의자 밑에 코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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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내림
작품등록일 :
2017.05.07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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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5.24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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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서 여기까지

DUMMY

우리집에서 여기까지


젊은 시절 아빠는 두껍기가 사전만하고 단단하기는 말굽만한 군화를 샀다. 군화 밑창이 다 달아지도록 걷다보면 글이 써질 거라 생각했단다. 이를 본 교회 여동생이 "오빠 멋있어요"라는 편지까지 써줬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우리 아빠는 삽질만 한 것 같다. 땅파는 것 하나는 잘 하신다. 삼십년 이상을 포크레인으로 땅파고 먹고 사는게 우리 아빠다.

그 정신과 삽질력을 물려 받아 나도 걸어보기로 했다. 젊은 날에 공유하기 좋은 체험이란 연예만큼 좋은 게 없다. 그러나 시인님 말을 빌려 말 하자면 나는 사지 멀쩡한 얼음 빙 신이다. 그래서 쓸 수가 없다. 대신 많이 걸어보기로 했다.

싸구려 청바지, 싸구려 빨간 셔츠를 입었다. 세수도 안 하고 선크림을 발랐다. 얼굴은 기름기로 반들반들했다. 머리는 떡이 졌다. 거울을 봤다. 스음... 아 왜 거울만 보면 잘 생긴 것 같지? 아 잘생겼다.

만원짜리 한 장 왼쪽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메모지 두 장 찢어 반으로 두 번 접었다. 그리고 볼펜 한 자루와 함께 오른 쪽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대충 밥을 먹었다. 그리고 전자 시계를 찼다. 더러운 파란색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일단 전주역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우리집은 서문교회 주차장 옆에 있다. 2시 17분. 시간을 측정했다. 차이나타운, 웨딩의 거리, 옛 동문터가 있는 한옥마을 그리고 병무청으로 가는 길을 따라갔다. 전주역까지 최단 거리로 가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땡볕 아래를 마냥 느긋하게 걷진 않았다. 건물 옆에 진 그늘을 붙어다녔다.

가는 길에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사람이었다. 그 다음은 차였다. 그 다음은 건물이었다. 그 다음은 가로수 나무였다. 그 다음은? 내 잡생각이다.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 한국 최초 노벨문상 수상자 이상연씨! 짝짝짝! 상연히 선생님 어떻게 이런 훌륭한 글을 쓰실 수 있었습니까? 아, 네. 저는 어려서부터 가난하여 어쩌고저쩌고... 이 다음은 영웅 이상연의 모험. 혼자 망상에 빠졌다. 혼자 웃었다. 어쩌다 지나가는 사람과 시선이 마주치면 애써 표정을 굳혔다. 창피함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이불도 제 대신 차주기 바랍니다.

뒤통수가 따갑다. 햇볕에 닿은 머리가락이 모조리 빠져버릴 것 같았다. 터벅터벅 걸었다. 신호등을 건널 때는 땡볕을 피하려고 신호등 그림자에 붙었다. 너무 대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상상도 멈추고 머엉하게 걸었다. 찢어온 메모지도 텅 비었다. 걷는 것처럼 글도 차곡차곡 써지면 얼마나 좋을까.

한참 뺑뺑 돌아서 전주역에 도착했다. 우리집에서 전주역까지 1시간 28분이 걸렸다. 전주역 시계를 봤다. 3시 44분이다. 생각보다 늦게 도착했다. 정수기 물을 세 번 마셨다. 그걸론 부족해서 매점으로 갔다. 콜라를 집었다. 땀에 쩔은 만원을 여점원에게 건넸다. 제 체취가 듬뿍 묻은 돈입니다. 불결한 표정을 지은 여점원이 만원을 받고 8천 800원을 남겨줬다.

막상 와보니 별것 아니었다. 세월 처럼 눈 깜작할 새 도착했다. 정말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쓸 거리도 없었다. 그래서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전주역에 정차하고 있는 79번 버스를 탔다. 뒤에서 두 번째, 의자 두 개가 붙은 좌석에 앉았다. 의자가 뜨뜻하다. 오메오메.

정거장을 걸칠 수록 승객이 많아졌다. 결국 내 옆자리만 빼고 가득찼다. 그러다가 전북대 쯤에서 여학생 무리가 탔다. 이거다! 짧은 스커트에 하늘거리는 셔츠를 입은 여성이 내 옆자리에 앉았다. 이거다! 아~ 좋다! 버스의 타는 즐거움이란 이런 거다.

얼마 지나지 않았다. 빈자리 하나가 났다. 가지마, 안 돼! 스테이! 빈자리가 나자마자 이 여자는 떠나버렸다. 머엉. 가슴이 뻥 뚫렸다. 창밖을 바라봤다. 애견샵이 보였다. 그 앞에 강아지를 보며 꺅꺅 거리는 세 여학생이 보인다. 개부럽네.

집에 도착했다. 4시 41분이다. 피곤해서 조금 쉬다 엄마가 왔다. 바나나, 오렌지, 딸기, 견과류를 아작아작 씹었다. 그러고도 5시에 밥을 먹었다. 밥먹고 바로 눈을 붙였다. 일어났을 때는 6시였다.

6시 4분에 집을 다시 나섰다. 이번에는 전주 IC 월드컵 경기장이다. 신흥중학교 옆에 있는 전주천을 따라 쭉 걸었다. 해는 여전히 강렬했다. 눈을 찌푸렸다. 가는 도중에 자외선으로 부터 완전 무장한 아주머니를 자주봤다. 총만 쥐어주면 근사할 텐데. 적어도 씨비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늦은 저녁에 여자가 돌아다니기 안전한 복장이다. 경찰이 배웅와 줄 것이다.

6시 37분 쯤에 롯데 백화점을 지났다. 이글거리는 주황색 태양. 메모지는 숫자 빼고 여전히 텅텅 비었다. 하늘을 보고 쓸 것이 없다. 동서를 막론하고 글쟁이라는 작자는 하늘로 부터 쓸 거리를 모조리 뜯어가버렸다. 텅빈 하늘이다. 땅을 바라봤다. 풀과 꽃이 있다. 이것에 대해 쓰고 싶어도 꽃 이름을 몰라 쓸 수 없었다. 사실 관심도 없다.

발바닥부터 늘어진 뾰족한 그림자를 보았다. 저 작은 얼굴과 긴 다리를 봐라. 내 몸매가 그림자 같은 비율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델이나 탤런트를 해먹고 살았을 것이다.

시선과 수평이된 해가 새빨갛다. 빨갛게 익은 태양과 눈싸움을 했다. 으악! 졌다. 시선을 돌려 눈을 깜빡였다. 퍼런 구멍이 허공을 떠다녔다. 다시 태양을 바라봤다. 빨갛게 익은 복숭아, 땅으로 떨어진다. 올ㅋ. 찢어온 메모장에 적었다. 그러고 보니 태양의 표면 온도는 수천도다. 그럼 천도 복숭아가 더 어울리겠다.

7시 3분. 해가 완전히 떨어졌다. 아련한 보라색이 머물고 있었다. 이 아련함의 정체는 사실 경치를 보고 느낀게 아니라 내가 불안해서 느낀 것이다. 아직도 동산동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금성 장례식장을 봤다. 올커니! 도착한 것 같다. 하고 올라갔는데 20분을 뺑 돌고 돌아서 천변으로 돌아왔다. 알고보니 송천동이었다.

완전히 깜깜해졌다. 사람도 안 보인다. 가로등도 없었다. 쏴아아~ 바람 소리가 아니다. 물 흐르는 소리도 아니다. 차 흘러가는 소리였다. 날파리가 얼굴에 부딪혔다. 훠이 훠이 탈춤을 췄다. 미치겠구만. 이대로 익산까지 가는 건가? 다리가 쑤셨다. 앉고 싶어도 앉을 곳이 없다. 힘들고 지루했다.

2시간 10분만에 천변에서 탈출했다. 그렇다고 동산동에 도착한 것은 아니다. 저 멀리 솟아난 고층 건물을 보았다. 그곳으로 갔다. 가로등 하나 없는 길을 따라 갔다. 색은 보이지 않는다. 구별할 수 있는 것은 명암 뿐이다. 얼마나 진하게 검은지 옅게 검은지 뿐이었다.

천을 건너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천을 건너고도 철도가 가로막아 한 참을 돌았다. 직선 코스란 없다. 목표가 보이는 대로 갔다가 수십번은 가로막혔다. 인생에서 겪는 개고생 축소판이었다.

공장단지인지 시골단지인지 모를 곳을 지났다. 어느 집을 지나쳤는데 개가 짖었다. 한 놈이 짖자 온 동네 개들이 다 짖어댔다. 잘 못 한 것도 없는데 긴장된다. 저녁에는 개짖는 소리도 무서웠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높낮이 없이 으르렁 거리는 발전기 소리였다.

동산동에 도착했다. 시내 못지않게 발전된 곳이었다. 배고프고 목이 말랐다. GS25시 마트에서 비안코를 하나 사먹었다. 목이 마를 땐 역시 아이스크림.

IC월드컵 경기장에 입구에 이르렀다. 마침 에어로빅을 끝내고 돌아가는 아주머니들이 보였다. 그들을 지나치고 경기장 쪽으로 갔다. 빨리 앉고 싶었지만 입구 계단에 앉아야 도착 판정이다. 그러나 입구는 가로막혔다. 결국 어느 대리석 난간에 손을 지대고 앉았다. 우리집에서 월드컵 경기장까지 3시간 1분이 걸렸다. 9시 7분이었다. 멍하게 10분 정도 앉았다. 킥보드를 타고 있는 아이. 농구를 하고 있는 청년. 머엉~ 하게 앉아있는 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손바닥은 검은 흙 먼지로 더러워져 있었다.

9시 30분. 조촌초등학교 옆에 있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타고 보니까 사람이 가득찼다. 맨 뒷좌석에 두 자리가 비었다. 오른쪽에는 남고생이 앉아 있었고 왼쪽에는 여고생이 앉아 있었다. 지금이다! 왼쪽에 앉았다. 고스트 바둑왕에 나온 대사를 빌려 설명하자면 신의 한수라는 것이다. 흰돌이 빠져나갈 곳은 없다. 킁킁. 친숙한 냄새가 난다. 우리 누나랑 비슷한 향수인데? 이름은 모르지만 흔한 향수인가 보다.

집에 도착했다. 10시였다. 샤워를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게임을 했다. 피로가 확 풀린다. 12시에 약을 먹고 이불자리에 누웠다. 자기 전에 누구나 천문학을 읽었다. 수면 보조제다. 태양이 낮게 보일 때는 빛은 먼지가 많은공기층을 길게 통과한다. 이때 대기 중 먼지는 파란 빛을 흡수하고 빨간 빛을 잘 통과시킨다까지 기억난다.

새벽 6시에 잠에서 깼다. 잠이 안 온다. CD플레이어를 틀어 놓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상상을 했다. 영웅 이상연의 모험. 그러다 갑자기 창피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으앜! 이불을 몇 번 차고 나자 8시가 되었다.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었다. 밥을 다 먹고 씻었다. 썬크림을 발랐다. 9시에 집을 나섰다.

이번엔 한일장신이다! 본래 이런 짓은 3번을 해줘야 한다. 한 번만 하면 서운하고 두 번만 하면 아쉽고 세번은 해야 마음이 노인다. 따가운 땡볕에 쌍을 찡그렸다. 볕이 머리카락을 쑤신다. 아침에 샤워를 하면서 하수구로 빠져나간 머리카락이 떠오른다. 머리카락도 빠지고 하수구도 막히고 피부에도 안 좋다. 저 해는 해로운 해다.

남부시장을 지나치고 다리를 건넜다. 치명자산 입구를 지나쳤다. 33분 경과. 강 건너편 도로를 달리는 빨간색 학교 버스가 보였다. 40분 경과. 참사랑낙원아래에 대리석 다리를 건넜다. 원당마을로 이어지는 다리였다. 1시간 18분 경과. 저 멀리 학교가 보였다.

얼굴이 화끈 거렸다. 하얀색 콘크리트를 퍼부은 시골 길에는 큰문제가 있다. 하얀색은 모든 빛을 반사한다. 자외선도 반사한다. 그래서 너무 뜨겁다. 검정색 아스팔트는 모든 빛을 흡수한다. 때문에 발바닥이 뜨겁고 지나치는 차가 쓸어오는 공기는 후끈하다. 길을 파란색이나 초록색으로 바꿨으면 좋겠다.

1시간 37분 경과. 상관면 보건소 앞에 서서 시간을 기록했다. 마트에서 포카리스웨트를 샀다. 세번 훌쩍이자 빈깡통이 되버렸다. 깡통을 자그작자그작 주물럭거렸다. 바닥에 버리려다 말았다. 학교 정류장 쓰레기통에 깡통을 버렸다. 이게 도착판정이다. 우리집에서 우리학교까지 1시간 51분이 걸렸다. 아침 10시 52분이었다.

물을 마시고 황기주 기념관으로 들어갔다. 단상을 비추는 주황색 전등이 켜져있었다. 분위기가 좋다. 또 시원했다. 피아노가 있어서 피아노도 쳤다. 주먹으로.

얼마 후 종소리가 났다. 잠잘 시간인가? 작은 의자에 놓은 방석을 집었다. 그리고 맨 뒷좌석으로 갔다. 긴의자에 누웠다. 작은 방석을 반으로 접어서 베개 대신 비었다. 그리고 잤다.

커어헙! 갑자기 숨이 멈춰서 눈을 떴다. 몸이 떨렸다. 황기주 기념관은 오래 있기엔 추운 곳이다. 옆에 있는 긴의자 방석을 가져와 이불 대신 몸을 덮었다. 다시 잤다. 그리고 2시에 일어났다. 피로가 싹 풀렸다. 타이밍 좋게 2시 10분 차를 탔다.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했다. 노트북을 켰다. 새 텍스터를 만들었다. 축축하고 구질구질한 메모지를 폈다.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한 줄도 안 써진다. 당연하다. 걷는 다고 글이 써지는 것이 아니다. 글쓰기란 어려운 것이다. 걷는 것은 힘든 것이다.

어려운 일을 못하면 힘든 일을 하게 된다. 힘든 일을 못하면 어려운 일을 해야 한다. 나는 힘든 일을 못한다. 그래서 글이나 써야 한다. 궁디에 피가 마르도록 앉아서 글을 기다렸다. 변비 같은 글이 꽁알꽁알 흘러나왔다.


작가의말

 이번 낭독은 제일 뒤에서 두 번째로 했다.  기다리는 동안 너무 긴장을 했다. 또 발표를 했을 때도 내가 뭐라고 말 한 지도 모를 속도로 내뱉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반응은 아주 좋았다. 시간이 한 주만 더 있었더라면 더 절제된 글이 나왔을 것이다. 아쉬운 대로 발표를 했다. 여기서 ‘시인’님이라는 것은 교수님을 말한다. 이 해는 해로운 해다는 이 새는 해로운 새다를 말 한 마우쩌뚱이 말한 인터넷 만화가 생각나서 썼다. 진이 다 빠져 정신이 없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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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담배로 힐링하자 +1 17.11.19 70 2 7쪽
7 나무통 17.11.11 54 1 8쪽
6 전설의 여관 융 프라우에 17.08.12 109 1 70쪽
5 2170년 미래전쟁 (1장) 17.08.10 70 1 40쪽
4 우리 미남이 또 오니라 17.06.01 81 1 12쪽
» 우리집에서 여기까지 17.05.24 92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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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도둑 +1 17.05.08 369 2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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