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시타투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녹차.
작품등록일 :
2017.06.08 23:03
최근연재일 :
2017.06.24 11:13
연재수 :
36 회
조회수 :
10,063
추천수 :
54
글자수 :
233,206

작성
17.06.12 18:01
조회
331
추천
2
글자
18쪽

9화.

DUMMY

늦은 밤이 찾아와 조금이나마 열기를 식혀주고 모든 자식에게 잠을 권하는 밤과 새벽의 그 사이 어디쯤의 시각에 한 여관의 홀 안 구석은 촛불 하나에 의지하며 빛을 내고 있었다. 그 탁자에는 둘이 마주 보고 있었고 나머지 자리들은 당연히 비워진 상태였다. 주인 또한 그들을 기다리다 포기했는지 자리에 없었다.


위층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코골이를 시작으로 침묵을 지키던 벽 쪽에 앉은 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피레네 산맥으로 갔단 말이지?”


그의 목소리는 그들의 자리처럼 어둡고 낮았다.


“예. 누굴 만나러 간다고 했습니다.”


“누군지는 모르고?”


“오해를 살까 봐 깊게는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까 제가 낮에 알아볼 겸 수소문을 좀 해봤는데 이상하게 다들 그 산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고 하더군요.”


벽 쪽에 앉은 남자는 미간을 꾹꾹 눌러댔다.


“그 꼬마가 아직까지 내려오지 않은 걸 보아하니 길을 잃었다기보다는 누군가를 만났다는 이야기겠지.. 누군진 모르겠지만, 교류를 끊고 산속에서만 기거하는 것 같군.”


반대편에 앉은 남자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혹시 유스터스와 관련된 사람일까요?”


“어느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어. 덱스터 자네가 여기에 계속 남아서 상황을 지켜보게. 나는 내일 당장 출발해 이 일을 가주님께 보고드릴 테니까.”


“알겠습니다.”


할 말을 다 한 듯 그 남자는 그대로 일어서서 먼저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의 움직임 때문인지 반 이상 타버린 초는 바람이 불진 않았지만, 불안하게 흔들렸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덱스터는 조심스럽게 자리를 정리하고는 입김을 불어 초를 꺼트렸고 순식간에 사방은 어두워졌다.


**********************************


“네 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니?”


발레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이상하게 어머니는 아버지에 관해서는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지 않으셨어요. 성함조차 도요.”


티보는 탁자를 검지로 탁자를 두드리며 최대한 덤덤하게 말하려 애썼다.


“그럼 유스터스에 관한 이야기는 들어봤어?”


어깨를 으쓱하며 발레르는 당연한 듯한 표정을 지어보았다.


“유명한 사람이죠. 전무후무한 희대의 살인마.”


티보는 입술이 바짝 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사람이··· 네 아버지란다.”


“...그게 무슨···.”


발레르는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리를 한 대 크게 얻어맞은 듯 그의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 지금 이게 무슨 소리인지 그에게 전혀 와 닿지 않았다. 자신의 아버지가 살인마란 말인가?


그는 부정했다. 그럴 수 없었다. 아니, 결코 그래서는 안 됐다. 그건 발레르 자신의 정체성이 완전히 무너지게 되는 이야기였다.


그 인자하고 마냥 착하기만 하시던 어머니가 살인마의 아내라고? 그리고 자신이 그 사람의 자식이라고?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티보를 바라보았다. 티보는 그의 눈빛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씁쓸함을 맛봤다.


“지금부터 내 이야기 잘 듣거라. 세상 사람들은 너희 아버지를 그렇게 알고 있어. 그런데 아니란다. 오히려 반대란다. 유스터스는, 네 아버지는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으려고 했던 사람이란다. 살인마가 아니야.”


발레르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러워 당장에라도 미쳐 괴성을 지를 것만 같았다. 티보는 그런 발레르를 애써 외면했다.


“엑시타투스.”


발레르는 얼굴을 감쌌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엑시타투스? 티보의 혼잣말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존재하는 무기란다. 그리고 그게 아나테마에서 왔다는 것도. 그래 믿기 어렵겠지. 왜 갑자기 이 얘기를 하는지도 이해가 안 갈 거고.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


“저는... 아저씨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어요. 이게, 이게 다 무슨 소린지···.”


발레르의 한쪽 눈 밑이 떨려왔다. 저 말에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도 몰랐고 이 상황이 말도 안 된다고 느껴지기까지 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웃으며 거짓이라고, 장난이었다고 해주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현실은 늘 그렇게 우리의 편에 서지 않았다.


“엑시투타스는 원래 아나테마 밖으로 내보내려 하지 않았단다. 세상에 분란을 야기할 걸 뻔히 알았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고 결국 그는 사람들 몰래 무기들을 훔쳐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세상 밖으로 나왔단다.”


티보는 옛 추억을 떠올리는지 멀리 시선을 둔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내려놓은 듯한 그 표정은 지난날의 후회가 서려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지금의 더글라스 가문의 가주 더글라스 일카이란다.”


또 한 번의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나오자 발레르는 헛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의 상황을 그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이 얘기대로라면 선과 악이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상식이 잘못되었고, 통념이 틀렸으며 마땅히 어깨를 펴야 할 사람은 마녀사냥을 당한 것이고, 분란을 일으키려 했던 자는 자신을 세탁해 영웅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다.


“유스터스는 나와 아나테마 사람들과 함께 그 흩어진 무기들을 회수하기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녔어. 그들은 순순히 응하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피를 봐야 했단다. 한 자루를 제외한 모든 무기를 찾아내고선 마지막으로 간 곳이 일카이었단다. 그때쯤 그는 자기만의 세력을 단단히 구축해 놨었어. 결과만 말하자면 우린 실패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티보는 굳이 마지막 말을 꺼내지 않았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발레르는 울고 있었다. 버티지 못한 그의 정신은 차라리 눈물이라도 흘려 감정을 속여 진정을 시켜야만 했다. 그는 가슴이 답답하고 역한 게 헛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발레르는 당장에라도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아 머리를 양손으로 쓸어 올리며 감싸 쥐었다.


“내가 해 줄 이야기는 일단은 이게 다란다. 누워서 생각을 좀 정리해 보거라.”


발레르는 멍해진 채로 힘없이 일어서 잠자리로 걸어갔다. 어쩐지 걸을 때마다 우는 나무바닥의 널 소리가 그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과거의 울음과, 현재의 울음은 서서히 멀어져 방문을 닫았을 땐 그것을 경계로 서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십여 분의 시간이 지나자 다른 방에서 조용히 문 여는 소리가 났다. 워낙 조심스레 열어 소리가 작았기만 거실은 그보다 더한 침묵이었기에 시선을 멀리 둔 채 깊은 상념에 빠져있던 티보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왜 안 자고.”


“심각한 얘기 하고 있길래.”


티보는 굳이 말을 꺼내진 않았다.


“나는 잘 모르지만 뭔가 잘못됐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이미 식어버린 차를 티보는 입안에 전부 털어 넣었다.


“그래.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방향 없는 그 말은 건물 안의 묵은 공기와 함께 섞여 흩어져갔다.


****************************************************


당연한 말이지만 발레르는 잠이 오지 않았다. 머릿속에 이야기라는 실타래들이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듯이 가득 차 무수히 섞이고 꼬여버려 어찌 손을 댈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짧은 밤 때문인지 그의 고뇌가 길어져서인지 무심코 바라본 밖은 어느새 옷을 갈아입었는지 밝아지려 하고 있었다.


답답하기도 하거니와 찌뿌드드해진 몸을 조금 풀려 그는 집을 나왔다. 집의 뒷벽에 기대어 앉은 그는 산에서 맡을 수 있는 상쾌한 공기를 깊게 들이 마시었다. 발레르는 밝은 곳에 나와 깨끗한 공기를 마시니 그제야 다시 머릿속을 정리할 마음 생겼다.


아버지가 살인마였는데 사실은 살인마가 아니라 의로운 일을 하다 죽은 사람이다. 그리고 저주받은 땅이라는 전설의 땅 아나테마와 엑시타투스 또한 실재한다. 일단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이렇게 축약할 수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아버지는 아나테마 출신이라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부모님 두 분 다 그쪽 사람이라는 것인가. 아나테마는 괴물들이 살아 한 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올 수 없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것 또한 거짓이란 말인가.


엑시타투스는 또 어떤가? 그것 또한 진실 된 이야기란 말인가. 그리고 그 무기가 이제 더글라스만이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 또한 아나테마 사람이라는 것.


솔직히 그로서는 와 닿지 않았다. 아까도 생각했던 것이지만, 상상이 현실로 다가왔을 때 그것이 현실감 있게 느껴진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의심하고 또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 그건 아마 본능일 것이다. 세상을 뒤집을만한 큰 변화에 대한 두려움. 자신의 알고 있던 것들, 정의를 내렸고 믿음으로 철책을 쌓아놨던 것이 무너지는 것에 대한 회피성. 반항. 그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아픈 참된 진실보다 거짓으로 덮인 진실이 더 달콤한 법이니 말이다.


많은 것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에 쌓인 강한 스트레스에 그는 심장이 쿡쿡 쑤시듯 아파져왔다. 차라리 이 모든 게 한여름 밤의 꿈이었다면, 그래서 눈을 뜨면 다시 자신의 침대고, 거실로 나와 어머니의 방문을 열면 곤히 주무시고 계시는 어머니가 보였으면 좋겠다고 그는 절실히 바랐지만 결국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에 대한 갈망과 현실에 대한 회피일 뿐. 결국은 받아들여야 할 일이었다.


“벌써 일어난 거야?”


깊은 상념에 빠져있던 발레르는 언제 왔는지 전혀 몰랐다는 듯 흠칫 놀라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애런···.”


발레르의 옆에 가까이 붙어 앉은 애런은 그를 쳐다보지 않고 숲 저 멀리 응시했다.


“정리는 좀 됐어?”


“대충은 됐는데 내가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조금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사실 나는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어. 난 여기서 줄곧 자라 와서 사람들을 만나 본 적도 거의 없고 해서 바깥 이야기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거든. 그래서 처음엔 그냥 모른 체하려고 했는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꾸 마음에 걸리더라.”


그는 애런을 바라보았다. 애런은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그대로 말을 이었다.


“감당하기 힘들면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아. 내가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한테 바깥에 데려가 달라고 떼쓰지 않은 게 아마 그 생각을 하고부터인 것 같아. 사실 그렇게 한다 해서 바뀌는 건 없지만 그래도 답답한 마음이나 불안한 마음은 좀 해소되니까.”


그게 그렇게 쉽게 마음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발레르는 속마음과는 다르게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신경 써줘서.”


긍정적인 반응이 들려오자 애런은 발레르를 마주 보았다.


“처음 친구를 사귀자마자 고민 상담이라니. 진도가 너무 빠르네.”


산 속에서 혼자 살아왔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애런은 활발했다. 대화를 나누는 것에 있어서도 어색해하거나 어려워하지 않은 것이 발레르로서는 신기하기도 했지만, 그의 그런 모습과 긍정적인 면은 발레르의 마음 깊숙이 있는 불안감을 덮어주었다.


“나도 친구 사귄 건 처음인데.”


애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농담이지?”


이번엔 발레르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멀리 던졌다. 씁쓸해 보이는 그의 눈빛을 보며 애런은 진심을 느꼈다. 무엇 때문인지 애런은 묻고 싶었지만 산속에서만 살았다 해도 그게 아직은 성급하다는 걸 모르진 않았다.


“궁금하지만, 그러려니 할게. 대신 지금 말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알려줘.”


웃음기를 뺀 채 부드럽게 말하는 애런의 모습에 그는 고마움과 함께 일종의 신뢰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그 자리에서 이야기해 줄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곧 그 역시 때를 기다려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떠날 거야?”


“모르겠어. 아저씨께서 아직 아무 말씀도 없으셨고,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계속 여기에 머무를 순 없어. 갈 곳이 없다 해도 말이야.”


처연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애런은 아쉬움을 삼켰다.


“그런데 아저씨는 왜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 주셨을까? 감당하기 힘들 걸 아시면서 굳이 왜? 대충 둘러대실 수도 있을 텐데 말이야. 어머니의 유언에 대한 의무감? 아니면 더글라스 가문이 해를 끼칠지도 모른다는 경각심···.”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어떤 장면이 펼쳐졌다. 리비오와의 대련이 펼쳐지고 더글라스 가문 사자의 눈도장을 받는 장면을 지나 그에게 우연히 다가온 그들 중 한 명. 우연히···.


정말 우연일까? 불안한 마음이 그의 심장에 불어왔다. 아저씨는 그들이 나의 존재를 알아보고 해를 가할 거라 생각하셨던 걸까? 하지만 덱스터는 그 자리에서 나를 죽이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그럴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란 말인가.


티보의 말대로라면 발레르는 자기의 위치를 직접 불어버린 셈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발레르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는 황급히 일어서며 방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애런은 당황한 채 그를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동시에 불안한 마음이 떠올랐다.


티보 역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인지 꽤 피곤해 보였다. 새벽에 그 일이 일단락 된 후 그는 자신의 행동에 후회하면서 스스로 안심시켰다. 발레르는 이곳에서 영원히 지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의견은 에스테르 또한 같을 것이라 그는 확신했다.


그들은, 아니. 더글라스는 그 일에 관련된 사람을 평생 쫓을 것이다. 끝내 마지막 남은 사람의 목을 확인할 때까지 그는 찾고 또 찾아다닐 것이다. 그게 내가 이곳에만 존재하는 이유겠지.


티보는 날카롭고 뜨거운 비참함을 맛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우리는, 아니··· 그녀와 나는 가해자가 되었다. 무엇을 위해 싸웠고 무엇을 대신하여 앞장섰을까. 죽음보다 못한 버러지 같은 이 삶의 대가는 금은보화도 아니었고, 드높인 명예도 아니고 사람들의 존경은 더더욱 아니다. 음지에 들어가 얻은 건 결국 밝힘이 아닌 같이 덮인 자신과 먹힌 친구들이다.


알량한 영웅 심리에 눈이 멀어 이렇게 된 것일까. 과연 나의 선택은 옳은 판단이었을까. 그는 천천히 힘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전과 달리 이제는 그 스스로 물음에 어떤 확실한 답을 할 수 없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다시 한 번 새벽에 생각했던 자신의 결정을 다짐하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아직 급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지금은 그저 아침밥을 차리는 데 집중하면 그만이라고 그는 자신을 달랬다. 적어도 이곳의 안전만큼은 그가 장담할 수 있었다.


한 숨을 푹 내쉬며 티보는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젯밤 애런이 잡아 온 노루는 입이 하나 들었지만 한 끼로 다 먹기에 양은 꽤 많았다. 저장고에서 잘 손질된 남은 고기를 꺼내 향신료를 뿌리고 간을 입히고선 불에 구우려 할 때, 급하게 여는 듯한 큰 문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헐레벌떡 뛰어 온 발레르는 식은땀을 흐르고 있었다. 왜 이제야 생각났는지 답답한 마음에 그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티보는 하던 일을 멈추고는 차분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아저씨가 여기서 지내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숨어 지내려 그러시는 거 아닌가요? 저 또한 그들에게 표적이 될 거라 생각하셔서 모든 이야기를 해 주신 거잖아요.”


티보는 천천히 행주로 물기 묻은 손을 조용히 닦았다. 발레르는 초조하게 그의 말을 기다렸고 애런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못 박은 채 지켜보았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굳이 너를 혼란스럽게까지 하면서 말을 한 것도 그 이유고, 너희 어머니가 여기로 보낸 것도 같은 이유란다.”


“그들이 알아요.”


“뭐?”


발레르는 좌절감에 두 눈을 감아버렸다.


“제가 여기로 올 때 그 가문 중 한 사람과 동행했었어요. 덱스터라는 사람인데 가문에서 위치가 꽤 있는 사람이죠. 가는 동안 별 이야기는 안 했어요. 근데 마을에서 헤어질 때 그 사람이 자연스레 어디로 가냐 묻길래 말해줬죠. 피레네 산맥으로 간다고···.”


그가 바라본 티보의 얼굴은 놀람과 당황이 섞인 채 굳은 표정이었다. 자기 생각대로 역시 무언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죄송해요. 저는, 저는 그저··· 그저···.”


“네 잘못이 아니야. 단지 꼬리가 길었을 뿐이야.”


티보는 발레르의 양어깨에 손을 얹으며 그의 정신을 잡아주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침착한 목소리로 애런을 불렀다.


“지금 당장 짐을 싸거라. 화살은 넉넉히 담아. 발레르, 날 보렴. 그래. 괜찮아.”


애런이 자신의 방으로 뛰어가자 티보는 다시 발레르를 바라보곤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췄다.


“그때 총 몇 명이었니?”


“한 명이요. 제가 마을에서 떠나기 전날. 그러니까 졸업 전날 하는 차출식이라는 게 있었어요. 보통 저희 마을까지 유명한 가문은 오질 않는데 이번엔 그들이 왔어요. 거기서 저는 그들에게 눈도장을 받았지만 거부하고 졸업식 날 동이 트기 전에 마을을 나왔어요. 가는 도중 덱스터라는 사람이 뛰어와 저를 알아보고는 같이 가자고 했어요. 그는 가문에 일이 있어 혼자 먼저 가고 있다고 하더군요. 나머지는 따로 다른 행사에 참여하고선 복귀한다고 다른 길로 간다 말했어요. 그래 봐야 다섯 일 거예요. 싸울 수 있는 사람만 포함하면 두세 명 밖에 없을 거예요.”


발레르는 잘못을 한 아이처럼 그렇게 하면 덜 혼나기라도 하듯 모든 이야기를 해줬고 덕분에 티보는 상황을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그들도 너를 섣불리 어찌할 수는 없나 보구나.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다시 여기로 오는데 보름이 채 안 걸리겠지. 우리는 그럼 그들이 수도에서 출발하기 전에 그 근처 마을에 숨어있다가 병력이 빠지면 수도로 들어가자꾸나. 나는 그럼 아침을 마저 준비할 테니 너도 어서 짐을 싸거라.”


폭풍의 눈에 들어온 듯 조용하지만,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 속에서 그는 재워놓은 고기를 조리하기 위해 주방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괜찮아. 괜찮아. 시간은 충분해.”


입 속으로 웅얼거리며 자신마저 스스로 달랬다. 그는 갑자기 느껴지는 등에 밴 식은땀을 느끼며 바깥문을 활짝 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 글 설정에 의해 댓글을 쓸 수 없습니다.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엑시타투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 시간과 요일. 17.06.08 148 0 -
36 에필로그. +2 17.06.24 267 1 6쪽
35 마지막화. 17.06.24 222 1 17쪽
34 34화. 17.06.24 231 0 15쪽
33 33화. 17.06.23 167 0 15쪽
32 32화. 17.06.22 297 0 15쪽
31 31화. 17.06.21 179 0 13쪽
30 30화. 17.06.20 193 0 13쪽
29 29화. 17.06.20 225 0 17쪽
28 28화. 17.06.19 191 0 13쪽
27 27화. 17.06.19 178 0 15쪽
26 26화. 17.06.19 176 1 12쪽
25 25화. 17.06.18 213 1 15쪽
24 24화. 17.06.18 178 1 17쪽
23 23화. 17.06.18 195 1 19쪽
22 22화. 17.06.17 221 2 14쪽
21 21화. 17.06.17 232 0 12쪽
20 20화. 17.06.16 247 2 13쪽
19 19화. 17.06.16 262 1 14쪽
18 18화. 17.06.15 251 1 15쪽
17 17화. 17.06.15 235 1 13쪽
16 16화. 17.06.15 229 1 14쪽
15 15화. 17.06.14 212 2 14쪽
14 14화. 17.06.14 247 2 14쪽
13 13화. 17.06.14 244 2 14쪽
12 12화. 17.06.13 277 2 13쪽
11 11화. 17.06.13 307 3 15쪽
10 10화. 17.06.13 385 2 16쪽
» 9화. 17.06.12 332 2 18쪽
8 8화. 17.06.12 332 3 1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