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월중천(赤月中天)(85)
팽광은 그렇게 손에 들어온 책자 첫 장을 신중하게 넘겨서 그곳에 적힌 몇 글자를 읽다가 놀라서 자빠질 뻔했다.
다음 장을 넘겨도 그다음 장을 넘겨도 놀라움은 더해갔지 줄어들지 않았다.
장마다 팽가 도법의 장단점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음은 물론 초식마다 대응법이 자세하게 나와 있었으니까.
그랬으니 만약 이 책이 강호에 퍼진다면, 그날로 팽가 도법은 삼류보다 못한 도법으로 전락하고 말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이런! 개 같은······.”
“팽 가주, 너무 열 내지 마시오.”
“지금 열이 안 나게 생겼소.”
“그럼 한 권의 비급을 드릴 테니 보시고 열이나 식히시오.”
또 무슨 비급일까.
궁금해 미칠 것 같았지만, 팽광은 조민이 내미는 책자를 확 잡아채지 못하고, 겉표지만 언뜻 바라봤다.
그러나 놀라 자빠질 뻔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항, 항룡도법!”
“그렇소. 무림 역사상 가장 뛰어난 도객(刀客)으로 도선이라 추앙받던 왕식의 항룡도법이오.’
“으음!”
“도성 황보현이 이 항룡도법 때문에 아직도 도선이라는 별호를 받지 못할 만큼······.”
“그건 강호가 다 아는 일!”
팽광은 이렇게 말하고 어찌할 바 갈피를 잡지 못했다.
비록 자신의 집안에 혼원벽력도법(混元霹靂刀法)과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 등 절세의 도법이 있다고는 하지만, 항룡도법 보다 절세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이 항룡도법을 극성으로 익혀 낸다면, 도성 황보현을 밀어내고 당당하게 도선(刀仙)의 반열에 올라서 천하제일 도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성 황보현을 밀어내고 팽 가주께서 천하제일도 곧 도선이 될 수 있소.”
자신이 내민 미끼에 흔들리는 팽광의 마음을 읽은 조민이 이렇게 적절하게 그의 약점을 파고들면서 그가 미끼를 물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음!”
“이것도 드리죠!”
팽광이 이미 걸려들었다는 것을 느꼈는지 조민이 이번에는 작은 금합을 그에게 건넸다.
순순히 받은 팽광이 뚜껑을 열자 폐부를 맑게 하는 청아한 향이 먼저 퍼져 나왔다.
“이것이 무엇이오?”
“천금신단이라고 들어 보았소.”
“그럼 이것이······.”
“그렇소이다. 그 의천문이 만든 천금신단으로 우리에게 멸문을 당했지요. 그리고 그건 그때 얻은 것.”
금박에 쌓인 다섯 개의 작은 호두알만 한 단약, 즉 천금신단을 보는 팽광의 얼굴은 점점 기기묘묘하게 변해갔다.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 주는 짜릿함이 이런 것일까.
그래서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들게 하는 것일까.
“이것도 드리죠!”
“이건 무엇이오?”
“금강석!”
영롱하게 푸른색을 발하는 대추 알만한 금강석 오십여 개를 보는 팽광은 자신이 결코 이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자신의 무공을 파훼한 책자에 다시 무공을 높여줄 비급, 그리고 그 무공을 연성하는 데 필요한 천금신단에 이어서 하북 팽가를 살찌울 금강석까지 내미니 어찌 아니 그렇겠는가.
“이 일은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오.”
“시간을 달라는 말이오?”
“그렇소.”
“이틀이면 되겠소.”
“충분하오!”
황궁 호위대장 조민이 그렇게 돌아가자 팽광은 자신의 아버지인 태상가주 팽황(彭凰), 숙부인 팽량(彭亮), 팽언(彭彦), 팽정(彭貞)과 자신의 아우인 도황(刀皇) 팽현(彭泫) 그리고 자신의 장남인 팽형 등을 모아놓고, 그의 방문 목적과 그가 주고 간 선물 등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가주의 의중이 이미 기울었는데, 이런 요식적인 의논을 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휴!”
“아닙니다. 아버님, 저는 다만······.”
“아니기는 무엇이 아니라는 말이냐.”
“형님, 가주의 마음이 기운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닙니다.”
“.......”
아우 팽량이 끼어들어 가주 팽광을 편들자 팽황은 입을 닫고 말았다.
그러자 팽량이 다시 말을 이었다.
“형님, 그 조민이라는 자가 우리 팽가에 올 때부터 우리는 그 일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건 또 무슨 말이냐?”
“형님, 우리가 거절하면, 그들이 우리를 가만 놓아두겠습니까. 현룡문은 산서에 있고, 그들은 구파와 연합한 상태이니 군을 동원하지 못하고, 우리를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하나 우리 팽가는 다릅니다. 이곳 하북은 그들의 영향권이니 우리가 그 일을 거절하는 즉시 당장 군을 동원해서 우리부터 절단 낼 겁니다.”
“우리가 덫에 걸렸다는 말이군. 하지 않을 수도 할 수도 없는 덫 말이야. 그래서 이를 이이제이라고 하는가.”
“바로 그렇습니다. 형님!”
“그럼 우리가 선택할 방법은 두 가지겠군. 나가서 죽느냐! 앉아서 죽느냐!”
태상가주 팽황의 이 말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자 그가 가주 팽광에게 물었다.
“가주, 어찌할 생각인가?”
“아버님의 말씀처럼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가서 싸우다 죽는 것을 선택하겠습니다.”
“그리 결정한다면, 승산은 있는가?”
“있습니다. 그 현룡검선이라는 자는 조민 그자와 황궁에서 나온 고수들이 책임진다고 했습니다. 하면 흑백쌍존이 남는데, 그들은 아우가 맡아도 충분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오합지졸일 것이니 우리에게 충분한 승산이 있습니다.”
“그 현룡검선이라는 자는 이즈음 제법 이름이 알려졌으나 강호의 소문은 언제나 과장되는 법!”
“맞습니다.”
“하나 명분이 있어야 한다. 명분이 없으면, 우리는 구파의 적이 될 수 있다.”
“명분이야 만들면 되지 않겠습니까.”
“확실한 명분이 필요해. 그리고 최악을 대비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해.”
조부인 팽황과 부친인 팽광을 비롯해서 어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팽형이 어렵게 말을 꺼내면서 나선 것은 그때였다.
“아버님, 제가 저번에 천하제일루에서 그 현룡문주라는 자를 만나 보았습니다.”
“그를 만났다고, 소상하게 말해보아라!”
“실은······.”
팽형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태상가주 팽황이 혀를 끌끌 차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식 놈 한번 잘 키운다.”
그때 가주 팽광이 흑백쌍존을 책임질 것이라고 한 그의 아우 도황 팽현이 나섰다.
“아버님, 조카의 일을 침소봉대해서 명분을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침소봉대한다.”
“그렇습니다. 그가 우리 팽가를 멸문지화 시키겠다는 말을 했다니 우리는 그것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음. 좋다. 그리고 그 일은 네가 맡아라.”
하북 팽가는 이렇게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들 준비를 착착 진행했으니 역시 정보의 중요성은 이럴 때 정말 중요했다.
만약 이들이 서민의 실체를 제대로 알았다면 이런 선택을 했을까.
분명히 아닐 것이다.
그러니 강호의 소문에는 과장이 심하다고 판단하고 이런 준비를 하는 것이다.
거기다가 팽가 도법 파훼법, 항룡도법, 천금신단, 금강석에 원나라군이라는 실제적인 위협 요소도 작용했으니까.
***
곤륜산.
마교 교주 만마신군 소진악의 명령을 받고 기어이 곤륜산에 온 마령오제는 곤륜파가 아스라이 보이는 곳에서 서서히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형, 이제 움직일 때가 되었소.”
“둘째야. 될 수 있는 한 소란을 피워야 한다. 그래야 구파 놈들의 시선을 이곳으로 돌릴 수 있다.”
“뭔 말인지 사형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아오.”
“그럼 가자. 조금만 더 가면 삼성요(三聖凹)가 나오고, 그곳에는 분명히 곤륜파 놈들이 지키고 있을 것이니까.”
“오랜만에 피 맛은 볼 수 있겠군요.”
“피 맛이라. 그래 피 맛을 볼 수 있겠지. 얼마 만인지 모르겠지만, 흐흐흐!”
마령오제 다섯 사형제는 어둠에 묻힌 곤륜산을 오르면서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곧 그들 앞에 곤륜산 삼성요가 나타났다.
“사형, 저곳이 삼성요입니다.”
“그래, 곤륜놈들은?”
“아직은 거리가 있어 모르겠으나 예감으로는 분명 있는 것 같소.”
그때 곤륜파 앞마당이라는 삼성요를 지키던 곤륜파 풍운검(風雲劍) 두현(杜賢)은 아침나절에 받은 개방 청해 분타주 옥망원의 전서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십만대산을 감시하던 개방 방도 전원이 행방불명되었다는 말은 곧 그들이 모두 마교의 손에 죽었다는 말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 경계에 신경을 쓰면서 주위를 점검했으나 그때 마령오제는 이미 그가 지키는 삼성요 근처에 와 있었다.
“사형, 누가 있습니다.”
“그렇구나. 하면 준비들은 되었겠지?”
“물론이오.”
“그럼 질질 끌지 말고 바로 시작하자!”
마령오제 중 대사형인 강도수(姜到秀)의 이 말에 그의 사제 넷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자 괴상한 웃음을 토해낸 강도수의 신형이 마치 안개처럼 희끄무레한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그의 사제들도 그 뒤를 따라 안갯속으로 사라져 갔다.
풍운검 두현은 그때 이상한 예감이 들어 검을 뽑아들고는 사방을 살폈지만, 특별한 것을 발견하지는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촌각도 지나지 않아 다섯 괴인영이 안개를 뚫고 나타나자 놀라자빠질 것만 같았으나 소리도 치고, 호각도 불었으니 대처는 잘했다고 할 수 있었다.
“적이다. 삑! 삑!”
이렇게 호각소리가 길게 울려 퍼지자 안개와 어둠에 묻혀있던 삼성요는 물론 곤륜산 전체가 화들짝 놀라서 몸을 부르르 떠는 것 같았다.
“참룡단혼!”
그때 강도수가 단혼마검 참룡단혼의 일초를 펼쳐 그 풍운검 두현을 쪼갤 기세로 내리치자 그가 한 발 뒤로 물러나면서 백장비폭(百丈飛瀑)의 일초로 맞받았다.
“헐! 제법이다.”
풍운검 두현이 기세 좋게 일초로 자신의 검초를 맞받자 강도수가 살짝 옆으로 몸을 틀어 그 일초를 피하고는 뜻밖의 말을 토해냈다.
“마교의 개냐?”
그러자 두현이 그 말을 맞받아 이렇게 물었고, 강도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마교의 개가 아니라 대천마신교의 개님이냐고 물었으면, 목이라도 붙여 주려고 했는데, 너는 아니다.”
“뭐라고?”
“대천마신교의 개님이라고!”
강도수가 이렇게 말하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은 두현이 그 말에 대한 대꾸 대신 다시 한 번 호각을 길게 불었다.
그러자 곤륜파에서 답이라도 하듯 이내 호각소리가 들려왔다.
“삑! 삑!”
“그런다고 네놈이 살 것 같으냐?”
“마교의 개, 너는 살아서 이곳을 벗어날 것 같으냐?”
“마교의 개가 아니라 대천마신교의 개님이라고 이 자식아!”
이런 일갈과 함께 강도수가 다시 달려들자 두현은 자못 그 기세가 매서워 뒤로 일단 한발 물러났다.
그리고는 그의 검초를 살폈으나 그건 어떤 초식도 아닌 것 같았고, 그렇다고 천변만화하는 변화가 있는 변초도 아니었다.
그냥 막무가내로 자신의 목을 찔러오는 것 같은 강도수의 그 검초를 바라보던 두현은 그러나 곧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도무지 어떻게 막아야 할지 어떻게 공격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피하는 게 상책!’
퍼뜩 이런 생각이 든 두현은 황급히 뒤로 물러나면서 강도수의 그 검초를 피해 보려고 했다.
“흥. 그깟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으로 나의 귀영신보(鬼影神步)를!”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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