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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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6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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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6 0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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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22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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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바자회 - 폭풍전야

DUMMY

# 19. 바자회 – 폭풍전야



바자회를 앞두고 핀치 목사의 교회는 매우 분주했다.

피터 사건으로 바자회가 원래 날짜에서 1주일이 밀리게 되면서 더욱 그랬다. 그들이 다친 것도 문제였지만, 이 지역 갱 핵심 멤버들이 거의 일망타진 되다시피 했기 때문에,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보통 큰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매년 봄에 열리는 바자회는 이 도시의 축제와도 같았다. 여러 다른 도시에서부터 찾아오는 방문객들만도 천여명이 넘었고, 근방에서 내로라하는 가게들은 모두 바자회에 입점하여 자선기금 마련을 도왔다.

한달 전부터는 지역 신문에 기사도 실렸고, 요리나 뜨개질, 그 밖에 수작업에 소질이 있는 사람들은 한해동안 정성껏 만든 물건들을 한아름 안고 나왔다.


이렇게 마련되는 기금은 아프리카와 제3지역 빈곤 어린이들을 위해 쓰였다. 핀치 목사 교회가 시작된 이후 끊이지 않고 이어져온 의미있는 일이었고, 마을 사람들 입장에서는 볼거리, 먹을거리, 즐길거리가 넘치는, 남녀노소 모두가 기다리는 행사였다.



캐빈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핀치 목사를 도와 바자회 준비에 달려들었다.

바자회는 규모가 큰 만큼 할일도 매우 많았다. 중요한 결정사항부터 자질구레한 소일거리까지 할일이 산더미였다. 방과 후에는 샘과 지미도 바자회 준비에 달려들었고, 많은 마을 사람들이 틈틈히 일을 도우러 왔다.

음식이나 음료를 준비하는 것도 큰 일이었지만, 그보다 바자회 장소를 만드는 일이 먼저였다. 교회 앞 뜰과 뒷 목장까지 비워 높이가 3미터나 되는 천막 십여개를 올려야 했다.


마을 사람들은 다년간의 경험으로 능숙하게 천막을 올리고, 줄로 단단히 묶어 말뚝을 박았다.


“이 시기에는 간혹 돌풍이 불기도 하거든요.”


3미터가 넘는 몽골텐트를 올리면서 제이크가 말했다. 그의 천막 세우는 솜씨는 정말 최고였다. 다른 천막은 여러명이 달라 붙어도 기우뚱거리며 쓰러지곤 했지만, 제이크는 샘이나 지미의 도움만으로도 수월하게 천막을 세워갔다. 캐빈은 그런 모습들을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무언가에 단련된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자, 이제 된 것 같으니, 물을 뿌려봅시다.”


완성된 천막들을 흡족하게 바라보며, 핀치 목사가 말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샘과 지미는 신이 나서 호스를 가져다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천막에 미리 물을 뿌려, 비가 올 경우 새는 곳을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바자회 전에 비가 한번 내려준다면 좋겠지만, 이 시기에는 비가 잘 오지 않기 때문에, 일단 이런 식으로라도 확인해야 했다. 물장난 하는 아이들을 따라, 럭키와 다른 개들도 ‘컹컹’대며 신나서 뛰어다녔다.


대여해온 천막은 문제가 없었지만, 교회에 있던 천막들은 거의 일년간 창고에 넣어놓고 사용하지 않은 탓인지 삭아서 물방울이 맺히는 곳이 있었다. 사람들은 사다리를 놓고 뚫어진 부분을 일일히 보수했다.


캐빈도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일을 도왔는데, 평소 생각하고 사다리에 올랐다가 핀치 목사의 불호령을 들어야했다.


“당장 내려와요, 캐빈!!!”


사다리에 올라간 게 안젤라였다고 해도 이보다 더 혼이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캐빈이 피터를 구해낸 이야기를 모두 알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거리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남자들 캐빈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슈퍼볼과 양털 시세 외에 흥미거리가 없는 이들에게 이보다 더한 이야깃거리는 없으니까. 남자들은 모이기만 하면 캐빈에 대한 어마어마한 뒷이야기들을 만들어내곤 했다.


“분명히 군인이었을거야. 그것도 그린베레 출신 같은거.”


“Navy seal이겠지. 혼자서 그 갱놈들을 삽시간에 다 제압했다며?”


“코리안이잖아! 그놈들은 강목으로 맞으며 훈련한다고, 맨발로 유리위를 막 걸어다니고 말야···”


사람들이 뭐라하든, 캐빈은 묵묵히 핀치 목사 곁에서 교회 일을 도울 뿐이었다.



그날 이후 핀치는 건강한 사람이라도 쓰러질만큼 몸을 혹사하며 일했다.

준비할 것이 많기도 했지만, 핀치는 마치 지지 않으려 기를 쓰는 것처럼 보였다.

캐빈은 그럴 때마다 아이작의 말이 떠올랐다. ‘당신 교회에 좋지 않을 것이다.’ 분명 그건 협박이었다. 아이작이 핀치 목사를 협박할 만한 꺼리가 무엇일까?

핀치 목사가 바자회에 총력을 다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기부금 같은 경제적인 문제일 가능성이 컸다. 아이작이 핀치 목사 교회에 자금을 지원하고 있었나? 그렇다면 그때 발끈하던 아이작의 모습은 뭐지? 둘 사이의 신앙적 차이를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늘 음모와 술수, 협박과 갈취의 미묘한 줄다리기 속에 살아온 캐빈이다보니, 핀치 목사가 겪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었다. 자신이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핀치 목사가 원할 때 가능한 것이고, 지금으로선 캐빈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잠도 못자고 일하는 핀치 목사가 쓰러지지 않게 곁을 지키는 것 뿐.



사람들이 돌아간 저녁 시간에도 핀치는 창고에서 물건들을 끄집어내 닦고, 미처 못 챙긴 양 축사의 건초와 물을 갈아주었다. 판매를 위한 쿠키를 굽느라 정신 없는 나오미를 대신해, 저녁을 차리고, 안젤라를 씻겨 잠자리에 들게하고 나면, 바자회 참가자들에게 일일히 연락을 돌려 참가 여부를 재점검하고, 기부 단체들에 보낼 서류들을 작성하느라 늦게까지 교회 사무실에서 나올 줄 몰랐다.


캐빈은 그런 핀치 목사의 짐을 덜어주고자 재빠르게 움직였다.

눈치와 완벽한 일처리로 ElDo 최고의 위치까지 올라간 캐빈이었다. 아무리 복잡하다고 한들 시골 교회 사정이야 뻔했다. 말많고 까탈스러운 시골 사람들과의 관계는 부담스러웠지만, 일주일쯤 함께 하자, 자질구레한 업무들은 핀치 목사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챙길 수 있었다.


“아, 라벤더 밭에 스프링쿨러를 틀어야할 시간인데 깜빡했어요!”


허둥지둥 밭으로 향하는 핀치를 캐빈이 잡아끌었다.


“아까 틀어놨어요.”


“내일 쓸 로프를 사와야 하는데···”


“제이크에게 아침에 올때 사다 달라고 부탁해놨어요.”


핀치가 빠뜨릴 법한 모든 일들을 캐빈이 챙겼다.

처음에 핀치는 캐빈에게 미안해 뭐든 자신이 직접 하려 했지만, 점차 말없이 나서는 캐빈을 믿고 맡기게 되었다. 마치 비서처럼, 잘 맞는 파트너처럼 둘은 딱 맞는 호흡으로 일했다.


바자회가 가까워질 때쯤 되자, 마을 사람들은 핀치 목사가 보이지 않으면 캐빈에게 물으러 올 정도가 되었다. 캐빈이 자기가 뭐라도 된듯 거만하게 굴었다면, 마을 사람들은 캐빈을 신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정도를 지키며, 필요한 역할을 하는 캐빈은 곧 보수적인 시골 마을 사람들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짧은 기간 동안 모두가 정신없이 함께하는 바자회 준비는, 캐빈이 단시간에 마을에 섞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바자회 날이 밝았다.

간밤의 비로 숲이 말갛게 씻긴 상쾌한 일요일 아침.

새벽녘부터 시끄럽도록 지저귀는 새소리 때문에 잠이 깬 캐빈은 방안 깊숙히 퍼져들어온 햇빛에 눈을 비볐다. 새로운 하루. 아침 햇빛에 잠이 깨는 생활은 충만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특히 오늘은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캐빈은 시계를 봤다. 아직 5시.

조금만 더 이불 속에서 게으름을 피우려는데, 문득 창문에 묻은 빗방울이 보였다. 비가 왔었나?

벌떡 일어난 캐빈은 티셔츠를 주어입으며, 쏜살같이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전속력으로 바자회 천막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들떠 있었다. 만약 뚫어진 부분이 있다면, 비가 떨어져 있을 것이다.


천막에 도착하니, 이미 핀치 목사가 나와 천막 곳곳을 확인하고 있었다.


“아, 캐빈! 일찍 일어났군요.”


캐빈과 핀치는 서로를 보고 웃었다. 같은 마음.

캐빈은 핀치를 도와 몇 군데 물이 새는 곳들을 보수했다. 햇빛이 씻어낸, 하얀 천막과 물기를 머금고 생생하게 솟아난 푸른 풀과 나무, 새벽 공기에 퍼져가는 라벤더 숲의 향기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7시가 되자 바자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지정된 자리에 짐을 펴고 물건들을 늘어놓는 사람들의 손이 바빴다. 가지각색 테이블보와 정성스레 만든 간판, 꽃과 다양한 장식들로 저마다 손님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준비에 한창이었다.


직접 오븐과 에스프레소 머신까지 들고 와 갓 구운 빵과 커피를 판매하는 베이커리도 있고, 초상화를 그려주는 아마추어 화가들, 다양한 화관을 쓰고 자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는 청년들, 양털로 직접 뜬 스웨터에 이름을 새겨주는 할머니들 등 다양한 종류의 즐길거리들이 가득했다.


핀치 목사는 이곳저곳을 다니며 사람들과 인사하고, 취재를 나온 지역 방송국과 인터뷰를 하는 등 정신이 없었지만, 막상 바자회가 시작되자 캐빈은 오히려 한가해졌다. 느긋하게 천막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구경도 하고, 체험도 해보며 시간을 보냈다.

허브를 이용한 음료 코너가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라벤더 라떼와 민트 모카는 두잔씩이나 마셔도 질리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바자회장 안은 오가는 사람들로 발디딜틈이 없어서, 캐빈은 돌아다니기를 포기하고, 나오미를 도와 쿠키 판매대 근처에서 얼쩡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포장을 돕기도 하고, 쿠키 박스를 나르기도 하면서.


“아, 시장님! 어서 오세요.”


나오미가 반갑게 인사를 건냈다. 마을 사람들과 소탈하게 어울리기로 잘 알려진 이 지역 시장이었다. 주위에 삼엄한 수하들도 없이 비서 두어명과 방문한 시장은 나오미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나오미의 쿠키 때문에, 매년 이곳에 온다고. 하하.”


시장은 쿠키를 열 박스나 구매했다. 시립 고아원에 보낸다고 했다.

캐빈은 비서들을 도와 쿠키를 시장의 차에까지 날랐다. 고아들을 위해 쿠키를 보내다니. 정치적 쇼맨쉽인지는 모르지만, 받는 아이들에게는 무척이나 기쁜일임에 틀림없었다. 게다가 나오미의 쿠키라면···



캐빈과 비서들이 박스를 들고 바자회장을 나오니, 주차장은 이미 가득 차, 주차된 차들은 몇 킬로미터 떨어진 마을 도입까지 길게 늘어서 있었다.


“도와주신다고 해서 천만 다행이에요. 근데 후회하실거에요. 꽤 멀거든요.”


비서들이 웃었다. 차들이 갓길에 이중 삼중으로 주차된 탓에, 마을의 차도는 거의 한차선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교통 경찰들이 총동원되어 요란하게 차들을 정리했지만, 좁은 길을 빠져나가느라 차들은 거북이 마냥 느릿느릿 한참이나 기다려야 했다.



비서들의 말마따나 시장의 차는 굉장히 멀리 주차되어 있었다.

거의 마을 초입에 다다라서야 캐빈은 쿠키 상자를 차에 실을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 내려서 걸어온건가? 최소한 시장이라는 특권에 사로잡힌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비서들의 인사에 캐빈은 별일 아니라는 듯 손짓을 했다. 사람들도, 시장도 괜찮은 동네였다. 저런 리더 밑에서 일하는 것은 보람있을 것이다.




아직 4월이지만, 길게 늘어지는 오후의 햇빛은 무더웠다. 캐빈의 등은 땀으로 축축히 젖어 있었다. 돌아가면 시원한 라벤더 라떼 한잔 더 하고 싶다고 생각하며, 캐빈은 바자회장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때였다.


“드르르, 드르르”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 캐리어를 끌고 오는 한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을 초입의 시내버스 정류장에서부터 끌고 오는 듯 보이는 여인은 엄청난 사이즈의 배낭도 매고 있었다.


처음 시선을 끈 것은 황토색 워커에 카키색 반바지, 검정색 면 티셔츠와 대비되는 그녀의 희고 긴 팔다리였다. 하얗지만 오랜동안 햇빛에 그을려 보기 좋은 연한 갈색빛을 내뿜는 그녀의 가느다란 팔에는 무게감 있는 캐리어를 잡아 끄느라 긴장된 근육이 도드라졌다. 가냘프지만 연약하지 않은, 강인한 내면이 엿보이는 몸이라고 캐빈은 생각했다.


걸리적 거리지 않게 질끈 묶은 금발 머리, 분명 미인임에도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

성큼성큼 걸어온 그녀가 어느새 캐빈의 앞까지 왔을 때, 그제서야 캐빈은 자신이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뚫어지게 자기를 바라보는 남자 앞에서 여인은 ‘탁’하고 캐리어를 멈춰 세웠다.


“도와줄려고, 그렇게 계속 쳐다보고 있었던거죠?”


가쁜 숨을 내쉬면서 당돌하게 말하는 그녀의 말에 캐빈은 당황해서 시선을 내렸다. 여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낮선 남자의 뻔뻔한 시선 쯤은 충분히 넘겨버릴 수 있다는 듯한 여유있는 태도였다.


“어, 어디로 가시는데요?”


“오늘 이 마을에 오는 사람이라면 다 똑같지 않나요?”


캐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캐리어 손잡이를 넘겨 받았다. 첫 움직임을 위해 캐리어를 끈 순간, 장난 아닌 무게에 깜짝 놀랐다. 여자가 혼자 끌고 왔다고, 이걸?


“무겁죠?”


그녀의 얼굴을 마주본 순간, 발갛게 달아오른 두뺨과 송글송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눈에 들어왔다. 대단한 여자다. 캐빈은 피식 웃으며 캐리어를 끌었다.


“ 근데 뭐가 들었는데, 이렇게 무겁죠?”


“바자회에 내놓을 물건들이요.”


“어, 거의 끝날 시간이 다 됐는데요.”


“네, 그래도 맞춰 올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1주일 연기되지 않았으면 올해는 못 참석했을 거에요.”


“아, 매년 오셨었나봐요?”


“매년...”


그녀는 웃으며 캐빈을 쳐다보았다. 환한 미소.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것 같은 그녀의 미소에 캐빈은 당황했다. 왜 이러지. 가슴이 두근 두근 뛰기 시작했다.


“저는 나탈리에요.”


캐빈은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고 멋쩍게 자기 소개를 했다.


“저는 캐빈이라고 해요.”


“못보던 분이시네요?”


“아, 네. 온지 얼마 안 됐습니다. 여기 오신지 오래 됐나봐요···?”


“네, 자주 떠나는 편이긴 하지만···”


아.. 캐빈은 그녀의 커다란 배낭에 시선을 주었다. 여행을 다니는 사람인가? 그녀의 복장이 오랜 시간 밖으로 돌아다닌 사람 특유의 활동적인 느낌을 드러냈다. 걸리적거리는, 가식적인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담백함. 자유로움. 이런 여자는 처음이었다.



어느 새 둘은 바자회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나탈리는 기쁨의 한숨을 내뱉더니, 캐빈에게서 캐리어를 받아들었다.


“고마워요. 나중에 또 뵈요.”


그리고는 씩씩하게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바자회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캐빈은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습한 느낌을 머금은 바람이었다. 지나가는 구름이 큰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오미는 천막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오려나? 캐빈, 판매대를 좀 뒤로 빼야할 것 같은데···”


나오미 말에 캐빈은 대답이 없었다.

캐빈은 멍하니 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디로 갔을까? 뭘 팔고 있을까? 나탈리···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캐빈의 심장은 묘한 흥분으로 두근거렸다.


“나오미, 나 잠깐··· 좀 돌아보고 올게요.”


캐빈은 나오미에게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말을 내뱉고는 판매대를 빠져나왔다. 눈이 마주치면 어딘가 자신의 마음을 들킬것만 같아 부끄러웠다.



한번 시작된 바람은 저물어가는 태양을 더욱 빠르게 밀어내며, 뜨거운 바자회장의 열기를 식혔다. 숲의 공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여자들의 치마자락과 판매대의 전단지들이 하나 둘 날아가 땅에 떨어졌다.


캐빈은 바자회장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며 두리번거렸다. 어디 있을까?

쿵쿵, 쿵쿵. 심장이 뛰었다. 마주치면 뭐라고 해야 하지? 웃어야 하나? 가슴이 사르르 죄어오는 느낌.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순간 캐빈의 눈에 금발 머리 여자가 보였다. 온몸이 긴장되어 왔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

저 멀리 또 다른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인가?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가니... 아니었다.


어디있는 거지?

코너를 돌 때마다, 모여있는 사람들의 틈으로 금발의 누군가가 보일 때마다, 캐빈의 심장은 두방망이질 쳤다가 가라앉았다를 반복했다.

기대, 실망, 기대, 실망. 최대치로 오르내리는 느낌은 아프면서도 짜릿했다. 캐빈은 심장깨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힘들다.



그때 캐빈의 눈 앞에,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판매대에 앉아 나탈리는 이국적인 패턴의 옷들을 꺼내 보이며 웃고 있었다. 빨강, 노랑, 초록 아프리칸 특유의 색감 속에서 도드라지는 그녀의 하얀 피부. 사람들은 그녀를 보고 반가워하고, 알은체를 하며 기쁘게 맞아주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 마음 속까지 들여다보일 듯한 맑은 미소와 눈가의 옅은 주름은 보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그리고 들끓는 사람들의 열기를 식히는 한줄기 바람같은 차분함과 온화함. 마치 그녀의 주위만 모든 것이 천천히, 천천히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보고 싶다.'


캐빈은 그런 생각에 스스로 놀랐다. 그녀가 눈에 들어온 순간, 너무나 너무나 그녀가 보고 싶었다는 것을 알았다. 계속. 왜 이러지? 단 한번도 이런 감정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백인 여자에게는 더더욱. 백인 여자들이 주는 도도함, 차가움, 그래서 느껴지는 어색함과 거리감. 게다가 금발까지도 낯설었다.

그런데 지금··· 왜 이렇게 그녀가 그립지···?


휘이잉··· 바람이 점점 거세어졌다. 회오리치는 바람에 날려가는 물건을 잡으러 판매자들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말뚝에 묶인 천막이 들썩였다. 하얀 몽골천막이 펄럭이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비가 오려나봐!”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에 허둥대는 사람들 너머로, 캐빈은 나탈리의 모습을 계속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의사 양반, 이번엔 너무 오랜만에 온거 아니야? 내 신경통이 더 심해졌다고.”

“죄송해요. 그래도 좋은 약초를 얻어왔어요. 다음주에 들릴게요.”


“이번엔 어디에 갔었어요?”

“에디오피아랑, 수단이랑...”


나탈리는 웃으며 마을 사람들에게 다정한 미소로 답하고 있었다.

의사? 아프리카? 캐빈은 나탈리와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놀랐다. 의사였구나···


그때였다.

누군가 캐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핀치 목사였다.


“캐빈, 여기 있었군요. 비가 쏟아질 것 같아서 큰일이에요. 돌풍이 불기 전에, 판매대 옮기는 일 좀 도와 줄래요?”


캐빈은 핀치 목사의 등장에 놀라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핀치는 캐빈의 손을 잡아 끌었다.


“아, 그 전에···이리 와요, 소개해줄 사람이 있어요.”


핀치는 캐빈을 끌고 나탈리에게로 데려갔다. 캐빈은 갑작스러운 핀치의 행동에 놀라 긴장했다.


“나탈리, 소개해줄 사람이 있어요. 이쪽은 캐빈···”


“핀치, 미안하지만, 우린 구면이에요. 캐빈이 여기까지 짐 옮기는 것을 도와줬는걸요.”


나탈리가 캐빈을 보며 웃어보였다. 캐빈은 나탈리의 말에 수줍게 마주 웃었다.

핀치 목사는 그런 일이 있었냐는 표정으로 놀라며 반가워했다.


“오, 캐빈 정말 고마워요. 정말 다행이네요. 아니면 나탈리가 고생했을 거에요. 나탈리는 의사에요.

국경없는 의사회를 따라 다니느라 일년에 3분의 1 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내 와이프죠.”



나탈리를 바라보는 핀치의 눈에는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쏴아아-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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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5. 출구 +7 17.07.17 230 7 10쪽
14 14. 희생 제물 +3 17.07.15 260 7 14쪽
13 13. 아버지의 마음 +2 17.07.13 322 6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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