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혈흔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에크낫
작품등록일 :
2017.06.26 22:50
최근연재일 :
2020.02.10 00:33
연재수 :
197 회
조회수 :
75,695
추천수 :
2,035
글자수 :
1,094,434

작성
18.10.29 20:08
조회
235
추천
9
글자
9쪽

9. 용호상박(6)

DUMMY

전장에서 공격보다 중요한 것은 보급이며, 안정된 보급선을 유지하기 위한 후방 관리의 필요성은 이제 막 임관한 초급 장교라도 아는 사실이다. 오셀 대공국의 쿠데타를 지원할 당시엔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소규모 기병대로 쾌속 진격을 지시했던 후안 국왕이었지만 이번 제국 침공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따라서 후안 국왕은 이제 거의 보르셀라인의 영향력 하에 장악되어가는 서부 제후국군과 오셀 대공국에서 본격적인 징병을 실시함과 동시에 점령지부터 제국 영토까지의 다중 보급망을 구성했다. 후안 칼소의 일처리는 집요한 만큼 정밀했다. 점령지에 설치한 군정 당국이 제대로 작동하기만 한다면 원정군의 보급에는 차질이 없었다.


물론 아직 점령지인들이 보르셀라인을 진심으로 따른다고는 할 수 없다. 군성제 루안이 보르셀라인을 견제하기 위해 서부에 다수의 제후를 분봉한 지 천년, 서부 제후들은 자기들끼리 분쟁을 일으킨 적은 많아도 그 전체가 보르셀라인의 명령 하에 놓인 것은 처음이었다. 후안 칼소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군이 진군하면 사람들이 그 위엄에 놀라 복종할 것이라고 믿는 망상가는 아니었다.


불만분자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혹은 사보타주를 획책하기만 해도 원정군은 심대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합리주의자인 후안 칼소는 시간을 들여 인화로써 점령지의 소영주들을 자복시키는 대신 더 빠른 방법을 택했다. 세피키아, 엔데버, 오셀의 전략적 요충지를 보유하고 있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던 소영주 23명이 간단한 재판을 거쳐 참수되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합리주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감정이 그의 사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았다. 후안 국왕의 군정 관료들은 왕의 뜻을 충실하게 따랐다. 지배층은 하루가 멀다 하고 감옥에 갇히거나 목이 날아갔지만 피지배층에게는 각종 시혜를 베풀며 기존 영주와 영민들 사이를 이간시켰다. 서부 제후들이 특별히 악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배자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피지배민들의 불만이 되는 법이다. 보르셀라인 왕국군이 해방군의 이름을 얻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오셀 남부의 키릴 영지는 사라진 자들의 평원과 접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용을 부활시키는 후안의 계획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키릴백 아센 쿠잔이 보르셀라인의 반란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탓에 그러한 조치를 비켜갈 수 있었다.


“그러니까, 공식적으로는 그렇다는 말이지.”


에레일리가 그렇게 씨부렁대며 육포를 이로 찢었다. 세릴을 구출하기 위해 똑바로 남쪽으로 향하고 있는 에레일리와 카드로스, 그리고 근위기사들은 키릴 남부의 이름도 없는 농촌이 내려다보이는 고개 등성이에서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그들이 마을로 내려가서 보급을 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후안 국왕의 꼼꼼한 일처리와 관련되어 있었다.

아무리 봐도 군용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대규모 감시탑과 병영, 창고와 주위를 둘러싼 목책, 참호선 등 거점을 구축하고 있는 마을 주민들을 건너다보던 카드로스가 에레일리의 말을 받았다.


“그렇군. 사실상 오셀은 괴뢰국 수준이 아니라 완전 합병에 가까운 처지가 되어버린 것 같소. 저 인원이 조직적으로 노역에 동원된 것을 보니 이미 여기까지 보르셀라인 군정당국의 손이 뻗쳐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지.”


카드로스 일행이 마을로 내려갈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보나마나 이 주변의 경계령은 삼엄할 것이고 재수 없게 주둔군에게라도 들키면 세릴을 구출하기는커녕 일행의 안위도 장담할 수 없다.

카드로스는 세릴의 빈자리를 다시 한 번 느꼈다. 그녀가 있었다면 이런 당혹스러운 상황과 마주치는 일 없이 피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별다른 준비 없이 똑바로 남진했고, 결국 마을을 눈앞에 두고서 건조식량을 씹어야 하는 처지에 빠진 것이다.


“그러게. 저기 보니 식량 배급까지 하고 있는 것 같군. 전시체제가 잘 갖춰져 있어. 그런데 오셀 대공국이 보르셀라인의 괴뢰국이 되었다면 저것은 오셀에서 자체적으로 제국을 막기 위해 짓고 있는 것 아니오?”


얀이 말하자 카드로스가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노비아가 먼저 반박했다.


“아니, 보르셀라인-오셀의 연합은 제국군 서부사령부가 괴멸적 타격을 입었다는 것쯤 당연히 알고 있을 겁니다. 자기들이 그렇게 했으니까. 제국으로의 빠른 진격이 목적이라면 경로를 보았을 때 굳이 여기에 보급기지를 지을 이유가 없습니다. 저것은 아무리 봐도······.”


“사라진 자들의 평원으로 접근하는 전력, 그러니까 우리 같은 자들을 감시하고 막기 위한 전진기지.”


에레일리가 깔끔하게 정리했다. 노비아도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레일리는 주민들에게 식량을 배급해 주는 군인들을 증오스럽게 노려보고 육포를 삼켰다.


“내가 처음 황금향에서 소장님의 지시를 받고 출발한 때부터 따져도 두 달이 채 안 됐는데, 실로 용의주도하면서도 신속한 대응일세. 여기가 별다른 전략적 요충지가 아니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은 사라진 자들의 평원이 용의 탄생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겠지.”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은 핵심부라는 증거다, 이 말이로군.”


에레일리는 얀을 보고 친밀감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핵심부. 좋은 말을 해 주었네. 그러니까 조금 더 상상을 해 보자면······. 내가 그 연금술사라면 세릴 경을 가장 안전한 곳, 다시 말해 저 요새 안쪽이나 그 너머에 숨겼을 거야. 저 사악한 계획의 핵심부야말로 가장 엄중하게 보호받고 있을 테니.”


“그렇다면 저 초소를 쳐야 하나? 보아하니 많으면 1개 대대도 주둔할 수 있는 규모인걸.”


얀의 말대로였다. 카드로스마저도 눈살을 찌푸렸다. 리들이 오셀에서 보르셀라인 국왕의 대리인 노릇을 하며 구축해 놓은 후방 시설의 치밀함은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리들은 과거 아센 쿠잔 앞에서 카드로스와 얀, 노비아 3명의 전력이 1개 대대에 필적한다고 평한 적이 있었고, 리들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래서 리들은 세릴 때문에 불필요한 이동을 하는 와중에도 군정 조직을 기민하게 움직였다. 이 초소도 그 결과물 중 하나였다.

물론 그 말이 정말 이 3명만으로 1개 대대와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들이 지금처럼 잘 정비된 근거지에 의지하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적어도 카드로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정면 돌파라는 선택지는 일찌감치 없어졌다. 카드로스가 고민하고 있던 중 노비아가 문득 말했다.


“그런데, 저것이 군 시설이라면 조금 이상합니다.”


“무엇이 말인가, 뮤엘 대위?”


“여기서 저 초소까지는 1마일이 채 안 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일반적인 야전군의 경계 범위 안쪽에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가 숲 속에 있으니 초소에서 얼른 보이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근처에 소규모 막사나 캠프가 있어야 합니다.”


카드로스는 섬뜩한 느낌을 받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먼저 생각했어야 하는 일이었다. 있을 수 없는 곳에서 군 시설을 만나 당황한 나머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실제로 카드로스 일행이 있는 언덕은 이 주변에서 야전이 벌어졌다는 상황 하에 가장 유리한 고지 중 하나였다. 당연히 병력이 주기적으로 수색하거나 소규모라도 주둔을 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그런 흔적은······.”


“예. 있었다면 저희가 놓칠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 되는 위치에 경계가 없을 리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답은 한 가지입니다. 병사 배치를 해야 했지만 할 수 없었거나, 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거기까지 말했으면 기사단 중에선 못 알아들을 사람이 없었다. 에레일리와 리키를 제외한 일행은 모두 자기의 무기를 움켜쥐고 에레일리를 중심에 둔 채 사방을 둘러싸는 자세로 섰다. 에레일리는 아직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야? 그게 무슨 말인가? 배치를 할 수가 없었다니? 여기에 뭐라도 있다는······.”


에레일리의 의문은 금세 답을 얻었다. 두두두두! 잔가지를 거칠게 부러뜨리는 소리와 함께 쇠를 찢는 것 같은 기성이 울렸다. 기병대의 전력 질주와 맞먹는 존재감이었다. 그러나 인간이나 말이라면 숲이 있는 고지로의 일제 돌격은 할 수 없다.

그들이 지긋지긋하게 마주쳐 왔던 용들, 얀과 에레일리의 작명을 따른다면 ‘사냥꾼’ 수십 마리가 언덕 아래쪽에서부터 그들을 향해 육박하고 있었다.


작가의말

간만에... 카드로스 일행이 등장한 것 같군요.


좋은 저녁 되시길 바랍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용의 혈흔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97 Epilogue Chapter . 그 가을날의 낙일 +2 20.02.10 232 2 9쪽
196 16. 회심(回心) (10) +2 20.02.10 131 2 17쪽
195 16. 회심(回心) (9) 20.02.10 102 2 15쪽
194 16. 회심(回心) (8) +4 20.02.10 86 2 16쪽
193 16. 회심(回心) (7) +2 20.02.10 81 2 14쪽
192 16. 회심(回心) (6) +2 20.02.10 82 2 14쪽
191 16. 회심(回心) (5) +1 20.02.10 77 2 14쪽
190 16. 회심(回心) (4) +2 20.02.10 124 2 14쪽
189 16. 회심(回心) (3) +2 20.02.10 73 2 15쪽
188 16. 회심(回心) (2) +2 20.02.09 85 2 15쪽
187 16. 회심(回心) (1) +2 20.02.08 85 2 15쪽
186 15. 신의 선물(14) +2 20.02.04 92 3 15쪽
185 15. 신의 선물(13) +2 20.02.04 85 3 15쪽
184 15. 신의 선물(12) +2 20.01.29 115 3 15쪽
183 15. 신의 선물(11) +2 20.01.26 96 3 14쪽
182 15. 신의 선물(10) +2 20.01.25 93 3 15쪽
181 15. 신의 선물(9) +2 20.01.22 88 3 13쪽
180 15. 신의 선물(8) +2 20.01.18 91 3 16쪽
179 15. 신의 선물(7) +2 20.01.15 96 3 11쪽
178 15. 신의 선물(6) +2 19.12.31 140 3 18쪽
177 15. 신의 선물(5) 19.12.30 104 3 13쪽
176 15. 신의 선물(4) 19.12.22 108 3 14쪽
175 15. 신의 선물(3) +2 19.12.17 111 3 15쪽
174 15. 신의 선물(2) +2 19.12.06 105 3 14쪽
173 15. 신의 선물(1) +2 19.11.29 123 5 14쪽
172 14. 고대의 길(14) +2 19.11.24 125 5 17쪽
171 14. 고대의 길(13) +2 19.11.18 127 4 13쪽
170 14. 고대의 길(12) +4 19.11.14 130 4 14쪽
169 14. 고대의 길(11) +2 19.11.11 99 5 12쪽
168 14. 고대의 길(10) +2 19.11.05 133 4 1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