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색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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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라나스
작품등록일 :
2017.06.27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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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5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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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6.30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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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행의 시작Ⅱ

DUMMY

···그날 밤의 결과를 말하자면, 아쿠아는 결국 뜬눈으로 여명을 맞이하고 말았다. 정령이 아니라 사람처럼 옆에 고른 숨소리를 흘리는 라피를 두고 잠든다는 건 그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향기 좋았··· 아니, 이게 아니고. 게임에서의 종족이 유지된 게 다행이네. 현실의 몸으론 골골대느라 여행은 꿈도 못 꿨을 테니.’

아쿠아는 주먹을 쥐어보며 스스로의 육체를 살피고는 속으로 읊조렸다. 정신적인 피로함이 경미하게나마 존재함을 제외하면 아무런 피곤도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신체에는 활력이 넘친다고 생각될 정도다. 예상했던 결과지만, 견인족의 상위종족은 레벨이 1인 상태라도 인간과는 격이 다를 정도로 강인한 체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게임일 때는 알아도 자각하기가 힘드니 말이지.’

스스로의 상태를 확실하게 숙지한 아쿠아가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막사 바깥에서 조심스러운 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사제님. 깨어나 계십니까?”

주변이 채 완전히 밝아지지도 않은 시간대건만, 원정대의 아침은 빨랐는지 병사의 목소리는 맑았다. 아쿠아는 ‘빠르네.’하고 낮게 읊조리곤 천천히 침낭에서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예. 하지만 들어오진 말아주십시오. 일행이 아직 자는 중이거든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식사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잠을 설친 그와 달리 곤히 잠들어있는 라피를 염두에 두고 꺼내든 대답에 병사가 입구를 걷으려던 손을 멈추고 물어왔다.

‘식사라. 음. 어제 먹은 거면······.’

아쿠아는 잠시 어제 대접받은 식사를 떠올렸다. 암염과 좋은 승부를 벌일 수 있을 만큼 짠 염장고기와 검보다 단단하지 않나 싶은 건빵을 섞어서 만든 스튜의 기억이 혀끝을 스쳐지나갔다.

무료로 대접해준 이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건 사람이 먹을 음식이 못되었다. 애초에 간도 제대로 안 돼서 스튜의 위쪽은 짜고, 아래쪽은 밍밍한 그런 물건을 어찌 ‘음식’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그리 표현한다면 음식이란 단어에 대한 모독이리라.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아쿠아는 대답을 기다리는 병사를 향해 말했다.

“괜찮아요. 저희도 나름대로 구비해둔 것이 있고, 여러분에겐 여러분의 일정이 있겠지요. 괜히 저희로 인해 일정을 어그러뜨리는 수고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그리 전달하겠습니다.”

조금은 딱딱한, 동시에 약간 아쉬움이 섞여든 병사의 대답을 들으면서 아쿠아는 고개를 잠깐 기울였다. 하지만 그다지 중요한 부분도 아니므로 금세 관심을 잃고 재차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혹 원정대장님께 잠시 시간을 내달라고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드릴 말씀이 있는데······.”

“···음. 아, 예. 알겠습니다.”

그 물음에 병사는 무언가 이해했다는 듯, 유감스러운 신음을 흘리더니 다시 올곧은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떠나갔다. 아쿠아는 바깥의 기척이 사라졌음을 확인하곤 슬며시 눈을 돌렸다.

작지 않은 수준의 성량으로 대화가 이어졌건만, 라피의 잠을 깨우기는 모자랐던 걸까. 평화로운 표정으로 곤히 잠든 모습은 아까 봤던 그대로다.

앞으로의 예정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라피를 깨워야 하리라. 하지만 아쿠아는 그러지 못했다. 이리도 곤히 잠든 라피를 어찌 깨울 수 있단 말인가.

그에게는 무리다. 그랬기에 아쿠아는 그녀를 깨우는 대신에 가만히 그 사랑스러운 자태를 바라보았다. 라피가 스스로 깨어나기를 기다리면서.

하염없이.

······.

“계십니까? 사제님. 원정대장님께서 면담을 승낙하셨습니다. 곧장 뵙기를 바라십니다만······.”

라피를 바라보는데 푹 빠져있던 아쿠아는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면서 정신을 차렸다.

‘얼마나 지난 거지?’

설마 이런 바보 같은 실수를 할 줄은 몰랐다. 당황스런 마음을 추스르며 지나간 시간을 헤아려보니, 다행히도 그리 오랫동안 넋을 놓진 않은 느낌이다.

‘라피는 아직 깨지 않은 것 같고, 저 사람은 아까 전언을 부탁했던 병사니······. 물어본 다음에 곧장 온 거면 1시간 전후겠지?’

···이미 날려버린 시간도 상당한 시간이지만, 그 시간은 잃어도 괜찮다. 뭘 했어도 결국 케론의 답신이 올 때까진 움직이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였을 테니까.

“예. 있습니다. 금방 나갈 테니 잠시 기다려주세요.”

스스로에게 그리 변명하면서 아쿠아는 우선 둘러대듯 대답했다. 그리고 아직도 깨지 않은 라피를 보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떠날 시간이 됐음에도 안 깰 줄은 몰랐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깨우는 쪽이 최선이겠지만, 무구한 얼굴로 잠든 라피의 얼굴을 보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더구나 당장 깨운대도 잠에서 막 깬 소녀를 마구 움직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생각해낼 수 있는 답은 하나······.

아쿠아는 결정을 내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곧장 가죠.”

“···저, 저기. 괜찮으시겠습니까?”

천막을 걷고 나온 아쿠아를 바라보며 병사가 당혹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다. 밖으로 나온 아쿠아는 등에 라피를 업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괜찮습니다. 나름대로 체력이 있는 터라.”

허나 아쿠아는 그의 물음을 가볍게 일축했다. 애당초 정령인 라피의 몸은 무게가 없지는 않아도 가볍고, 그를 제하더라도 상위견인족의 육체가 지닌 강인함은 인간과 격이 다르다.

라피를 업고 다니는 것쯤은 부담거리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하고자 한다면 몇 시간이건 며칠이건 업고 다닐 수 있다. 그런 자신감이 넘쳐나는 아쿠아의 대답에 병사는 미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으음. 사제님이 그러시다면야······.”

‘그걸 물어본 게 아닌데.’라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지만 병사에게 관심이 없던 아쿠아는 가벼이 넘겨버렸다. 그리고는 병사의 안내를 받아 케론이 있는 지휘막사를 향해 걸어갔다.

지휘막사는 원정대 내에서도 꽤나 눈에 띄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다른 막사보다 크기가 두 배는 크고, 천의 질감과 색감에도 확연한 차이가 난다.

본디 군대에서 지휘관의 위치는 기밀에 속하므로 이런 요란한 막사는 해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크리프란 평야 원정대의 경우에는 또 입장이 다르다.

그들의 상대는 정보전이 중요한 인간이 아니라 크리프란 평야의 강대한 몬스터들. 딱히 정보를 숨길 필요가 없을뿐더러, 그런 상황에서 지휘부를 헷갈리게 숨겨두는 건 오히려 악수가 되니까.

“정지. 무슨 연유로 오셨습니까?”

막사를 관찰하며 그 앞까지 다가가니, 지휘막사를 지키던 경비병이 둘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까 말씀드린 아쿠아 사제님이십니다.”

“그렇군요. ···들어가십시오.”

허나 그도 잠시다. 바로 돌아온 병사의 대답에 경비병은 무언가 찝찝한 표정으로 아쿠아를 바라보곤 비켜섰다. 아쿠아는 그에게 수고했다는 의미로 가볍게 목례하고는 막사로 들어갔다.

막사 내부는 ‘기사’라고 하면 떠올릴법한 깔끔한 모습과는 달리 상당히 어수선했다. 임시로 만든 모양인지 얼기설기 엮인 탁자는 균형이 비뚤어져있고, 그 앞에 앉은 참모들은 퀭한 얼굴로 난잡하게 흩어진 서류들을 필요한 대로 붙잡고 있었다.

‘음. 역시 읽을 수 없나. 너무 자연스럽게 대화가 통해서 살짝 의심스러웠는데, 지구나 시리우스랑은 언어가 달라. 지금까지 대화가 됐던 건··· 그래. 영언 특성 덕인가.’

아쿠아는 슬쩍 들키지 않도록 그들의 서류를 엿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태까지 대화에 지장이 없었음을 떠올리며 혹시나, 하고 일말의 기대감을 가졌지만 상황은 예상했던 대로다.

그가 살던 세계와는 언어가 다르다. 그럼에도 대화가 원활했던 이유는 상위종족으로 진화하면서 얻은 종족특성 ‘영언’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영언의 특성을 가진 존재는 단순한 언어가 아닌 의념으로 타인과 소통하게 된다. 게임에선 그리 의미가 없던 특성이나, 지금은 이차원에 떨어진 아쿠아의 생명줄과 같은 능력이 되어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네. ···음. 그 모습은 꽤나 뜻밖이지만 말일세. 하기야 신을 모시는 이에게 인세의 법도를 논함은 어긋나는 일이려나.”

그렇게 아쿠아가 새로운 사실을 확신하고 있는 사이, 막사의 중심에서 케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쿠아는 난감한 기색이 어린 그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알아차렸다.

‘아, 젠장. 예의에 완전히 어긋났어.’

무심코 라피의 매력에 푹 빠져서 잊어버렸지만, 라피를 업은 그의 모습은 예의와는 멀리 동떨어져있다. 이제야 깨달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심각하게 말이다.

‘멍청하긴.’

내심 스스로를 욕하면서 아쿠아는 케론의 눈치를 살폈다. 당혹스런 기색이긴 하지만 딱히 불쾌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는다.

도량이 넓다는 증거일까, 아니면 그저 사소한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뿐일까?

어느 쪽이든 이쪽으로선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아쿠아는 그리 생각하며 곧장 사과의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어제까지의 모험으로 일행이 너무 피곤해하던 터라······.”

“음. 그렇구려. 하기야 그대들은 여태까지 둘이서 여행해왔다고 했지. 이 금지에서 홀로 호위를 맡은 그녀의 부담은 분명 보통이 아니었을 터. 그런 상태인 것도 이해가 가오.”

기사이기에 그런 걸까, 아니면 크리프란 평야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원정대장이기에 그런 걸까. 케론은 아쿠아가 사과와 함께 꺼낸 변명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주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것 아니오. 그보다도 슬슬 본론을 진행하는 쪽이 어떻겠소? 무슨 연유로 나를 보자고 한 게요?”

그리고는 이제 그 이야기는 끝났다는 듯, 망설임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감사의 말을 읊었던 아쿠아는 케론의 말에 자세를 바로하면서(라피를 계속 업고 있는 상태기는 했지만.) 찾아온 용건을 밝혔다.

“아, 예. 떠나기 전에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여러분의 호의는 감사히 잘 받았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그 호의에 기대어서 조금 더 머무르고 싶었으나, 급한 일이 있어서요.”

“곧장 떠난다니. 괜찮겠소? 여태까지 무탈했다한들 앞으로도 무탈하리라 보증할 수는 없거늘. 일행도 상당히 지치지 않았소? 이틀 후에는 보급대가 도착하오. 떠나더라도 그때 안전하게 가는 편이 어떨까 싶은데, 어찌 생각하시오?”

작별인사···만은 아니고, 다른 목적도 살짝 섞인 인사에 케론은 걱정스런 어투로 제안했다. 호의가 절로 느껴지는 제안인 만큼 아쿠아에게 놀랍도록 이로운 조건이었다.

“저도 그러고는 싶지만, 시간이 부족합니다.”

허나 아쿠아는 그 매혹적인 조건을 밀어내며 말했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지만 한시라도 빨리 하스를 찾아야하는 입장에서 일정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음. 뜻이 확고하다면 강제할 순 없지. 어쩔 수 없구려. 허면 혹 떠나기 전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기탄없이 말해주시오. 병력을 빼기는 힘들지만, 다른 것이라면 가능한 준비해드리리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아쿠아는 바라던 말을 먼저 꺼내준 케론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밤새도록 필요하다고 생각해둔 것들을 조심스레 요청했다.


작가의말

오늘은 조금 늦게 올렸네요. 낮잠을 자는 바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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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5. 노을의 기사Ⅶ +1 17.11.16 148 1 12쪽
23 5. 노을의 기사Ⅵ +1 17.10.31 202 2 12쪽
22 5. 노을의 기사Ⅴ +2 17.10.18 201 1 12쪽
21 5. 노을의 기사Ⅳ +2 17.08.29 211 3 12쪽
20 5. 노을의 기사Ⅲ 17.08.19 384 3 12쪽
19 5. 노을의 기사Ⅱ 17.08.12 209 3 12쪽
18 5. 노을의 기사Ⅰ 17.08.05 152 3 11쪽
17 4. 그가 사제인 이유Ⅴ +1 17.08.01 342 3 11쪽
16 4. 그가 사제인 이유Ⅳ 17.07.27 175 3 13쪽
15 4. 그가 사제인 이유Ⅲ 17.07.22 234 3 11쪽
14 4. 그가 사제인 이유Ⅱ +2 17.07.13 197 3 12쪽
13 4. 그가 사제인 이유Ⅰ 17.07.10 190 3 11쪽
12 3. 여행의 시작Ⅳ 17.07.07 525 3 11쪽
11 3. 여행의 시작Ⅲ 17.07.03 213 3 11쪽
» 3. 여행의 시작Ⅱ 17.06.30 204 3 12쪽
9 3. 여행의 시작Ⅰ 17.06.29 284 3 11쪽
8 2. 크리프란 평야 원정대Ⅳ 17.06.29 248 4 13쪽
7 2. 크리프란 평야 원정대Ⅲ +1 17.06.28 238 4 11쪽
6 2. 크리프란 평야 원정대Ⅱ +1 17.06.28 239 5 11쪽
5 2. 크리프란 평야 원정대Ⅰ +1 17.06.27 302 5 11쪽
4 1. 표류자Ⅲ +2 17.06.27 367 5 12쪽
3 1. 표류자Ⅱ +1 17.06.27 382 5 12쪽
2 1. 표류자Ⅰ +1 17.06.27 440 5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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