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색의 시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판타지

엘라나스
작품등록일 :
2017.06.27 14:03
최근연재일 :
2019.01.25 20:56
연재수 :
87 회
조회수 :
14,348
추천수 :
177
글자수 :
473,281

작성
17.12.31 23:57
조회
290
추천
1
글자
12쪽

6. 모호한 끝맺음Ⅰ

DUMMY

“엄청 빨리는군.”

아쿠아는 소녀의 보드라운 입술 사이에 물려둔 자신의 팔뚝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라피의 힘으로 통증이 제어된 상태에서 물린 상처를 타고 피가 죽죽 빠져나가는 감각은 아프진 않아도 상당히 오싹하다.

“아무리 봉인된 상태래도 수백 년을 굶주린 상태니까요. 더구나 봉인의 해제에 필요한 힘까지 충당하고 있으니, 그만큼의 보충이 필요하겠죠.”

“그래. 뭐, 이해는 하는데······. 벌써 2L도 넘게 빨렸단 말이지. 이거 보통 사람이었으면 깨우기도 전에 죽을 거 같은데?”

돌아오는 라피의 대답에 아쿠아는 아까보다 파리해진 얼굴로 읊조렸다. 그가 소녀를 잠재운 마법을 확인하고 알아낸 마법의 해제방식, 흡혈을 개시하고 빨린 피는 인간으로 치면 거의 치사량에 가깝다.

더군다나 뱀파이어의 흡혈은 단순히 피라는 액체만을 빼앗는 게 아니다. 붉은 피로 대표되는 생명력은 물론이거니와 생물이 보유한 마나··· 유저인 아쿠아의 경우에는 이데아도 함께 갈취하는 것이다.

설령 아쿠아와 같은 입장이더라도 인간이라면 이 흡혈을 견뎌내지 못하리라. 아니, 인간만이 아니라 그보다 월등하게 강인한 수인종이라도 무리겠지.

···아쿠아마냥 괴물에 가까운 상위종이 아니라면.

‘정말이지. 이런 흐름은 싫은데.’

여태까지도 의혹의 색은 충분히 짙었다. 헌데 그조차도 모자라다는 듯 이렇게나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면, 이제 그것은 의혹이라 부를 수 없다.

“물어볼 게 많을 것 같네.”

“으웅······.”

쩌적- 쩌저저저적-

아쿠아가 읊조리는 것과 동시에 시체처럼 잠들어있던 소녀의 의식이 각성하기 시작한 듯, 얕게 웅얼거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하늘을 뜨겁게 불태우던 노을에 균열이 일어났다.

“···뭐지?”

우르르르릉- 쩌어억!

갑작스런 이변은 꼬리를 갓 잡은 생선마냥 펄떡인 아쿠아의 당혹성이 주위로 닿을 새도 없이 이어졌다.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사방이 격동하며 균열이 더욱 더 자신의 몸을 불려간다.

“음. 무너지는 것 같소.”

“어엉?”

“조금 전까지는 흐릿했소만······. 이 던전을 구성하는 힘은 잠들어있는 아가씨로부터 순환됨으로서 확보된다던 것 같소. 말 그대로 그대를 기다리기 위한 요람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그 말은··· 내가 얘를 깨워서 던전의 순환을 끊어버리게 되면······.”

“붕괴된다는 거네요.”

쩌어어억! 쿵!

선고하듯 마무리하는 라피의 말과 함께 균열이 부서지며 노을빛으로 물든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확실히 용도를 다한 던전을 폐기하는데 이만큼 효과적인 방법도 또 없다.

자연붕괴로 소멸해버리면 던전의 자세한 내막을 조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거기에다 동시에 언데드가 출몰하는 던전의 귀찮은 뒷수습도 일거에 정리되니 얼마나 편리하단 말인가?

“젠장. 라피. 얘 좀 부탁해.”

“네.”

아주 사소한 문제라면, 붕괴의 타이밍이 너무 빠르다는 점이리라. 아쿠아는 황급히 라피에게 소녀를 맡기면서 여전히 회복되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 웨스페르를 향해 물었다.

“달릴 수 있겠어?”

“미안하구려. 지금 상태로는 무리요.”

“그럼 일단 나한테 업혀. 가능한 빨리 빠져나간다.”

웨스페르의 대답을 들은 아쿠아는 곧장 결정을 내렸다. 성술을 쓸 짬은 없다. 안 그래도 전투를 벌이면서 상당히 힘을 소모한 판에 흡혈까지 당하는 바람에 이데아가 바닥을 치는 상태였으니까.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커다란 체구인 웨스페르를 업고 달리는 것뿐. 다행히도 내부에서부터 일어나는 던전의 붕괴를 뒤로한 채 아쿠아는 출구를 향해서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뛰쳐나갔다.


* * *


쿠르르르르릉! 콰아아아앙!

해가 져서 어둑어둑한 하늘 아래. 고요히 가라앉아있던 폐허를 굉음이 뒤덮는 것과 동시에 두 개의 인영이 붕괴되는 던전 입구에서 뛰쳐나왔다.

“세이···프. 후우. 죽는 줄 알았네.”

결사의 탈출이 시작되고도 몇 시간. 마라톤보다도 먼 거리를 훨씬 격렬하게 달린 끝에 일행이 아슬아슬하게 붕괴하는 던전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교대하지 않았으면 못 맞출 뻔했구려.”

“신성력만이 아니라 체력도 온전치 않으니까.”

안도어린 목소리에 아쿠아가 쓴웃음을 지으며 웨스페르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출발할 당시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구도.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건 아쿠아가 약간의 꼼수를 부린 덕이었다.

“하지만··· 그대는 괜찮은 거요? 아가씨에 이어서 내게도 흡혈이라니. 견인족이라도 버틸 일이 아니거늘.”

이데아만큼 바닥을 치는 건 아니래도 흡혈 탓에 체력 역시 온전치 않다. 그를 인지하고 있던 아쿠아는 달리던 중에 웨스페르에게 피를 제공, 그의 부상을 급속도로 회복시킴으로서 활로를 열어젖혔다.

허나 그런 선택에는 당연히 대가가 따르는 법. 흡혈의 반동을 걱정하는 웨스페르에게 아쿠아는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뭐, 이쪽도 평범한 견인족은 아니······.”

“아쿠아. 설명은 나중에. 이제 깨어날 것 같아요.”

허나 그 대답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한 채 끊기고 말았다. 지나치게 오래 잠들었던 여파일까, 달리던 내내 조짐만 보일 뿐 좀처럼 눈을 뜨지 못하던 소녀가 각성할 기미를 느낀 라피가 둘의 대화를 멈췄기 때문이다.

둘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라피는 안아들고 있던 소녀를 그대로 부드럽게 바닥에 눕혔다. 그러자 마치 미리 짜기라도 한 듯 소녀의 눈이 뜨이며 조금은 흐릿한 홍옥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으, 음······. 여긴······.”

“아가씨, 아가씨, 아가씨, 아가씨!”

이어서 소녀의 고혹적인 입술이 열리는 순간, 웨스페르가 눈물을 쏟아낼 기세로 뛰어들었다.

“···웨스, 페르?”

“예. 접니다. 아가씨!”

멍한 기색으로 읊조리는 소녀의 흐릿한 눈동자에 서서히 초점이 살아난다. 소녀는 자신의 부름에 감격스러운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는 웨스페르를 향해 아직 막 깨어난 터라 표정을 만들기 어려운지 살짝 딱딱한 미소를 머금으며 읊조렸다.

“그렇군요. 성공···한 건가요.”

스스로가 깨어난 것으로, 그리고 동시에 몇 시간이나 지났음에도 남아있는 감미로운 잔향을 통해 소녀는 자신이 그토록 꿈꾸던 순간에 다다랐음을 이해했다.

“이걸로, 나는······.”

“남을 뱀파이어로 만들지 않을 수 있게 됐다, 맞나?”

환희와 쓸쓸함, 죄악감 등이 뒤섞인 소녀의 읊조림을 무정하게 끊으며 아쿠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에 소녀는 자신에게 피를 준 이, ‘그녀’가 말했던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리면서 추억하듯 답했다.

“네. ···저는, 오랫동안 바라왔어요. 지금의 제 동족들의 눈에는 이단으로 비쳐질지 모르지만. 남을, 괴물로 만들고 싶지 않아요.”

“으음? 아. 그래. 너, 원래는 인간이었구나?”

소녀의 답을 들은 아쿠아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 이내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혈은 다른 뱀파이어들과 다르게 자연발생하는 존재지만, 그게 정말로 무에서 나타난다는 뜻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발생하는 건 일종의 핵이라 할 수 있는 피의 정수니까. 정혈의 뱀파이어란 이 정수가 다른 요소로 육신을 구성하거나, 다른 종족과 결합해 강제로 진화시킨 결과물일 따름이다.

“정수를 받아들이고도 정체성을 보존하다니. 흔치 않은 일인데 말이야. 많이 힘들었겠네.”

“잘, 아시는군요.”

“언데드에 대해서는 전문가니까. 정혈이랑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아, 근데 생각해보니까 정혈은 언데드라기엔 좀 미묘한 종족이지?”

정혈이 아무리 희귀하대도 예전에는 한 세계를 주름잡던 아쿠라미드교의 수장이던 아쿠아다. 정혈과도 몇 번이나 만나봤으며, 이번처럼 도움을 주게 된 적도 있었다.

“···신기한 분이시네요, 은인께서는.”

놀란 듯 읊조렸던 소녀는 그리 태연하게 대답하는 아쿠아를 신비하다는 눈으로 올려다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 소녀를 내려다보며 아쿠아는 미묘한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신기하다라. 그 말엔 그리 좋은 기억이 없는데 말이지. 그나저나 웨스페르, 당신도 그렇고, 그쪽도 은인이니 하는 건 좀 낯간지럽거든. 그냥 이름으로 불러줘.”

“이름, 인가요······.”

그에 소녀가 살짝 곤혹스러운 기색으로 읊조렸다. 아쿠아는 그 태도를 보고서야 아직 소녀와 통성명도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이런. 소개를 안 했었구나. 나는 아쿠아. 물의 여신 아쿠라미드님을 모시는 첫 번째 물방울···이지만, 지금은 사정상 일반사제로 행세하고 있어.”

“예. 아쿠아님. 제 이름은 비올라예요. 소속은······ 이제, 없네요.”

아쿠아의 소개에 소녀, 비올라도 스스로를 소개했다.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을 끝맺은 그녀의 말에 아쿠아는 적당히 상황이 일단락됐다고 판단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래. 잘 부탁해.”

“저도 잘 부탁드려요.”

그리고 그 손을 비올라가 잡는 동시에 하스의 반응이 느껴지는 북동쪽으로 눈을 돌리면서 말했다.

“그럼 이제··· 할 얘기는 가면서 하든지 하고 빨리 여기서 튀자.”

“예?”

“무슨 소리요? 그대의 동료들은?”

갑작스러운 도주선언에 두 뱀파이어가 당황한 기색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아쿠아는 손을 잡은 채 의아해하는 비올라를 일으키며 우선 여전히 기사들을 아쿠아의 동료라 생각하는 웨스페르의 인식을 정정했다.

“저기. 우선 먼저 말해두겠지만, 그 사람들이랑은 딱히 동료도 뭣도 아냐. 그냥 이해관계가 일치해서 잠시 고용된 사이였을 뿐이지.”

“그런 것이었소? 허나 그렇다하더라도 굳이 도망쳐야할 필요까지 있는 것이오?”

“···당연히 있지. 귀찮아지거든.”

아쿠아는 비올라가 잠들기 전에 어찌 살고 있었던 건지, 자각이 없는 웨스페르를 보며 이마를 짚었다.

“상황을 봐. 던전은 무너졌고, 던전을 지키던 당신은 나와 함께 있지. 이쪽까지 의심할지 확신하긴 어렵지만 비올라가 은근슬쩍 일행에 추가된 상태고. 이런 모습을 당신의 마법으로 추방당했던 그들이 돌아와서 보면 어떻게 되겠어?”

모르긴 몰라도 꽤나 고역을 치르리라. 던전의 문제가 해결됐대도 이래저래 의문점이 남아있고, 결코 좌시할 수 없을 웨스페르의 존재도 있으니까.

그나마도 어찌어찌 잘 넘기면 또 모르겠지만, 비올라의 정체가 드러났다간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순혈로도 나라가 뒤집힐 판에 그런 순혈을 무수히 양산할 수 있는 정혈의 등장이 유야무야 넘어갈 일이겠는가?

“으음. 그래도 그냥 갔다간 후환이 남지 않소?”

“그건 뭐, 별 수 없지. 솔직히 말하자면 나한테도 사정이란 게 있거든? 앉아서 마냥 시간을 날려먹고 있을 수 없어. 여기에 오는 것도 얼마나 고민을 했는데.”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한시라도 빨리 하스를 찾아야하는 아쿠아에겐 용납할 수 없는 시간낭비다. 실로 단호한 아쿠아의 태도에 웨스페르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으면 얼른 가자. 그들을 어디까지 보내버렸는지는 몰라도 돌아오기 전에 벗어나기만 하면 당분간은 괜찮을 거야. 무너진 던전에서 우리의 단서를 찾기는 어려울 테니까.”

아쿠아는 그래도 보수를 챙겨두지 못하는 건 아쉽네, 하고 중얼거리고는 두 뱀파이어를 재촉하며 흔적이 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작가의말

어쩌다보니 신년기념같은 느낌이 되버렸군요..


끙..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물색의 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8 6. 모호한 끝맺음Ⅲ +1 18.01.31 165 1 13쪽
27 6. 모호한 끝맺음Ⅱ +1 18.01.15 160 1 12쪽
» 6. 모호한 끝맺음Ⅰ +1 17.12.31 291 1 12쪽
25 5. 노을의 기사Ⅷ +1 17.12.13 157 1 16쪽
24 5. 노을의 기사Ⅶ +1 17.11.16 148 1 12쪽
23 5. 노을의 기사Ⅵ +1 17.10.31 202 2 12쪽
22 5. 노을의 기사Ⅴ +2 17.10.18 201 1 12쪽
21 5. 노을의 기사Ⅳ +2 17.08.29 211 3 12쪽
20 5. 노을의 기사Ⅲ 17.08.19 384 3 12쪽
19 5. 노을의 기사Ⅱ 17.08.12 209 3 12쪽
18 5. 노을의 기사Ⅰ 17.08.05 152 3 11쪽
17 4. 그가 사제인 이유Ⅴ +1 17.08.01 342 3 11쪽
16 4. 그가 사제인 이유Ⅳ 17.07.27 175 3 13쪽
15 4. 그가 사제인 이유Ⅲ 17.07.22 234 3 11쪽
14 4. 그가 사제인 이유Ⅱ +2 17.07.13 197 3 12쪽
13 4. 그가 사제인 이유Ⅰ 17.07.10 190 3 11쪽
12 3. 여행의 시작Ⅳ 17.07.07 525 3 11쪽
11 3. 여행의 시작Ⅲ 17.07.03 213 3 11쪽
10 3. 여행의 시작Ⅱ 17.06.30 203 3 12쪽
9 3. 여행의 시작Ⅰ 17.06.29 284 3 11쪽
8 2. 크리프란 평야 원정대Ⅳ 17.06.29 248 4 13쪽
7 2. 크리프란 평야 원정대Ⅲ +1 17.06.28 238 4 11쪽
6 2. 크리프란 평야 원정대Ⅱ +1 17.06.28 239 5 11쪽
5 2. 크리프란 평야 원정대Ⅰ +1 17.06.27 302 5 11쪽
4 1. 표류자Ⅲ +2 17.06.27 367 5 12쪽
3 1. 표류자Ⅱ +1 17.06.27 382 5 12쪽
2 1. 표류자Ⅰ +1 17.06.27 440 5 15쪽
1 初章 +1 17.06.27 828 9 1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