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다보는 남자 042
“자네가 나눠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인이시여.”
크몬족은 잡식성이지만, 굳이 따지면 육식에 가까웠다. 또한 지방덩어리인 비곗살도 제법 입맛에 맞았다.
‘살 찌우는 데는 비계만한 게 없지.’
사방에서 모여드는 크몬족을 뒤로한 김태훈은 베르탈의 접속을 끊고 지구로 복귀했다.
“할 일이 많아.”
집 거실 한쪽 구석에는 일부러 장판을 오려낸 곳이 있었다.
회색 콘크리트 바닥이 그대로 노출되어 흉물스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곳에 자리한 구멍은 땅의 정령이 바깥을 오가는 전용 통로였다.
녀석은 그곳을 통해 오가면서 김태훈이 시킨 일을 하고 있었다. 그가 시킨 것은 다름 아닌 잡초 제거였다.
녀석에겐 잡초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지만, 그가 몇몇 풀을 지정하여 제거하라는 식으로 가르쳤다.
“일하고 있나보네.”
거실 바닥 구석의 구멍을 슬쩍 바라보던 그는 신전 창고에서 의뢰 계약서를 꺼냈다.
“명함을 어디다 뒀더라....”
그렇게 최화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다시 방문해서 계약서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거기 계약서 마지막 장에 보시면 QR코드 있을 겁니다. 보이세요?
“잠시만요. 아 이건가.”
-일반적인 QR코드하고 생긴 게 좀 다를 거예요.
“네. 찾은 것 같습니다.”
-휴대폰의 어플리케이션... 그 각성자용 어플리케이션 사용하고 계시죠?
“네.”
-거기에 코드 스캔하는 기능 있으니까, 그것으로 하시면 됩니다.
“좋은 세상이네요.”
전화를 끊은 그는 최화연의 말대로 했다.
어플리케이션에서 QR코드 스캔 기능을 찾아 켜고 카메라 앵글을 맞추니, 신기하게도 다탁 위에 올려놓았던 계약서가 빛을 뿜으며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의뢰 계약서 1부 획득]
[문서 저장소에 저장하였습니다]
단순히 휴대폰에 저장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계약을 수락하거나 거절하는 것도 가능했다.
이미 서명을 했지만, 그것은 인정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런 것도 세대 차이라고 해야 하나.”
단순히 나이가 들어서 신문물에 적응하기 힘든 것과는 조금 달랐다.
하지만 생소한 것에 대한 위화감과 더불어 약간의 떨림 같은 느낌은 비슷했다.
“오. 이런 기능도 있네.”
어플리케이션은 저장된 계약서의 조항들을 쉽게 풀어 설명하고, 독소조항이 될 만한 것들을 알려주는 서비스도 있었다.
물론 유료였지만, 5캐쉬 정도는 쓸만 한 것 같았다.
“나한테 불리한 조항은 없고... 그러면 됐지.”
그는 계약서 분석 결과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이어서 수락을 확인하자, 상대편에게 알림이 갔는지 다시금 최화연에게서 전화가 왔다.
“해당 지역 좌표는 계약서에 첨부되어있더군요. 이후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게 조건이었고요.”
-부디 한 명이라도 더 구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한 명 구출 당 천만원씩 추가니까, 저도 그만큼 열심히 해야죠. 그럼 끊겠습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는 휴대폰을 끊었다.
이미 해당 지역 좌표는 시스템에 저장해두었기에, 그곳으로 이동하는 것은 문제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동 직후부터 발생했다.
“워....”
저도 모르게 내뱉은 탄성.
그 소리를 듣고 사방에서 돌아보는 것들.
그에게 꽂히는 날카로운 눈빛들.
그 눈빛 속에 들어있는 감정은 아무래도 식욕인 것 같았다.
“.......”
주저 없이 접속을 끊고 캐릭터를 시스템에 집어넣은 그는 하늘로 높이 올라가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저기가 캠프인가본데....”
그곳에서부터 수백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나지막한 구릉이 있었다.
그 위로 딱히 건물이 솟아오르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곳이 캠프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그 구릉 바닥 곳곳에 차리한 강철판 같은 것들이었다.
‘지상은 간이 막사 같은 게 있고, 지하에 비상용 벙커가 있다고 했었지.’
지상에 있던 시설들은 사라져버렸다.
곳곳에 약간의 잔해들이 남아있긴 하지만, 그것에서부터 원래의 캠프 모습을 짐작해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구출 못 하겠는데?’
각성자라면 그냥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
지금 벙커 안에 있을, 아니 있을 지도 모를 조난자들은 모두 비각성자들이라는 이야기다.
‘아니지.’
현장 책임자라거나 하는 몇몇 각성자가 그들을 보호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일부러 떠나지 않고 남은 이들이 있었다고 하니까.
‘그런데 저걸 어떻게 뚫고 가냐고.’
지금 땅 위에 돌아다니는 것들.
그곳엔 사자 정도 크기를 가진 이족보행 파충류들이 즐비했다. 얼핏 보면 벨로시랩터라는 공룡을 연상케 하는 모양새였다.
게다가 숫자가 장난이 아니었다.
포위망을 벗어나자면 일단 이목을 피하고 그 사이를 뚫어야 하는데, 그럴 만한 틈 자체가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바글바글했다.
‘침착하자.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야.’
길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
‘놈들의 이목을 끌어서 다른 곳으로 유도하면 되나.’
이목을 끄는 건 어렵지 않다.
그의 캐릭터를 하나씩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는 식으로 혼란을 주거나 유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정답이 될 수는 없다.
현장에서 벗어나는 것만 문제가 아니라, 그 이후에 다른 캠프까지 가는 것까지 생각해야 하니까.
‘가장 가까운 방어 캠프까지는 걸어서 하루 이상 가야 한다고 했었지. 그것까지 생각해봐야 돼.’
캠프라는 곳은 ‘세계 간의 틈’ 인근에 구축된다고 했었다. 그곳을 이용해 양쪽 세상을 오가기도 하고, 또한 그곳을 통해서 몬스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도 한다고.
하지만 이곳의 틈은 사라졌다.
원래 틈이라는 게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이 보통이긴 하지만, 그들이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막힌 탓에 이런 사고가 벌어진 것이다.
‘근데, 여기가 한국이 맞나?’
원래의 지구와 같은 장소가 일대일로 이어진다고 듣긴 했는데, 주위는 온통 초원 뿐이었다.
아무래도 이쪽 세상이 원래의 지구와 많이 달라지긴 한 모양이었다.
푸쓩!
그 때였다.
어디선가 들려온 날카로운 소리에 이어, 벙커 인근에 있던 몬스터 하나가 옆으로 픽 쓰러졌다.
‘사람이 있다.’
잘 보이지 않았던 덮개 하나가 위로 살짝 열려있다가 막 닫히는 것이 보였다.
그 안에서 뭔가를 발사한 모양이다.
쓰러진 몬스터는 잠시 버둥거리더니 동작이 서서히 줄어들어 결국 멎었다.
“......?”
하지만 그 직후.
지금 막 죽은 몬스터 위로 떠오른 것이 있었다. 분명 전에도 본 적 있는, 반짝거리는 아이콘.
[접속 시도 가능]
김태훈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잠깐만. 몬스터도 접속이 된다고?’
잘못 본 건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정말로 몬스터 사체 위로 ‘접속 시도 가능’ 아이콘이 떠있었다. 시도 제한 시간도 함께 말이다.
‘5분 남았네.’
5분 안에 접속해서 소유하지 않으면 그냥 시체가 되어버린다는 뜻이다. 이미 겪어봤다.
‘어쩌지?’
일단 갖고 싶긴 하다.
몬스터가 되어 살아보고 싶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단지 몬스터가 무엇을 갖고 있을까 궁금했다.
혹시라도 다른 캐릭터들이 활용할 수 있는, 공유할 수 있는 뭔가가 있는 것 아닐까?
‘문제는 가격인데.’
몬스터 사체 자체는 공짜다.
하지만 그것을 가지려면 결국 캐릭터 슬롯 한 칸이 더 필요하다.
베르탈을 넣었던 두 번째 슬롯은 500포인트를 주고 구매한 것이었지만, 그 다음 슬롯은 열 배 가격인 5천 포인트가 필요하다.
‘칸을 비우는 건 가능한데....’
정 뭣하면 베르탈이나 김태훈 캐릭터를 버리고 새 캐릭터로 교체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자신의 원래 몸을 버리는 건 좀 아닌 것 같았고, 베르탈의 몸은 지금 버리기엔 잠재력이 많았다.
‘돈은 문제가 아니지.’
이미 피닉스 클랜으로부터 의뢰 선금 5억원을 받았다. 그것으로 환전하면 5천 포인트는 만들고도 남는다. 돌려주지 않아도 되는 돈이니 아까울 것도 없다.
문제는 과연 새 캐릭터 슬롯을 구매하는 것이 3억 5천만원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여부다.
‘가치 있어.’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지금 저 몬스터를 캐릭터로 추가하는 것과 별개로, 포인트가 있다면 무조건 슬롯을 늘리는 것이 좋다는 것이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가급적 좋은 몸뚱이가 좋겠지만, 무엇을 갖든 공유되는 게 있으니까.’
몬스터에게도 나름의 에너지는 존재한다.
그 몸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는 마나가 될 수도 있고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
아무튼 그 에너지의 종류가 무엇이든간에, ‘돌려막기’ 스킬이 적용될 것이다.
그러니까 캐릭터를 늘리면 늘릴수록 좋다. 모든 캐릭터를 동시에 접속하는 것이 아닌 이상, 한 캐릭터에 에너지나 접속시간을 몰아줄 수 있다.
“.......”
김태훈은 몬스터의 사체로 접근, 상세한 상태 내역을 확인했다.
[이름 : 없음]
[종족 : 케라틀]
[나이 : 3]
[현재 상태 : 사망 직후(사망원인 : 뇌 손상)]
[접속을 시도하시겠습니까?]
[접속을 위해선 신체 복구가 필요합니다]
[남은 시간 : 2분 42초]
[복구 및 소유권 확보에 필요한 포인트 : 28]
의외로 복구 비용이 저렴했다.
슬롯 가격 자체가 비싸긴 하지만 그것은 캐릭터와는 상관 없는 값이니까 논외고.
‘지르자.’
김태훈은 얼른 움직였다.
일단 몬스터들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이동하여 캐릭터를 꺼낸 후, 휴대폰을 꺼내어 어플리케이션을 실행했다.
현재 그가 갖고 있는 포인트는 5천이 안 되었다. 하여 그렇게 계좌와 연동시켜둔 것에서 환전을 해야 했다.
포인트나 캐쉬를 원화로 바꿀 때와는 좀 달랐다. 그와 반대로 원화를 캐쉬로 환전하는 건 별다른 딜레이 없이 금방금방 되었다.
아마도 그만큼 현금을 만들려는 각성자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남들하고 반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살짝 찜찜하긴 했지만, 생각이 달라지진 않았다.
‘하는 김에 넉넉하게 하자.’
6천 포인트 정도를 확보한 그는 캐릭터 슬롯 한 칸을 새로 뚫었다.
그 후 꺼내두었던 몸을 다시금 집어넣고 나서 얼른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니, 접속 시도 가능 시간이 1분 안쪽으로 줄어있었다.
[포인트를 지불하였습니다]
[해당 캐릭터가 복구되었습니다]
[세 번째 캐릭터를 확보하였습니다]
[업적에 따른 보상이 지급됩니다]
-1000포인트
[기본 데이터 열람 및 최적화를 시작합니다]
[최적화 완료 후 접속이 가능합니다]
‘와... 업적 보상이 크네.’
새로운 캐릭터 확보에 대한 보상은 처음으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새로 얻을 때마다 늘어나는 모양이었다.
다만 슬롯을 새로 뚫지 않고, 즉 기존의 캐릭터를 버리고 다른 것으로 갈아타도 그런 업적이 이어지는지 궁금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확인해봐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던 김태훈은 베르탈의 몸을 얻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케라틀’ 이라는 종의 몬스터가 갖고 있던 지난 3년 동안의 기억을 고스란히 넘겨받았다.
‘이게 거의 다 자란 거였구만.’
해당 종의 수명은 10년에서 길면 15년.
하지만 그 수명을 다 채우고 제 명에 죽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보통 5년에서 7년 사이에 죽는 것 같았다.
죽음의 원인은 신체적인 노쇠함. 혹은 사냥이나 싸움 도중에 입은 부상 등등.
해당 종은 동족끼리도 잡아먹기 때문에, 스스로를 지킬 수 없으면 결국 죽는 것이 수순이었다.
‘다행히 약한 놈은 아닌 것 같고.’
벙커 인근에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전방에서 나서던 놈이라는 뜻이다.
녀석의 기억 속에는 온갖 사냥 경험과 동족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았던 경험들이 있었다.
‘앞발은 강력하긴 한데, 짧아서 거의 못 써먹네.’
발톱이 아무리 날카롭다고 해도 일단 닿아야 할퀴든 꼬집든 할 것이다.
그러니 역시 쓸만한 건 이빨.
그리고 그것을 활용하는 강인한 턱.
물론 굵고 단단한 뒷발이 있기에 빠른 이동이 가능하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베르탈이 숲에서 활동하기 좋다면, 이 몸은 이런 평원 같은 평지에서 사용하기 좋겠네.’
유체를 활용하지 못한다고 가정한다면, 그런 식의 이용이 효율적일 것이다. 물론 지금의 그에겐 별로 의미 없는 일이긴 하지만, 따져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일단 겪어보자.’
- 작가의말
항상 고맙습니다.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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