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서 본 마지막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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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규보성인
작품등록일 :
2017.08.17 16:13
최근연재일 :
2018.02.17 13:56
연재수 :
8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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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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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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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6,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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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23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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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제58화 운명이었다구요!

DUMMY

서영은 형오 옆에 무릎을 세우고 쭈그리고 앉아 그녀의 아버지가 형오에게 띠라준 소주잔을 목이 마른 낙타처럼 소주잔을 대신 비우고 있었다. 제 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망연자실한 채 소주를 마셨다.


" 민선, 민채, 민오 저 아이들한테 못할 짓을 해놓고 나한테 적당한 남자를 골라 시집이나 가라는 것이 아버지 뜻이잖아요?"


이번에는 한일우, 서영의 아버지가 소주잔을 들어 한번에 맑은 액체를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이 부녀지간에 깨트려지지 않을 얼음같은 담벼락이 가로막고 있는 걸까?


"난 아직도 모르겠다. 니 말대로 내가 그렇게 죽어도 시원찮을 잘못을 저지른 것인지...그걸 잘 모르겠어. 옛말에도 있잖니... 산사람은 살아야 한다고...박세익을 그렇게 보내고 나서 밤이면 밤마다 난 피범벅이 된 박세익을 만나는 악몽에 시달렸다. 괴로웠다고! 미칠 듯이...나도 괴로웠었다고..."


"그랬겠죠. 아버지도 사람이니까...인두껍을 뒤집어쓴 사람이 그 정도도 괴로워 하지 않았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죠. 박세익과장님의 부인이 남편의 장례를 치뤄내기도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도 아버지는 저 아이들을 소리소문없이 고아원으로 보낼 생각만 했어요. 혹여나 아이들을 떠맡게 될까봐서...아이들을 내버려 둔 채 목숨을 끊은 애들 엄마를 한없이 원망하면서 말에요.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랬을까 이런 생각은 해보지도 않고... "


“어떻게 애들 엄마라는 사람이 애들을 셋이나 내버려 둔 채로 죽을 수가 있어? 그런 무책임한 사람이 어디 있냐고?”


“이 애들을 고아로 만든 아버지한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요?”


“제발...제발 좀 그만 하라고...”


표독스럽게 변해버린 딸의 눈길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한일우회장은 하던 말의 끝을 얼버무린 채 연거푸 소주만을 들이켰다. 그리고 누구라도 들으라는 듯 독백을 했다.


"후후후...여보 마누라...박현숙씨... 어쩌다가 내 인생이 이리 되었노! 후후후..."


그는 강하구의 갈대밭에 부는 바람처럼 그지없이 처량한 모습이 되어 액자 속에서 말없이 웃고 있는 비비안리만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빈잔에 소주를 채웠다.


"아버님, 제가 한잔 올리겠습니다. 받으세요."


한일우는 자신이 자작한 잔을 비우고 말없이 형우에게 빈잔을 내밀었다. 한일우 자신뿐만이 아니라 죽은 아내도 아이들을 거두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입장이었다. 혹여라도 나중에 서영이 결혼을 하는데 짐이 될까봐서 그리한 것인데, 결국은 서영이 아이들을 떠앉는 것으로 끝끝내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자네...서영이와 결혼을 한다구? 저 고집불통 미련퉁이를 자네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한일우는 담박에 술잔을 비우고 다시 잔을 형오에서 내밀어 거기에 가득 소주를 채웠다.


“저는 사람들이 말하는 운명이라는 것을 전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살면서 가만 생각해보니 운명이라는 것이 있기는 있더라구요. 드라마처럼 되는 놈한테는 운명이라는 놈이 기적처럼 다가오고, 매사 인생이 꼬이는...안 될려는 놈한테는 운명이라는 놈이 빚쟁이처럼 다가옵니다. 거기에다 요 운명이라는 놈이 사람을 힘들게 할 때에는 저당잡힐 때 온 집안에 붙이는 빨간 딱지처럼 필연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오지 않습니까? 아버님... 여기 민선이 민채 민오가 서영이한테 운명이었습니다. 저한테는 은인이지만 말입니다.”


“뭐? 이 애들이 자네의 은인이라고? 듣다듣다 별 해괴망칙한 얘길 다 듣겠구만... 이 혹들이 왜 자네한테 은인이야?”


형오는 우선 잔을 들어 목마른 낙타처럼 벌컥하고 소주를 들이킨 후에야 말을 이어나갔다.


“만약에 말입니다. 서영이가 아버님 어머님 소원대로 대충 조건 맞춰서 시집이라도 가버렸다면 제가 이렇게 서영이를 다시 만났 수 있었을까요? 결혼도 안하고 부동산 사업한답시고 혼자 떠도는 내내 저 역시 수없이 많은 여자들을 만났었고 몇 번인가는 그 인연 중에 결혼도 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남자인 저도 그랬는데... 서영이는 오죽했을까요! 서영이한테 이 애들이 옆에 없었다면 세상 남자들이 이렇게 어여쁜 여자를 가만 놔 뒀을까요? 그래서 이 세 아이들이 저한테는 서영과 제가 재회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도움을 준 제 은인이라는 겁니다. 하하하...아버님 제 말에 일리가 있지 않습니까? 하하하 ”


“흠흠... 그러게. 듣고보니...틀린 얘기는 아니구만! 제법 이치에 맞는 얘기야. 근데 말야...아니 도대체 자네는 서영이하고 어떤 관계였길래 장가도 안가고 저 미련퉁이를 20년간이나 묵혀놨다 못 잊고 다시 찾게 된거야? 저 미련퉁이 말고도 세상에는 똑똑하고 젊고 예쁜 여자들이 넘쳐나는데...”


서영과 형오 간에 있었던 러브스토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한일우회장은 20여년만에 다시재회했다는 형오의 얘기를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걸 물어보았다.


“서영이하고는 대학교 2학년 때 국어국문학과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뭐야? 그럼 서영이하고 같은 학교 같은과 동기였어?”

형오는 한일우가 자신에게 서영과 같은 학교 같은 과 동기가 아니냐고 물어오자 그는 온몸으로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저는 법대생이었고요. 그 당시는 법보다 소설이 좋아서 소설이란 걸 한번 써보고 싶어서 국어국문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하게 되었던 겁니다. 아무래도 그때 운명이란 게 저와 서영이와의 만남을 주선해 주려고 뜸금없이 국문학과를 부전공으로 선택하게 만든 거 같습니다. 그렇게 서영이를 만나게 되었는데... 후후훗! 이 여자를 보자마자 첫눈에 제 눈에 콩깍지가 씌여버리고 말았습니다. 처음부터 제가 서영이를 많이 좋아했더랬습니다. ”


“끄응...! 저 미련퉁이한테 뭐 볼게 있다고...”


“전 압니다. 뭐라 말씀하셔도 아버님께서 서영이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시는지...서영이를 아무 남자한테나 시집보내기 싫으셔서 아이들을 서영이가 떠안겠다는 것도 반대하셨구요 저는...알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저하고 서영이하고 처음 사귀었을 당시에도 대통령 후보감이라던 김영석 의원의 며느리로 서영이를 그 집에 들이려 하셨던 것도 다 같은 마음때매 그러셨던 거 아닙니까! 하하하! 아무튼 그때는 국문과 학회실에 다소곳하게 앉아있던 서영이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었습니다. 다가가서 말 한마디 걸지 못하고 저 혼자 속앓이를 하면서...그런데 그때 저만 혼자 이 여자를 좋아했었던 게 아니었나 봅니다. 서영이도 제가 좋았던지 우연히 만난 우리는 2학년 겨울방학 땐가부터 본격적으로 사귀게 되었던 겁니다.”


지금껏 몰랐었던 형오와 서영이의 연애사가 재미있고 그 후의 이야기까지 궁금해 졌는지...한일우회장의 눈망울이 말게 개이면서...아니 눈에서 살짝 흥분했을 때 떠오르는 호기로움같은 감정까지 내비치면서 그는 서커스단의 어릿광대 앞에 선 아이처럼 뚫어져라 형오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불현 듯 뭔가가 뇌리를 스치고 지났는지 형오에게 큰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좋아했다면 그때 왜 서영이를 잡지 못했나? 왜 헤어졌었냐고? 응!”


“서영이하고 헤어지게 된 건 우선 저한테 책임이 있지만 아버님 어머님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십니다.”


“나하고 서영이 엄마한테 책임이 있다? 그건 또 뭔 소리야?”


형오는 답답헸다. 당신께서 김은호한테 서영이를 시집보내지 못해 안달을 했으면서 까마귀 고기를 구워잡순 것처럼 그런 기억은 전당포에나 가서 찾으라는 식으로 나 몰라라 하니...형오는 당시를 추억하면 할수록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아버님...김 은 호라는 이름 혹시 기억나시나요?”


“김은호? 아아이! 그놈의 새끼를...갈아 마셔도 속이 시원찮을 놈인데...그 놈은 내 속을 칼로 난도질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검붉게 부어오른 내 속에 고춧가루를 뿌린 놈이야. 어떻게 내 그놈의 이름을 잊을 수가 있겠어?”


“서영이가 그 김은호와 결혼하기 싫어서 저한테 와 섬에 가자고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서영이하고 단 둘이서 서해의 작은 섬 속으로 여행을 갔었는데... 서영이는 그때 저한테 영원히 단둘이서 그 섬에서 숨어살면 안 되냐고 애원하듯이 넋두리를 했었지요. 그땐 서영이의 마음을 제가 헤아리지 못하고...쯧! 아버님이 김은호와 서영이를 부부로 엮으려 했기 때문에 그랬단 말입니다. 돌이켜 보면 섬으로 떠나는 밀월여행 중에 이 여자 참 많이 힘들어 했었습니다.”


“그랬다고... 내가?”


“네 아버님... 그래서 김은호 집안이 아버님한테만 원수가 아니고 저한테도 원수인 겁니다.”


“그랬단 말이지...허어!”


한일우회장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 가운데 가장 가혹한 시절이 형오 자신과도 관련이 있다고 말하며 그 당시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상기시키자 트라우마처럼 멍한 눈길이 되어 서영이와 형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물론 망연자실한 눈길 속에 형오와 서영이에게 보내는 미안함이 서려 있었다.


“이해는 합니다. 제가 그 입장이었더라도 충분히 그랬을 테니까요. 하지만 아버님...여기까집니다. 더 이상 어머님께서 돌아가시게 된 것이 서영이 때문이라고 덮어씌우시는 것도 이제부터는 안 됩니다. 서영이는 아버님이 박세익 과장 가족에게 저지른 잘못을 대신 뒤집어 쓴 죄밖에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도가니처럼 서영이를 옭죄었고 거기다가 첫사랑까지 잘못 만나 세상의 온갖 홀대를 견뎌야 했던 여잡니다. 혼자 말없이 십자가를 짊어질 수 밖에 없었던 이 여자한테 무슨 잘못이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서영이는 제 여자입니다. 그 누구도 제가 있는 한 이 여자를 힘들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아버님께서도 서영이한테 말씀을 좀 삼가 주세요. 미련퉁이... 병신같은 년... 바보같은 년... 이런 따위의 말씀은 이제 하시면 안됩니다. 부탁드립니다.”


“끄으응! 알겠네... 내 미안허이.”


잠자코 형오의 옆에 앉아있던 서영의 눈에서 닭똥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민선, 민채, 민오 세 아이들을 품안으로 끌어당겨 안으며 여름날 장마철같은 울음을 울었다. 한일우는 멋쩍었는지...그런 서영을 애써 외면하면서 형오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래...그러지 뭐! 그건 그렇고 저 애들을 어찌할 건가? 저 애들 저 미련퉁이...아아니 말이 또 헛나왔네...헤헤헤 미안허이. 저 아이들이 지금 서영이 호적 아래로 들어가 있단 말이지. 자네...그건 알고 있나?”


“아뇨...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실 거 없으십니다. 혼인신고 하자마자 민선이 민채 민오를 제 아이들로 입적시킬 겁니다. 아니 민선이, 민채, 민오는 이미 제 아들 딸입니다. 서영이가 가슴으로 낳은 아이들 아닙니까! 저한테는 은혜같은 아이들이구요. 잘 키울꺼고 듬뿍 사랑을 줄 겁니다. 그러니 아버님도 이 애들의 외할아버지가 되어주세요. 아마도 장모님께서도 하늘나라라에서 그러시겠다고 약속하실 겁니다. ”


형오가 아이들을 입양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자 한일우회장은 부아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괜한 짜증으로 형오에게 볼멘소리를 내었다.


“끄응...!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아버님...장모님...이란 말이 잘도 나오는 구만. 끄으응...!”


한일우회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은 채로 세 아이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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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제80화 심판 18.02.17 253 4 11쪽
79 제79화 뿌린대로 거두리라. 18.02.13 242 2 15쪽
78 제78화 외줄타기 18.02.11 199 2 11쪽
77 제77화 그렇게 쉽게 당하지는 않아 18.02.09 196 2 12쪽
76 제76화 서영 집에 돌아오다 +1 18.02.06 246 2 13쪽
75 제75화 담판을 짓다. 18.02.02 176 2 12쪽
74 제74화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 +2 18.02.01 207 2 16쪽
73 제73화 자식까지도 잡아먹을 인간. 18.01.30 410 2 18쪽
72 제72화 제72화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18.01.27 190 2 11쪽
71 제71화 비자금 18.01.25 620 2 9쪽
70 제70화 급소를 물리고 요동을 치다 +1 18.01.23 215 2 11쪽
69 제69화 올가미 +2 18.01.18 219 2 13쪽
68 제68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2 18.01.16 196 2 8쪽
67 제67화 추행 +2 18.01.13 196 2 8쪽
66 제66화 금고를 털어라! 18.01.11 171 2 11쪽
65 제65화 손님 +2 18.01.09 198 2 13쪽
64 제64화 적과의 동침 18.01.06 197 2 14쪽
63 제63화 너는 대한민국 검찰이야! +2 18.01.04 583 2 15쪽
62 제62화 미끼 18.01.02 195 2 13쪽
61 제61화 라이벌보다 친구가 좋아 +2 17.12.30 700 2 12쪽
60 제60화 그녀를 만나다. 17.12.28 219 2 10쪽
59 제59화 미치지 않으면 얻어먹을 게 없다구! 17.12.26 184 2 10쪽
» 제58화 운명이었다구요! 17.12.23 221 2 12쪽
57 제57화 숨겨왔던 이야기들2. 17.12.21 228 4 12쪽
56 제56화 숨겨왔던 이야기들 +2 17.12.19 224 2 16쪽
55 제55화 축포로 쓸 탄알들 +4 17.12.05 365 3 14쪽
54 제54화 잊혀진 계절! 잊혀진남자. 17.12.04 237 1 12쪽
53 제53화 허락을 받아야 할 사람이 둘이었네! +2 17.12.01 410 2 11쪽
52 제52화 행복 17.11.28 389 2 11쪽
51 제 51화 크리스마스 선물 17.11.24 253 2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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