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황제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완결

Nu.T
작품등록일 :
2017.08.31 23:24
최근연재일 :
2019.07.22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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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14 0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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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109. 밖을 알고 싶네

DUMMY

신분도 직위도 초월하는, 새로운 커플의 탄생과는 별개로 시간을 착실하게 흘러갔다.


화창한 날씨만큼이나 소풍 나가기 좋은 날.


이리아나의 주도하에 별궁의 정원 한켠에서 식사라는 핑계를 댄 여성들의 모임이 개최되었다.


아름드리나무 그늘 아래에 테이블이나 의자가 아닌 돗자리를 깔아 신분에 상관없이 둥글게 앉았다.


나무그늘 덕분에 양산을 쓸 필요도 없었고 돗자리 아래 잔디가 푹신한 쿠션감을 더해주었다.


선선하게 부는 바람은 한낮의 열기를 지워주면서 그야말로 최상의 분위기로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이곳은 어디까지나 황궁에 속한 별궁에 있는 정원!


황궁 내에서 단순한 도시락을 먹는다는 건 결코 황궁 총주방장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나도 완벽한 소풍의 분위기를 코스요리로 망치는 것도 멍청한 짓이었다.


해서 타협안으로 나온 것이 무려 17단 초호화 도시락이었다.


돗자리 위에 다 같이 앉아 도시락을 펼쳐놓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취지에도 딱 맞는 한 편 실력을 아끼지 않은 황궁 주방의 작품은 하나하나가 먹기 아까울 지경이었다.


이곳까지 옮겨온 시녀들의 솜씨도 감탄할 정도로 도시락 안에 있는 내용물들 중 흐트러진 것 하나 없이 깔끔하기까지 했다.


거기다 플레이팅 하나하나에도 꼼꼼히 신경을 써줬는지 화사한 색들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맛에 있어서도 타협하지 않은 덕분에 참석한 모두가 만족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면면을 살피던 이리아나는 유난히 움직이지 않는 아르시엘의 손을 발견했다.


도대체 먹은 음식이 어디로 사라지는지 궁금할 정도인 리버티와 쌍벽을 이루는 대식가인 그녀였다.


입맛은 오히려 황제인 리버티보다 더 까다롭지만, 가는 허리와 자신감 넘치는 흉부는 모든 여성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그녀였는데... 오늘은 이리아나의 절반도 먹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어두운 표정과 분위기는 주최자로써 나서기에 충분한 이유였다.


일단 말을 걸기 전, 빠르게 그녀를 훑어봤다.


특별한 상처가 없는 것으로 봐선 외상적인 이유로 인한 식욕부진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뭔가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아르시엘에 대해 잘 아는 만큼 바로 제외되었다.


그렇게 되니 예상되는 경우의 수는 딱 두 가지.


건강에 이상이 생겼거나 심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보통 이럴 때는 깊게 참견하지 않는 것이 예의였다.


그러나 상대는 아르시엘이었다.


자신의 사촌이자 현 황제인 리버티의 황후에 가장 가까울지도 모르는 여성!


그런 그녀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이리아나도 곤란했다.


그러니 신속하게 이유를 파악하고 오지랖으로 보여도 해결을 위해 나서기로 했다.


“우르엘 각하께선 뭔가 근심이 있으신가요?”


“아, 예... 대단한 건 아닙니다만, 조금...”


조금이라는 부분은 작아지는 목소리 만큼이나 신뢰도가 떨어졌다.


결론은 근심이 있다는 것!


잠시 최근에 들었던 소식들을 종합한 결과 이리아나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다.


저 근심의 원인은 리버티다!


다른 어떤 일에도 무덤덤한 것으로 유명하며, 사업도 잘 되고 감사부 일도 빠르게 진행되는데 심란해져 입맛이 뚝 떨어질 정도라면 그것밖에 없었다.


아르시엘이 유일하게 다양한 감정 반응을 보이는 것도 리버티와 관련된 일 뿐이니 더더욱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추측은 반은 정답이었다.


어쨌든 리버티와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는...


“혹시 하시는 일이 힘드셔서 그런 거라면 폐하께 부담을 줄여주실 수 있는지 간청드려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전보다 일이 줄고 폐하께서 든든히 받쳐주셔서 편합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으니 일단 대외적인 부분부터 파고들었다.


현재 아르시엘이 진두지휘하는 특별 감사부는 재무부와 함께 리버티가 진행하는 일들의 중심지였다.


당연히 업무량도 많을 거라는 생각에 넌지시 꺼낸 제안이었지만, 바로 부정했다.


이건 이리아나도 당연히 납득했다.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그림자의 일에 대해 듣고 현재 그들의 보호를 받고 있는 만큼 서류 검토가 주류인 감사부 일은 아르시엘에게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닐 거라고 여긴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 더 깊게 들어갈 필요성이 있었는데 이 이상 사적인 부분으로 들어가려고 한다면 실례가 될 수 있었다.


다행히 현재 소풍이라는 테마 덕분에 편안한 분위기 속에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페닐린이 대화에 동참했다.


“그럼,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침울하세요?”


사실 조금 전 대화로 잘 하면 재무부도 업무 부담이 줄어들 기회가 아닐까 싶었다.


일단 페닐린도 재무부의 말단이지만 엄연한 관료였기에 하루에 처리하는 양이 어마무시했던 것이다.


그 외에도 이유가 있지만, 덕분에 결혼 준비 작업이 점점 늦어지고 있었다.


비록 아르시엘이 부정하면서 당장의 가능성은 사라졌지만, 이 자리는 기회나 다름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친분을 잘만 쌓는다면, 결혼 후 육아휴직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그녀의 질문은 이리아나에게 점수를 조금 따면서 대화를 계속되도록 만들어주었다.


“실은... 폐하께 실수를 하고 만 것 같아서...”


“...그, 그런가요?”


“헤에...”


심각하던 분위기와 별로 대단한 것 없는 실수라는 단어에 이리아나와 페닐린의 의욕이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반대로 이를 오히려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그룹도 존재했으니... 바로 솔레나와 카밀라였다.


“어머! 어쩌시다가...”


“혹시 무슨 일이 생기신 건가요?”


바로 어제 리버티가 수십 명의 기사들에게 내렸던 처벌을 떠나서 두 사람 다 그를 대하기에는 벽이 있었다.


솔레나에게 리버티는 여러 차례 도움을 준 은인이었다.


현재도 벨리나를 통해서 틈틈이 챙겨주고 있기에 고맙기는 하지만 살짝 어려운 게 사실이었다.


반면 카밀라는 유일한 보호막이었다.


어제의 경험으로 자신의 목숨이 풍전등화였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그 전까지 몰랐던 건 자신이 황궁에 눌러앉아 있었기 때문이라는 자각이 생기자 집주인인 리버티는 너무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거기다 폭탄처럼 떨어졌던 창과 수십 명의 기사들이 대응하지 못하고 당하는 광경은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봐버렸다.


때문에 카밀라가 리버티에게 갖는 감정은 솔레나의 고마움에서 오는 어색함이 아닌 공포와 필요성에서 오는 조심성이었다.


어쨌든 두 사람 모두 리버티와 아르시엘 사이에 트러블이 생겨 그 여파를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그녀들의 걱정은 완전히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그게... 최근 폐하의 주변에 이상한 시선들이 늘어난 것 같아서 예민해졌는지... 생리통이 유난히 심하게 와서 조금 심해서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바람에... 조금 냉담하게 대응해버렸습니다.”


“...”


“...”


걱정하던 마음을 배신으로 돌려받은 솔레나와 카밀라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스트레스로 인해 그날의 통증이 심해지는 경험은 그녀들도 경험해봤다.


하지만 그걸로 민감해진 감정을 남자에게 표출한다는 쪽으로는 경험이 전무했던 것이다.


“...전 또...”


“그 정도 가지고...”


반면 이미 한 번 기세가 꺾였던 페닐린과 이리아나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마치 뭘 그 정도 가지고 새삼스럽게 그렇냐는 반응과 귀여운 아카데미 신입생을 바라보는 졸업생 같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두 사람에게서는 도저히 감출 수 없는 고참의 여유가 보였다.


어쩐지 용기내서 한 말에 대한 반응이 이렇다 할 법한 게 없자 당황스러운 건 오히려 아르시엘이었다.


차라리 별거 아니라면서 괜찮다고 위로한다면 무난히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뭔가 부럽다는 시선도 섞인 인자한 눈빛은 뭔가 넘어가기 애매했다.


“하지만, 그것만이 이유도 아니라서... 실은 어제 폐하께서 왕녀님을 구하실 때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물론 폐하께서 나서셨기에 무난하게 해결된 일이었지만, 그게...”


“질투네요. 그거.”


“네, 질투에요. 확실하게.”


정확히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상황만 구구절절 늘어놓는 아르시엘의 말을 뚝 끊은 두 고참은 같은 결론을 내렸다.


질투.


물론 그 뜻은 아르시엘도 제대로 알고 있다.


오랫동안 리버티 곁에서 마음을 간직한 그녀이니 종종 경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여느 때와 달리 제어가 안 되어 실수했던 것에 심각했던 건데 이리아나와 페닐린의 오히려 부럽다는 시선이 더 짙어졌다.


반대로 솔레나와 카밀라의 표정은 장난하냐? 라고 묻고 싶은 듯 보였다.


도대체 왜 이런 반응이 계속되는지 알지 못한 아르시엘은 어제 자신으로 인해 리버티가 어떤 상태였는지까지 떠올리기 시작했다.


“하, 하지만 그것 때문에 폐하께서 기운이...”


“그 정도는 금방 익숙해져요.”


“맞아요. 남자들은 원래 그런 쪽으로는 둔해서 반복하다보면 적응해요.”


물론 금세 막혀버렸지만...


오늘 처음 제대로 한 자리에 앉게 된 사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합된 이리아나와 페닐린은 이대로는 평행선만 달릴 거라고 판단하고 자신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을 털어놨다.


“저도 관료가 된 뒤로 바빠져서 짜증을 부릴 때가 많았는데 처음에는 아스텐도 전전긍긍하면서 난리도 아니었는데 이제는 신경도 안 써요. 심지어 결혼 준비하는데 늦어놓고 한 귀로 듣고 흘리더라니까요!”


갑자기 최근 자신과 약혼자의 다툼을 털어놓은 페닐린에게 이리아나가 가세했다.


“맞아요. 저는 결혼준비를 황궁에서 전부 해주셨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건 아닌데 한 번도 먼저 찾아와주질 않더라고요. 한 번은 짜증을 부렸는데 처음엔 당황하다가 너무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대응하더라니까요? 그래놓고 첫날밤에 이상한 부탁이나 하고...”


마지막 뒷말은 목소리가 작아지면서 아르시엘만 얼핏 들었지만 제대로 전달되진 않았다.


뭔가 질투와는 핀트가 어긋난 고참들의 하소연이었지만, 결론은 같았다.


“남자들은 바보니까 그렇게 세세하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괜히 머리만 아파지니까 흘려넘겨요. 폐하니까 괜찮을 거예요.”


결론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아르시엘로써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게 살기는 없지만, 요 근래에 계속 폐하를 향하는 시선이 늘어나는 것 같은데 폐하는 전혀 눈치를 못 채시는 것 같고, 저는 경계할 수밖에 없으니까 신경은 쓰이고. 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은 부쩍 그런 쪽에 예민해진 것 같아서...”


“아마 그 시선은 착각이 아니라 진짜일 거예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나겠지만... 아마 폐하는 계속 모를 걸요.”


확신하는 이리아나의 눈빛에 설마 싶었다.


잠을 자다가도 살기를 감춘 암살자들의 기척을 10m밖에서도 감지하는 리버티였다.


자신도 느끼는 것을 그가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뭔가 아는 듯한 이리아나를 보고 있자니 찝찝함을 버릴 수가 없었다.


아르시엘의 표정을 읽은 그녀는 한 발 먼저 선수를 치고 들어왔다.


“폐하는 자신에게 향하는 이성의 호의에 상당히 둔하거든요. 각하도 경험해보셨을 것 아니에요?”


“...”


이리아나의 정확한 지적에 아르시엘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실제로 자신이 아무리 감정을 잘 숨겼다고 해도 함께 한 시간이 얼마나 긴데 새어나온 적이 없겠는가.


하지만 리버티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고, 어쩌면 지금도 제대로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그는 이성의 호의에 둔감했다.


그런데 갑자기 리버티의 둔감함과 자신이 느끼는 이상한 시선이 무슨 조합이란 말인가.


여전히 눈치를 채지 못한 게 표정에 그대로 들어나자 결국 페닐린이 접근 방법을 조금 바꿨다.


“폐하의 즉위 후로 황궁과 제국에서 가장 많이 바뀐 게 뭔지 아시나요?”


“그야 귀족세력의 위축 아닌가요?”


누가 감사부 아니랄까봐 대답도 그쪽으로 나왔다.


머리를 거치기는 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즉답이었으나 페닐린이 말하고자 하는 답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답을 내놓은 건 모든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드레나였다.


“그보다는 폐하의 평판과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더 크지 않나요?”


“엡시안 경의 말씀이 맞아요. 그 증거로 이번 2회차 관료시험 여성 응시자수가 제가 치룰 때의 세 배로 늘었다고 해요. 솔레나 영애의 사업 성공에 희망을 품고 사업을 시작한 여성분들도 증가했고요. 그렇게 될 수 있던 사회적 기반을 마련해주신 게 결국 폐하이니 즉위 초반에 뿌리셨던 피들과는 별도로 백성들의 평판과 신임이 높아졌어요.”


“그게 제가 느낀 시선과는 무슨 연관이...”


차근차근 이어지는 설명에도 아르시엘은 도저히 생각이 따라가지 못했다.


물론 그녀가 멍청한 건 아니었다.


단지 그런 방면으로는 완전 초짜인데다 오직 리버티와의 일만 떠올리다보니 생각의 폭이 좁아진 것이다.


보다 못한 드레나가 아예 정리까지 해주었다.


“하아~, 관료시험을 통과한 여성들이 자신의 은인과도 같은 폐하를 가까이에서 보면 어떻겠어요. 그것도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을 말이죠.”


“?!”


다른 어떤 말보다 마지막 말이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리버티는 누가 뭐라고 해도 제국 최고의 권력자였다.


거기다 꾸준한 운동 덕에 몸의 밸런스도 잘 잡혀있으며 황실 혈통 아니랄까봐 반론의 여지없는 미남이었다.


그를 동경하면서 관료시험을 보고 합격한 영애들 중에 그를 보고 흠모하지 않는 게 오히려 어려울 정도!


심지어 아직 황후 후보 경합은 진행 중이다.


그들 중에는 가문의 몰락으로 자격을 박탈당한 대귀족의 영애들을 보며 희망을 품은 자들도 있을지도 몰랐다.


“그럼 저는...”


“무의식중에 경쟁자들을 감지하신 거죠. 그리고 폐하께 그 감정을 표출했다는 건...”


“투정부리는 거라고 봐야겠죠?”


“@#$%!!”


페닐린의 마무리에 아르시엘은 격침되었다.


자신의 행동이 질투에서 나오는 투정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는 말에 부끄러워져 도저히 낯을 들 수가 없게 되었다.


여태 그 점을 자각하지 못한 점에서는 참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이 딱 맞는 한 쌍이었다.


그 와중에도 다른 일에는 무덤덤한 아르시엘이 리버티와 관련된 일에서는 점점 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게 너무 귀엽게 느껴졌다.


마음 같아서는 기왕 이렇게 된 거 좀 더 놀려서 다양한 반응을 보고 싶지만, 그랬다간 아르시엘의 얼굴이 터질 것 같았기에 주제를 일단락했다.


하지만 지금의 화제만 끝냈을 뿐.


아직 여자들끼리 모였을 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했다.


예를 들어 소보르그와 레일나의 그 후 이야기라든가.


예를 들어 신혼집 인테리어에 대해서라든가.


예를 들어 다음에도 이렇게 모이자는 의견이라든가.


하지만 도저히 얼굴을 들 수 없게 된 아르시엘은 어영부영 넘어가면서 정신을 차렸을 때는 특별 감사부로 복귀한 뒤였다.


자신의 책상을 손을 짚으며 정신을 추스린 아르시엘은 곧 못 보던 물건을 발견했다.


40cm정도 되는 길쭉한 형태에 리본으로 묶여있는 상자는 어떻게 봐도 선물상자였다.


다행히 수상한 게 아니라는 걸 알릴 의도인지 자필로 적은 카드가 떡하니 꽂혀있었다.


“혹시 폐하께서 다녀가셨나요?”


“네? 아뇨, 저는 계속 있었는데 아무도 안 오셨습니다.”


점심시간에 자리를 지키고 있던 비서에게 확인한 것과 달리 자신의 책상에 버젓이 놓여있는 선물상자를 다시 확인했다.


발신자를 밝히지 않았지만, 필적을 보면 분명 리버티였다.


단지 정면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몰래 들어왔다는 점이 신경 쓰였다.


남들의 시선을 피해 몰래 주고 가다니... 무슨 뜻이지?


평소라면 그저 업무에 필요한 증거인가 싶었겠지만, 조금 전까지 여자들끼리 연애이야기를 신나게 떠든 상태였다.


덕분에 뒤죽박죽 섞인 생각들로 인해 빠른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그런가요. 수고하셨어요. 가서 식사하고 오세요.”


“알겠습니다.”


자리를 지켜주느라 챙기지 못한 끼니를 해결하도록 비서를 내보내면서 혼자가 된 아르시엘은 조심스럽게 리본에 끼어있는 카드를 빼냈다.


[머리가 많이 긴 것 같아서...]


제대로 다 적지도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리버티가 주눅이 들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덕분에 아르시엘은 괜히 미안해졌다.


이렇게 된 이상 직접적으로 감사를 표하기보다는 선물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았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일단 내용물을 확인해야 했기에 조심스레 리본의 한쪽 끝을 잡아당겼다.


설령 어떤 이상한 물건이라도 기꺼이 사용하겠다는 각오를 다진 아르시엘은 조심스럽게 상자를 개봉했다.


그리고 마침내 안에 담긴 선물을 본 순간.


“?”


아르시엘의 머리 위로 ?가 생겼다.


*


만약 남자 셋이서만 하는 식사자리가 있다면 어떨까?


그것도 가족의 관계가 아니라 명백한 상하관계가 구분된 이들이라면?


심지어 어제 처음 만났는데 한 사람이 날뛰는 모습을 봤다면?


정답은 어색하다는 것이다.


어색함은 눈치를 낳고 눈치는 조심성을, 조심성은 결국 침묵으로 치환되었다.


달그락, 달그락.


최대한 조용히 하려고 했으나 눈치 없는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천둥처럼 식당을 채웠다.


그리고 초대한 사람도, 초대 받은 사람도 한 마디 대화 없이 디저트 차례가 되고 말았다.


정말로 식사 약속이 ‘식사만’ 먹고 끝날 것 같은 분위기!


그렇다고 바게르하나 소보르그가 먼저 입을 열 수는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나이를 제외하면 무조건 상급자인 리버티가 먼저 대화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정말로 식사만 할 생각은 아닌 리버티가 대화의 물고를 트였다.


“바게르하 공, 짐이 했던 부탁에 대해 생각해보았는가?”


바로 본론을 꺼내는 바람에 케익을 자르던 포크를 떨어뜨릴 뻔했지만, 다행히 노련한 상인인 바게르하는 금세 마음을 추스렸다.


어떻게 보면 압박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지만, 리버티의 눈빛에서는 순수한 질문이라는 게 잘 전달되었다.


덕분에 바게르하는 자신들의 결론을 짧게나마 전달할 수 있었다.


“예, 폐하. 허나, 소신들의 짧은 생각으로는 폐하의 의중을 다 파악하기 어려워 바로 결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원하시는 답변을 드리지 못해서 송구합니다.”


“아닐세. 오히려 바로 수락하겠다고 했다면 짐이 의심을 했을 테니까.”


평이한 어조였지만 까딱 잘못했다면 황제의 말에는 숨은 칼날이 있었다.


섣불리 결정했다면 자신의 신뢰가 떨어졌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충분히 신뢰감이 생긴 건지 리버티는 다시금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얼마 전에 북부와의 전쟁도 끝나고 조만간 교역문이 다시 열릴 걸세. 그렇게 되면 당연히 많은 상인들이 북부로 진출하여 활발한 거래를 이루겠지. 그리고 새로운 기술들이 들어오고 발전하면서 더 멀리 가고자 하는 이들이 생길거야. 하지만 새로운 교역로는 쉽게 생기는 게 아니라는 건 그대로 잘 알 걸세. 거기다 몇백 년이 넘도록 사막을 사이에 두고 교류가 없던 동방이야. 언어도 문자도 완전히 다르고, 서로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데 괜히 접촉하는 건 분란만 만드는 일이지. 그러니 짐은 사막을 오고가는 그대들이 소규모 교역을 맞음으로서 사막을 가로질러 두 세계를 잇는 가교가 되어주었으면 한다...는 게 공식적인 입장일세.”


마지막 어미에 의미심장한 표현을 덧붙인 리버티의 눈동자가 이채를 띄었다.


다행히 그의 말뜻은 바게르하 부자에게 잘 전달되었다.


“공식적이라고 하시면... 비공식적인 이유가 있으시다는 거군요.”


“맞아. 비공식, 이라기보다는 짐의 개인적인 목적이지.”


단신으로 10만 해군을 수장시키고 5배의 병력차를 압도한 황제의 목적.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대단할 것이라는 느낌이 왔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주었을 때 자신들에게 떨어질 황제의 총애 또한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머릿속에는 온갖 부정적인 단어들이 스쳐지나갔다.


전쟁, 침략 작업, 사전조사...


리버티가 뜸을 들일수록 점점 더 소보르그가 언급했던 최악의 미래를 떠올리게 하는 단어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러나 리버티의 답변을 이루는 단어는 단 하나도 포함되어있지 않았다.


“짐은 제국 밖을 알고 싶네.”


“예?”


어쩐지 어제 들었던 교역을 하고 싶다는 말과 비슷한 답변에 바게르하 부자는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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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169. 한 번 해봤으니까 19.04.12 277 2 19쪽
168 168. 제일 많이 할 테니까 19.04.08 283 2 17쪽
167 167. 나한테 전해져서... 19.04.05 271 2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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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157. 대공은... 모르겠네 19.03.01 301 2 17쪽
156 156. 제국의 큰 자산이니까요 19.02.25 311 2 18쪽
155 155. 작전을 제안하겠네 19.02.22 306 3 18쪽
154 154. 못하면 안 되잖아? 19.02.18 311 2 17쪽
153 153. 할 거라면 철저하게 19.02.15 300 2 17쪽
152 152. 니가 더 더러운데? 19.02.11 285 2 17쪽
151 151. 왜 막 밟고 난리야 19.02.08 277 2 19쪽
150 150. 적응 안 되게 19.02.04 289 2 18쪽
149 149. 왜 될 것 같지? 19.02.01 294 2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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