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마군단장 랭코르의 개인 기록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GP32
그림/삽화
시베리아인
작품등록일 :
2017.09.03 17:09
최근연재일 :
2019.03.17 18:00
연재수 :
89 회
조회수 :
71,912
추천수 :
378
글자수 :
482,918

작성
18.08.27 21:55
조회
465
추천
3
글자
8쪽

make believe (1)

DUMMY

make believe – 마군단장 랭코르의 개인 기록



1



“불편하지는 않아. 오히려 신경 쓸 게 없어서 한가하고 좋은걸.”


그녀는 내 앞에 유리병 속에 담긴 향초 하나를 부드럽게 내려놓으며 은은한 미소를 뗬다. 이토록 티 없고 걱정 없는 미소를 보는 건 천 년 만이었다.


“그래도 적응하기 좀 힘들지 않았어?”

“음... 수도꼭지가 없는 건 조금 불편하긴 해. 매일 물장수한테 물을 사서 주방 물동이에 채워놔야 하잖아. 요리할 때 일일이 불을 피워야 하는 것도 그렇고. 그쪽에선 그냥 가스 밸브 열고, 손잡이만 돌리면 됐는데.”


그래도 거기서 벗어나서 여기 있는 게 더 좋다고 덧붙인 그녀가 성냥불을 켜서 향초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향긋한 허브 향이 주변으로 천천히, 은은하게 번져갔다. 마치 지금 그녀가 짓고 있는 편안한 미소처럼.


“향기는... 맡을 수 있지?”


입김을 후 불어 성냥불을 끈 그녀가 살짝 걱정스러운 듯 어색한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고.


“응.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몸으로도 냄새 정도는 맡을 수 있더라고.”


사실 정말로 미스터리인 부분은 갑옷을 둘렀음에도 대략적인 촉감 정도는 느낀다는 거지만. 아마 내 영혼이 갑옷에 완전히 들러붙은 것이 아닐까. 그것만큼은 거의 확신의 영역이었다.


“다행이다. 당신 생각하면서 고른 향이거든. 지구에서 가져온 거야.”

“나를?”


나는 공기 중에 퍼진 달콤하고 상쾌한 향기를 느끼며 되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방긋 웃으면서 대답하는 것이었다.


“늘 달달하고... 상쾌했잖아. 답답한 내 속을 항상 어루만져줬는걸. 마치 이 애플민트처럼.”


수줍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기라도 한 양 볼을 살짝 붉힌 그녀를 바라보자 안타까운 마음이 스멀스멀 끓어올랐다. 가장 밝게 빛났어야 했을 젊은 시절을 통째로 날리고, 이제는 안쓰럽게도 세월의 흔적이 조금이나마 쌓여가고 있는 얼굴. 날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과는 달랐을까. 나도, 그녀도 서로 마주치지 않는 길을 걸으며 행복할 수 있었을까.


“지금도?”


삼천포로 빠지려는 마음을 간신히 추스르고서 짤막하게 물었다.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지금도.”


그녀는 기어코 답을 들려주었다. 내가 몹시도 듣고 싶었으면서도, 한편으론 별로 듣고 싶지 않았던 답을. 이제 나를 마음에서 멀리 밀어내도 되는데, 좋은 사람을 만나서 마음껏 행복하게 살아도 되는데.


“아닐 텐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점점 분위기가 부담스럽게 무르익어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아, 그러고 보니까... 이름을 바꿨다고 들었는데.”


어물쩍 다른 화제를 꺼내보았다.


“응, 맞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게 좋다잖아? 그래서 이름부터 여기서 쓰는 식으로 바꾸기로 했어. 여기 사람들이 발음하기 쉽게.”


그녀의 목에서 타오르는 불꽃처럼 빛나고 있는 커다란 루비 펜던트가 내 눈길을 끌었다. 통역 마법이 걸려 있는 아티팩트. 엘드리치 영감에게 부탁해서 만들어낸 물건이다. 목에 직접 걸어줬을 때, 내게서 처음으로 받은 보석 선물이라며 농을 건네던 그 모습이 떠올라 다시금 기분이 풀썩 가라앉았다.


“그래? 뭐로 바꿨어?”


내가 물어보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배시시 웃으면서 대답했다.


“후후, ‘지나’야. 앞으로는 지나라고 불러줘.”

“뭐야, 똑같잖아.”


그거 원래 이름에서 받침만 뒤쪽으로 뺀 거잖아. 도대체 다른 게 뭐냐고.


“똑같긴! 완전히 다르거든?”

“발음은 똑같으니까 거기서 거기지.”


내가 심드렁하게 말대꾸하자 그녀는 눈가를 살짝 찌푸리면서 찻잔을 정리했다. 아직 손님은 거의 없는 탓에 당연히 본인이 마신 찻잔이었다.


“그래, 이름은 그렇다 치고... 성씨는 어떻게 할 건데?”


나는 그녀에게서 잠시 눈을 떼고, 대신 가냘프게 타오르는 향초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맡으면 맡을수록 마음이 편안해지면서도 청량한 느낌이 드는 향이었다.


“성씨는... 생각해둔 건 딱히 없어. 날 데리고 오셨던 마법사님께 들었는데 평민은 성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말을 묘하게 흐렸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명백했다. 성을 쓰지 않겠다, 즉 평민으로 평범하게 살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포르티아의 사정이 워낙 좋지 못한지라 나로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평민 살기 힘든 건 어느 나라에 가도 마찬가지겠지만.


“그건 안 될 말이야. 평민은 절대로 안 돼. 일단 랭스 가문의 일원으로 소개를 해 둘 테니까 성씨는 당분간 그걸 쓰는 게 좋을 것 같아.”

“그, 그건... 나는...”

“여긴 귀족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야. 너도 재벌 가문에 속해 있었으니 잘 알겠지. 당장 너희 어머니부터... 크흠. 아무튼 여기 귀족들의 특권의식은 한국의 재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으니까... 평민 신분으로 지내는 건 별로 권하고 싶지 않아.”


나는 나직하지만 은근히 힘을 준 단호한 어조로 평민으로 살고 싶어 하는 그녀를 뜯어말렸다. 사실 ‘앙리 랭스 남작의 친척’이라는 신분도 딱히 좋은 편은 못 되긴 하지만, 그래도 아예 아무런 방패막이가 없는 평민보다야 훨씬 더 유리한 편이니까. 다른 곳이면 몰라도 왕도의 귀족 밀집 지구 중 하나인 여기에서 살고 싶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평범하게 살고 싶다면 평민이 되어서는 안 된다니, 참으로 불합리한 현실 아닌가.


“응, 알았어. 그렇게 할게. 그럼 난... 지나 랭스가 되는 건가?”


다행히 여러 번에 걸쳐서 설명과 설득을 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녀는 항상 책을 손에 들고 다니던 지적인 모습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마는.


“미들 네임을 붙이지 않는다면야...”

“훗, 지나 랭스라.”


새로이 얻은 이름을 입 속으로 몇 번 되뇌는 그녀의 모습이 창밖에서 흘러든 초저녁 노을에 물들어 아름답고 아련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바로 앞에 있는데도 손을 뻗으면 공기 중에 녹아들듯 사라져버릴 것만 같이 말이다. 그날, 찾아와서 꼭 안아줬던 그날에 그녀가 느꼈을 마음이 이와 같았을까.


“지나 랭스, 지나 랭스... 랭... 스...”


장미꽃과 같은 빛깔을 띤 입술 속에서 맴도는 아름다운 목소리, 창문턱을 넘고 들어와 온 방안을 붉게 물들인 노을, 그리고 점점 퍼져나가는 싱그럽고 상쾌한 향기. 너무나도 완벽해서 오히려 이 세상 것이 아닌 것만 같은 오후 한때가 그렇게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꿈이라면 차라리 깨지 않기를 바랄 정도로 완벽한 순간이.


“저기... 날 랭스 가문의 일원이라고 소개한다고 했잖아.”


하지만 완벽한 순간은 순간이기에 지상에 영원히 머무르지 못했고,


“응, 그랬지.”

“그럼 난... 몇 촌 친척이 되는 거야?”


그녀의 입에서 새어나온 말은 나를 잠시나마 멈칫하게 만들었다. 흠, 그건 아직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 갑자기 그건 왜?”


그래서 의자 등받이에 등을 쭉 기댄 채 대충 얼버무리며 지나가려고 했는데...


“아, 그냥... 이 나라에서 법적으로 결혼이 가능한 촌수가 어떻게 되나 싶어서.”


꽈당.


“... 뭐, 뭐라고?”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대가를 호되게 치르고야 말았다.




"Archfiend Legion Commander Rancor's Personal Record" by GP32,
All Rights Reserved.


작가의말

14장, 시작합니다. 13장 연재할 때 너무 달려서... 이번에는 좀 체력 안배를 해가며 천천히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마군단장 랭코르의 개인 기록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시즌 1 소장판 펀딩 안내 18.09.17 121 0 -
공지 수술로 인한 휴재 및 자유연재 전환 안내 18.02.10 195 0 -
공지 연재 주기 안내 17.09.10 280 0 -
89 Evolving Souls (5) 19.03.17 52 0 18쪽
88 Evolving Souls (4) 19.03.11 55 0 12쪽
87 Evolving Souls (3) 19.03.06 94 2 15쪽
86 Evolving Souls (2) 18.12.09 92 1 12쪽
85 Evolving Souls (1) 18.11.30 94 1 7쪽
84 EE: Emulated Emeth (시즌 1 完) +2 18.09.08 524 3 14쪽
83 make believe (Epilogue) 18.09.05 462 4 8쪽
82 make believe (7) 18.09.04 432 4 14쪽
81 make believe (6) 18.09.03 435 2 13쪽
80 make believe (5) 18.08.31 442 3 14쪽
79 make believe (4) 18.08.30 453 2 14쪽
78 make believe (3) 18.08.29 449 3 16쪽
77 make believe (2) 18.08.28 457 3 14쪽
» make believe (1) 18.08.27 466 3 8쪽
75 피의 신에게 바치는 공물 (Epilogue) 18.08.25 457 3 10쪽
74 피의 신에게 바치는 공물 (5) 18.08.24 483 3 14쪽
73 피의 신에게 바치는 공물 (4) 18.08.23 473 3 14쪽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GP32' 작가를 후원합니다!

  • 보유 골드: 0 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