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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군단장 랭코르의 개인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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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P32
그림/삽화
시베리아인
작품등록일 :
2017.09.03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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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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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8.28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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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쪽

make believe (2)

DUMMY

2



“어서 오시오, 랭스 경. 갑작스럽게 불렀는데도 이렇게 기꺼이 와 줘서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이다.”


시종장의 안내를 받아 알현실로 들어가자 자리에 앉아 있던 무르하드 국왕이 몸을 일으켜 나를 맞이했다. 오늘 아침, 내가 랭스 저택에 머무르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국왕이 먼저 전령을 보내 나를 궁으로 호출한 탓에 이렇게 급하게 입궁한 것이었다.


“과인은 지금부터 랭스 경과 내밀한 이야기를 할 것이오. 허니 그대는 이만 물러가시오.”

“하, 하오나, 전하...”

“그리 해 주시겠소? 랭스 경이 다른 마음을 품지 않는다는 것은 그대도 잘 알지 않소.”


국왕은 나를 여기까지 안내한 시종장을 바라보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퇴실을 명했다. 언제든지 나를 소환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계약자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굳이 이런 식으로 복잡한 절차를 밟는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비록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꼭두각시에 불과하긴 하나, 그래도 엄연히 한 나라의 국왕인 터라 홀로 남겨지는 시간이 거의 없었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차라리 신하인 ‘앙리 랭스 남작’을 궁으로 불러들여 독대를 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 나와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알겠사옵니다, 전하.”

“고맙소.”


시종장은 허리를 깊이 숙여 머리를 조아리고는 홀 전체에 발소리를 울리며 걸어 나갔다. 마침내 단 둘이 남겨지게 된 마족과 계약자. 마족은 문 쪽으로 몸을 휙 돌려서 손수 문단속을 철저히 했고, 계약자는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얼굴이 좀 핀 것 같군.”


나는 빈정대는 것인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말투로 먼저 운을 텄다. 따지고 보면 둘 다였다. 내가 준 돈으로 확실히 신세가 핀 것 같기는 했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왕실이 평소엔 꼭 필요한 지출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하기 그지없는 이 나라에 대고 빈정댄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대 덕분이오. 세자가 암살당할 걱정도 확실히 놓았고 자금 사정도 좋아졌으니까...”

“동궁에 암살자가 쳐들어왔다던가.”

“그렇소. 그대의 부하들이 전부 처리했소. 너무 순식간이라서 근위대가 도착하니 이미 상황이 끝난 지 한참 되었을 정도였지. 전부 단칼에 허리나 목을 끊어 죽인 탓에 배후를 캐내진 못했지만... 솔직히 너무 뻔한 일이니 그 점에는 별로 불만이 없소.”


세자를 노린 일단의 암살자가 동궁을 기습했다는 소식은 교대 근무를 마치고 랭스 저택으로 복귀한 죽음의 기사 중 하나가 보고한 탓에 대충 알고는 있었다. 잘 끝났다고 해서 굳이 캐묻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당사자의 입으로 직접 듣게 되니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순식간, 순식간이라. 그럴 만도 하지. 그 녀석들은 마계에서도 일당백의 전사들이니까 암살자 나부랭이 따위에게 질 리가 없잖아.


“이런 얘기나 하려고 부른 건 아닐 테고... 또 뭔가 부탁할 일이 있나?”


하지만 이렇게 곁다리에 불과한 얘기를 하는 동안에 어렵게 마련한 독대 시간이 손에 움켜쥔 모래알처럼 마구 흘러내리고 있었기에 슬슬 본론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얘기하고 싶었다만... 뭐 어쩔 수 없지. 나도 그렇게까지 한가한 몸은 아니니까.


“혹시 돈이 더 필요한 거라면 그렇게 어려워 할 필요는-”

“결단코 그건 아니오. 큰 지출은 모조리 몰아서 처리했으니까... 상황이 아주 좋다고는 말 못 하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큰돈이 필요하지도 않소. 흠흠, 이거 얘기가 다른 쪽으로 새었구려. 그게 아니라...”


돈 문제면 빨리빨리 이실직고하라는 내 말을 단칼에 끊어버린 국왕은 잠깐이지만 홀가분하다는 듯 편안하고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마와 눈가에 주름을 잡지 않고 있으니 생각보다 젊어 보이는 인상이구나, 그렇게 실없는 생각을 하던 나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에 다시금 귀를 기울였다.


“실은... 어제 저녁에 바실레우스 교단의 대주교가 은밀히 알현을 청하였소.”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되돌아가 말을 이어나가는 국왕.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바실레우스’ 라는 이름이 유독 귀에 쏙쏙 들어왔다. 화신(化身)으로 취한 형태가 하도 많아서 ‘천의 가면’이라는 이명으로 불리는 신이자, 쌍둥이 남동생들을 꼬드겨 아버지를 배반하고 부당하게 만신전의 왕좌를 차지했던 네이트 여신을 몰아낸 새로운 신. 중간계에는 그 내막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 아직도 유폐된 여신의 신관들이 한껏 거들먹대고 있었지만 마계에서는 지나가는 하급 마족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썩을 대로 썩은 여신의 신관들이 신성력을 점점 잃어가는 실태를 숨기며 연착륙을 위해 벌이는 짓거리들이 마족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단한 것들뿐인지라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으려 입을 다물고 있을 뿐.


“네이트 교단이 신성력의 행사를 요즘 유독 꺼리고 있는지라... 내심 바실레우스 교단과의 관계 진전을 바라고 있어서 늦은 시간이지만 알현 신청을 받아들였소. 헌데 그 내용이 상당히 충격적이라서 놀랐다오.”


고개를 살짝 숙인 그의 얼굴에 옅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까부터 짓고 있던 심각한 표정과 그림자가 어우러져서 얼핏 보면 사뭇 기괴한 그림이 되고 말았다.


“물론 왕궁 내에 필시 끄나풀이 있을 테니 대주교가 알현을 청했다는 사실은 이미 귀족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을 것이오. 허나 빠르게 행동하면 그들이 대응할 시간이 없을 터니...”


아, 그래서 대체 본론이 뭡니까. 급하면 제발 급한 사람답게 행동하세요, 계약자 씨.


“하고 싶은 말이 도대체 뭔가?”


그대로 놔뒀다간 투 머치 토커로 타락하고 말지도 모른다는 싸한 예감이 들어서 슬슬 제동을 걸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국왕은 다시 고개를 위로 쳐들며 약간 가라앉은 톤으로 말했다.


“아, 미안하오.”

“미안하면 빨리 말이나 해 봐라.”


그리고,


“... 수녀 한 명을... 사이프러스까지 호위해 줄 수 있겠소?”


부르튼 입술에서 새어나온 뜻밖의 말이,


“그게 무슨...”


내 고개를 일순간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바실레우스 교단의 대성전이 남부 왕실 직할령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보 정도는 나도 파악하고 있었다. 순례자들이 올라가다 지쳐서 포기할 정도로 높은 첩첩산중에 있다지, 아마?


“대성전의 접근성이 좋지 않지만 총대주교가 신탁을 받아 세웠기에 바꾸지는 못하고 3년이 흘렀소. 하지만 그 탓에 교세의 확장이 용이하지 못한지라 유동인구가 많고 번화한 곳에 제 2의 대성전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하오. 그래서 낙점된 곳이 3국의 국경이 마주하는 교역 도시인 사이프러스였고...”


국왕은 짧게 숨을 고르고 다음 말로 넘어갔다. 저 기나긴 말을 숨 한 번 제대로 안 쉬고 계속 이어 내려갔던 탓이었다.


“그래서 대성전에 있던 신물 중 하나인 황금 천칭을 오십여 명에 달하는 신관단이 호위하며 사이프러스 교구로 운반하던 중이었는데... 왕도 인근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의 습격을 받아 대부분이 전멸했다는 모양이오. 헌데 괴한들이 신관을 우선적으로 참살하고 짐을 뒤지던 탓에 틈이 생겼고, 그래서 마침 그날 당번을 맡아 성물을 갖고 있던 수녀가 간신히 달아나는 데 성공했소. 그 수녀는 어제 오전에 포르토스 대교구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하더이다. 정황상 성물을 노린 것이 아닌가 싶소만...”


이야기를 듣던 나는 성물을 챙겨서 달아났다는 그 수녀에게 경외감 비슷한 감정마저 느꼈다. 신관이 아니라 수도자라는 것은 신성력이 없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뜻인데, 신관들마저 괴한에게 모조리 죽어나가는 중에 그런 대담하고 용기 있는 생각을 하고, 결국 실천에 옮겨 성물을 지켜낸다? 보통의 의지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어제 저녁에 대주교가 찾아왔던 것이오. 교단의 역사가 짧아 성기사단이 빈약하여 이런 일이 생겼다면서... 왕실에서 기사단과 호위병을 지원해 주기를 희망한다 하였소.”


도대체 대주교라는 작자가 말이야, 자기가 몸담고 있는 나라의 기본적인 정세조차 파악을 못 하면 어쩌자는 건지. 아주 조금이라도 정치적 식견이 있거나, 최소한 뭔가 알아보려는 노력이라도 했으면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은가. 이 나라 왕실에 그럴 힘이 있을 턱이 없다는 것을. 이거야 원, 하루 종일 신전에 콕 박혀서 기도만 한 수준이잖아. 그게 성직자로서 올바른 자세이기는 한데... 그래도 대주교씩이나 되는 고위 성직자가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물론 왕실에 그만한 여유가 없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으리라고 보오. 허나 귀족들에게 맡기기엔... 습격 사건의 배후도 밝혀지지 않았던 터라 좋은 생각은 아니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겠지만, 기스 공작이 사주한 일일 수도 있지 않겠소.”

“흠...”


배후, 배후라. 짐작 가는 곳이 딱 하나 있었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거기밖에 없었다. 종교와 세속 권력은 어지간해선 서로 척을 지지 않으니까. 하지만 굳이 국왕에게 말해주지는 않았다. 나도 결국은 마족이니 말이다. 말해봤자 좋을 게 없잖아. 그 썩어빠진 녀석들 덕분에 가만히 있어도 마이너스 감정이 펑펑 솟아나는데.


“기스 공작은 아닐 거다.”

“사실 과인도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었소. 기스 공작이 아무리 안하무인이더라도 교단을 건드릴 정도는 아닐 테니까. 당장 본인이 병이라도 걸리면 신전에 신관을 보내달라고 호통을 칠 것 아니오.”


국왕은 다시 숨을 고르고는 탁자 위로 손을 뻗어 물이 담긴 은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한 나라의 지존인 그의 신분과는 어울리지 않는 은잔. 금잔을 써도 될 텐데 왜 하필 은잔일까. 부왕이 독에 당해 승하했던 탓일까, 아니면 단순히 왕실의 재정 형편이 어려운 탓일까.


“하지만 귀족 세력이 배후가 아니더라도 이 일을 귀족들에게 맡길 수는 없소. 왕실이 교단의 호의를 얻기 위해선... 반드시 왕실의 힘만으로 해결을 해야 하니 말이오. 귀족들에게 맡기면 잘 익은 알곡은 모두 사라지고, 텅 빈 쭉정이만 남게 되겠지...”


그는 고개를 다시 아래쪽으로 떨구며 한 많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것은 번진 연합이나 다름없는 나라에서 어렵사리 꼭두각시 왕 노릇을 하고 있는 남자의 조용한 절규였다. 단지 어지러운 나라에서 국왕의 맏아들로 태어난 죄, 그 죄 하나 때문에 온통 가시밭으로 점철된 지옥도를 묵묵히 걸어야 하는 자의 쓸쓸한 체념.


“과인은 결코 역도나 다름없는 귀족들에게 그 과실을 넘겨주고 싶지 않소.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오. 그래서...”


그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두 손으로 얼굴을 푹 감싼 채 고개를 축 늘어뜨릴 뿐. 국왕이기 때문에, 그리고 국왕이기 이전에 남자이기 때문에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 가슴 속은 마르지 않는 눈물과 절망으로 가득할 터였다. 가시 면류관이나 다름없는 왕관을 머리에 썼던 그날부터 쭉 그랬겠지.


“그래서 내가 그 수녀를 호위해주길 바라는 건가.”

“... 그렇소. 참 염치없지만.”


이제 공은 나에게로 넘어왔다.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염치없는 건 잘 아는군. 계약 조건에는 없는 내용인 것 같은데.”

“...”


매정하게 걷어찰 것인가.


“나, 증오와 분노의 군단장 랭코르는 그대, 포르티아의 국왕 무르하드 막 돔날 크레이그와 한 달에 금화 한 닢으로 계약했다. 그 대신 그대의 아들, 이 나라의 왕세자를 모든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지켜주기로 했지. 이게 우리가 맺은 계약이다. 이 조건 어디에도 성물을 들고 도망쳐온 수녀를 사이프러스까지 무사히 호위해야 한다는 내용은 없지 않나?”

“그건...”


계약까지 들먹이며 걷어차려는 기미를 보이자 국왕은 그대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입술을 질끈 깨문 그 모습이 처음 그를 만났던 날과 너무나도 닮아 있어서,


“... 그래도 못 해줄 거야 없지.”

“저, 정말이오? 정말 그리 해주겠소?”

“뭐... 그간 대금을 밀린 적은 없었으니까. 서비스라고 생각해라.”


결국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대신 공물을 추가로 준비했으면 한다. 신관 놈들한테도 안 들킬 정도로 마력을 숨기는 건 꽤 피곤한 일이니까... 위험수당 정도는 받아야겠지.”


사실 지금도 평범한 신관에게는 안 들킬 자신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대성전이 얽힌 일이니만큼 만전에 만전을 기해야 할 터였다. 사이프러스 교구가 현재 어느 정도 규모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평범한 녀석을 성물을 인수해갈 신관이랍시고 보낼 리는 없으니 말이다.


“... 알겠소. 얼마나 바치면 되는지, 대략적인 수준을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당장 큰 위기는 넘겼겠지만 여전히 암울한 왕실의 재정 형편 탓인지 국왕의 얼굴에 어두운 기색이 드리웠다. 이런, 또 마음이 약해지잖아. 저건 반칙이라고.


“그쪽에 맡기겠다. 알아서, 정성껏 준비해라. 얼마가 되던 군말 없이 받아줄 테니까...”

“고, 고맙소. 내 그렇게 하리다.”


정말이지 손해만 보고 사는 것 같다니까. 나는 속으로 그렇게 툴툴대면서 몸을 돌렸다.


“일단 그 수녀를 먼저 만나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지금 어디에 머무르고 있나?”




"Archfiend Legion Commander Rancor's Personal Record" by G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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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오늘은 하루종일 물폭탄이 떨어졌습니다... 덕분에 좀 낭패를 봤어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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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make believe (6) 18.09.03 434 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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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make believe (1) 18.08.27 464 3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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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피의 신에게 바치는 공물 (5) 18.08.24 482 3 14쪽
73 피의 신에게 바치는 공물 (4) 18.08.23 471 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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