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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군단장 랭코르의 개인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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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P32
그림/삽화
시베리아인
작품등록일 :
2017.09.03 17:09
최근연재일 :
2019.03.1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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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2,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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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8.30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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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쪽

make believe (4)

DUMMY

4



“안녕하세요, 신께 몸과 마음을 바치기로 서원한 그분의 종, 체칠리아라고 합니다. 기사님의 성함은...”


대략 이십 분 정도를 기다려서 간신히 마주하게 된 수녀는 기품 있고 단아한 태도로 내게 인사했다. 발끝까지 내려오는 검은 수도복을 입어 온몸을 단단히 가리고, 머리에는 검은 베일을 써서 머리카락 한 올조차 남김없이 모두 감춘 그녀는 얼핏 봐도 성스럽고 정결해 보이는 편이었지만, 가끔 흐릿한 눈동자로 주변을 둘러볼 때마다 그 이면에 망설임 비슷한 무언가가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물론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눈동자에 힘이 돌아오며 다시 맑게 빛나곤 해서 혼란스런 감상만을 숙제처럼 남겨뒀지만.


“왕실기사 앙리 랭스 남작입니다.”


나 자신을 소개하는 게 오늘 하루에만 벌써 세 번째이다. 어차피 진짜 이름도 아니긴 하지만. 그렇게 고개를 살짝 숙이자 그녀도 그에 맞춰서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는 것으로 화답했다. 평범하지 않은 기품이 서려 있는, 상당히 절도 있고 깔끔한 동작. 대주교의 걱정은 완전히 기우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국왕 전하의 명을 받들어 체칠리아 수녀님을 사이프러스까지 호위하게 되었습니다. 수녀님께 누를 끼치지 않도록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런 자리에선 늘 그러했듯 완벽하게 정의감에 불타는, 그러나 그 불꽃을 바깥으로 마구 내보이지는 않을 정도로 무게감 있는 기사를 연기하며 다시 한 번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갑옷이 이리 칙칙해서야 별 소용이 없겠지마는.


“많은 분들께서... 이 성물을 지키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굉장히 위험한 일이 될 거에요. 랭스 남작님께서는... 정말로 괜찮으신가요?”


그런 나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맑게 빛을 발하는 눈동자에서 당장이라도 눈물이 뚝 떨어질 것만 같아 보여 혼자 살아남아 여기까지 온 그녀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을지 짐작케 했다. 불쌍하도다.


“주군의 명령은 곧 기사의 명예요 영광입니다. 수녀님을 안전히 모시는 것이 제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저는 결코 도망칠 수 없습니다.”


덕분에 참 낯간지럽기 그지없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하이델이나 다른 부하 녀석들이 하는 거 보고 귀동냥으로 배운 말재간인데, 하위호환조차도 못 될 수준이라는 느낌을 영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 낯간지럽기 짝이 없는 말이 그녀의 걱정을 조금은 누그러트렸는지,


“또한 신의 영광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요. 기사님의 마음이 굳건하다는 것은 잘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눈을 살짝 내리깐 채 두 손을 모아 기도하듯 맞잡으며 말했다. 그 모습이 정말로 신실하고 경건하게만 보여 나와는 영 다른 세계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저쪽 세상에서 살아 있었을 때에도 종교적인 열정과는 거리가 먼 편이었으니까. 지금이야 신이라 불리는 이들이 이 세계에 존재함을 - 그리고 내가 저버리고 온 그 세상에도 신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이가 한 명 존재함을 – 확실하게 알고 있긴 하지만, 내가 나의 신에게 가진 감정은 신에 대한 경배라기보다는 개인에 대한 감사와 경의 정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물론 저 혼자 수녀님을 호위하는 건 아닙니다. 기사 몇 명이 추가로 동행할 것이니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그녀를 따라 양손을 깍지 껴서 잡으며 호언장담했고,


“저희를 습격한 자들은 대충 눈짐작으로도 칠팔십 명에 달했답니다. 실례되는 말씀인 걸 알지만... 감당할 수 있을까요?”


그녀는 흐릿해진 눈동자를 살짝 떨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풀 플레이트 아머로 무장한 기사를 쓰러트리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단순히 방어만 하면서 도망치는 정도라면... 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녀가 조금이라도 안심하길 바라며 다시 한 번 호언장담했다. 방어만 할 생각 따위는 당연히 없었지만. 겁도 없이 내게 덤벼오는 자가 있다면 이 지상에서 모조리 삭제해버리면 그만이다.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눌러 휴지통을 비우는 것보다는 확실히 느리겠지만, 아무튼 내겐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까.


“그러고 보니 기사님의 갑옷은 정말 시꺼멓군요. 이런 갑옷은 어디서도 본 적이 없었어요.”


갑옷 얘기를 꺼내서였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눈을 다시 똑바로 뜨고는 내 갑옷에 관심을 보였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면서,


“예. 흑철로 만들었지요. 흑철을 갑옷에 쓰는 건 확실히 흔치 않긴 합니다.”


교묘한 거짓말로 답했다. 흑철이 아다만티움보다 무게가 더 가벼운 편이라 구분이 가능하지만, 이렇게 그냥 보는 것만으로 구분할 수는 없을 터이니.


“그런가요... 왜죠?”

“몹시 강한 금속입니다만... 우선 지하 깊은 곳에서만 채굴되기 때문에 충분한 양을 확보하려면 상당히 비싼 값을 치러야 합니다. 게다가 비교적 무거운 편이라 갑옷으로 만들어 입으려면 힘이 꽤 좋아야 하니까요. 그렇다고 딱히 부가적인 능력이 있지도 않으니... 아무래도 파사(破邪)의 능력이 있는데다가 굉장히 가벼운 편인 백은에 비하면 선호되지 않습니다. 강도 자체는 백은보다 더 좋으니까 가끔 검을 만드는 데 쓰이는 정도죠.”


흑철 샘플을 받았던 시계태엽 로봇의 첫 마디를 떠올리며 속으로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무겁군.’ 딱 세 글자만 말하고는 5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지. 죽음의 기사들만 보고는 몸에 두껍게 두르고도 어렵지 않게 움직일 수 있는 가벼운 금속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아마 모르긴 몰라도 단단히 배신당한 기분이었을 터였다.


“아, 그런가요. 그러면 기사님께서는 왜...”


그녀는 계속 내 갑옷을 두 눈으로 훑으며 중얼거렸다. 좀 과한 것 같단 말이지. 시꺼먼 갑옷이야 볼 일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흑철이나 아다만티움 같은 시꺼먼 금속을 쓸 필요도 없이, 마법 도료로 색만 칠하면 그만이니까. 가문의 상징색이 검정색인 귀족들이 휘하 기사나 중장보병의 갑옷에 그렇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편이고 말이다. 뭐 따지고 보면 볼 기회가 없었을 가능성도 충분하겠지만.


“랭스 가문은 검정색을 상징으로 삼고 있습니다.”

“아...”


그래서 나는 국왕에게 받았던 문장이 검정색으로 거의 도배가 되다시피 했음을 떠올리며 그걸 핑계로 댔다. 아마 국왕도 시꺼먼 갑옷, 시꺼먼 투구, 시꺼먼 대검으로 무장한 내 모습에서 강한 인상을 받아서 그런 문장을 내린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마음 한구석에 메모해두면서.


“저희는... 언제 출발하죠? 내일인가요?”


슬슬 말을 돌리려는 모양이었는지 갑자기 일정에 관해서 묻는 그녀.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리는 것에는 나 또한 찬성인 입장이었으므로 고개를 양 옆으로 살짝 저으며 대답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금 교구에서 마차를 준비하고 있습니다만, 다소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이르면 내일 모레 정도에나... 좀 더 걸릴 수도 있을 것 같군요.”

“그, 그렇게 오래 걸리나요?”


그녀가 의아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확실히 이상하게 생각할 법도 했다. 마차를 준비하는 데 이틀이나 걸린다니. 설명을 제대로 안 해준 탓이니 전적으로 내 실수다.


“대주교님께선 이번 습격이 성물을 노린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표적이 될 만한 것들을... 요컨대 교단의 성표나 문장 따위를 모두 제거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지요. 그래서 좀 오래 걸릴 겁니다.”

“아, 그렇군요. 제게는 별 말씀 않으셔서...”


내 설명을 들은 그녀는 다시 눈을 내리깔고 손을 맞잡았다. 그 모습이 약간 서글퍼 보이는 데가 있어 눈 둘 데가 마땅찮았다.


“덕분에 조금 쉬면서 몸을 추스르실 시간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여기까지 도망쳐 오시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그래서 고개를 아주 약간 위쪽으로 치켜들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저 슬퍼 보이는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에.


“예. 다행히 신께서 절 보살펴 주셔서 이렇게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잘 쉰 덕에 육체적인 피로도 많이 풀렸고요.”


그녀는 여전히 눈을 아래로 향한 채 마치 꿈꾸는 듯 아득하게 일렁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 수 없는 기품과 위엄이 은은히 흐르고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듯 묘하게 흔들리는 목소리였다.


‘어지간히도 처참한 광경이었던 모양이군.’


실로 가엾은 여인이었다. 평화와 침묵을 간절히 바라며 수도 생활을 시작했는데 얼마 되지도 않아 그런 끔찍한 일에 휘말리다니. 그녀가 계속 흐릿한 눈으로 주변을 불안스레 둘러보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리라.


“수녀님은 참으로 용감하신 분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목숨과 맞바꿀 각오로 끝까지 성물을 지켜내셨으니... 그런 분을 죽게 내버려두는 일, 저는 못 합니다. 그러니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강하게 힘을 주어 호언장담하듯 말했다. 부디 이것으로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기를 바라면서.


“고마워요.”


그러자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들고 손을 앞으로 뻗어 내 두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당황한 내가 고개를 옆으로 휙 돌리며 애써 딴청을 피웠지만 그녀는 계속 내 손을, 건틀릿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


수녀와 마족, 참으로 기이한 조합이 아닌가.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랭스 저택으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하이델을 호출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녀석은 정말 이상할 정도로 말이 없었다.


“... 그렇게 되었다. 일단 너랑 내가 가고, 그 외에 추가로 한 여덟 명이나 아홉 명 정도 차출하고 싶다만... 친위대에 여유 인원이 있던가?”

“그 정도라면 아마 문제없을 겁니다. 대략적인 리스트를 작성해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시간이 얼마 없다. 최대한 빨리 부탁한다.”


내 명령을 받은 하이델이 고개를 가볍게 숙인 다음 방에서 물러갔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그 위에 어지럽게 널브러진 양피지를 내려다보다가,


“아, 맞다. 마시장 가야 한다는 얘기를 안 했잖아...”


잊어먹고 안 한 말이 있음을 뒤늦게 떠올렸다. 마시장에서 말을 사와야 하는데, 그 분야의 준전문가인 하이델에게 얘기하는 걸 깜빡하고 만 것이다. 또 불러서 할 일이 더 있다고 말하는 건 좀 그런데, 이를 어쩐다.


“... 돈 받는 건 포기하자.”


결국 저번에 사이프러스에 다녀올 때 사용했던 말을 교단에 헌납하기로 결심하면서 마구 어질러져 있던 책상 위를 대충 치웠다. 팔을 반원 모양으로 슥 휘저어 양피지며 펜 따위를 한쪽으로 대충 밀어내고,


“하아, 마족이 신전에 헌금하는 날이 올 줄이야... 내가 너무 오래 살았어.”


한편으로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투덜거렸다. 정말이지 내가 생각해도 한심스러운 일이었다. 마족 주제에 신전이랑 이렇게 깊숙이 엮이다니. 하이델 녀석, 방금 웃음이 터지려던 걸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을지도 몰라. 지금쯤 허파 빠진 놈처럼 실컷 웃고 있을 것만 같단 말이지. 허파는 이미 한참 전에 썩어 없어졌겠지만. 젠장, 젠장맞을.


“천 년인가... 마족치곤 꽤 오래 살았지. 수명은 없을지 몰라도, 전사하는 놈들이 하도 많아서... 하.”


내 영혼을 잃어버렸던 것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 마족의 수명을 없애는 데 합의했다던 비하인드 스토리를 당사자인 명계의 왕 본인에게 직접 들은 바가 있었기에 그걸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원래는 오백 년에서 천 년 정도였다고 했던가.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천 년씩이나 사는 놈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싸우다 죽는 게 마족이 죽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그럼 나는 얼마나 더 오래 살아야 할까.”


책상 위에 고개를 파묻고 중얼중얼. 앞으로 천 년? 이천 년? 좀 더 길게 잡아서 오천 년일까? 그것도 아니면 만 년 정도? 아니, 더 오래오래 살아야 할지도 몰라. 날 쓰러트릴 놈이 생길 때까지 살아야 할 테니까. 그러면... 설마 마계가 망할 때까지? 하아. 벌써부터 지치는구나.


“뭐...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서 아직 한참 이른 생각을 저 멀리 털어냈다.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렸지만 어차피 누구 하나 듣는 이도 없으니 상관없겠지. 소피아가 쓰는 방은 여기랑 거의 정반대쪽이니까.


“그나저나 또 사이프러스로군. 어디 보자... 흠, 이번엔 이렇게 가면 되겠어.”


다시 자세를 고쳐 앉은 나는 시선을 위쪽으로 끌어올려 저쪽 벽에 걸린 포르티아 전도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사이프러스까지 가는 가장 빠른 루트를 눈대중으로 대충 짜맞춰보면서.


“일 다 끝나면 베네딕타나 만나고 올까...“


베네딕타가 ‘시어머니’의 성화 때문에 기네즈 백작령으로 이사해서 차마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다이나믹한 시집살이를 경험하는 중이며, 그 끔찍한 시댁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탈출하기 위해 식사에 몰래 지효성 독을 탈 궁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조금 나중 일이었다.




"Archfiend Legion Commander Rancor's Personal Record" by G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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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14장도 11장처럼 예상보다 길어질 것 같습니다. 제발 질질 끌지 않기를 바랍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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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EE: Emulated Emeth (시즌 1 完) +2 18.09.08 524 3 14쪽
83 make believe (Epilogue) 18.09.05 462 4 8쪽
82 make believe (7) 18.09.04 432 4 14쪽
81 make believe (6) 18.09.03 435 2 13쪽
80 make believe (5) 18.08.31 442 3 14쪽
» make believe (4) 18.08.30 453 2 14쪽
78 make believe (3) 18.08.29 449 3 16쪽
77 make believe (2) 18.08.28 457 3 14쪽
76 make believe (1) 18.08.27 465 3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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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피의 신에게 바치는 공물 (5) 18.08.24 483 3 14쪽
73 피의 신에게 바치는 공물 (4) 18.08.23 473 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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