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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군단장 랭코르의 개인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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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P32
그림/삽화
시베리아인
작품등록일 :
2017.09.03 17:09
최근연재일 :
2019.03.17 18:0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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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2,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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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03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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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make believe (6)

DUMMY

6



체칠리아 수녀가 무릎 위에 내려놓았던 하얀 천으로 감싼 황금 천칭을 품에 안아드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뒤는 하이델에게 맡기고 천천히 앞쪽으로 걸어갔다. 정신만 제대로 차리고 있으면 아주 유능한 녀석이니까. 가끔 정신을 제대로 안 차릴 때가 있기는 한데, 일단 지금은 멀쩡해 보였다.


- 무슨 일이 있어도 수녀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라. 최우선적으로 지켜야 할 대상이다.

- 예, 알겠습니다.


뒤는 그렇게 맡긴 채 죽음의 기사들에게 사념으로 명령을 내리고,


“환영한다.”


여덟 명 정도가 어설프게 대열을 맞추며 힘차게 달려오던 쪽으로 거세게 몸을 날려서,


“지옥에 온 걸.”


공중에서 쏜살같이 떨어져 내리며 육중한 대검으로 녀석들을 밀어붙였다. 칼날이 아니라 칼등으로.


“크허억!”


칼등으로 단지 무게와 충격만을 전달했을 뿐인데 맥없이 밀려나며 고통스런 신음 소리를 사방팔방으로 흩뿌리는 놈들. 고작 두어 명 정도만 얇은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고 나머지는 맨몸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리라.


‘잘 하고 있군.’


잠시 짬을 내어 주변을 둘러보니 죽음의 기사들도 한 명당 몇 명씩을 상대하며 압도적으로 밀어내는 중이었다. 그럼 이제 나도 제대로 일할 차례인가.


‘한두 놈 정도는 살려둬야겠어.’


배후가 어떤 놈들일는지는 거의 확신 수준이긴 했지만, 그래도 자백을 확실하게 받아낼 필요가 있었다. 모두 죽인다는 원래 계획은 그래서 보류. 일단 가장 가까이 있던 두 명의 머리를 칼등으로 연달아 쳐서 기절시켰다. 아까 받은 충격과 더해지자 단말마조차 내뱉지 못하고 정말 죽은 것처럼 조용하게 픽 쓰러지는 모습이 마구 달려들 때의 기세등등한 모습과 비교되어 헛웃음만 나올 지경이었다. 뭐, 숨은 약하게나마 붙어 있었으니까 죽은 건 아니다만.


“입은 두 개 정도면 충분하겠지.”


팔다리를 기괴한 방향으로 늘어트린 채로 아무렇게나 바닥 위에 널브러진 놈들을 발로 걷어차서 한쪽으로 보내버리고,


“다시 말해 너희는,”


지금까지 대충 칼등만 썼던 검을 살짝 고쳐 쥐면서 반원 모양으로 가볍게 휘둘렀다.


“쓸모가 없다는 뜻이다.”


검이 한 번 왕복하자 기절하지 못한 운 없는 녀석들의 가슴팍에 깊게 패인 상처가 생겨났다. 아주 잠시, 그들은 자기 자신의 눈을, 그리고 감각을 믿을 수가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뭔가 말하려던 찰나에,


“잘 가라. 다음 생에는 내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상처에서 붉은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풀이 꺾여 넘어지듯 풀썩 주저앉다시피 쓰러졌다. 내가 조금 덜 자비로웠다면 이렇게 깔끔하게 끝내지는 않았겠지. 운 좋은 거라고 생각해라. 생각이란 걸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수녀님, 괜찮으십니까?”


죽음의 기사들도 마찬가지로 상황을 거의 다 정리했음을 확인한 나는 하이델의 등 뒤에 꼭 숨어 있던 수녀에게 다가가며 큰 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수녀가 하이델의 등 뒤에 몸을 더욱더 꼭꼭 숨기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몸도, 목소리도 모두 가늘게 떨리고 있어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하이델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괘, 괜찮아요... 저, 저는...”


얼핏 보니 성물을 감싼 천에 땀이 배어들어가 있었다. 으스러지지는 않을까 도리어 걱정될 정도로 성물을 꼭 끌어안고 있는 그 모습이 참으로 안쓰러웠다. 얼마나 놀랐으면 저렇게 떨까. 수풀에서 저런 건장한 사내놈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위해를 가하려고 했으니 당연히 놀랄 수밖에.


“이제 괜찮습니다. 안심하세요.”


그래서 계속 다가가면서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는데...


“죄, 죄송합니다만... 가까이 오지 말아 주셨으면...”


더더욱 떨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


아무래도 그녀가 무서워하고 있는 건 이미 생명을 잃고 땅바닥에 누운 시체 따위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의, 의뢰인이 누군지는 절대 말 못 해! 내 입은 바위보다 무겁다고!”


운이 좋아서, 혹은 운이 나빠서 목숨을 건졌던 두 녀석 중 그나마 상태가 좋은 편이었던 한 놈에게 찬물을 끼얹어서 깨웠다. 당연히 배후를 캐기 위함이었다. 이미 알고 있긴 하다만, 그래도 확실하게 확인할 필요성은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녀석은 생각보다 심지가 굳은 편이었는지 한사코 자백하기를 거부했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네가 아니더라도 증언할 입은 하나 더 있다만.”

“흥! 그 녀석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렇게 꼴사납게 기절한데다가 지금은 사슬로 꽁꽁 묶여있기까지 한데도 기백 하나는 제법 좋은 편이었다. 나로서는 일이 어렵게 될 것 같아 한숨만 나올 지경이었지만.


“그런가. 할 수 없지, 그럼.”


녀석에게서 눈을 뗀 나는 바로 옆에서 불안스레 떨리는 눈으로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수녀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다음 넌지시 말했다.


“수녀님, 마차 안으로 들어가 계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봐서 별로 좋을 게 없습니다.”

“아, 알겠어요.”

“하이델, 수녀님을 마차 안으로 모셔라. 저 녀석이랑 단 둘이 나눌 얘기가 있으니까.”


나는 하이델을 찌릿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명령했다. 수녀가 바깥쪽을 내다보지 못하게 하라는 속뜻은 앞서 한 말에서 잘 알아들었으리라고 기대하면서. 하이델은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이고는 수녀를 데리고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마침내 수녀가 마차 안으로 들어가고, 하이델이 커튼을 쳐서 창문을 가리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다시 바닥에서 굼벵이처럼 꿈틀대고 있는 녀석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날 고문할 셈이야? 그래, 어디 한 번 해 봐. 내가 입이라도 뻥긋할 것 같아?”


녀석이 앙칼지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내게 쏘아붙였다. 동료들은 모두 일검으로 잃고, 이렇게 포로로 잡힌 주제에 목소리가 건방지구만.


“아니. 그쪽에는 별로 소질이 없다. 흥미도 없고 말이지.”

“그럼 어떻게 내 입을 열게 하려고 수녀까지 안으로 들여보냈나, 어? 어쩔 셈인데!”


계속 꿈틀대면서 호기롭게 외쳐대는 녀석에게 한 번 코웃음을 치고,


“어쩔 셈이냐고?”


한 쪽 무릎을 땅에 대어 몸을 낮춘 다음,


“이렇게.”


바이저를 살짝 위로 들어올렸다. 투구 속에 감춰진 나의 맨얼굴, 그 편린을 살짝 엿본 녀석의 얼굴에서 혈색이 급속도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 마... 말도...”


하얀색을 지나서 점점 푸르죽죽해지는 얼굴이 마치 블루베리 같아서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얼굴이 비교적 둥글둥글하고, 수염도 없어서 싱크로가 꽤 맞는 편이거든. 체면을 생각해서 간신히 참긴 했지만, 꽤 아슬아슬했다.


“너, 너는... 대체 뭐, 뭐야... 뭐냐고...”


시퍼렇게 익은 얼굴로 말을 제대로 잇지조차 못하며 더듬대는 모습이 살짝 불쌍하기까지 했다. 확실히 내 맨얼굴을 보는 것이 정신력을 크게 갉아먹는 짓이기는 하지. 오랫동안 간직해온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이 원초적인 공포조차 이겨낼 정도로 강했던 드라헤부르크 영주 같은 특이 케이스를 제외한다면 대부분 정도는 달라도 이런 반응이었다.


“왕실기사다.”

“거, 거짓말! 거짓말 마! 너 같은 왕실기사가 어디 있어!”


이런, 내 나름으론 농담이라고 건넨 말이었는데. 유머 감각이 없구려. 안타까워라.


“왕실기사다, 지금은.”


뭐 아무튼, 지금 당장은 포르티아의 왕실기사 신분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사실이라고 치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나? 자,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해 볼까.”


바이저를 다시 내려 투구를 봉했다. 계속 바라보다가 혼절해 버린 놈도 있었으니까.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성실하게 대답했으면 한다. 만약 거부한다면... 아까 말했듯 입은 너 하나만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둬라.”

“...”


바이저가 내려가자 약간 평정심을 되찾은 듯 진정된 모습을 보이던 녀석이 침을 꼴깍 삼켰다. 과장 좀 많이 보태서 저 마차 안쪽까지 들릴 정도로 크게.


“내가... 대답하지 않는다면... 날 죽일 셈이야? 괴, 괴물...”

“그 다음이 네게 별로 달갑지 못하리라는 건 보장할 수 있다. 어떤 형태가 되었든.”


나는 붉은 안광을 여과 없이 쏟아내면서 녀석의 눈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녀석은 체념한 듯 한숨을 훅 불어 내쉬면서,


“뭐든지 말씀만 하십쇼...”


기가 팍 죽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태도는 아직도 건들건들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이쯤이면 나쁘진 않군그래. 최소한 대답은 할 것 같아 보이니까.


“어차피 내 인생, 단 한 번도 달가웠던 적은 없지만...”


꿈틀대는 것을 멈추고 밤하늘을 바라보며 누운 녀석이 목을 간신히 돌려서 저쪽에 널브러져 있는 동료를 쳐다보았다.


“저 녀석은 어떻게 할 거요?”


반말과 존댓말 사이의 어느 이상한 부분에 위치한 말투였다.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딱히 싫은 것도 아닌 어중간한 어딘가.


“글쎄.”


그래서 나도 녀석을 따라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천 수백의 민들레 홑씨처럼 반짝거리는 별들이 바짝 달라붙어 점이 된 그곳은,


“일단 너 자신부터 걱정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실로 아름답고,


“... 거 친절도 하심다.”


실로 쓸쓸했다.




“수고했다.”


한 시간 넘게 걸린 기나긴 취조를 끝낸 나는 녀석을 묶고 있던 사슬을 풀어주었다. 대화 내용은 모두 마법 걸린 수정구를 통해 녹화를 마친 상태였다.


“죽고 싶지 않거든 나에 관한 건 입 다물고 사는 게 좋을 거다. 엘드리치 영감이 있었으면 정신에 금제라도 걸었겠지만... 아쉽군. 그래도 중간계에는 항상 귀를 열어두고 있으니까 입, 조심해라.”


풀려났음에도 온몸이 욱신거리는지 제대로 일어나질 못하는 놈을 흘끔 내려다보며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마족 소환 감시 목적으로 중간계에 그림자 마물을 대거 파견해 두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 정 걱정되면 그림자 마물 하나 더 불러서 일대일로 붙이면 되고.


“주, 중간계... 라굽쇼? 서, 설마 당신은...”


어이쿠, 말실수.


“내가 천사일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 않나. 자, 소거법으로 하면 뭐가 남을까.”

“마, 마...”

“정답이다.”


나는 녀석이 ‘마족’이라고 말하기 직전에 그 입가에 검지를 쫙 펼쳐서 가져다 댔다. 괜히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 뒤돌아봐 마차 쪽을 한 번 쳐다보면서.


“나는 경고했다. 입도 뻥긋하지 말고 조용히, 없는 것처럼 살아라.”

“아, 알겠음... 알겠습니다.”

“네 동료도 데리고 가라. 이런 비리비리한 놈은 스켈레톤으로도 못 만들 것 같아서...”


간신히 몸을 가누며 일어선 녀석에게 나머지 하나까지 떠맡겨버렸다. 필요는 없지만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많이 묻히긴 했지만, 그래도 굳이 1인분을 더 묻힐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사, 살려 주셔서 감사함다! 아니, 가, 감사합니다!”

“감사하면 빨리 꺼지던가.”


녀석이 사슬에 묶인 채 기절해 있는 동료를 질질 끌며 수풀 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나는 모닥불에 장작을 몇 개 더 넣었다. 약해졌던 불길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되살아났고, 새로 넣은 장작에서 불똥이 타다닥 튀어 나풀나풀 날아가다가 이내 뚝 꺼지면서 차갑게 죽어버렸다.


“수녀님, 이제 나오셔도 됩니다.”


나는 마차 쪽으로 걸어가 문을 가볍게 두드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이미 죽음의 기사들이 수풀 쪽에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시체를 전부 묻어버린 뒤였기에 나와도 딱히 문제될 건 없었다.


“... 다 끝났나요.”


몇 초 정도 뜸을 들인 끝에 모기 소리처럼 작게 앵앵거리는 목소리가 문 저편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힘을 주어 대답했고,


“예. 정리는 다 끝났고... 자백도 받았습니다.”

“알겠어요. 금방 나갈게요.”


잠시 후 문이 삐거덕 열리고, 그녀가 하이델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불과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 뿐인데 낯빛이 아까보다 많이 상해 있었다.


“안전하게 지켜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마차에서 내린 그녀는 몹시 영혼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내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치 얼이 빠진 사람처럼 맥없는 얼굴이었다.


“마땅히 할 일을 한 것일 뿐입니다.”


나도 따라서 고개를 숙이며 화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면서,


“전부... 죽었나요?”


라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목소리가 살짝 날이 돋은 것처럼 창백하고 차가운지라 그 시선을 교묘히 피할 수밖에 없었다.


“두 명을 제외하면 모두 전투 중에... 예, 전투 중에 사살했습니다. 부하들이 저쪽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 뒀으니까 밤중에 냄새가 난다거나 하지는 않을 겁니다.”


전투 중에 죽었음을 특히 강조한 것은 일종의 자기 변호였을지도 모르겠다. 저항하지 않는 놈을 죽이지는 않았다는 뜻으로서 말이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죽은 영혼을 위로하는 기도를 올려야 한답니다. 안내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러자 그녀가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키가 작은 편이라 까치발까지 든 그 모습이 꽤나 결연하고 확고부동해 보인 터라,


“예, 따라오십시오.”


결국 원하는 대로 해줄 수밖에 없었다.




"Archfiend Legion Commander Rancor's Personal Record" by GP32,
All Rights Reserved.


작가의말

아마도 7편 + 에필로그로 끝낼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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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make believe (Epilogue) 18.09.05 432 4 8쪽
82 make believe (7) 18.09.04 414 4 14쪽
» make believe (6) 18.09.03 417 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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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피의 신에게 바치는 공물 (Epilogue) 18.08.25 439 3 10쪽
74 피의 신에게 바치는 공물 (5) 18.08.24 442 3 14쪽
73 피의 신에게 바치는 공물 (4) 18.08.23 452 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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