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마군단장 랭코르의 개인 기록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GP32
그림/삽화
시베리아인
작품등록일 :
2017.09.03 17:09
최근연재일 :
2019.03.17 18:00
연재수 :
89 회
조회수 :
69,912
추천수 :
378
글자수 :
482,918

작성
19.03.11 21:39
조회
33
추천
0
글자
12쪽

Evolving Souls (4)

DUMMY

4



[반성문 제출하고 갑니다.]


잠시 공방에 다녀와 무구 제작 현황을 점검하고 오니 책상 위에 양피지 더미와 함께 하이델이 써놓은 자그마한 쪽지가 맨 위에 놓여 있었다. 아마 내가 없는 사이에 집무실에 다녀간 모양이었다. 내가 이틀 전에 내줬던 숙제 때문에.


“시간을 이틀만 줬던 건 좀 너무하긴 했어. 써오느라 고생 좀 했겠는걸.”


나는 쓰게 한 번 웃은 다음 자리에 앉았다. 하이델이 살포시 두고 간 반성문 외에도 이것저것 시급히 검토해야 할 서류가 많았다. 아무래도 반성문은 제일 나중 순번으로 미뤄야 하지 않을까. 별로 급할 건 없잖아?


“그나저나 하이델은 반성문을 써오라고 했지만... 영감님은 어쩔까. 참 어려운 양반이란 말이지...”


높이 쌓인 서류더미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지만 대답해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별 수 없이 하이델 녀석이 제출한 반성문을 한쪽으로 미뤄둔 다음 한쪽 구석에 쌓여 있는 서류더미를 책상 정중앙으로 끌어당기고,


[포로 이감 및 이송 경로 보고서]


제일 위에 있는 서류부터 하나씩 하나씩 검토해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검토라고 할 것도 없었고, 그저 제목이랑 문단 첫머리만 수박 겉핥기로 보고 기계적으로 서명할 뿐이었지만.


‘다음 일정이... 정기 보고였던가.’


서류를 한 장 넘겨 재빨리 훑어보고 맨 아래쪽에 깃펜으로 서명만 슥 끄적거리는 식으로 한참이나 단순노동을 반복했지만 여전히 일거리는 썩어나다 못해 넘쳐흘렀고, 그렇게 지루하기 짝이 없는 짓거리를 반복하다 보니 문득 다른 생각이 고개를 슬금슬금 내밀었다. 그래서,


- 하이델.


투구 관자놀이 부분 근처에 손가락을 얹고 잔뜩 힘을 준 근엄한 어조로 한심한 부하 녀석을 불렀다. 아마 지금쯤 자기 거처인 북서쪽 탑에 있겠지.


- 예, 말씀하십시오.


녀석의 대답이 곧바로 내 머리 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제법 군기가 들어간, 바짝 긴장하고 있는 목소리였다. 흠, 이만하면 슬슬 안심해도 되겠군그래.


- 엘드리치 경에게 연락해서 내 집무실로 제자들을 몇 명만 보내라고 해라.

- 정기 보고입니까?

- 그래. 혹시 바쁘지 않다면 네가 직접 인솔해서 데려왔으면 한다. 항상 마법 공부에만 매진해서 은근히 성내 지리에 어두우니까...

- 예, 알겠습니다. 하아.


손을 다시 아래쪽으로 늘어뜨린 나는 아직 많이 쌓여 있는 미답의 서류더미를 아주 잠깐 위아래로 슥 훑은 다음 고개를 천장 쪽으로 향하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이건 완전히 합법적으로 쉬는 거야. 잠깐 짬 좀 낸 거라고.


‘그러고 보니까 아까 하이델이 한숨을 쉰 것 같았는데...’


하이델이 장거리 통신 마법을 쓸 마법사들을 데리고 올 때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고,


‘기분 탓이려나.’


온갖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헤매다가,


‘기분 탓이겠지.’


하늘빛 하늘 속을 유유히 헤엄치다가 흔적도 없이 녹아드는 하얀 구름처럼 사그라졌다.




“수고했다.”


통신을 전담할 마법사들을 데리고 온 하이델에게 짤막하게 감사를 표한 나는 책상 위를 대충 치운 다음 의자에 천천히 걸터앉았다. 통상적인 법도대로라면 섬기는 왕에게 마법 통신으로 보고를 하는 마족은 그 신분이 아무리 높더라도 바닥에 무릎을 꿇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 그 머저리나 다름없는 나머지 군단장 놈들이 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전혀 지켜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 나는 특별히 그러지 않아도 될 권리를 허락받았다.


“좌표는 알고 있겠지.”


그래도 등받이에 몸을 기대지는 않는 선에서 스스로와 합의하고,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서 엘드리치 영감의 제자 중 하나에게 확인차 물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믿음직한 대답이 곧바로 돌아왔다.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연결해라. 예정 시간보다 조금 빠르기는 하지만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마법사들이 마법 통신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나는 하이델의 도움을 받아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라서 딱히 할 수 있는 게 많지는 않았지만, 망토 매듭이나마 대충 가다듬는 것으로 마무리.


“다 끝났습니다. 바로 연결 가능합니다.”

“이쪽도 다 끝났다.”

“그럼 연결하겠습니다.”


녀석들이 책상 위에 올려놓은 커다랗고 투명한 수정구가 밝게 빛나더니 홀로그램 비슷한 영상이 허공에 떠올랐다. 아직 저쪽에서 받지 않았는지 온통 시꺼먼 배경에 노이즈만 가끔 흘러들었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그 영상을 가만히 응시하면서 나는 속으로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수정구슬 말고 다른 매개체를 써도 될 텐데... 굳이 저걸 쓰는 건 전통이라서 그런 건가.’


듣자 하니 요즘 인간들은 수정구슬보다 거울을 더 선호한다던 모양이었다. 물론 중간계의 유행이 무조건 여기에 퍼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상아탑의 그 고매한 마도사들도 거울을 쓴다고들 하니 수정구슬보다 더 효율적인 모양이었다. 아니면 뭔가 수정구슬과는 다른 느낌이 있던가. 그렇게 약간 옆길로 샌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어느새 저쪽에서도 통신을 수락했는지 뿌옇게나마 익숙한 풍경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신(臣) 북부군 군단장 랭코르, 왕을 뵙나이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영상이 점점 선명해지고, 누군가의 얼굴이 그 정중앙에 식별 가능한 수준으로 떠오르자마자 나는 주먹 쥔 오른손을 척 들어올려 왼쪽 가슴 위에 살짝 가져다가 댔다. 반대편에서는 아직 별 말이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지난주에 보고를 올렸어야 했는데, 부득이한 사정으로 미루게 되어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국경에서 약간의 소요 사태가 있었던 터라 전방을 순시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가장 중요하게 보고드릴 내용도 그와 관계가 있습-”

- 알아서 해. 나는 별로 관심 없어.


한참 첫머리를 주섬주섬 늘어놓고 있는데 심드렁한 목소리가 끼어들어 말허리를 뚝 잘라먹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들고 수정구슬 살짝 위쪽에 둥둥 떠 있는 영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약간 짙은 피부와 검은 머리칼, 청소년과 청년의 중간쯤에 애매하게 끼어 있는 앳된 인상의 미소년. 머리 양쪽에 난 작고 앙증맞은 뿔이 아니라면 그가 마족임을 아무도 몰라봤으리라.


- 어차피 당신이 다 알아서 할 거잖아. 늘 그랬듯이.

“그, 그건...”

- 그냥 편하게 말 놔.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나도 당신한테 존댓말 듣는 거 불편해.


뭐 모습은 저래도 나보다 나이가 많았으니까 지위 고하와 관계없이 그거 하나만으로도 내게 반말을 해도 될 끗발이기는 하지. 처음 만났을 때 마족의 외형과 나이는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마냥 어린애 취급을 했었는데. 옛 생각을 하고 있자니 문득 그 시절이 그리워졌다. 그 시절 그 자체가 그리운 건 아니다 그저 그 시절의 내가, 우리들이 그리웠을 뿐.


“...”


하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는 가시가 서려 있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억지로 밀어붙여서 왕좌에 앉힌 다음부터? 아니야, 그래도 처음에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는걸.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던 걸까.


- 당신도 알지? 날 왕 취급해주는 마족은 이 왕국 전체를 뒤져서 당신 하나밖에 없는 거. 당신네 부하들도 그냥 참고 있는 거잖아. 아주 죽을힘을 다해서.


도대체 언제부터,


- 그러니까 그냥 편하게 말해. 어차피 당신이 마음 바꿔먹기만 하면 이 자리에서 내려오는 건 물론이고 벼르고 있는 녀석들한테 시체까지 흔적도 없이 찢겨 나가서 어디 쓰레기장에나 뿌려지면 다행일 목숨인데 뭐 하러 예의를-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우리는 이렇게 어긋나고 잔뜩 금이 가서 남보다 못한 그런 사이가 되고 만 것일까.


“내가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는다고. 내가 말이다!”


계속해서 늘어지고 늘어지는 일견 무신경하면서도 실제로는 신랄하게 비꼬고 있는 그 목소리에 나는 결국 폭발하듯 내질러버리고 말았다. 왕과 그 신하라는 입장으로서 깍듯이 공대하는 것조차 깜빡 잊은 채로.


“내가 어떻게 널 지켜냈는데! 내가 어떻게 널 그 자리에 앉혔는데! 널 위해서 이 왕국을 만들고, 넓히고, 겨우 궤도에 올려놨는데! 네가 그렇게 되도록 내가 내버려둘 것 같아?”

- 이제야 좀 당신답네. 분노의 군단장 씨.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날 증오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것도 당신 ‘영역’이잖아.

“... 절대로.”


마음 깊은 곳에서 쥐어짜내듯 말한 내 마지막 한 마디가 끝나자 방 안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한 정적으로 가득 찼다. 나도, 녀석, 아니, 나의 왕도, 영감님의 제자들도, 그리고 하이델도, 다들 아무 말도 입에 담지 않았다. 절대로 깨트리면 안 될 신성한 고독이라도 되는 듯 그렇게.


- 일일이 나한테 보고할 필요 없어. 당신 이름을 명령서에 같이 쓰지 않으면 아무도 말을 들어먹지 않는 허수아비 같은 놈한테 뭔 보고야.

“...”

- 어차피 난 왕이 될 자격조차 없는 놈이었어. ‘영역’이 없으니까.


얼마나 지났을까, 짧은 침묵을 깨고 쏟아져 들어온 말이 내 안을 파고드는 가시가 되어 나를 찌르고 또 찔렀다.


- 왜 그랬어?


아무리 도망치려 애써도,


- 당신이 왕관을 썼다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을 텐데. 도대체 왜 그랬냐고.


나를 괴롭혔다.


“나도...”


그래서,


“후회하고 있어, 가끔은.”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왕이 되고 널 나의 이름으로 보호한다는 칙명만 내렸으면 우리 모두 행복할 수 있었을 것을,”


가슴을 도려내는 듯 아릿하게 파고드는 통증을,


“내가 왜 그랬을까.”


견딜 수가,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너에게 주고 싶었을 뿐인데.”


없었다.




정기 보고를 빙자한 감정 배설 타임이 어떻게 끝났는지 잘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영혼이 빠져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방에는 나 빼고 아무도 없었고, 굳게 닫힌 문이 싸늘한 공기를 방 안에 꽉 가둬놓고 있었다. 아마 하이델이 내 상태를 보고는 눈치 빠르게도 모두 데리고 나간 모양이었다. 평소에는 눈치를 전당포에서 엿 바꿔먹기라도 했나 진지하게 의심을 해봐도 하자가 없을 정도였던 녀석이었는데, 오늘은 이거 참 의외인걸.


“다음 일정은... 작전 회의겠지.”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참석하기 전까지는 시작도 안 할 테니까 그런 것쯤이야 별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남들보다 윗자리에 있다는 건 이렇듯 가끔 편할 때도 있다. 족쇄처럼 불편하게 옭아맬 때가 더 많았지만.


- 다들 모였나.


나는 책상 앞에 선 채로 영감님께 사념을 보냈다. 명목상 주재자는 나지만 실질적으로 회의를 이끌어가는 건 당연히 다재다능하신 영감님이었다.


- 예, 모두 모였습니다. 오시기만 한다면야 지금이라도 바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은근슬쩍 내가 한참 지각했음을 비꼬는 영감님. 정말이지 혀를 내두를 정도라니까. 운 좋은 줄 아세요. 저 말고 다른 놈이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면 영감님 목이 수백 번은 달아나고도 남았을 터이니 말입니다.


- 금방 가겠다. 조금만 기다려라.

- 알겠습니다.


나는 홀로 집무실을 나설 채비를 했다. 늘 옆에서 거들어주곤 하던 하이델이 없는지라 전적으로 혼자서 해야만 했다. 그래봤자 딱히 챙길 것은 없었고 – 자료 같은 건 엘드리치 영감이 빈틈없이 준비해놨을 테니까 – 그저 망토나 정리하고 혹시 갑옷에 먼지라도 앉지는 않았는지 점검하는 정도였지만. 사실 그런 것이야말로 남보다 윗줄에 선 자로서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 중 하나겠지. 주군이 멋쟁이면 좀 더 충성심을 가지고픈 마음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드디어... 내일이군.”


그런 연유로 잠깐 시간을 할애하여 부하들의 충성심을 충전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 가만히 한 마디 중얼거린 다음,


“내일...”


굳게 닫힌 문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었다.




"Archfiend Legion Commander Rancor's Personal Record" by GP32,
All Rights Reserved.


작가의말

벽난로 위의 모닝스타는 아직 제 실력이 부족한 관계로... 그냥 모닝스타인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마군단장 랭코르의 개인 기록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시즌 1 소장판 펀딩 안내 18.09.17 98 0 -
공지 수술로 인한 휴재 및 자유연재 전환 안내 18.02.10 169 0 -
공지 연재 주기 안내 17.09.10 254 0 -
89 Evolving Souls (5) 19.03.17 25 0 18쪽
» Evolving Souls (4) 19.03.11 34 0 12쪽
87 Evolving Souls (3) 19.03.06 55 2 15쪽
86 Evolving Souls (2) 18.12.09 65 1 12쪽
85 Evolving Souls (1) 18.11.30 80 1 7쪽
84 EE: Emulated Emeth (시즌 1 完) +2 18.09.08 474 3 14쪽
83 make believe (Epilogue) 18.09.05 432 4 8쪽
82 make believe (7) 18.09.04 415 4 14쪽
81 make believe (6) 18.09.03 418 2 13쪽
80 make believe (5) 18.08.31 425 3 14쪽
79 make believe (4) 18.08.30 428 2 14쪽
78 make believe (3) 18.08.29 429 3 16쪽
77 make believe (2) 18.08.28 430 3 14쪽
76 make believe (1) 18.08.27 442 3 8쪽
75 피의 신에게 바치는 공물 (Epilogue) 18.08.25 440 3 10쪽
74 피의 신에게 바치는 공물 (5) 18.08.24 443 3 14쪽
73 피의 신에게 바치는 공물 (4) 18.08.23 455 3 14쪽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GP32' 작가를 후원합니다!

  • 보유 골드: 0 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