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 유비와 간옹
003
유비(劉備)와 간옹(簡雍)
취객이 모두 떠나고 난 술집에는 유비(劉備)와 간옹(簡雍)만 남았다.
유비와 간옹은 탁현 누상촌에서 나고 자란 죽마고우이자 거의 유일한 술벗이었다.
술기운이 제법 오른 것인지 유비가 곡을 하듯 신세한탄을 시작했다.
“나 유비 현덕은 중산정왕의 후손이자 한경제의 현손으로···.”
“또 시작인가.”
간옹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비는 신세한탄을 계속했다.
“난세에 백성의 원성이 천하를 뒤덮고 있는데 나는 이렇듯 짚신, 돗자리나 만들어 팔며 객 떠난 주막에서 빈 잔을 기울이고 있구나.”
간옹은 유비가 팔고 남은 돗자리를 베개 삼아 모로 누운 채 그의 신세한탄을 거들었다.
“그래도 자네는 그 왕후장상의 씨라도 이어받은 탓에 대학자인 노식(盧植)과 정현(鄭玄)의 제자가 되어 공손찬(公孫瓚)과 함께 가르침을 받지 않았나.”
유비가 간옹의 이야기를 받았다.
“스승과 동문을 떠나오며 도탄에 빠진 천하를 구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네. 하지만 자네도 보고 있듯 한 황실 부흥의 대업은커녕 몇 년이 지나도록 이렇게 한량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네.”
간옹이 이야기했다.
“한량 신세를 면하려면 우선 입신을 해야 하지 않겠나.”
유비는 눈을 지그시 감고 읊조리듯 이야기했다.
“난세가 아닌가. 난세의 입신은 어지러운 풍속에 동조하며 부패한 세상에 영합하는 처세일 뿐이네.”
“입신 못한 자의 허장성세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네. 하지만 그 명분 아닌 명분은 한실 종친 타령이나 한량 타령보다 더 듣기 싫은 것이 사실이네.”
간옹이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를 이었다.
“자네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하지 않는 것’과 ‘하지 못하는 것’을 구별하지 않았네. 하지 않는 것이 처세라면, 하지 못하는 것은 입신일 것이네. 그렇지 않은가.”
유비가 대답했다.
“공자는 ‘논어’에서 세상의 인간을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네. 맹자는 네 가지 유형에 주석을 달았지.”
“그 네 가지 유형이 무엇인가.”
유비가 대답했다.
첫 번째 유형은 광자(狂子)라네.”
“광자는 어떠한 인간인가.”
“앞에 나서는 인간이네. ‘狂’ 자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상을 내세우며 앞만 보고 내달리나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자를 일컫는다네.”
“나와 자네에게 해당하는 인간형은 아니로군.”
간옹이 다시 물었다.
“두 번째 유형은 무엇인가.”
“견자(狷子)라네.”
“견자는 어떠한 인간인가.”
“뒤로 물러서는 인간이네. ‘狷’ 자에서 짐작할 수 있듯 매사에 비판적이고 신중하나 실천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자를 일컫는다네.”
“나와 자네에게 해당할 수도 있는 인간형이로군.”
간옹이 다시 물었다.
“세 번째 유형은 무엇인가.”
“군자(君子)라네.”
간옹이 유비의 이야기를 받았다.
“광자와 다르게, 앞에 나서되 언행이 일치하는 인간이겠지. 견자와 다르게, 뒤로 물러서되 실천하는 인간일 테고.”
간옹이 다시 물었다.
“자네는 뜻이 큰 광자인가.”
“아니네.”
“자네는 신중한 견자인가.”
“아니네.”
“자네는 광자와 견자의 장점을 취한 중도의 군자인가.”
“아니네.”
“그렇다면 자네는 어떠한 유형의 인간인가.”
“공자와 맹자가 인간을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고 했네.”
“그렇지, 네 가지 유형이라 했지. 그렇다면 그 네 번째 유형은 무엇인가.”
유비가 대답했다.
“군자와 비슷한 듯 보이지만 전혀 다른, 중도가 아닌 중간을 취하는 자를 일컬어 향원(鄕原)이라 했네.”
“중도, 중용의 도(中庸之道)가 아닌 중간(中間)이라···.”
간옹이 혼잣말을 하자 유비는 조소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
“비난하려 해도 할 것이 없고, 공격하려 해도 할 것이 없는 자가 향원이네.”
다소 가벼운 표정과 다르게 유비의 어조는 매우 낮고 무거웠다.
“공자도 맹자도, 이러한 향원과 요순(堯舜)의 도를 논할 수 없으며 더 나아가 이러한 향원이야말로 천하를 어지럽히는 악의 근원이라 여겼다네.”
유비는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을 띠며 빈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간옹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렇다면 다시 묻겠네. 자네는 향원인가.”
유비가 크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빈 술집의 적막을 뒤흔들었다.
“내 비록 신세한탄이 일상이나 자조는 하지 않는다네.”
간옹이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유비의 이야기를 받았다.
“한탄은 무엇이고 자조는 또 무엇인가. 그 두 가지가 어떻게 구별된다는 말인가. 마치 나를 놀리는 것 같아 기분이 몹시 좋지 않네.”
“이보게, 헌화(憲和). 내 어찌 이곳 누상촌의 유일한 벗인 자네를 놀리겠나. 자네가 향원이 아니듯 나도 향원이 아닐세.”
“속 시원히 이야기해보게. 광자와 견자, 군자, 향원 이야기는 도대체 왜 꺼내 든 것인가.”
유비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군자가 못 되어 향원 취급을 받더라도···, 광자나 견자는 되지 않으려 하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이미 이야기했네.”
간옹이 다소 공격적인 어조로 물었다.
“그것이 한 황실의 종친이라는 자네의 도리일 수 있는가. 그것이 자네의 명분이라는 말인가.”
유비가 다시 조소에 가까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만하게. 수백 년 전, 그것도 고조(高祖, 한고조 유방)께서 천하를 통일하기 한참 전의 노(魯)와 제(齊)에서 나온 이야기일 뿐일세.”
간옹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유비의 이야기를 받았다.
“나는 자네가 글 읽는 것을 본 적이 없네. 배우고 익힌 것인지 주워들은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또 이렇게 고전 몇 토막을 들이대며 내 정신을 쏙 빼놓는군.”
간옹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이야기를 이었다.
“자네는 입신하지 않는 이유를 대기 위해 논어와 공맹을 들먹인 것인가.”
유비가 대답했다.
“부정하지 않겠네. 세상 어지러운 풍속에 동조하며 부패한 세상에 영합하는 처세가 바로 향원의 것이니 말일세.”
“입신하지 않고도 천하를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인가. 내 자네를 더 이상 다그치지 않겠네. 절망보다 무서운 것이 존재하지 않는 희망을 꿈꾸는 것 아니겠나.”
유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의 시선이 가 닿은 밤하늘 끝에는 붉은 빛을 띤 초승달이 떠 있었다.
“혈흔에 빛을 잃은 월아(月牙, 月牙槍)처럼 휜 저 붉고 야윈 달 아래서도 나는 감히 낯을 들 수가 없네.”
간옹이 몸을 돌려, 동주 문에 기대어 그와 유비의 대화를 듣고 있던 감부인에게 손짓을 했다.
“술과 고기를 더 내주게.”
감부인은 이 술집의 주보이자 유비의 정부인 열여덟 과부였다.
세족 출신의 그녀는 열여섯에 탁군의 중급 관리에게 시집을 왔으나 그 이듬해 황건적에게 남편과 시집 가족 모두를 잃었다. 이후 이곳 탁군 탁현의 누상촌에서 주막을 운영하며 연명하다 유비의 정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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