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한의 마스커레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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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pen
작품등록일 :
2017.10.06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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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1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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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05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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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55. 판도라의 상자

Letum non omnia finit 죽음이 모든 것을 끝내는 것은 아니다.




DUMMY

이아페토스가 대문을 나서는 것이 보였다. 오늘은 그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배드민턴 동호회의 정기 모임이었다. 지금 나가면 저녁 9시 이전에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프로메테우스는 알고 있었다.


안전을 기하기 위해 30분을 더 길에서 보낸 후에 집안으로 들어갔다. 대문과 현관 키는 이미 가지고 있었기에 드나드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고민 끝에 결국 이곳을 찾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게 미행이 따라붙은 이유를 찾아낼 수 없었다.


생각해 낼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이아페토스뿐이었다. 그 이외에는 그날 자신의 동선과 스케줄을 아는 이가 있을 수 없었다.


실수이든 고의이든 이아페토스로부터 정보가 새 나갔다고 봐야 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줄곧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었다. 여기에 더해 평소에 궁금하게 여기던 부분까지 확인하고자 이아페토스가 나간 틈을 노려 집안을 수색할 작정이었다.


이아페토스가 지금까지 보여준 계획은 혼자 세웠다고 보기에는 너무 방대한 규모였다. 살생부에 오른 목표들에 관한 정보는 일반인이 알아내기엔 매우 구체적이었고 알아내기 쉽지 않은 것들이 섞여 있었다.


적어도 두 명 이상의 전문가가 1주일 이상을 꼬박 따라다니며 모아도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외부에 그런 일을 전문으로 하는 기관이나 프리랜서에게 자료 조사를 맡기면 가능할지도 몰랐지만 극비를 요하는 프로젝트에 외주를 줄 리가 만무했다. 설사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비용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찾는 것은 데이터 형태의 자료였다. 노트북이나 패드, 외장하드 등으로 보관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1층을 샅샅이 구석구석 뒤져봤다. 하지만 그가 찾고 있는 비슷한 형태조차 없었다.


(내가 괜한 의심을 한 건가?)


경박하게 서둘렀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차라리 직접 물어볼 것을 엉뚱한 문제를 일으키나 싶었다. 그러나 후회하기엔 늦은 시점이었다.


2층 서재로 올라갔다. 서재 책상 아래 데스크탑 컴퓨터가 있었다. 컴퓨터를 켜고 보니 이상했다. 소형 HP 레이저 프린터가 컴퓨터 옆에 놓여 있었지만 컴퓨터에는 프린터 드라이버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이아페토스가 이 컴퓨터로 살생부를 작성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서재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우측 벽면을 메운 2m 높이의 책장에는 책들이 빽빽했다. 철학, 역사, 과학, 심리, 정치, 물리 등 분야도 다양했다. 루소, 플라톤, 파인만 등 권위자들이 쓴 이론서들과 원서들이 섞여 있었다. 어지간한 독서가도 벅차게 느낄 정도의 콜렉션이었다.


책장을 살피던 프로메테우스의 눈이 다섯 번째 칸에서 정지했다.


(왜 이런 곳에 이 책들이 있는 거지?)


그곳에는 짙은 황토색 표지에 금박으로 제목을 새긴 고전문학전집 수십 권이 꽂혀 있었다. 제본 방식으로 볼 때 10년 이상 된 책들이었다. 위쪽에 꽂힌 책들과 성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가 아는 이아페토스는 과시용, 장식용으로 책을 꽂아둘 사람이 아니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책장 유리문을 연 다음 전집을 빼냈다. 전집들을 20권쯤 빼내자 서가 안쪽 벽에 감춰진 은빛 노트북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트북의 전원을 켜자 곧바로 암호를 입력하라는 창이 떴다.


(역시나 쉽지 않군······)


‘이아페토스’를 한글과 영문으로 입력했지만 잘못된 암호라는 메시지가 떴다. 자신의 코드명을 넣었으나 마찬가지였다.


허공에 머물던 프로메테우스의 눈길이 서가에 꽂힌 책등에 내려앉았다. 다윈의 <진화론>, 존 로크의 <통치론>, <인간지성론>, 맹자의 <맹자>, 체 게바라의 <체의 일기>,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사카모토 료마의 <료마가 간다> 등의 제목들이 눈에 들어왔다.


단어들이 눈앞에서 부유하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프랑스, 바스티유 감옥, 보스턴 차 사건, 체 게바라 ···


단어들을 생각나는 대로 쳐보았다. 역시나 소용없었다.


이아페토스라면 아무 뜻도 없는 단순한 단어를 암호로 사용할 리 없다. 분명히 이번 프로젝트와 연관된 단어를 조합하거나 의미 있는 단어를 선별해서 암호로 만들었을 것이다.


(이번 프로젝트를 한 단어로 압축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프로메테우스는 지금 상황을 머릿속에서 잊고 가부좌를 틀고 제자리에 앉았다. 기억의 방에 보관되어 있는 잠재의식들을 총동원해서 단어를 찾아야 했다.


(선생님은 이 사회가 이대로 흘러가면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이아페토스는 프랑스의 시민혁명, 미국의 독립전쟁, 영국의 명예혁명, 루소의 사회계약론 등을 자주 이야기해 주었다. 그들은 모두 다른 상황, 다른 장소에 있었지만 원하는 것은 같았다.


“ 불합리와 부조리가 극에 달한 사회에서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기득권의 반성과 자정에 의한 개혁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게 역사가 증명한 사실이지. ”


사회가 혼란해지고 피지배계층의 불만이 극에 달하게 되면 구시대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는 새로운 사상과 철학을 가진 소수의 지도자들이 반드시 출현하기 마련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오직 하나뿐이다.


‘부조리한 현실을 바로잡고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 목표를 압축하고 선명한 이미지로 재현하기 위해, 동지들을 독려하기 위해, 미래의 동지들을 위해 시대를 앞서 간 선구자들은 하나의 단어를 사용했다.


어느 순간 프로메테우스의 머리 속에서 이미지들이 합쳐지며 섬광처럼 하나의 단어를 만들어냈다.


혁명(Revolution).


프로메테우스는 주저하지 않고 입력창에 영어 단어를 채워 넣었다. 그러나 잘못된 패스워드라는 경고 메시지가 보란 듯이 다시 떴다.


(이럴 리가 없는데?)


프로메테우스는 Revolution이라는 단어를 둔 채로 영어와 숫자, 영어와 한글, 영어와 특수문자를 조합한 진입 시도를 반복했다. 20여 분이 훌쩍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경고 메시지가 사라지고 푸른색 윈도우 배경화면이 나타났다. 천신만고 끝에 암호를 찾아낸 것이다.


Revolution1789.


(그렇군. 프랑스 시민혁명이었어···)


프로메테우스는 망설였다. 지금부터 하려는 일은 선을 넘는 것이었다. 이아페토스의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선을 넘지 않으면··· 더 이상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불가능해!)


지금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원인을 규명하려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프로메테우스는 결국 앞으로 나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바탕 화면에는 폴더 네 개가 전부였다. 폴더에는 각각 이아페토스, 프로메테우스, 미다스, 패리스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각각의 폴더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처럼 보였다.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지만 틀림없이 좋지 않은 것들이 들어 있을 것 같은 판도라의 상자였다. 폴더들을 여는 순간 지금까지와는 다른 운명이 자신을 옥죄리라는 예감이 엄습했다.


이아페토스 폴더를 클릭했다. 안에는 연도와 월별로 구분한 서브 폴더들이 들어 있었다. 폴더 하나를 골라 누르자 한글 파일들이 나타났다. 파일들은 모두 8개의 숫자들로 표현되어 있었다. 날짜였다. 파일들은 이아페토스의 일기였다.


프로메테우스 폴더를 열었다. 폴더 안에는 압축파일 한 가지와 프로메테우스라고 이름 붙인 문서파일이 들어 있었다. 암호가 걸려 있는 압축파일은 용량이 100메가가 넘는 대용량 파일이었다.


‘프로메테우스’ 문서 파일을 열었다. 프로메테우스를 처음 만나게 된 계기부터 성장을 지켜보면서 느낀 감정들, 프로메테우스의 고민과 갈등에 대한 본인만의 단상을 더한 글들이었다. 아버지 같기도 하고 선생님 같기도 한 느낌이었다.


패리스 폴더 내부는 숫자 폴더들로 다시 분류되어 있었다. 1이라고 이름붙인 폴더를 열어보니 jpg파일과 한글파일이 섞여 있었다. 파일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가 찾던 살생부 파일이었다.


이현수 1이라고 적힌 파일을 클릭했다. 이현수를 제거하기 전에 그가 받은 파일이었다. 2라고 적힌 폴더를 열었다. 수백 장의 jpg파일들이 나타났다.


프로메테우스는 망연자실해졌다. 실제로 확인한 정보의 양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현수의 집부터 회사, 만나는 사람들, 계좌 정보, 비리 사항들이 모두 적혀 있었고 각각의 관련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이 정도로 구체적이고 비밀을 요하는 정보라면 정보 기관에 내통자가 있거나 공공기관을 제집 드나들 듯 할 수 있는 해커가 필요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모았을까?···)


의혹이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혹 떼러 왔다가 혹을 붙인 꼴이었다.


차영호, 배전기, 김성구 파일도 마찬가지였다. 이아페토스가 가지고 있는 오리지널 파일은 그가 받은 파일보다 훨씬 방대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었다.


(······!)


그 중의 텍스트 자료를 보게 된 프로메테우스는 할 말을 잃었다. 그가 모르고 있던 희생자들에 관한 사항들이 드러나 있었다.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이아페토스에 대한 의심이 더욱 커졌다.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했다.


(왜 혼자 그 사실을 숨기고 계셨던 걸까?)


그러나 정작 프로메테우스를 놀라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미다스 폴더 안에 있는 파일들이었다.


그 자료는 놀랍게도 손으로 적은 것을 다시 스캔한 것이었다. 서류에 적혀 있는 글들은 모두 이아페토스의 필적이었다. 몇 달 혹은 오랜 기간에 걸쳐 적어 놓은 것이 분명했다. 그 자료들이 의미하는 사실은 명백했다. 이아페토스가 자신이 모르는 제3의 기관과 모종의 연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내게 한 마디 말도 없이?)


청천벽력이었다. 허탈하면서도 공허했다.


이아페토스가 대화 도중 찰나지간 머뭇거렸던 이유도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이아페토스는 누가 미행을 했는지 짐작을 했다는 뜻이었다.


미다스 폴더 안에는 피닉스, 도플갱어, 헤파이스토스라고 이름 붙은 서브 폴더가 들어 있었다. 서브 폴더는 모두 다른 암호가 걸려 있어서 여는 데 실패했다.


파일들을 USB에 옮겨 담은 후 노트북을 원래 장소에 되돌려 놓았다. 전집을 제자리에 꽂아 놓고 손댄 흔적이 드러나지 않는지 면밀히 확인한 후에 대문을 나섰다. 충격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도대체 선생님은 왜 다른 조직을 끌어들이려 한 것일까?)


이아페토스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자신의 신념과 철학에 한결 같은 태도를 보여온 그가 이제 와서 그를 배신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다만 말 못할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쳐도 제 3자와 함께 하기로 한 그의 결정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어야 비밀로서의 가치가 유지되는 법이다. 이아페토스 본인도 믿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 까닭에 지금과 같은 위치로 추락하지 않았던가.


그들이 원하는 결과를 이루었을 때 과연 어떻게 나올 것인가? 목표 달성 이후에 정체 모를 신비조직이 두 사람을 걸리적거리는 방해물로 여기지는 않을 것인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그들의 입장에서 두 사람은 토사구팽을 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언젠가 자신들을 파멸로 이끌 골칫거리가 될지도 모를 인물들을 두 명이나 살려둘 조직이 과연 있기나 할까? 세상의 모든 계약에서 열등한 쪽은 언제나 이용만 당하고 제거되기 마련이다.


이렇게 된 바에야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다. 이쪽을 삶아 먹으려고 솥에 물을 끓이고 있는 상대에게 자진해서 목을 내밀 생각은 없었다.


상대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먼저 알아야 했다. 힘의 우위를 갖고 있는 상대에게 무작정 덤벼봐야 개죽음만 당할 뿐이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의 방심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들은 두 사람에 비해 절대적인 힘과 조직의 우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두 사람 쯤은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쉽게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개도 솥을 걷어 찰 수는 있는 법이다. 방심한 상대에게 끓는 물을 쏟아 부을 수만 있다면 승부는 아직 모를 일이었다. 그들은 사람을 잘못 보았다.




Si vis vitam, para mortem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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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82. 발본색원 18.01.22 76 0 16쪽
82 81. 백주결전 18.01.22 342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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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68. 반격의 시작 17.12.30 109 0 10쪽
68 67. 하이에나 군단 17.12.29 100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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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65. 의외의 희생자 17.12.27 109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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