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황제
장원산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용형매도 떠났다. 천살은 아무곳에서나 만나서 이야기 할 것이지 별 짓거리 다 한다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사실 제삼자를 통해 연락했기에 정확한 지점을 정하지 않고 개봉성 남쪽의 객잔에서 방을 잡고 기다리라고 장원산이 정한 것이다.
고삼에게 침대에서 자라고 말한 뒤 야행의로 갈아입고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야행의라 해봤자 검은색에 가까운 회색의 천으로 최대한 몸에 붙게 만들어서 기척도 줄이고 눈에 잘 안 띄게 한 것뿐이다. 천살은 경공을 사용해서 개봉성의 성벽을 가볍게 넘었다.
법사는 개봉성에서 사십리가량 떨어진 곳에서 진행한다. 주체는 처음 며칠 얼굴을 내비친 후 개봉에 머물고 있다. 끝나는 마지막 날 한번만 더 얼굴을 내비치면 법사가 끝나는 것이다. 비록 주체는 개봉에 머물고 있지만 금의위와 동창의 정예들이 다른 특무조직들을 지휘하여 응천부에서 대신들의 뒷조사를 세밀하게 진행하고 있다.
법사는 주체가 응천부를 비워서 일부러 틈을 보여 반심을 품은 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꾸민 일이다. 당연히 법사에 관심이 없기에 처음 며칠 얼굴을 내비치고 개봉부윤의 저택에서 조정의 일을 처리하는데 몰두하고 있다. 안으로 세겹 겉으로 세겹 둘러싸여 있어서 쥐새끼 한마리도 얼씬하지 못하고 있었다.
횃불로 장원의 곳곳이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지나다니는 하인과 하녀들도 계속 검문을 당했다. 밖에서 두시진간 지켜본 후 천살은 겨우 틈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명현공이 아니었다면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명현공은 사람이 눈으로 보고도 인지하지 못하게 하는 신공이다. 천살이 눈에 띄는 짓을 하지만 않는다면 돌멩이나 나무처럼 인식되어 주의를 끌지 않는다. 덕분에 천살은 가만히 서서 명현공을 운기하는 것으로 몇번의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그것도 어두운 곳이어서 가능한 것이다. 장원의 내부로 들어가자 어두운 구석이 거의 없을 정도로 횃불들이 촘촘했다. 특히 중심부에 접근할 수록 횃불이 많아 아예 접근이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천살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자 일부 횃불들이 꺼졌다. 곧 하인들이 꺼진 횃불 대신 새 횃불을 밝혔다. 그 어수선한 틈을 타서 천살은 창고로 보이는 건물까지 전진했다. 보통 창고를 외곽지역에 짓는다는 것에 비추어 볼 때 담벼락에 그대로 있는 것이나 크게 다름이 없다.
두번째 기회는 새벽이 끝나고 아침이 밝아올 때였다. 천살은 창고로 보이는 건물에서 옆 건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내공으로 창문을 열고 안에 들어가보니 여러가지 서책들이 가득한 서고였다. 천살은 서고 한켠에 자리를 잡고 가벼운 잠에 들었다.
며칠씩 잠을 자지 않아도 크게 지장이 없지만 얕은 잠이라도 자서 집중력을 회복하는 것이 좋다. 일반무사들의 눈을 피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것이라고는 천살은 예상하지 못했다. 몇달전부터 금의위와 동창이 이곳에서 수없이 침투훈련을 하며 자객의 침입에 대비했음을 천살은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사흘째가 되어서야 천살은 겨우 주체가 머무는 방에 접근할 수 있었다. 셋째날 낮에 움직이는 것이 밤에 움직이는 것보다 훨씬 쉬움을 발견한 천살은 허탈함을 느꼈다. 낮에 사람들의 집중력이 오히려 낮아져서 더 쉽게 움직일 수 있는데 밤에 움직이는 것을 고집하며 시간이 사흘이나 걸린 것이다.
주체는 자신의 앞에 홀연히 나타난 거구의 사내를 보고 침착한 어조로 질문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물론이오. 앉아도 되겠소?"
천살의 대답에 주체는 피식 웃고 의자를 가리켰다. 황제인 자신의 앞에서 자리에 앉아도 되냐는 것은 황제의 권위가 소용 없으니 피차 시간낭비를 하지 말자는 의미이다.
"뭔가 이상하긴 하다만 내가 먼저 질문하자. 어떻게 여길 들어온 것이냐?"
"사흘에 거쳐 천천히 걸어 들어왔소. 애꿎은 수하들을 탓하진 마시오."
주체는 의자에 앉은 사내가 세번이나 사라졌다 나타나는 것을 보고 내심 놀랐다. 동시에 상대와의 협상에서 이미 지고 들어갔음을 직감했다. 굳이 얼굴까지 드러내고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은 자신에게 원하는게 있다는 뜻이다.
"누군지 알고 싶구나."
"명화교의 소교주 천살이라고 하오."
"네가 서창훈을 죽였다는 그 천살이구나. 이해가 되는구나."
무공에 문외한인 주체는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타나는 천살 정도면 서창훈을 쉽게 죽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높은 경지에 있는 자들은 기감으로 천살을 느낄 수 있기에 명현공을 극성으로 익히지 않고는 일정 경지 이상의 고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약속을 지키라고 빚 재촉하러 왔소."
주체는 조금 큰 소리로 웃었다. 고리대를 염왕채라고 한다. 한번 걸려들면 염왕을 보러 갈 때까지 벗어나기 힘들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빚을 받아내는 자들을 소염라 혹은 염라꾼이라 부른다. 주체는 어릴때 일반 서민들과 섞여서 살았기에 이러한 것들을 잘 알고 있다. 황제인 자신에게 염라꾼이 찾아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약속한 재화와 식량은 늦지 않게 보내주도록 하마. 내 목숨값에 비하면 그 정도는 공짜나 다름없지."
천살은 주체의 말에서 진심을 느꼈다. 고수가 되면 상대의 기운의 움직임이 원활한지만 보고도 상대가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아니면 숨기는게 있는지 알 수 있다.
"교주와의 거래에 대한 약속은 지키리라 믿겠소. 그럼 지금부터 나와 거래를 하지 않겠소?"
"말해보거라. 솔직히 거절할 엄두가 나지 않는구나."
주체는 은근슬쩍 거래가 아니라 협박이 아니냐는 투로 대답했다.
"관과 무림의 상호 불가침을 선언해 주시오. 무림 문파들간의 싸움에는 관이 간섭하지 않는다고 말이오. 일반 백성들에게 피해만 없다면 다 눈감아준다고 하시오."
천살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세력을 확장하고 공고히 한 후 필요없거나 해가 되는 자들을 솎아내야 한다. 그후 또 세력을 확장하고 공고히 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교주와 사장로의 세력을 힘으로 눌러야 한다.
동시에 천살 자신의 무위를 제대로 끌어올릴 시간도 필요하다. 일년여의 시간이 더 흐르면 신화공이 다시 움직일 것이다. 그때 신화공을 제대로 수련해서 교주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다. 그리고 무림맹과의 전투를 통해 자신의 무공을 다듬을 것이다.
"거래라고 했으니 나한테도 뭔가 돌아오는 것이 있겠군."
"지금 강호에는 나보다 강한 고수가 최소 열은 넘소. 서창훈과 같은 경우는 천운이 따라 내가 이겼지만 실력으로만 겨뤘다면 내가 졌을 것이오. 서창훈은 어검술이라고 검을 허공의 띄우고 마음대로 조종했소. 장원밖에서 장원안의 누군가의 목숨을 취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오."
주체는 고수들처럼 상대의 기운으로 진실인지 아닌지 판단하는게 불가능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뤄본 경험으로 천살의 말이 진실일 가능성이 높음을 안다.
"남궁세가에 남궁천이라고 있소. 그라면 그저 홀몸으로 검 하나 들고 장원으로 쳐들어와 아무의 머리를 베어버릴 수 있소. 강호에는 이러한 자들이 얼마나 더 있을 지 모르오. 이런 자들을 우리 명화교가 대신 상대해 주겠소. 그러니 청해호를 중심으로 어느정도 권역을 명화교의 영역으로 인정해 주시오."
주체는 머리가 비상한 자이다. 이런 고수를 보유한 단체가 다른 형제들과 손잡고 주체의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다만 대부분의 문파들이 권력다툼에 연루되는 것을 싫어한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먹고 살 방도가 많기에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천살이 교주가 된 후 주체가 아닌 다른 형제나 조카와 손을 잡아버리면 주체의 목숨도 위험하다. 거래라고 했지만 협박이나 다름없고 협박이지만 거래이다. 주체는 자신이 외통수에 걸려들었음을 인정했다.
"듣고보니 내가 손해볼 일이 하나도 없구나. 이런걸 거래라고 해도 되는지 모르겠구나."
황제인 자신이 상대의 협박에 굴했다는 것을 인정해서는 안된다. 설사 칼날이 심장을 향해 찔러들어와도 웃어야 한다. 심장을 찔리고 살 수 있는지는 몰라도 겁먹은 표정을 지으면 무조건 죽는다. 굶주린 들개들이 득달같이 달려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신으로 얻은 정보가 있소. 첫 거래의 선물로 드리는 것이니 사양하지 않으셨으면 하오."
천살의 말에 주체는 상대가 만만치 않음을 인정했다. 자신의 말에 전혀 흔들리지 않고 본인이 할 말을 다한다. 이 자와 가깝게 지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주체는 천살의 말에 집중했다.
"모용세가라고 알 것이오. 예전에는 왕족이었다고 하던데 최근 무림의 세력들을 모아서 서남쪽에서 일을 만들 예정이라고 하오."
황제의 자리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는 주체에게 반란은 민감한 화제이다. 반란이라는 것은 전염병과 같아 한곳에서 누가 들고 일어나면 다른 곳에서 곧바로 누군가 호응한다. 반드시 초기에 진압해야 하며 가장 좋은것은 반란이 아예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형산파라고 있소. 그 지역에서는 화산이 서안 지역에서 가진 위치와 비슷한 문파요. 형산파의 장원산이라는 작자가 모용세가와 손을 잡고 장문인의 자리를 찬탈할 생각이오. 그리고 남궁세가와도 손을 잡아 남궁천을 무림맹주로 만든 다음 무림왕의 칭호를 받아낼 계획이라고 하오."
천살은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입을 연 것은 아니다. 그저 모용가와 장원산에게 찬물을 뿌리고 싶었는데 말하다보니 그럴듯해 보였다.
"아마 형산을 중심으로 호남과 귀주의 땅 일부를 탐내는 것 같았소. 전쟁이라면 몰라도 도성내에서의 싸움이라면 무인들이 병사들보다 훨씬 강할 것이오. 남궁천이 무림왕의 칭호를 받아내면 남궁가와 모용가가 혈연을 맺는 것으로 협상되었소."
광서 지역과 귀주지역은 반란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두 지역에서 반란으로 목숨을 잃은 자들이 대충 합산하면 백만은 몰라도 팔십만은 될 것 같다. 형산은 호남땅에 있고 서로 귀주가 남으로 광서가 있다. 역심을 품은 자들이라면 노릴만한 곳중의 하나이다.
천살의 말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면 말이 안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남궁천이 무림맹주가 된다고 해도 수많은 무인들을 반역에 가까운 일에 동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황제라는 자리는 반역을 하려는 자들을 공정하게 가려내는 자리가 아니다. 반란할 능력과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미리 제거해야 하는 자리이다.
"그럼 이만 작별인사를 올리겠소. 혹시 또 찾을 일이 있을지 모르니 연락책 하나를 지정해 주시오. 이런 만남은 폐하께서 그리 반가울 것 같지 않으니 말이오."
천살은 그대로 떠나지 않고 이틀간 더 장원에 머물렀다. 주체가 수하들에게 모용세가와 장원산의 정보를 모으게 하는 것을 확인하고 떠났다. 나갈때는 들켜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더 대담하게 움직였는데 들키지 않았다. 오일동안 명현공을 실전을 통해 수련하며 작지 않은 발전을 이룬 것이다.
"폐하, 장원산이라는 작자가 자기 심복들에게 모용가와 손잡고 형산을 차지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합니다. 그리고 취중에 남궁천이 왕이 될 것이라는 말도 했다고 합니다."
장원산이 말한 왕은 무림맹주를 뜻하는 말이다. 하지만 주체의 귀에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설사 반란의 마음이 없더라도 반란의 마음을 가진 누군가에게 이용될 수도 있다.
"형산파에 사람을 파견하여 장문인과 그 세력들을 포섭하고 도움을 주어라. 그리고 무림맹의 맹주선출에 개입하여 소림이나 무당이 맹주가 되도록 만들거라."
"그리고 너는 명교에 약속한 재물과 식량들을 전달하도록 해라."
"너는 관과 무림이 서로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서를 작성하거라. 일반백성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무림인끼리 다투는 것은 관에서 관여하지 않음을 명시하거라."
천살의 작은 심술때문에 장원산과 모용세가 그리고 남궁세가의 야욕이 분쇄되었다. 거기에 국법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진 강호는 다시 예전의 피비린내나는 강호로 돌아갈 것이다. 이제 천살에게 남은 것은 힘을 키우는 것이다. 하늘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힘을 키워 누군가의 손에 놀아나는 일이 더이상 없어야 한다.
- 작가의말
천살 : 모용세가 미워할꼬야.
천살이 심술이 좀 많습니다.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러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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