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복면천마
천리마회장의 당부 때문에 천마는 당분간 행사도 멈추기로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신화공이 모이지 않는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천마의 존재를 알리고 신도화해야 신화공이 더 많아질 수 있다. 그러한 고민을 비서실장인 화운이 해결해 주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의 MC 김성수입니다."
충성과 의리의 대명사인 김성수가 MC를 보는 음악예능인 복면가수가 시작되었다. 대학 졸업후 바로 아나운서가 되어 수십년간 방송국에 헌신한 김성수는 수많은 아나운서 후배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오늘 첫번째 무대를 꾸며줄 두분을 소개하겠습니다. 첫번째로 등장할 분은 천고마비, 가을은 독서의 계절, 텍본마니아입니다."
훤칠한 키에 메모장 가면을 쓴 남자가 성큼성큼 등장하자 연예인 판정단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미모의 개그우먼 신여포가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어머, 모델인가봐, 저 기럭지를 봐."
"두번째로 등장할 분은 바로 이분입니다. 책은 내 머리를 채워주는 양식, 스캔본매니아."
두번째로 등장한 남자는 책장을 펼친듯한 모습의 가면을 썼다. 다만 중간부분에 음영이 자리하여 실제책이 아니라 스캔본임을 강조했다.
"아이돌 대 아이돌인가봐."
신여포의 말에 연예인 판정단은 전부 고개를 끄덕였다. 판정단들은 잽싸게 머릿속에 들어있는 아이돌 리스트중 요즘 이슈가 되어 복면가수에 나올만한 자들을 스캔했다.
전주가 울리고 텍본마니아가 먼저 노래를 시작했다. 모 드라마의 OST로 유명한 '나 아파도 살아야해' 가 시작되자 모두 관심있게 지켜보았다. 텍본마니아는 시작하자마자 반주를 무시하고 4옥타브로 노래했다.
텍본마니아의 고음에 밴드의 반주가 끌려갔다. 거친듯 정돈된 목소리가 4옥타브의 고음으로 귀를 시원하게 뚫어주자 관객석이 삽시간에 난리가 나버렸다. 텍본마니아의 파트가 끝나고 스캔본의 파트가 되자 갑자기 4옥타브에서 2옥타브로 음이 추락했다. 사납게 뛰던 심장이 차분하게 가라앉자 관객석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스캔본매니아는 자신이 노래부르자 순식간에 조용해진 관객석에 위축되어 노래를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다시 텍본마니아의 파트가 되자 반주가 갑자기 달라졌다. 미리 4옥타브에 걸맞게 반주를 조절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텍본마니아는 밴드를 농락했다. 5옥타브의 고음으로 노래를 이끌어갔다.
결국 노래가 다 끝날때는 8옥타브로 절정부분을 마무리했다. 스캔본매니아는 정신이 절반정도 빠져서 자신의 파트를 놓치기까지 해 투표도 필요없이 승패가 판명났다.
"두분의 노래 참 잘 들었습니다. 투표집계가 끝나기전에 잠시 인터뷰시간을 가지겠습니다. 두분 제 옆으로 와주세요."
그후 김성수 아나운서는 스캔본매니아에게 개인기를 마구 시켰다. 어차피 다음 라운드는 없기에 여기에서 분량을 충분히 뽑아야 한다. 스캔본매니아의 빽이 아주 든든하기에 분량을 충분히 뽑아야 한다고 PD가 미리 언질을 주었다.
"자, 이제 텍본마니아님의 개인기를 볼 시간이 되었습니다. 개인기로는 팔굽혔다펴기라고 적어주었는데 아주 남성적인 개인기네요."
마이크를 김성수에게 건네준 텍본마니아는 물구나무를 섰다. 물구나무를 선 상태에서 왼팔을 치우고 오른팔만으로 몸무게를 지탱했다. 그 상태에서 가볍게 다섯개의 팔굽혀펴기를 한 텍본마니아는 관객들의 열화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자, 마지막으로 두분 텍본과 스캔본의 장점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스캔본은 실제 책을 보는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죄책감이 덜하죠. 이는 텍본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장점입니다."
스캔본매니아가 먼저 치고 나오자 관객들은 열렬히 박수를 쳤다. 공감이 많이 가는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관객들의 박수가 끝나기도 전에 텍본마니아가 입을 열었다.
"배경색 조절 가능, 폰트 크기 조절 가능, 글씨체 조절 가능, 글씨색 조절 가능, 원하면 책의 느낌이 나게 할 수도 있음. 끝."
스캔본매니아가 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마이크의 음성변조 때문에 쓰러지는 소리가 이상하게 변조되어 퍼졌기에 사고에 당황해야 할 관객과 판정단이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구급대원들이 급히 투입되어 스캔본매니아를 데리고 나갔다. 구레나룻이 인상적인 구급대원이 인공호흡으로 스캔본매니아를 깨웠다. 강력한 입맞춤에 정신을 차린 스캔본매니아 강사성은 눈물을 흘리며 대기실로 돌아갔다.
"외할아버지, 저 오늘 비웃음 당했어요. 복수해 주세요. 텍본마니아 혼내주세요."
전화를 끊은 강사성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풀렸다. 현장로는 막내딸 현처양모와 사위 강쇠변을 매우 마음에 들어했다. 거시기 빼고 전부 아버지를 닮은 강사성도 훤칠한 외모로 현장로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곧 녹화가 재개되면 자신이 텍본마니아를 꺾고 2라운드에 진출할 것이다.
"야 이 개새끼야. 지난번에는 운이 좋아 백화점 하나로 싸게 무마했는데 또 사고를 치냐? 올해부터 명절은 네 애비랑 함께 집에서 쇠거라."
현장로의 폭언에 강사성은 다시 혼절했다. 곁에서 호시탐탐하던 구레나룻이 번개같이 달려가 인공호흡을 시도했다. 강렬한 인공호흡에 강사성은 다시 눈을 떴다. 하지만 눈썹밑에 달린 두눈을 제외하고 다른 눈도 함께 떠버렸다.
"자, 텍본마니아와 스캔본매니아의 대결 결과를 기다리며 다들 손에 땀을 쥐고 있을 겁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취향의 차이이지 수준의 차이가 아닙니다. 불의의 사고로 스캔본매니아가 참가할 수 없게 되어 다른분이 가면을 쓰고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시청자분들의 양해를 바랍니다."
99 대 0의 아슬아슬한 표차이로 텍본마니아가 승리하자 텍본마니아를 지지하는 관객들이 환호와 함께 기립박수를 보냈다. 2라운드 대결을 준비하기 위해 대기실로 돌아간 텍본마니아는 방금 부른 노래를 회상했다.
나 슬퍼도 살아야해는 아주 슬픈 노래이다. 텍본마니아는 이 노래를 부르며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절세미녀들이 세수를 시켜주고 옷을 입혀준다. 아침상에 반찬이 99가지가 올라오는데 맛없는 것 하나 찾기 힘들다. 유능한 대신들이 국사를 전부 깔끔하게 처리해서 자신은 도장만 찍으면 된다. 손도 필요없이 마음이 움직이면 도장이 알아서 움직였다.
오후가 되면 미인대회 심사관이 되어야 한다. 전세계에서 몰려온 참가자들을 심사해야 하고 최종 32인에 든 미녀들 전부 후궁으로 들여야 한다. 저녁이 되면 백명도 누울 수 있는 커다란 침대에 미녀들이 득실댄다. 참으로 피곤한 삶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슬픈 삶을 끝내기 위해 무단히도 노력했지만 불사공 때문에 죽을 방법이 없다. 한번은 머리를 잘라냈는데 삼일이 지나도 죽지 않아 다시 머리를 붙였다. 몸과 분리된 머리가 둔해져서 다른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단함과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에 질려 삶을 끝내고 싶은데 죽을 방법이 없었다.
'나 슬퍼도 살아야해, 나 슬퍼도 죽을 수 없어.'
가사를 되뇌이며 전생의 비참했던 삶을 회상하던 텍본마니아는 제작진에게 다음 상대가 누구인지 물어보았다. 하지만 제작진은 공평함을 위해 알려줄 수 없다고 말을 아꼈다.
2라운드가 되자 맨먼저 무대에 올라간 텍본마니아는 모두의 예상을 벗어나서 유명한 저음가수 조운장(운장은 삼국지 관우의 자입니다. 혹시 모를 분이 있을까 사족 답니다. 위에 신여포가 나오는데 여포의 자는 봉선이죠.) 히트곡 높을 불렀다. 잠이 솔솔 오게하는 저음으로 인해 관객들은 노래가 끝난 뒤 박수칠 타이밍을 놓쳤다.
"천고마비, 가을은 독서의 계절, 텍본마니아의 상대는 이분입니다. 지난 라운드에서 우리들에게 익숙함을 선물한 분이시죠. 너희들이 창작의 고통을 아느냐, 표(剽)현이 절(竊)묘한 작가, 읍읍읍. 여러분 큰 박수로 맞이해주세요."
읍읍읍은 롤라의 천상무애를 불렀다. 한국가요사상 최고의 창작곡이라 불리우고 작곡가 본인이 창작곡임을 친히 밝혀서 당시 화제가 되었던 노래이다. 신나는 노래에 관객들이 높은 호응을 보내주었다.
"자 두분 개인기도 다 보았습니다. 투표결과 공개하기 전에 각자 상대의 노래에 대한 감상평을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텍본님은 아주 새로웠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고음이 아니면 먹히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저음으로 일관된 노래는 예술성은 몰라도 대중성은 없습니다. 조운장씨도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후광이 아니었으면 한국가요계에 발도 붙이지 못했을 겁니다. 낙승을 자신합니다."
읍읍읍의 말에 텍본마니아가 입을 열었다.
"표현이 절묘한 글들은 텍본으로 읽어야 합니다. 돈주고 읽기 아깝거든요."
읍읍읍이 쿠당 하고 쓰러지자 제작진은 머리가 아파왔다. 텍본마니아의 상대가 연속으로 쓰러지면 조작의혹이 제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첫 대결 99대 0의 간소한 차이 때문에 말들이 나올게 뻔한데 2라운드에도 상대가 쓰러졌으니 문제가 크게 불거질 수도 있다.
2라운드 역시 99 대 0의 간소한 차이로 텍본마니아가 승리했다. 텍본마니아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대기실로 돌아갔다. 두번의 대결 다 운이 좋았다. 50명만 변심했어도 질 수 있는 간당간당한 스코어이다.
"텍본님, 대결에서 지면 가면을 벗어야 합니다. 그건 절대 안되는거 아시죠? 꼭 승리하셔서 가왕이 되셔야 합니다."
3라운드 시작전에 걸려온 전화 때문에 텍본마니아는 젖먹던 힘까지 다해서 노래를 불렀다. 4옥타브에서 8옥타브까지 자유자재로 오르락내리락하는 편곡에 관객과 연예인 판정단은 시종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지 못했다.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속에서 놀던때가
그립습니다'
모든 국민이 따라부를 수 있고 매년 봄이 되면 '벗고앤딩'을 2위로 밀어버리는 인기곡이라 관객들의 반응은 무척이나 열정적이었다. 관객들의 열렬한 호응에 점점 힘이 더 강해지는 것이 느껴지자 텍본매니아는 힘을 더 짜내 9옥타브로 음을 올려버렸다.
9옥타브의 소리에 테러당한 귀들은 텍본마니아의 경쟁상대인 '악플은 삭제하고 악플러는 차단한다, 비난도 악플 비판도 악플, 문피아는 악플러들의 천국, 내가 바로 양심작가' 의 노래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높은 음에 고막이 일시적으로 기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자, 두분 마지막으로 소감 한마디씩 부탁드립니다."
"작가는 힘듭니다. 아주 예민하구요. 그러니 제발 악플 달지 말아주세요. 당신들은 쉽게 생각하고 단 '개연성이 부족해 보입니다' , '앞뒤가 모순되네요' , '설정에 구멍이 여러개 보입니다' 와 같은 악플들 때문에 밤잠을 설칩니다."
양심작가의 말에 텍본마니아가 말을 받았다.
"저런분의 글은 텍본으로도 안 봅니다."
양심작가가 쓰러지기도 전에 구급대원들이 무대로 달려왔다. 그래서 양심작가의 머리가 바닥에 닿기 전에 부축할 수 있었다.
"이분은 유료작가입니다. 헌법규정상 지금 당장 보호조치를 해야 합니다."
이번에도 99 대 0의 근소한 차이로 이기자 관객들은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절묘했기 때문이다. 미리 짠 것처럼 똑같은 스코어로 아슬아슬한 승리를 따내니 너도나도 누구에게 투표했는지 질문하기 시작했다.
"자, 여러분. 오늘 진짜 말도 안되는 우연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불신과 의혹을 가진 분들도 계실겁니다. 그 모든것을 씻어버리기 위해 텍본마니아가 노래 한곡 부르겠습니다."
제작진의 정중한 요청에 텍본마니아도 동의했다. 어린소년(YB)의 유명한 히트곡 'LOVE둘'을 락버전으로 불렀다. 가요계사상 동요를 락으로 공중파에서 부른 첫 시도일 것이다.
'그래, 난 너희 둘다 사랭해. LOVE 둘.
이런 나를 바람둥이라 욕하지마.
옆반 철수는 세명이랑 사귀고 있어.
그리고 우린 결혼한 사이도 아니잖니.
법적으로도 아무 문제 안돼.
우리 그저 순수한 동심으로 마음껏 사랑하자.'
순수함이 묻어나는 가사와 텍본의 맑고 청아한 고음이 맞물려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동요 하나로 곤객들의 동요하던 마음이 안정되었다. 곧 가왕의 무대가 시작되었다.
"자, 이미 일년간 가왕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절대가왕의 등장입니다. 환생자는 회귀자의 상대가 안돼, 회귀매니아."
회귀매니아는 80년대의 명곡 '슬픈기억'을 불렀다.
'그러나 그 시절에, 다시 회귀할 수 있다면, 운명 바꿀수 있을까.
바뀌어진 그 운명에, 나는 또 얼마나, 많은 콧물을 흘리려나.'
가왕의 노래가 끝나고 투표도 끝났다. 투표결과를 기다리면서 회귀매니아는 이를 갈았다.
'제길, 번마다 다르지만 몇달에서 몇년안에 게이트가 열리고 던전이 생긴다. 그리고 나는 잘나가는 헌터에게 여친을 빼앗긴다. F급 판정을 받고 인생에 비관하면서 몬스터 시체나 도축하면서 평생을 살겠지. 하지만 왕의 칭호를 유지할 수 있다면 SSS급이 된다. 그때 가왕의 자리를 차지한 자가 음공을 터득해 절세신음(絶世神音)이라는 SSSSSS급 타이틀을 얻었지. 무려 마력을 +50 해주는 레전드급에 조금 못 미치는 전설급 타이틀.'
"투표결과를 공개합니다."
김성수의 외침과 함께 역시 텍본마니아가 99 대 0의 근소한 차이로 가왕의 보좌에 올랐다. 다리가 풀린 회귀매니아는 무대에 주저앉은 채 고민했다.
'열두번이나 회귀했는데도 또 가왕의 자리를 빼앗겼구나. 제길, 한번 더 회귀하는 것은 너무 지랄맞은데.'
- 작가의말
텍본은 마니아이고 스캔본은 매니아입니다. 일부러 그렇게 쓴 것이니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당연히 마니아가 표준어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사실 낮술을 조금 한 상태이기에 본편은 좀 그래서 외전 한편을 올립니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술보다는 약이 낫다는 것입니다. 최근 집 주변 약방의 약들이 전부 떨어져서 이사를 가야할지 고민입니다. 주인공이 나오지 않아 당황한 분들도 계시겠지만 외전이니 양해 바랍니다.
이 외전으로 새해의 첫날에 여러분의 얼굴에 작은 웃음꽃이라도 피었으면 합니다. 날이 바뀌고 달이 바뀌고 해가 바뀌었으니 우리 삶도 더 좋게 바뀌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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