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공탄생
초화규는 비급을 품속에 넣은 뒤 몇겹의 옷을 더 끼어 입었다. 그간 떨어진 자들의 옷들 중 그나마 완전한 것들을 모아둔 것이다. 시간이 오래되어 입고 있는 옷이 언제 찢어질지 모르기에 옷을 여러벌 껴입었다. 혹시나 품속의 비급이 떨어질까 걱정된 것이다.
천마신공의 장점이라면 빠른 성취와 심후한 내공에 있다. 그리고 내공의 회복도 매우 빠른 덕분에 초화규는 큰 위기가 없이 복마전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초화규는 예상못한 복병을 만났다. 오랜 기간 복마전에서 생활했던 초화규에게 태양은 너무나 눈부셨다.
다시 복마동으로 돌아온 초화규는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깊은 밤이 되고 달빛도 어두워서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또다시 낮이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초화규는 인내심을 가지고 복마동에서 밤을 지새웠다.
아침해가 뜨자 초화규는 어쩔수 없이 다시 복마동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다. 눈이 회복할 때까지 이곳에서 지낼 수밖에 없다. 괜히 소림을 탈출했다가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 낮에 쫓기기라도 하면 꼼짝 못하고 잡힐 것이다.
다시 밤이 되자 초화규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움직였다. 복마전에서 기어오르느라 체력과 심력을 많이 소모했고 복마동에서도 하루이상 음식과 물을 섭취하지 못했다. 초화규는 조심스럽게 움직여서 음식과 물을 찾았다.
"도둑이다."
갑작스런 외침에 초화규는 이것저것 가릴것 없이 전력으로 도망을 쳤다. 재수 없이도 장경각 쪽으로 움직였기에 장경각을 지키는 나한들에게 들킨 것이다. 곧바로 나한들이 뒤를 쫓았고 소리를 듣고 달려온 무승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초화규가 천마신공을 익혀 내공이 심후하지만 이미 오랜시간 굶었고 두 팔로 움직이는 동시에 무공도 펼쳐야 하기 때문에 다수와의 싸움에 매우 취약했다. 오래 저항하지 못하고 제압당한 초화규는 소림의 나한이 자신의 품속에서 천마신공의 비급을 꺼내가자 비명을 질렀다.
"내꺼야!"
오랫동안 갖혀 있다 겨우 탈출했는데 다시 잡혔다. 거기에 유일한 희망인 천마신공의 비급마저 빼앗겼다. 분노와 허탈 그리고 여러가지 감정이 섞이면서 초화규는 피를 토해냈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피를 꿀렁꿀렁 토해내고 온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혼절한 초화규의 맥을 짚어보던 소림중이 고개를 저었다.
"천마신공을 익힌 마인 같습니다. 주화입마에 빠진 것 같은데 구원하려면 단전을 폐해야 합니다."
"사람 목숨이 소중하지 무공이 무에 소용 있겠냐. 당장 구원하도록 해라."
사숙의 명에 중은 곧바로 초화규의 단전과 명문혈을 파괴했다. 단전을 파괴한 것은 주화입마를 가라앉히기 위해서이고 명문혈은 천마신공을 깨기 위해서이다. 머리쪽 혈도들이 발달했기에 천마신공을 익혀도 미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초화규인데 소림승들의 자비심 때문에 영원히 무공을 익힐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도둑놈의 몸에서 찾아낸 비급은 아무리 읽어보아도 소림의 무공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비급에 말로 형용하기 힘든 현묘함이 묻어있어 손에서 떼기 힘들었다. 소림에서 무공연구에 일가견이 있다 자부하는 노스님들이 모여서 비급을 연구했다.
"두곳의 운기경로가 아주 이상하오. 아무리 애써도 저런 운기경로가 취해지지 않소. 상리를 벗어나는 부분인데 이 두 부분이 이 비급의 핵심인 듯 하오."
"그 두 부분을 제외하고 보면 매우 이상적인 심법이오. 내공심법의 형식을 띄지만 익혀내면 외공의 성취도 자연스럽게 이룰 수 있소. 조금 비틀려진 두 부분은 무언가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나 무언가를 피하기 위해서라고 생각되오."
"나는 내용보다 이 표지의 두글자가 무언가 제시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되오. 글의 순서대로 읽으면 화규요. 하지만 이 두 글자는 책의 내용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씌여있소. 왜 굳이 두글자를 거꾸로 적었을지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수 없소."
갑론을박을 진행했지만 운기경로중 이해가 안되는 두부분은 해석이 되지 않았다. 대화를 통해 더 많은것을 끌어낼 수 없자 다들 대화를 멈추고 사고에 잠겼다. 그때 장경각 소속의 학승이 입을 열었다.
"제자가 잘못본게 아니라면 비급의 글씨가 매우 눈에 익습니다. 어디선가 많이 본 글씨체 입니다."
장경각 소속의 학승들은 무공을 익힐 수 없는 자들이다. 이들은 장경각의 책들을 관리하고 정기적으로 필사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오래된 책은 글씨가 지워질 수도 있기에 정기적으로 필사를 해놓는 것이다. 장경각의 책들을 많이 접한 학승이기에 노스님들은 가볍게 지나치지 않았다.
"어디서 보았는지 생각이 나느냐?"
"어디선가 본게 분명한데 생각나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학승의 말에 장경각주가 명을 내렸다.
"가서 학승들을 전부 불러오거라. 이 글씨체를 본 자가 더 있을수도 있다."
학승들은 장경각에 도착해 비급의 글씨체를 확인했다. 다행히 어디에서 보았는지 아는 학승이 늦지 않게 나타났다.
"몇년전 마교에서 분실했던 비급을 되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 비급들에 한선후의 주석들이 달려 있는데 글씨체가 이것과 매우 흡사합니다."
곧바로 마교로부터 되돌려받은 비급들을 찾아와서 글씨체를 대조했다. 한선후가 소림의 비급들을 보며 나름대로 주해를 달았다. 글씨체를 대조해보니 한선후의 글씨체가 맞았다.
"저희 학승들이 비급의 필사를 자주 합니다. 비급으로 제작된 이 책은 분명 소림의 것입니다. 그리고 비급의 상태를 보면 한달에서 석달사이에 제작된 것이 분명합니다."
학승의 말에 나한당주는 초화규를 데려오라고 명했다. 혼절해있는 초화규의 머리에 찬물을 쏟아부어 억지로 깨웠다. 쿨럭거리며 정신을 차린 초화규는 단전이 파괴된 것을 확인하자 세상의 종말을 맞이한 기분이 되었다.
"너는 한선후와 무슨 관계이고 한선후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크크크큭, 한선후 그 새끼 고자돼서 죽었소. 내가, 이 내가 한선후를 죽여버렸소."
그뒤로도 초화규는 중얼중얼 말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무언가 실마리를 얻겠거니 하고 귀담아 들었는데 앞뒤가 맞지 않는 미친소리였다. 초화규가 완전히 미쳐버린 것을 확인한 나한당주는 나한당 제자들에게 명했다.
"단전도 파괴되고 이미 미쳐버렸으니 등봉현이나 개봉에 풀어주거라. 불심이 깊은 사람들이 많으니 굶어죽지는 않을 것이다."
나한당 제자들은 초화규를 등봉현 길거리에 버렸다. 평생 강한 무공을 익혀 천하를 오시하는 것이 소원이었고 복마전에 갇힌 후에는 탈출하는 것이 꿈이었다. 복마전을 탈출하는 꿈을 이뤄낸 초화규는 천하를 오시하지 못했지만 미쳐버려서 눈에 뵈는게 없는 상태가 되었다. 조금 다른 형태로 소원을 이룬 것이다.
초화규로부터 무언가 실마리를 얻어낼 것을 기대했던 노스님들은 미쳐버린 초화규를 확인하고 실망했다. 하지만 자리를 지키고 있던 학승은 무언가 발견하고 생각에 골몰했다. 장경각의 비급들을 외부로 반출했을 때 반드시 한명 이상의 학승이 지켜봐야 한다. 장경각의 비급이 아닌것이 뒤늦게 확인됐지만 처음에는 초화규가 장경각에서 훔쳐낸 것으로 오해했기에 학승 한명을 불렀던 것이다.
"제자가 무언가 발견한 것 같습니다."
학승의 말에 노스님들은 반색했다. 필체도 이 학승이 발견한 것이니 자신들이 보지 못한 무언가를 발견했을 가능성이 높다.
"제가 무공을 잘 모르기에 안의 내용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방금전 그 광인의 말과 표지에 씌여진 두글자를 잘 해석하면 답이 나옵니다."
학승은 노스님들이 주목하자 긴장되었지만 억지로 용기를 냈다.
"표지의 두글자는 방향이 내용과 반대됩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일부러 두글자를 거꾸로 쓴 것이라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방금 그 광인의 말에서 답을 얻었습니다. 그 광인은 비록 미쳐버렸지만 처음에는 질문에 성실히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첫마디가 바로 한선후가 고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규화(葵花)는 다름 이름으로 조양화(朝陽花)라고 합니다. 해를 따라 움직이거든요. 그런 규화를 굳이 거꾸로 썼습니다. 이는 이 비급을 쓴 자가 고자가 되었다는 것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양(陽)을 바라는 규화를 거꾸로 쓰면 음(陰)을 바란다는 뜻이 되는게 아니겠습니까?"
학승은 말을 하면서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 말하는 자신도 더없이 그럴듯해 보였기 때문이다.
"즉 이 비급은 고자가 되어야만 익힐 수 있는 무공입니다. 아까 사조께서 두군데 흐름이 이상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손이 무공은 잘 모르지만 이상하다고 말씀하신 두군데 혈도가 하나는 가랑이쪽이고 하나는 머리쪽이라는 것을 압니다. 머리와 가랑이의 혈도들이 서로 대응한다는 것은 다들 아는 상식입니다."
"머리 혹은 가랑이쪽의 운기경로가 이렇게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무공이 고강한 사조님들도 저런 운기경로를 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저 운기경로는 상리를 벗어나고 음양의 조화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학승이 숨이 차는듯 하자 장경각주는 찻잔을 학승에게 건넸다. 공손히 인사를 올린 후 찻잔을 받아들인 학승은 찻물을 꿀꺽꿀꺽 삼켜버렸다.
"상리를 벗어나는 운기경로를 취하려면 상리에 벗어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두가지 선택이 있는데 하나는 머리쪽 혈도를 파괴하여 운기경로를 강제로 바꾸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머리쪽 혈도를 잘못 건드리면 큰 문제가 나기 십상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은 하나뿐입니다."
"바로 가랑이쪽 혈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아마 운기경로에서 제외된 몇개 혈도를 파괴하면 머리쪽 운기경로도 거기에 맞춰 바뀔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선후는 아마 절세의 신공을 깨닫고 그것을 익히기 위해 일부러 고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학승의 말이 끝나자 고요와 침묵이 지속되었다. 과연 몇개의 혈도를 제외하니 학승의 말대로 머리쪽 운기경로도 바뀔 수밖에 없다. 그렇게 바뀐 운기경로로 어떤 내공을 쌓고 어떤 위력이 나올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천하에서 다섯손가락안에 들 정도로 강한 한선후가 자신의 양물을 자를 정도면 그 위력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익히기는 뭐하지만 무공 자체는 연구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하오. 원본은 파괴하고 필사본을 장경각에 보존할 것을 건의하오."
장경각주의 말에 달마원과 나한당의 스님들은 전부 동의했다. 필사하는 임무는 진실을 파헤친 학승에게 맡겨졌다. 학승은 먼저 붓으로 한지에 글씨연습을 했다. 최대한 비급 작성자와 비슷한 필체로 작성해야 한다. 이유는 모르지만 학승이 되었을 때부터 그렇게 배웠다.
충분한 연습이 되자 학승은 한글자 한글자 정성스럽게 옮겼다. 글자의 크기와 글자사이의 간격마저 원본과 매우 흡사했다. 필사를 완성하자 장경각주가 내공을 운용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원본을 불살랐다.
비워놓은 첫장에는 이 비급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를 적어야 한다. 한참 고민하던 장경각주는 붓을 움직여 여덟글자를 써내려갔다.
욕련차공(慾練此功 - 이 무공을 익히려면) 필선자궁(必先自宮 - 먼저 거세를 해야 한다).
여덟글자를 적은 후 먹물이 마르기를 기다려서 표지를 덮었다. 표지에는 학승이 미리 적어놓은 비급의 이름 네글자가 씌여 있었다.
규화보전(葵花寶典).
- 작가의말
하나의 신공이 탄생하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피, 땀, 눈물 그리고 몇몇 사내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습니다. 초화규는 단순히 주인공의 창조기연을 위한 일회성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창조의 주역입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된 무공을 가지는게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장삼풍의 이름으로 된 삼풍신공이 있습니까? 한발 양보해서 풍삼신공이라도 있습니까? 초화규는 어떤 의미에서 장삼풍의 성취를 넘어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Comment '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