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이야기 : 낯선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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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v
작품등록일 :
2017.12.04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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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8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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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17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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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키포인트

DUMMY

하일랜드의 딩월시, 페리 로드.


[ 로스 카운티가 놀라운 승리를 거두면서 I조의 전망은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


“그렇지. 미궁 속에 빠졌지.”


[ 승자 예측이 워낙 불투명했던 죽음의 조였긴 했습니다만. ]


“죽음의 조였지, 그래.”


[ 그래도 챔피언스 리그 경험이 풍부한 올림피아코스와 오스트리아의 강호 잘츠부르크의 진출이 유력하지 않겠냐는 말들이 많았죠. ]


“근데 완전히 뒤집어졌지.”


[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아니었습니다. 생테티엔이 현재 8점으로 조 1위를 굳혔고, 3점이었던 로스 카운티는 6점이 되며 2위에 올라섰습니다. 반면 잘츠부르크는 다음 경기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탈락이 확정됩니다. 올림피아코스의 상황은 더 심각합니다. 그들은 2무 2패를 기록하며 이제는 자력 진출도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진출 후보로 거론되었던 두 팀이 순식간에 탈락 후보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


케니 풀러의 식료품점에서는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항상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의자에 앉아 신문이나 책을 들여다보기만 하던 가게 주인이 라디오 볼륨을 크게 키워놓고서 흥겨운 콧노래를 부르는 풍경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아내에게 허락받지는 못했지만, 그는 카운터 옆에 비치할 작은 TV를 새로 장만할 계획까지 꾸리고 있었다. 일단 아쉬운 대로 집에서 잘 안 쓰던 라디오를 들고나온 것이다.


요즘 딱히 볼 만한 것도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풀러의 태도가 갑작스레 변한 이유는 오로지 하나. 그의 열정에 다시 불을 지펴버린 축구팀을 더 자주 접하기 위해서다.


지금 그가 무릎에 얹어놓은 한쪽 다리를 연신 까닥이며 읽고 있는 것도 스코티시 축구 매거진으로 어제 막 따끈따끈하게 발간되자마자 서점에서 구입한 12월호.


당연히 로스 카운티에 대한 내용이 메인으로 실려 있는 걸 보고서 사온 거다.


[ 물론 그렇다고 로스 카운티가 안심할 상황은 아니죠. 유리한 고지에 올라섰긴 했지만, 잘츠부르크를 잡아내지 못한다면 다시 역전될 수도 있습니다. 이번 경기가 레드불 아레나에서 펼쳐진다는 것도 상당히 큰 변수가 될 겁니다. 홈팀이 잔뜩 벼르고 있다는 것도요. ]


“뭐, 별로 잃을 것도 없지. 솔직히 이 정도까지 온 것만 해도 대단한데.”


“뭘 잃을 게 없어?”


누군가가 가게에 들어서며 불쑥 되물었고, 신나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풀러는 위를 올려다보더니 반가운 표정으로 일어섰다.


“오랜만이네요, 어르신.”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온화한 인상의 노인. 크레이그 던컨(Craig Duncan)이라는 이름으로 풀러가 개점한 초기 때부터 단골이었던 손님 중 하나다.


“요즘 왜 이리 통 얼굴을 비추지 않으셨어요?”


“그럴 일이 있었네. 여러모로 바쁘기도 했고. 그나저나 자네가 축구에 그리 관심이 많던 사람이었던가?”


풀러는 노인의 시선이 손에 들린 매거진에 있는 걸 확인하고 멋쩍게 웃어 보였다.


“예전엔 그랬죠. 그리고 다시 흥미를 붙이고 있습니다.”


“별일이군. 난 자네가 고상하기만 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항상 딱딱하기 짝이 없는 서적들을 읽는 모습만 봐왔거든.”


던컨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옆에 놓인 빈 의자에 앉았다.


“물론 축구가 격식이 없는 스포츠라는 건 아니네만.”


“하하······ 그러고 보니 어르신도 한때 축구에 심취한 적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


“심취라······.”


풀러의 물음에 노인은 회상에 잠기듯 바깥의 하늘을 쳐다보았다.


“오래전 일이야. 지미의 유나이티드가 유럽을 호령하던 시절에는 미쳐 살았지.”


과거 1970~80년대, 던디 유나이티드를 최전성기로 이끌었던 짐 맥클린(Jim McClean) 감독 얘기다. 던컨은 하일랜드로 귀농 생활을 하러 오기 전에는 쭉 던디 시에서 살았고, 자연스레 그쪽 연고 팀을 응원했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모든 게 황홀했네. 응원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으니까.”


노인이 말했다.


“환상적인 감독과 함께 영광의 시절을 누리다가 어느 순간 그 나날들이 저물어가고 이제는 더 찾아오지 않으리란 걸 깨달았을 때의 심정을 아는가? 차라리 모두 다 잊고 싶어진다네. 애초에 그런 경험을 안 했다면 현재를 보면서 과거의 향수를 찾으려 하지도 않았을 텐데.”


“······.”


“정말 잊고 싶다는 얘긴 아니지만, 그만큼 그 기억들은 특별했었지.”


애써 짓는 웃음에는 씁쓸함이 묻어나왔다. 하지만 그 표정을 볼 수 있는 건 아주 잠깐뿐이었다.


“그리고 그걸 떠나서 말이야. 이 나라 축구는 영 재미가 없어! 허구한 날 셀틱, 셀틱, 셀틱······. 승자가 이미 정해져 있고, 그 각본에 맞춰서 움직이는 연극 따위에 지나지 않지. 배우뿐만 아니라 관객들조차 결말을 다 알고 있는데 무슨 흥미가 있겠나?”


노인은 갑자기 지팡이를 허공에 흔들면서 불만이 가득한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레인저스가 뭐 희대의 대항마니 뭐니 지껄이는데 그것도 강자들끼리의 으스댐이야. 자기들끼리 벌이는 쇼에 지나지 않는다고. 발아래에 들러리를 잔뜩 세워놓고 말이지. 결국 둘 다 똑같은 족속들이야. 레인저스 그것들이 강등 조치를 받았을 때는 얼마나 통쾌하던지.”


풀러는 계속 머쓱하게 웃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데 더 웃긴 건 환상에 젖어있는 던디 유나이티드 놈들이지. 구단이고 팬이고, 레인저스가 나가떨어졌다고 그 자리를 자기네들이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데. 아직도 80년대에 살고 있는 모양이야. 지미가 물러나고 그 팀이 이룩한 최고 업적은 강등했다가 승격할 것뿐인데.”


“하하······.”


“이후엔 그저 중위권을 떠도는 구단이 되어버렸는데 말일세. 감독 선임도 엉망으로 하는 팀이 어떻게 짐 맥클린 같은 감독을 얻을 수 있었을까? 참 신기한 일이야. 지금도 잭 맥펄린인가 뭔가 하는 이름만 비슷한 꼭두각시 하나 데려와 앉혔다고 하던데.”


“잭 맥퍼슨입니다, 어르신. 그리고 그 감독은 작년에 경질됐어요.”


“······그런가? 지미와 이름을 헷갈렸다니. 나도 아직 과거 속에서 살고 있나 보군.”


잭 맥퍼슨을 경질한 후 선임한 게 알란 윌슨이며 더 심각한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는 암울한 사실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여튼 그런 이유로 축구와 담을 쌓고 지낸 지는 오래라네. 셀틱 놈들이 다 해 먹고 다닌다는 것 말고는 아는 게 없지.”


“그렇군요.”


풀러는 문득 매거진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가 노인을 보며 말했다.


“그럼 제가 응원하는 팀을 한 번 보는 건 어떠세요?”


“자네가 응원하는 팀? 이 시골 마을에 있다는 그 자그마한 팀을 얘기하는 건 아닐 테고.”


던컨은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누차 얘기하지만 난 빤한 연극에 박수를 쳐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네. 지미의 유나이티드와 퍼거슨 경의 애버딘이 올드 펌을 무너뜨리면서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킬 때의 쾌감을 잊지 못했거든. 이제 더 이상 그런 기적은 없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고.”


“이 시골 마을에 있는 팀을 얘기하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 팀이 어쩌면 어르신이 느꼈던 향수를 다시 자극할지도 모르지요.”


“······그게 무슨 소린가?”


“제가 괜히 멀리하던 축구에 다시 빠져들었겠습니까?”


풀러는 매거진을 펼쳐 그에게 보여주었다.


“이 팀은 지금 이탈리아에서 온 외국인 감독이 부임한 뒤로 기적을 하나씩 만들어 가는 중이니까요.”


“이탈리아에서······ 온 감독이라고?”


펼쳐 든 매거진에서 볼 수 있는 건 큼지막한 유로파 리그 로고와 함께 터치라인에서 선수들을 향해 손가락으로 지시를 내리는 델 레오네 감독이 클로즈업된 사진이었다. 노인은 그 아래에 있는 문구를 읽어 내려갔다.


“로스 카운티와 레드불 잘츠부르크, 다음 진출을 건 한판 싸움······. 유로파라면 설마?”


“유럽 대항전을 얘기하는 게 맞습니다. 예전에 UEFA 컵으로 불렸던 그 대회죠. 작년에 리그 2위까지 올라섰고, 이번에 플레이오프 예선을 전부 뚫어내면서 조별 본선까지 올랐습니다. 좀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이 마을의 자그마한 팀이 말입니다.”


풀러는 로스 카운티가 현재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셀틱의 입지를 어떻게 흔들고 있는지부터 해서 작년에 스코티시 컵을 우승했던 일, 올해 리그에서 보여주는 행보와 유럽 대항전에서의 분전 등을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다.


그전까지만 해도 노인은 흥미가 전혀 없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건 풀러가 그의 친구 조지 맥도넬의 끈질긴 회유에도 넘어가지 않았을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지금 매거진을 들여다보며 설명을 듣고 있는 그의 표정은 마치 자신이 로스 카운티의 경기를 처음으로 접했을 때와 비슷해 보였다.


“듣고 보니 제법 흥미가 동하는군. 하지만 이 마을은 한 가지 더 문제가 있어.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술과 함께 축구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것이지. 던디에 살적엔 꽤 흔한 풍경이었거든. 항상 경기가 있을 때면 펍에 가서 다 같이······.”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르신.”


풀러가 말했다.


“제 친구가 운영하는 술집이 하나 있습니다. 조촐하지만 제법 술맛도 괜찮고 분위기도 나쁘지 않은 곳인데 저와 함께 가시죠. 그 친구도 워낙 축구에 미쳐 있어서 아마 흔쾌히 반겨줄 겁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을 일이다. 자신이 친구 맥도넬처럼 들떠서 이 마을의 축구팀을 열심히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다니게 될 거라고는 말이다. 누가 시켜서 그런 것도 아닌,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마음이 시키는.


[ 참 언제 봐도 대단한 것 같습니다. 딩월 시에 사는 주민들은 지금 무척 자랑스러워하고 있을까요? 자신의 마을에 있는 팀이 이런 놀라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이죠. ]


‘당연하지!’


풀러는 라디오의 질문에 속으로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건 그뿐만 아니라 현재의 로스 카운티에 매료된 모든 이의 공통된 생각일 것이다.


*******


레드불 잘츠부르크의 회의실.


“미드필드에 힘을 더 실어야 해.”


아돌프 휘터(Adolf Hutter) 감독의 말이었다.


“저번 1차전에서도 교체하고 포메이션을 바꾼 이후에 효과를 봤었으니까. 이번엔 우리의 홈이기도 하니 상대의 중앙을 확실하게 잡아낼 필요가 있어.”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저번처럼 미드필더 한 명을 후방에 남겨 두고 공격적인 4-1-4-1로 운영하는 게 좋을까요?”


“하지만 그럴 경우 후방이 에이든 딩월에게 먹혀버릴 수 있습니다. 그 선수가 묀헨글라트바흐를 곤란하게 만들었단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저번이야 후반부에 준 변화라서 효과를 보았다지만, 시작부터 그런다면 오히려 우리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점수를 내야 하는 처지니까. 공격에 투자를 안 할 수는 없어요. 우선 전방에 숫자를 최대한 투입해놓고 롱볼을 넣어주면서 승부를 보는 게 어떨까 합니다만.”


“상대 레프트백의 오버래핑이 위협적이니 특히 그쪽을 주의할 필요가······.”


이어서 코치들이 저마다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휘터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그의 앞에 놓인 보드를 손등으로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자자, 어쨌든 우리는 무조건 이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고, 더 물러설 곳이 없어. 공격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동감이야. 하지만 그 전에 앞서 알렉산더 캐리와 리 월리스, 이 두 명을 잡고 들어가는 게 가장 중요해. 오른쪽 미드필더 자리에 케빈 캄플을 놓고.”


그가 자석을 로스 카운티 레프트백 앞에 하나 붙여놓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쪽에서 쉽게 공격을 풀어 나올 수 없도록 견제할 필요가 있어. 이 선수만 제대로 막아내도 상대 왼쪽 라인은 온전히 힘을 쓰기 힘들 거야. 그리고 분석관? 최근 로스 카운티가 어떤 포메이션을 쓴다고 했지?”


“4-3-3입니다. 미드필드진이 캐리를 후방에 둔 역삼각형으로 나오고 있죠. 최근 4-4-2보다 그 포메이션을 더 활용하는 추세입니다. 잭 마틴의 부상 변수가 있었긴 합니다만, 아마 이번에도 그렇게 나오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는군. 그 말대로라면 블랜차드와 브리튼, 그리고 뒤에 캐리를 내세우겠지. 우리가 이 진형을 잡아내려면 4-4-2는 불안정한 부분이 너무 많아. 똑같이 세 명의 미드필더로 맞붙을 놓아야 한다는 얘기지.”


휘터는 그렇게 말하며 캐리가 나올 것으로 유추되는 위치에 자석 하나를 더 붙여놓았다.


“알렉산더 캐리, 이 선수야말로 이 경기의 키포인트야. 우리가 반드시 묶어내야 하면서 동시에 공략해 들어갈 대상이지. 그의 발에서 나오는 패스는 분명 위협적이야. 하지만 후방에 있는 미드필더치고는 수비 능력에 아직 많은 의문점이 있어. 우리는 이걸 어떻게든 이용해야 해.”


“그쪽에 한 명을 붙여서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게 만들고, 공격 시에는 그쪽을 통해서 풀어가자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그거야. 로스 카운티의 강점이자 약점인 이곳. 알렉산더 캐리의 영역을 우리가 완벽히 점령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판도가 갈리게 되겠지.”


“그런데 그 중요한 임무를 맡을 적격자가 있을까요? 상대를 집요하게 괴롭힐 수 있으면서 공격을 주도해서 이끌 줄도 알아야 하는데.”


“없으면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지. 생각해 둔 선수는 있어.”


휘터가 말했다.


“저번에 후반 교체로 들어가서 좋은 활약을 보였던 그 어린 녀석 있잖아? 이번엔 선발로 내보내 보자고.”


*******


로스 카운티의 회의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잘츠부르크는 진형을 바꿔서 올 거야.”


“진형을 바꿔서 말입니까?”


“그동안 우리가 4-3-3을 써오지 않았나? 상대가 그걸 모를 리는 없겠지. 게다가 1차전에서 그들은 알렉스를 제어하지 못해 실점까지 했었어. 똑같은 방식으로 당하려 하지는 않을 거야. 그 모든 걸 염두에 두면서 판을 짜올 테고, 그렇다면 아마 세 명의 미드필더를 구성해서 맞서려고 할 확률이 높아.”


이곳에서도 한창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4-4-2로 나가면 중앙에 셋을 둔 다음 한 명이 에이든을 견제하면서 저번에 우리를 격파했던 인버네스 CT와 비스름한 전략을 들고 나올 것이고.”


“······.”


“4-3-3으로 나가면 밸런스를 맞출 두 명을 뒤에 세운 뒤 한 명은 2선까지 끌어올려서 알렉스를 집중 공략하려 들겠지. 우리가 어떤 식으로 나오든 거기에 맞춰서 대응해 올 수도 있다는 얘기네.”


“그렇게 나온다면 상당히 골치 아파지겠는데요.”


“상대가 우리를 철저히 파고들었다면 말이야. 방금 내가 말한 건 생각해볼 수 있는 최악의 가정이지. 그러니까 이 상황을 기준으로 방법을 모색하면 돼. 상대가 덜 준비를 해올수록 우리로서는 더 수월해질 테니까.”


다른 점이라면 조급하고 분주했던 잘츠부르크와 달리 훨씬 차분한 분위기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예전처럼 다시 리차드를 내려서 수비 보호에 치중하고, 알렉스를 올리는 건 어떨까요?”


“그렇게 되면 중앙을 완전히 먹혀버리게 되겠지. 그거야말로 상대가 제일 바라는 일이고.”


“이번에 아예 알렉스를 쉬게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비기기만 해도 유리한 상황이니까요. 대런과 리차드의 4-4-2로 단단히 굳히는 걸 우선으로 하는 겁니다.”


“적군의 안방에서 말인가? 아주 나쁜 선택은 아니지만, 90분 내내 득점을 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그들의 공세를 웅크리기만 해서 막아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실점하는 순간 모든 게 끝장나 버릴 테고.”


코치진이 하나둘 의견을 내놓았지만, 이탈리안의 고개를 끄덕이게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좋은 의견들이지만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해. 단순히 잘츠부르크와의 승부만이 아니라 이번 결과에 따라 상대의 인식이 달라질 수도 있거든. 알렉산더 캐리만 막으면 되는 팀인지, 그 한 명만 막아서는 안 되는 팀인지. 그저 회피하기만 해서는 될 문제가 아니라는 거야.”


“······.”


“닐, 자네의 생각이 듣고 싶군.”


감독의 시선이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수석코치에게로 향했다. 갑작스레 지목받은 스튜어트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긴 한데, 상대가 알렉스에게 집중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 비중을 줄이면 되지 않을까요?”


“비중을 줄인다?”


“알렉스보다 약해질 수는 있겠지만 다른 루트로의 빌드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서요. 우리 팀 좌우 풀백의 패스 정확도는 꽤 높은 편이고, 리차드도 전진을 아예 못하는 선수는 아니잖습니까. 상대가 알렉스만 신경 쓰고 있다면 그건 우리 선수들을 과소평가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리가 있군. 내가 원하는 방향도 바로 그거야. 생각지도 못한 선수들이 한 방 먹여주는 그림이지.”


감독이 적극적으로 동조하자 스튜어트는 더욱 신이 나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제임스와 리차드의 위치를 바꾸는 겁니다. 그래서 리차드가 알렉스를 보조하는 데 집중하고, 제임스가 오른쪽 공간을 활용할 수 있게요. 녀석이 주로 왼쪽에서 뛰긴 했지만, 오른발잡이니까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래, 이제껏 우리 팀 주공격 방향이 왼쪽에서 이루어졌으니까 이번엔 오른쪽을 더 활용해서 허를 찌르자는 얘긴가? 공격 루트가 분산되면 자연스레 왼쪽도 느슨하게 풀릴 수 있고 말이지.”


“그렇죠!”


“괜찮은 의견이었네.”


“······예?”


“제임스는 자네 말대로겠지만, 리차드는 오른발만 사용할 수 있는 데다가 왼쪽에서 뛰어본 경험이 한 번도 없지. 이럴 경우 도박에 가까워. 오른쪽에 비중을 두는 게 아니라 왼쪽이 아예 죽어버릴 수도 있거든.”


“그걸 생각 못 했군요······.”


“그래도 좋은 아이디어였어.”


실망감에 주눅이 든 스튜어트에게 감독이 웃으며 말했다.


“자네 덕분에 나아갈 길이 훨씬 더 잘 보이게 된 것 같으니까.”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전술 보드의 자석들을 이리저리 만지기 시작했다.


“만약 이렇게 역삼각형으로 나간다면 상대는 분명 정삼각형으로 똑같이 맞붙으려 하겠지. 여기서 우리가 가장 유의해야 할 부분이 알렉스에게 붙는 선수야. 아마 내 생각엔······.”


“······.”


“나비 케이타. 그 선수가 유력하겠지.”


“그 선수 이제 겨우 열아홉 살이던데, 과연 선발로 내보낼까요?”


“내보낼 거야.”


감독이 말했다.


“내가 조사한 잘츠부르크의 선수단 중에서 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적임자일 테니까. 민첩하고, 저돌적이며, 왕성한 체력을 보유한 공격적인 자원은 나비 케이타 뿐이었어.”


“그렇긴 하지만······.”


“심지어 1차전에서 교체로 들어와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었지. 이쯤 되면 감독으로서는 어떻게든 승리가 간절한 상황에서 그 소년을 믿어보고 싶을 거야.”


“······.”


“설령 다른 선수를 쓰거나 한다면 더더욱 고마운 일이지. 그건 완벽한 판단 미스기 때문에 알렉스를 제어하지 못할 거거든. 아까도 얘기했지만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그걸 해결한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거라네.”


여느 때와 마찬가지였지만 감독에 말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상대는 알렉스의 영역을 침범해서 장악하려 할 테고, 우리는 그곳을 반드시 사수해야만 해. 우리의 레지스타가 활동하는 공간이 상대 팀 돌격대장에 의해 쑥대밭이 되지 않도록 말이야. 그게 이번 경기의 키포인트가 될 거야.”


“그렇다면 제임스 대신 대런을 쓰는 게 어떨까요? 케이타 그 선수에게 마크맨 하나를 붙이는 겁니다. 너무 수비적으로 기울어질 우려가 있다면 제가 드렸던 제안을 섞어서 대런과 제임스를 쓰는 것도······.”


“그럴 생각이었어.”


스튜어트의 말에 감독이 다시 웃으며 대꾸했다.


“마크맨을 붙이려는 것 말이지. 하지만 라인업은 제임스와 리차드로 구성할 것이네. 대런의 맨마킹 능력은 높이 사지만, 이번 상대에게는 역부족일 거야. 뛰어난 신체 능력에 발재간까지 겸비한 테크니션이라 몸이 느리면 상대할 수 없지. 그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그러면······ 제임스를 붙인다는 말씀입니까?”


“오히려 더 나은 선택일 수 있어. 이런 유형은 더 월등한 피지컬로 눌러버리는 게 효과적일 경우가 많거든.”


감독의 웃음은 살짝 음흉하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선수들을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우리의 계획대로만 움직인다면 이번 경기는 아주 재미있는 방향으로 흐르게 될 거야.”


*******


< 14-15 UEFA Europa League 'Group I' Match >

레드불 잘츠부르크 : 로스 카운티

2014년 11월 27일 (목) 19:45

레드불 아레나 (관중 수 : 13,947명)



[레드불 잘츠부르크 / 4-2-3-1]

FW : 호나탄 소리아노

AM : 발론 베리샤 / 나비 케이타 / 케빈 캄플

CM : 슈테판 일산커 / 크리스토프 라이트게프

DF : 안드레아스 울머 / 마르틴 힌테레거 / 안드레 하말류 / 크리스티안 슈베글러

GK : 굴라치 페테르


[로스 카운티 / 4-1-4-1]

FW : 에이든 딩월

MF : 에드빈 데 루어 / 제임스 블랜차드 / 리차드 브리튼 / 소피앙 부팔

DM : 알렉산더 캐리

DF : 리 월리스 / 폰투스 얀손 / 스콧 보이드 / 아메드 델샤드

GK : 마크 브라운



‘젠장, 젠장, 젠장!’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휘터의 머릿속은 온갖 잡생각에 이미 엉망이 되어있었다.


로스 카운티의 라인업은 예상대로였다. 4-3-3을 들고나왔으며, 알렉산더 캐리가 후방에 위치한 형태 그대로였다.


하지만 킥오프 이후 보이는 것들은 그가 생각했던 그림과 완전히 달랐다.


‘저 풀백은 왜 안 올라오는 거야? 그리고 블랜차드 저놈은 왜······.’


가장 경계하고 있던 블랜차드와 월리스는 공격보다 수비에 더 치중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회심의 카드로 내세운 나비 케이타의 선발은 명백한 실패.


“집중하라니까!”


다시 볼을 빼앗겨 버린 케이타를 보며 휘터는 결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볼을 잡을 때마다 거칠게 몸을 부딪치며 엉겨 붙는 블랜차드에게 열아홉의 어린 선수는 완전히 기세를 눌려버린 듯했다.


“캐리를 잡으려고 내보냈더니 도리어 잡혀버릴 줄이야. 그건 그렇고, 블랜차드 저놈은 거의 공격을 안 나가잖아?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모든 게 예상된 것과 거꾸로 돌아가고 있었다.


“더 압박해! 적극적으로 붙어!”


감독의 독촉에 잘츠부르크 선수들이 이를 악물며 달려나갔다. 압박의 목표는 명확했다. 알렉산더 캐리가 있는 곳을 기준으로 볼이 원활하게 돌지 못하도록 하는 것.


캐리의 발에서 시작되는 전진 패스가 거의 없어졌다는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문제는 계속 다른 곳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압박이 들어가자마자 캐리가 뒤쪽 센터백에게 볼을 돌렸고, 그 볼이 다시 캐리에게 돌아오자마자 다시 빠르게 월리스 쪽으로 보내졌다. 오늘 캐리의 선택지는 계속 간결하고 빠른 주변 패스뿐이었다.


그리고 길게 횡패스가 잘츠부르크 선수들의 머리 위를 지나가며 단번에 월리스에서 델샤드에게로 이어졌다.


“오른쪽 계속 신경 쓰고 있으라니까!”


이런 식으로 유린당하는 것이 벌써 다섯 번째. 아무리 외쳐대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던 루트였기에 선수들은 적응하지 못하고 계속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그 흐트러진 진영으로 델샤드가 중앙선을 넘어 거침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막아!”


상대 라이트백의 패스가 수비를 따돌리고 들어가는 부팔에게 배달되는 것을 보며 휘터는 언성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한두 번이야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었지만, 대처하지 못하고 계속 허용되는 펀치를 연거푸 버텨낼 수는 없는 법이다.


부팔의 크로스가 정직한 일직선이 아닌 뒤로 꺾이는 컷백 패스처럼 들어갔고, 골문을 쇄도하던 딩월과 수비수의 뒤를 지나치고 말았다.


그건 실수가 아니었다. 델샤드 쪽으로 크게 전환될 때부터 함께 질주하고 있던 브리튼을 노린 패스였기 때문이었다.


브리튼은 자신에게 굴러오는 볼을 잡을 생각 없이 그대로 받아 찼고, 낮게 깔린 슈팅이 키퍼를 피해서 좌측 하단 구석으로 깔끔하게 굴러 들어갔다.


작가의말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이렇게 또 길게 시간을 쓸 생각은 아니었는데

기다리다가 실망하신 분께는 드릴 말씀이 없고

끝까지 기다려주신 분들께도 죄송하고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이번 화에 잘츠부르크전을 싹 마무리할 계획이었는데

어쩌다보니 분량과 시간이 너무 늘어나서 일단 매듭을 지었습니다.

늦는건 정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게 뜻대로 안되네요 참..

항상 독자분들 덕에 열심히 쓸 기운을 내고 있습니다.

늦으면 열기가 식고 페이스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도

재밌게 읽어주셔서 항상 감사할 뿐입니다. (_ _)

이번 주말도 행복하시길 바라며 저도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소중한 후원금을 보내주신

이풍 님

매번 후원 감사드립니다. (_ _)


언젠가는 속도와 내용을 다 잡는 것으로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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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199. 대립 +5 24.01.25 746 32 26쪽
198 198. 대면 +5 24.01.14 800 34 25쪽
197 197. 팀의 완성도 +8 24.01.04 775 42 24쪽
196 196. 신뢰의 결실 +5 23.12.23 832 37 28쪽
195 195. 한 마리의 송골매 +5 23.12.10 821 39 23쪽
194 194. 두 마리의 사자 (2) +5 23.12.02 828 41 25쪽
193 193. 두 마리의 사자 +4 23.11.22 886 42 25쪽
192 192. 캡틴 잭 +3 23.11.10 847 40 26쪽
191 191. 경기장 위의 숫사슴들 +6 23.10.31 897 35 28쪽
190 190. 계몽의 시대 (3) +3 23.10.20 922 44 23쪽
189 189. 계몽의 시대 (2) +5 23.10.08 937 39 26쪽
188 188. 계몽의 시대 +4 23.09.26 983 42 26쪽
187 187. 새로운 국면 (5) +7 23.09.15 1,036 45 22쪽
186 186. 새로운 국면 (4) +6 23.09.03 1,062 42 25쪽
185 185. 새로운 국면 (3) +8 23.08.19 1,146 45 22쪽
184 184. 새로운 국면 (2) +8 23.08.04 1,192 40 26쪽
183 183. 새로운 국면 +7 23.07.13 1,272 56 22쪽
182 182. 지상 최고의 팀 (4) +8 23.06.28 1,247 50 29쪽
181 181. 지상 최고의 팀 (3) +5 23.06.16 1,140 39 24쪽
180 180. 지상 최고의 팀 (2) +6 23.05.27 1,252 50 24쪽
179 179. 지상 최고의 팀 +5 23.05.07 1,339 50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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