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이야기 : 낯선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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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v
작품등록일 :
2017.12.04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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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8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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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3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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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첫 라이벌

DUMMY

“치명적인 교훈을 안겨준 시합입니다.”


디터 헤킹의 경기 후 인터뷰.


“우리는 경기를 주도했고,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는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추가 골을 넣어서 상대를 완전히 꺾어야 했어요. 등 뒤를 추격해 올 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던 겁니다. 다가온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대가가 따르는 법입니다.”


감정을 쉽게 조절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여도 감독이란 직책에 앉은 사람은 의무적으로 경기 직후 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내야만 한다.


“아무리 유리해도 축구라는 건 결국 골을 넣어야 이기는 스포츠니까요.”


그렇기에 패장의 인터뷰는 참담하다. 태연하려 노력해도 표정을 쉽게 감출 수 없으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실수를 저지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헤킹은 나름대로 잘 대처하는 중이었다. 평소 그의 이마에 도드라져 보이던 주름살이 더 깊게 파인 것은 어쩔 수 없었겠지만.


“승부차기에 들어선 이후엔 모든 걸 운명에 맡겨야 했어요. 그리고 보시다시피······. 결과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입을 열 때마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플래시. 지금 이 순간은 죄수가 카메라 앞에서 촬영 세례를 받는 심정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단순한 패배가 아니다.


많은 이들은 늑대가 사슴을 잔혹하게 사냥하는 과정을 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늑대는 사슴의 뿔에 찔려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유력하지는 않아도 유로파리그 우승 후보로서 제법 많은 베팅이 걸리기도 했던 팀. 볼프스부르크가 생각지도 못한 상대에게 덜미를 잡혔다. 잠깐 떠들썩하고 말 이슈가 아니었다.


“로스 카운티가 보여줬던 열의는 대단했습니다. 우리가 여러 번 기회를 놓쳤다지만 두 골을 앞서 있었죠. 그걸 동점까지 따라온 건 순전히 그들의 저력입니다. 본받아야 할 정신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바스 도스트가 폰투스 얀손에게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요. 그의 부진이 승패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는지?”


이어서 시작되는 심문.


“도스트에게 전부 떠넘기는 건 옳지 않습니다. 책임은 모두의 몫이죠.”


“볼프스부르크 공격진 전체의 문제?”


“아니, 아닙니다. 우리 모두. 감독인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건 사실 폰투스 얀손, 그 선수에게 초점이 맞춰져야 합니다. 우리가 올리는 크로스를 거의 혼자서 다 막아냈으니까요. 그가 왜 맨 오브 더 매치에 선정되지 않았는지 의문이에요. 두 골을 실점한 게 원인이라면 실로 가혹한 처사입니다.”


“얀손의 퍼포먼스가 제일 인상 깊었다는 건가요?”


“그렇죠. 단단한 벽을 계속 두들기는 느낌이었어요. 세트피스로 얻어낸 이른 득점이 없었다면, 오늘 그를 뚫어내기 어려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 오늘 당신의 팀에 얀손이 있었다면, 연장전을 내줄 일이 없었다고 보는지?”


“그것과는 별개입니다. 왜 계속 특정 선수의 탓으로 몰아가려는 겁니까? 수비진의 집중력이 아쉬운 부분은 있었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로스 카운티의 투지가 일궈낸 결과입니다.”


자기 팀 선수는 옹호하면서 상대를 치켜세워주는 답변이야말로 감독이 고를 수 있는 최고의 선택지겠지만, 헤킹은 그 정도로 철저히 계산해서 발언하는 성격까진 아니었다.


대진이 성사되기 전까지 존재 여부조차 몰랐던 변방의 스코티시 팀이 보여준 경기력에 감탄했고, 그 소감을 솔직하게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경기 휘슬이 불리기 직전까지도 미친 듯이 뛰어다녔어요. 엄청난 정신력으로 악착같이 쫓아왔습니다. 우리를 향한 비판보다 로스 카운티에게 찬사를 보내줘야 마땅한 시합이라는 겁니다.”


다만 정도가 지나치면 팬들의 심기를 긁어대는 꼴이 되고 만다.


‘그래서 로스 카운티 따위에게 져서 탈락한 게 자랑이라는 거야?’


마지막으로 덧붙인 발언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독일인들의 반응이 어떨지는 빤할 테니까.


볼프스부르크를 리그 상위권으로 올려놓은 감독의 지지층은 여전히 탄탄하겠지만, 당분간은 어느 정도 힐난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기자들의 도발성 질문 공세는 끝내 목적을 달성한 듯했다.


이를 토대로 교활한 문구를 고안하여 기사에 싣는 것도 시간문제다.


“······어쨌든.”


헤킹은 아차 싶었는지 욱했던 감정을 가라앉히며 말을 이었다.


“로스 카운티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전합니다. 그들은 8강에 올라갈 자격이 충분한 팀이었습니다. 앞으로도······ 행운이 있기를 빕니다.”


일어서서 퇴장하는 그의 뒷모습은 초라해 보였다. 승부를 깔끔하게 인정하고 물러섰으나, 세간에서 내려지는 평가가 어떨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다.


한 기적적인 팀의 역사 속을 거쳐 갔던 제물 중의 하나로 언급될 것인지, 평생의 조롱거리로 남을 흑역사의 파편이 되어 가슴을 후벼 팔 것인지.


로스 카운티, 그들의 행보에 따라 이 놀라운 사건을 기억하는 방향이 결정될 테니까.


어느 하나 달갑지는 않겠지만, 굳이 정해야 한다면 그나마 전자 쪽이 나을 것이다. 그렇기에 헤킹은 8강에서 그들을 응원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물론 이보다 훨씬 더 좋은 선택을 고를 수도 있었다. 로스 카운티의 돌풍을 잠재우고 일대기의 주인공으로 거듭날 수 있던 기회.


AS 생테티엔, 올림피아코스, 레드불 잘츠부르크, 디나모 모스크바, 그리고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까지. 다들 그 기회를 앞에 두고서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이제 볼프스부르크가 그 뒤를 따를 차례였다.



[ BBC ] 로스 카운티, 승부차기 끝에 볼프스부르크를 꺾고 8강 진출


[ Kicker ] 볼프스부르크, 다 잡은 승리를 놓치며 충격적인 16강 탈락


[ Sky Sports ] 로스 카운티, 챔피언스 리그를 포함한 유럽 대회에서 유일하게 8강까지 생존한 영국 팀으로 등극


[ Sport Bild ] 디터 헤킹 “수비진 집중력 엉망, 우리는 로스 카운티가 보여준 정신력에 한참 모자랐어.”


[ Scottish Sports ] 빅토리아 파크를 뒤흔들었던 카운티의 구호, 킥오프 전부터 일어났었던 기적


[ Der Spiegel ] 디터 헤킹 “로스 카운티가 잘한 거지, 볼프스부르크가 못한 건 아니야.”


*******


로스 카운티의 사무실.


“예. 아, 물론입니다. 저희야말로 영광이죠. 그럼 그때 뵙도록 하겠습니다.”


벌써 다섯 번째 걸려오는 전화.


아직도 꿈을 꾼 것처럼 느껴질 만큼 황홀했던 경기가 끝난 다음 날. 대런 코너 단장은 그 누구보다도 바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점심시간도 채 되지 않은 이른 아침부터 업무가 들이닥쳤으나, 그의 입가에는 주체할 수 없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어젯밤 로스 카운티가 분데스리가 2위 팀을 상대로 이뤄낸 결과물을 지켜보던 수많은 눈들 중에서는 단순히 응원하는 팬들 이외에도 저마다의 목적을 지닌 이들이 찾아왔었다.


다른 구단에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파견한 스카우트나 유로파 리그에서 제법 주목도가 쏠리던 이 경기를 분석하려고 모여든 칼럼니스트 등 많은 부류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로스 카운티를 새로운 거래 파트너 대상으로 눈여겨보기 시작한 기업들.


그들이 하나둘 교섭을 요청해 오고 있다.


스코티시 축구판의 대세로 거듭난 이 팀의 성장세가 멈출 기미를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강력한 대형 사고를 일으키자 여러 큰 손들이 앞다투어 스폰서십을 체결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친 것이다.


“하······ 세상에.”


코너 단장은 전화를 마치자마자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변변찮은 역사와 성적에 지역조차도 매력적이지 않아서 인기라는 것과는 아예 동떨어져 있던 로스 카운티가 온갖 단체에서 구애를 받고 있다니.


후원사 하나 제대로 구하지 못해서 쩔쩔매던 시절도 있었는데 말이다.


물론 이 팀의 주가가 꾸준히 상승하리란 걸 진작 알아보고서 접근해온 데는 꽤 많았다. 그들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규모가 큰 곳에서는 굳이 모험하면서 손실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한 발짝 물러서서 관망하고만 있었을 뿐이다. 코너는 그 부분이 매번 아쉬웠다.


근데 그토록 신중한 태도로 일관하던 쪽에서 제 발로 직접 찾아오고 있다.


“테넌츠라니······.”


방금 전화는 스코틀랜드 맥주 판매 순위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테넌츠(Tennent's)를 제조한 웰파크 브류어리(Wellpark Brewery)에서 온 것이었다.


한때 셀틱과 글래스고 레인저스의 공동 메인 스폰서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 맥주회사. 1989년부터 2007년까지 스코티시 컵을 후원해주기도 했던 그 회사.


“우리가 이들과 한 테이블에 앉을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올드 펌의 대표 스폰서였던 그들이 파트너십을 맺고 싶어 한다. 무슨 의미겠는가? 몇 년 전이었다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언제나 최고의 위치에 있는 축구팀들과 계약해왔던 그들이 마침내 로스 카운티를 인정했다는 얘기다. 이건 정말로 시사하는 바가 엄청나게 큰 것이었다.


스코틀랜드 맥주를 대표하는 회사가 프리미어십의 대표 구단을 후원한다. 경영을 책임지는 단장으로서는 전율이 안 느껴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미성년자의 술 구매량이 급증한다는 이유로 작년부터 시작된 주류회사의 메인 스폰서 참여 금지 운동만 아니었다면 유니폼에 테넌츠 마크를 새기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계약만 맺는다면 그들의 상품을 얼마든지 협찬 받을 수 있다.


우승을 할 경우 축하 파티에 사용할 수도 있으며, 그 맥주들을 어디서 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들을 덜어낼 좋은 기회였다.


그 전에 앞서 우승을 하는 게 중요하겠지만.


더욱 흥분을 감출 수 없는 건 단지 이걸로 끝이 아닐 것 같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테넌츠가 움직였다는 건 어지간한 기업들이 죄다 이쪽을 주목하고 있다는 뜻일 테니.


어쩌면 그 범위가 스코틀랜드를 넘어 영국 일대까지 퍼졌을지도 모른다.


현재 메인 스폰서인 공구회사와의 계약이 올 시즌 이후에 만료된다. 그 이후엔 어떤 기업에서 손을 내밀까? 내년 시즌엔 과연 어떤 브랜드를 로스 카운티 유니폼에 달게 될까?


“이럴 때가 아니지. 빨리 구단주님께 보고해야······.”


코너는 서류들을 주섬주섬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운티의 구호로 물들었던 빅토리아 파크의 검푸른 물결은 아름답다는 표현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구단주실 안에서는 TV 소리가 문밖으로 크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노크하며 들어가니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 뉴스를 보고 있는 로이 베넷이 눈에 들어왔다.


“어서 오시오, 대런.”


그는 코너와 똑같이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최근 클럽 하우스 내부는 행복이 전염되기라도 한 것처럼 모두가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팀이 워낙 잘 나가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특히 구단주. 예전에는 심기 불편한 모습이 일상이었던 그가 요새는 미소를 잃지 않고 있다. 근래 들어 화를 내는 걸 본 적이 있던가? 로스 카운티의 인지도가 날이 갈수록 커져가는 것만큼이나 적응이 안 되는 게 이 방 안에서 이루어지는 평화였다.


코너는 사람의 성격이 환경에 영향 받는다는 말을 새삼 머릿속에 떠올렸다.


[관중들은 경기가 종료되는 순간까지 쉬지 않고 구호를 외쳤으며, 로스 카운티가 승리를 확정 짓자마자 거리로 나와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역시나 뉴스에서는 간밤에 일어났던 기적에 대해서 보도하고 있었다.


[딩월시는 평소 조용한 마을로 알려져 왔습니다. 보이는 것은 알려진 사실과 달라 보입니다. 사람들은 로스 카운티에 대해 이야기하기 바빴습니다. 짜릿했던 어젯밤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이곳은 여전히 승리에 흠뻑 취해 있습니다.]


유로파 리그 8강 진출에 버금갈 정도로 놀라운 기적. 그토록 수동적이던 빅토리아 파크가 활기를 띠었다. 어떤 면에서는 유럽 대항전 승리보다 더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엄청났지.”


베넷이 말했다.


“갑자기 카운티의 구호가 단합된 목소리로 울려 퍼지는데 어찌나 소름 돋던지. 그 조용하던 사람들이 말이야.”


“요즘 우리 팀이 보여주는 행보에 팬들의 마음이 크게 움직인 듯합니다.”


“하긴······. 누가 봐도 매력적인 축구팀이 되었으니까. 다른 지역에서 찾아오는 손님들도 늘어나는 마당에 이상할 건 아니겠군.”


[크게 펼쳐 든 천에는 ‘우리는 숫사슴들이다.’라고 적혀 있었는데, 이 숫사슴들은 로스 카운티의 별칭이자 서포터를 대표하는 이름입니다. 구호를 주도한 인원들은 재조직된 서포터 집단으로 추정되며, 앞으로도 계속 이런 활동이 이어지리라는 의견이 나오는 중입니다.]


파견 나온 기자는 ‘숫사슴들’에 대한 내용은 잘 조사한 것 같았지만, ‘성난 숫사슴들’의 존재는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애당초 로스 카운티가 전국으로 유명세를 얻기 시작한 게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영악한 그놈들은 법의 선을 교묘하게 넘지 않으면서 빅토리아 파크를 갉아먹어 왔으니까.


공포정치에 적응되어 버린 스탠드는 침묵의 경기장이라는 오명과 조롱 속에서도 반응하는 법을 잊었고,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원래 그랬던 것처럼 있는 그대로 보일 뿐이다.


이 팀에는 엄연히 ‘숫사슴들’이라는 자랑스러운 단체가 존재했었는데 말이다.


피터 블랙과 토드 홉킨스의 주도하에 일어난 신흥 숫사슴들의 목적도 그 악성 종양을 떼어내고 서포터 문화를 바로 잡는 것이었다. 빅토리아 파크를 카운티의 구호로 뒤덮을 수 있던 것도 수개월을 거쳐서 치밀하게 세운 계획의 결과물이었다.


베넷으로서는 자세한 내막을 알 도리가 없었기에 떠났던 팬들이 로스 카운티의 성적을 보고서 돌아온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감사함 또한 느끼고 있었다.


“참 골칫덩이 같은 놈들이었는데.”


성난 숫사슴들의 심각성은 구단주도 잘 알고 있었지만, 단지 쫓아낼 명분을 만들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방치한 채로 오랜 세월을 보내야 했다.


미디어의 눈을 피하며 악행을 일삼던 그놈들이 마침내 팬들의 소리에 파묻혔다. 제압당해서 우왕좌왕하던 꼬락서니는 다시 생각해도 통쾌하다.


[로스 카운티는 스코티시를 대표하는 구단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유로파 리그 8강에서는 어떤 모습을 보일지, 또 관중을 하나로 묶었던 서포터 집단이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지.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거참. 로스 카운티가 스코티시를 대표하는 구단이라니.”


[다음 소식입니다. 셀틱의 로니 데일라 감독이 지난 경기에서······.]


삑 -


베넷은 리모컨을 들어 TV를 꺼버리고는 편안한 자세로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몇 달 전만 해도 누가 그렇게 얘기하면 어색해서 손사래를 치기만 했었지. 이제는 내가 먼저 나서서 그렇게 말하게 되더군.”


“저도 그렇습니다.”


코너가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가 우승 경쟁 팀이라는 말에 어느 새부턴가 위화감이 들지 않고 있으니까요.”


“그렇지. 그런 표현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팀이 되었지. 참 신기한 일이야. 우리에게 강팀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줄 어찌 알았겠어? 로스 카운티가 셀틱과 우승 경쟁을 한다. 재작년에 이런 소리가 나왔다면 그 사람은 미친 취급을 받았을 거야.”


베넷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코너에게 다가가 손을 덥석 잡았다.


“단장이 큰일을 해주었소. 그때 델 레오네, 그 사람의 이력서를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렸다면 우리 또한 나락으로 처박혔겠지. 이런 영광은 고사하고 지금쯤 2부 리그에서 승격하려고 허우적댔을지도 몰라. 단장의 한마디가 이 팀을 살려낸 거요.”


주변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건 구단주의 새로운 버릇 중 하나였다. 코너는 그에게서 이미 백 번은 넘게 더 들은 얘기였지만,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저도 그때 구단주님을 설득했던 게 일생일대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베넷은 이를 드러내며 웃다가 다시 돌아가 의자에 앉았다.


“그렇다고 해도 이럴 수가 있나? 어떻게 사람 한 명이 팀 하나를 이렇게까지 바꾸어낼 수 있느냔 말이지. 두 눈으로 보고서도 믿기지 않아.”


축구는 감독의 스포츠라는 말을 예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과장된 얘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스코티시 리그는 통하지 않는 영역이라고 여겨왔다. 그건 크게 신뢰했던 전임자 데렉 아담스와 함께 했을 때도 굽히지 않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베넷의 가치관은 감독 만능주의로 기울어지려 하고 있었다.


아리고 사키나 카를로 안첼로티가 와도 어떻게 할 수 없었을 거라고? 그렇게 확신하던 자신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위대한 거장들에게 큰 결례를 범한 셈이다. 그들이 스코티시에 왔다면 분명 뭔가가 달라졌을 게 분명한데.


다만 수억의 연봉을 받는 세계적인 명장들이 변방의 초라한 구단에 발을 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이 누추한 곳에 찾아와 준 이탈리안이 그저 감격스러웠다.


안토니오 델 레오네. 그는 축복이며, 이 팀의 구세주다.


“제가 찾아온 건 다름이 아니라, 급히 보고드릴 게 있어서입니다.”


코너의 말이었다.


“방금 테넌츠 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테넌츠라고? 정말이오?”


“예. 우리와 스폰서십을 맺고 싶다고 했습니다.”


“맙소사. 경사가 겹겹이 일어나는군.”


베넷은 한층 더 기분이 좋아졌는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틀 뒤에 만나서 협상할 예정입니다만, 먼저 그쪽이 조건 하나를 내건 게 있습니다. 이건 꼭 들어주었으면 한다고······.”


“어떤 조건이오?”


“계약 기간 동안 대표 모델로 활동할 두 명의 선수를 지목했습니다.”


스폰서십 관계를 맺게 되면 선수들은 해당 기업 상품의 전속모델로 활동하기도 한다.


포스터나 신문 광고 등 다양한 수단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TV 광고. 모든 선수를 브라운관에 담아낼 순 없어서 대표 모델을 설정해야 하는데, 테넌츠 쪽에서 스코티시 차기 스타가 될 조짐이 보이는 두 선수를 내세우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지목한 두 선수는?”


“제임스 블랜차드와 앤드류 톰슨입니다.”


“하하하! 과연 일류 기업이야. 보는 눈이 있어!”


베넷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는 로스 카운티 소속의 선수들이라면 전부 좋았지만, 유독 세 명에게는 동경에 가까운 애정을 담고 있다.


수년간 팀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리차드 브리튼의 열렬한 팬이었고, 델 레오네가 부임한 이후엔 잭 마틴의 해결사 본능에 푹 빠졌었다. 그리고 최근에 눈길이 가는 선수가 바로 앤드류 톰슨이다.


베넷은 장담할 수 있었다. 블랜차드와 톰슨은 로스 카운티 역사에 길이 기록될 인물이 되리라는 것을. 테넌츠가 그 진가를 알아보니 도저히 웃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소년의 티를 아직 다 떼지 못한 톰슨이 맥주 광고에 어울리는 이미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선수의 미래를 잘 내다보는 편은 아니어도, 이건 느낄 수 있어. 톰슨에게는 뭔가 특별함이 있다는 걸.”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스피드는 경이로운 수준이며, 시간이 갈수록 성장하는 것이 뚜렷하게 보여서 지켜보는 맛이 있다.


기복이 극심하던 작년과 달리 퍼포먼스도 점점 물이 오르는 중. 후반기 들어서는 팀의 승리에 일조한 비중이 결코 작지 않았다.


볼프스부르크와 붙었을 때도 그랬다. 1차전에서는 상대의 왼쪽을 찢어버리며 부팔의 골을 어시스트했고, 2차전에서는 보이드의 동점 골이 나오기 전 날카로운 측면 돌파가 있었다.


물론 열한 명의 선수들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기에 일궈낼 수 있던 결과다. 하지만 톰슨이 없었다면 8강 진출이란 대성과를 달성해내는 게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로스 카운티의 경기에서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든 순간에는 항상 그 중심에 앤드류 톰슨, 그가 존재해 왔으니까.


“내년이 더 기대되는 선수야.”


그의 나이는 겨우 스물하나. 전성기는 아직 찾아오지도 않았다. 앞으로 얼마나 성장할지, 그 후엔 어떤 플레이를 하는 선수가 될지. 베넷은 가슴이 두근거려 미칠 것 같았다.


그리고 반드시 이루어질 거라고 굳게 믿었다.


리저브 팀에서 전력 외 취급을 받던 블랜차드와 유소년 팀에서 풀백으로 뛰던 톰슨을 한눈에 알아보고 발탁하여 핵심 선수로 키워낸 감독이 함께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


사람들은 익숙함보다는 새로움에 더 끌리는 법이다.


지루하던 스코틀랜드 축구판을 뒤바꿔 버린 로스 카운티의 성공 가도는 어디 가서도 빠지지 않는 이야깃거리가 되었고, 모두가 이 하일랜드의 작은 팀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중이었다.


축구가 싫든 좋든 이 나라의 건장한 성인 남성이라면 로스 카운티에 관심을 보이는 정도에 이른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축제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그동안 기준점으로 살아오는 데 익숙해져 있던 집단이다. 이를테면 셀틱의 팬들처럼.


친 카운티파와 반 카운티파의 심정은 볼프스부르크의 탈락이 확정된 후 천당과 지옥처럼 반으로 명확히 나뉘었고, 다음 날 저녁이 되자 그 희비는 다시 엇갈렸다.


살아남은 여덟 팀의 대진 상대를 정하는 조 추첨식.


그 대진 결과가 정해지자 존 프리먼 같이 혁명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고, 로스 카운티의 질주에 제동을 걸어주길 간절히 바라던 사람들은 쾌재를 불렀다.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든 로스 카운티는 화제의 중심이었지만.



“블랜차드가 결장한다는 정보가 돌고 있습니다.”


“연장전까지 그렇게 뛰어다녔는데 삼 일 만에 몸 상태를 회복하는 건 무리겠지.”


“믿어도 될까요? 그 이탈리안이라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려고 연막을 쳤을 가능성이······.”


“로스 카운티가 치렀던 살벌한 일정을 보면 그건 아닐 거야. 우리도 당장 윌프리드가 나오지 못하는데.”


정작 셀틱 구단에서는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이틀 뒤 그 독일 팀을 좌절케 했던 팀과 맞붙어야 하는 차례가 왔기 때문이다. 그 문제에 대해서 로니 데일라 감독과 존 콜린스 수석 코치는 심각한 논의를 나누고 있었다.


어느새 그들과의 격차는 고작 2점밖에 남지 않았다. 여기서 승리를 내주면 버티고 버텨왔던 그간의 노력이 허사가 되고 만다.


이토록 중대한 시점에 윌프리드 자하와 크리스 커먼스 두 명이 경미한 부상으로 결장하는 상황. 하필 로스 카운티전을 앞두고 좌우를 책임지는 주전 날개가 전부 누워버렸다.


커먼스의 후계자로 데려왔던 게리 맥케이-스티븐은 부진을 거듭하며 사실상 실패한 영입이 되었고, 자하를 대체할만한 급의 선수는 아예 없다. 공격에 큰 차질이 생기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그 외에도 골치 아픈 게 한둘이 아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에밀리오의 폼이 너무 좋지 않아서 톰슨 쪽을 제대로 방어해낼 수 있을지······.”


“······.”


승리를 따내지 못하더라도 비길 수 있다면 여전히 정상 자리를 사수할 수 있다. 최고만을 추구해야 하는 셀틱의 사상과는 어긋나겠지만, 데일라는 물불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5년간 핵심 레프트백으로 활약하던 에밀리오 이사기레가 근래 들어 빈틈을 계속 내보이는 게 영 심상치 않다. 며칠 전 하이버니언과 무승부를 거뒀을 때도 그의 실책이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았던가.


이런 꼴로 그냥 내보냈다간 볼프스부르크의 측면보다 더 심각하게 박살 나버리는 참사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지.”


데일라가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역시 그 녀석을 선발 출전시켜야겠어.”


“예? 고작 열일곱 살의 어린 선수입니다. 1군 경험이 전무한데 우승 경쟁의 기로에 놓인 싸움에 데뷔시키겠다니요? 아무리 유망한 재능을 지녔다지만······.”


“그러면 폼이 심각하게 떨어진 에밀리오를 그대로 넣자는 소린가?”


“······.”


“아니면 그보다도 수비력이 미숙한 찰리를 선발로 내보내야 할까?”


날이 선 질문에 콜린스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감독은 전부터 세대교체를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그걸 만류했던 건 자신이었다. 이어진 결과는 그의 주장에 힘이 실릴 수가 없었다.


끝까지 중용해야 한다고 했던 이사기레의 폼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백업 요원인 찰리 멀그루가 톰슨을 잘 막아낼 수 있을지는 굳이 안 봐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어차피 에밀리오는 폼이 떨어지기 전에도 톰슨에게 약한 면모를 보여 왔었어. 부진할 때 내보낸다는 건 승리를 헌납하자는 말과 다름없지. 변화를 줄 때가 왔어.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지금······.


“······.”


“아니, 우리에게 선택권은 없다고 봐야지.”


데일라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소집 명단에 포함하고, 이틀 뒤 선발로 나갈 거라는 사실까지 알려줘. 이젠 그 녀석에게 전부를 걸어볼 수밖에 없어.”


*******


2015년 3월 22일, 경기 당일.


“이런 게 제대로 된 풍경이지.”


한 남자가 스탠드에 우뚝 서서 뿌듯해하고 있었다.


감동적인 카운티의 구호를 이끌어낸 장본인이자 온종일 뉴스를 뜨겁게 달궜던 단체의 지도자, 신흥 숫사슴들의 응원단장인 피터 블랙이었다. 그는 못된 훌리건 놈들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눈앞의 모습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그의 뒤에는 수십 명의 인원이 한데 뭉쳐 있었지만, 예전 그 무리처럼 불편한 분위기를 발산해내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서포터,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팀을 응원하며 즐기기 위한 모임이다.


“잔당들이 남아있을 순 있겠지만, 이미 끝난 싸움이야.”


옆에서 토드 홉킨스가 말했다.


“주변의 선량한 사람들이 우리의 뜻에 동조해주었고, 미디어에 크게 알려지기까지 했어. 놈들이 다시 깽판 치기에는 껄끄러운 상황이 되었지.”


“흥. 그깟 오합지졸들이 뭘 할 수 있겠어.”


블랙이 말했다.


“이때까지 한 짓을 생각하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것들이지만, 자네를 생각해서 그냥 넘어가는 거야. 알아서 찌그러졌으니 더는 신경 쓸 필요도 없지.”


“그래, 피터. 우리는 이제 순수하게 서포터로서 이 순간을 즐기면 되는 거야.”


블랙은 그 말에 다시 너그러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렇지. 서포터로서.”


이윽고 선발 라인업이 발표되었고, 장내 아나운서가 로스 카운티에 이어 셀틱의 진영을 읊기 시작했다.


“방금······ 뭐라고?”


그리고 블랙은 귀를 스쳐 간 이름을 듣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머지는 다들 알만한 놈들인데 저 이름은 처음 듣는 것 같군. 토드, 자네는 아나?”


“나도 처음 듣는데.”


홉킨스마저 고개를 젓자 블랙은 인상을 구기며 구레나룻을 긁적였다.


“키어런······ 티어니? 이게 대체 누구야?”


작가의말

너무 늦어버렸네요. 죄송합니다.

최근에 가정사 문제가 겹쳐서 글에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심리적인 부분이 글에 많은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기본 연재 속도에 대한 문제도 조금씩 개선되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 원점으로 돌아가버려 쉽게 되지가 않네요. 

독자분들께서 이야기에 잘 몰입하실 수 있도록

연재 속도를 내서 즐거움을 드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니..

제가 아직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무료라지만 너무 늦어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제 글을 기다려주시고 재밌게 봐주시는 분들께는

그저 무한한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늦더라도 계속 글을 하나씩 추가해나가면서

완결에 대한 신뢰는 반드시 지키고 싶은 마음입니다.

다시 한번 늦어서 죄송합니다. (_ _)


소중한 후원금을 보내주신

이풍 님

모아두상 님

DailyMail 님

언제나 감사할 따름입니다. (_ _)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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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199. 대립 +5 24.01.25 746 32 26쪽
198 198. 대면 +5 24.01.14 800 34 25쪽
197 197. 팀의 완성도 +8 24.01.04 775 42 24쪽
196 196. 신뢰의 결실 +5 23.12.23 832 37 28쪽
195 195. 한 마리의 송골매 +5 23.12.10 821 39 23쪽
194 194. 두 마리의 사자 (2) +5 23.12.02 828 41 25쪽
193 193. 두 마리의 사자 +4 23.11.22 886 42 25쪽
192 192. 캡틴 잭 +3 23.11.10 847 40 26쪽
191 191. 경기장 위의 숫사슴들 +6 23.10.31 898 35 28쪽
190 190. 계몽의 시대 (3) +3 23.10.20 923 44 23쪽
189 189. 계몽의 시대 (2) +5 23.10.08 938 39 26쪽
188 188. 계몽의 시대 +4 23.09.26 984 42 26쪽
187 187. 새로운 국면 (5) +7 23.09.15 1,037 45 22쪽
186 186. 새로운 국면 (4) +6 23.09.03 1,063 42 25쪽
185 185. 새로운 국면 (3) +8 23.08.19 1,147 45 22쪽
184 184. 새로운 국면 (2) +8 23.08.04 1,193 40 26쪽
183 183. 새로운 국면 +7 23.07.13 1,273 56 22쪽
182 182. 지상 최고의 팀 (4) +8 23.06.28 1,248 50 29쪽
181 181. 지상 최고의 팀 (3) +5 23.06.16 1,142 39 24쪽
180 180. 지상 최고의 팀 (2) +6 23.05.27 1,254 50 24쪽
179 179. 지상 최고의 팀 +5 23.05.07 1,341 50 27쪽
178 178. 승부욕의 화신 +3 23.04.22 1,268 50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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