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있는 곳에 강호가 있다
혼자서 마시는 술은 쓰다. 그러나 상대의 정체도 파악하지 못한 지금은 숨어서 혼자 술을 마셔야 한다. 오시가 지나 일어날 때만 해도 술이 그렇게 싫었는데 저녁이 되자 또 술 생각이 난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난생처음 보는 자 둘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에 염우가 무척이나 공손한 태도로 따라 들어왔다. 최근에 부방주로 임명한 인재다. 몇 번의 투자로 수백 냥의 은자를 벌어다 주었다.
염우를 보자 전당호는 기분이 좋아졌다. 낯선 사람 중 키가 큰 사내가 조금 눈에 거슬렸지만, 이미 몽롱해진 전당호의 눈과 머리는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오, 염 부방주 왔는가. 와서 나랑 술 한잔하세. 그리고 새로운 벗들도 소개 좀 해주게나."
염우는 둘의 눈치를 보았다. 당우형은 어이가 없어 실소했고 유신은 오히려 화가 났다. 아비의 원수가 저렇게 멍청하고 무능한 놈이라는 게 견디기 힘들었다.
"이미 만나보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대신 소개하죠. 이분은 사천당문에서 온 당 대협이고 이분은 용철 대협의 아들 용유신 소협입니다."
전당호는 식은땀이 쫙 흐르며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급하게 정신을 차리려고 하니 그 반동으로 오히려 취기가 더 심하게 치고 올라왔다. 잠깐의 어지러움이 지나자 머리가 조금 맑아졌다.
"제발, 제발 원하는 건 다 드릴 테니 저만 죽이십시오."
황당하게도 전당호는 유신이 아닌 당우형에게 빌었다. 검을 뽑아 들고 성큼성큼 걸어간 유신은 전당호의 사지를 베었다. 목숨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지만 도망치거나 수작을 부리긴 힘들 것이다.
"소질, 내 간악한 자에게 속아서 천벌 받을 죄를 지었네. 청죽방도 넘기고 내 목숨도 맡기겠소. 그러니 제발 내 가족은 놔두시게."
음혈도도 그렇고 전당호도 그렇고 자기 가족은 끔찍이도 아끼는 것 같다. 하지만 남의 가족을 해치는 건 그렇게도 쉽게 한다. 유신은 화가 억누르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삭초제근(削草除根)을 해야 하나? 아니면 당사자만 벌해야 하나? 내 아비는 어떤 복수를 원할까?'
유신은 당우형에게 눈길로 도움을 청했다. 당우형은 잠시 고민하더니 유신의 곁으로 움직였다. 당우형이 뚜벅뚜벅 걸어오자 전당호는 더욱 심하게 떨었다. 피를 많이 흘려 추워서 떠는 건지 당문의 흉명에 겁이 질려 떠는 건지는 본인만 알 것이다.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라. 그러면 손속에 사정을 둘 것이다."
전당호는 대답도 못 하고 고개만 주억거렸다.
"먼저 사건의 연유를 밝혀라."
청죽방은 황죽방에게 심하게 밀렸다. 무력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관이나 흑도와 긴밀히 연결된 황죽방의 세력이 청죽방을 압도했다. 그래서 청죽방을 떠나 황죽방에 몸을 담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어쩔 수 없이 저는 의형제인 용철을 찾아 청죽방의 방주가 되어달라고 했습니다. 용철은 무공도 강하고 정통성도 있기에 용철이 오면 황죽방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용철은 거절했다. 그때 청죽방의 간부 중 하나가 꾀를 냈다. 일단 용철이 이쪽에 온다는 소문을 퍼뜨려서 방도의 이탈부터 막자는 것이다. 전당호는 자신이 거듭 간청하면 용철이 들어줄 거로 생각하고 소문을 퍼뜨렸다.
"용철은 이름만 걸고 실질적인 방의 운영은 우리가 하는 조건으로 거듭 청했습니다. 그런데도 용철은 고집을 부리더군요. 그때 황죽방에서 용철을 상대할 고수를 찾는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전당호는 이 정보를 이용해 용철을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수하들은 용철이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음을 강조하며 다른 계책을 내놓았다. 황죽방이 원하는 청부사와 먼저 계약을 맺고 황죽방을 끝장낼 계획을 세웠다.
"음혈도에게 은자 오십 냥을 주는 조건으로 황죽방의 의뢰를 완수한 후 황죽방의 방주까지 처리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정말 귀신에게 홀렸던 것 같습니다. 제가 가진 걸 다 드릴 테니 저 하나로 복수를 끝내주십시오."
"솔직하게 얘기하면 봐주려고 했는데, 왜 내 동생을 생포하라고 시킨 건 빼먹느냐?"
전당호는 상체를 벌떡 일으키고 아픈 팔을 움직여 자기 뺨을 힘껏 때렸다.
"제가 원래 멍청한 놈입니다. 거기에 술까지 먹어 대가리가 굴러가지 않았습니다. 유신을 방주 자리에 앉혀서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해칠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습니다."
당우형이 유신을 바라보았다. 유신의 애절한 눈빛을 본 당우형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강호에 발을 들인 이상 마음은 철석같이 굳세야 한다. 내 이번까지는 봐주마."
다시 전당호에게 고개를 돌린 당우형이 서릿발 같은 기세로 호통쳤다.
"네 가족 목숨이 걸린 질문이다. 오현사에 내 동생이 있는 걸 알았을 텐데 왜 팔 년이나 가만 둔 거냐? 설마 오현사도 너희와 한통속이냐?"
유신은 눈을 부릅뜨고 전당호의 대답을 기다렸다. 전당호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팔다리의 피는 이미 멎었으나 흘린 피가 많아 낯빛이 창백하다.
"오현사는 고수가 많아서 저희가 감히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오현사의 주지가 죽련방의 창시자인 초대 방주와 친분이 깊습니다. 그 명분만으로도 청죽방은 오현사를 건드릴 수 없습니다."
"단지 그뿐이냐?"
전당호는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조금 머뭇거리는 말투로 답했다.
"그리고 누진 대사의 경고를 받았습니다. 자신이 허락하기 전에는 누구도 용유신을 건드리지 말라고요."
유신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항주로 오는 길에 당우형이 오현사도 의심스럽다고 할 때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그 믿음이 점점 흔들리고 있다.
"저도 이상해서 의뢰를 넣어 알아봤습니다. 하오문의 정보에 따르면, 누진 대사가 초대 방주가 남긴 무공비급을 탐내서 용유신을 데리고 있다고 하더군요."
전당호가 꾸며낸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유신은 전당호의 말이 진실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매일 비무를 해주면서도 무공을 가르쳐 주지 않은 일, 낙방한 서생이 있음에도 일부러 글을 가르쳐주지 않은 일, 늘 동자승을 통해 유신의 행적에 신경 쓰던 일.
무공의 갈래가 달라서 안 가르쳐준다고 한 건 핑계였다. 공부해서 어디에 쓰겠냐며 무공 수련이나 열심히 하라던 말은 가식이었다. 동자승은 늘 유신이 주지 스님의 관심을 독차지한다고 불평했지만, 그건 관심이 아니고 감시였다.
'죽림의 집을 뒤진 건 누진인가? 비급인지 뭔지를 찾지 못하니 일부러 나를 강호에 내보낸 건가? 내가 떠날 때 배웅하지 않은 건, 내 뒤를 밟기 위한 것인가?'
갑자기 모든 게 의심스러웠다. 아비의 원수를 열심히 알아본 것도 그놈이 무공비급을 가져간 게 아닌지 의심되어 조사한 것 같다. 간혹 손속이 과할 때가 있었는데 유신이 무공을 숨기는 줄 알고 일부러 그런 것 같다.
"동생, 여기 일 마무리하고 천천히 생각하자."
유신은 검으로 전당호의 목을 날렸다. 내공이 알아서 움직여 두꺼운 전당호의 목을 갈대 베듯이 베어버렸다. 팔·다리에 피가 흥건한데도 많은 피가 남았는지 전당호의 몸뚱이는 피를 꾸역꾸역 쏟아냈다.
염우는 멀찍이 서서 눈치만 보았다. 떠나는 당우형과 유신을 멀리까지 배웅한 후 돌아온 염우는 수하들을 모아놓고 작당을 시작했다. 용철의 자식이 복수했다는 사실을 믿을 만한 자들에게만 알린 뒤, 청죽방의 오랜 간부들을 전부 잡아서 심문하고 벌할 계획을 세웠다.
"동생, 과유불급이란 말이 항상 맞는 게 아니야. 복수는 아무리 과해도 나쁘지 않아. 분이 풀리지 않는다면 염우에게 명해 전당호의 가족을 전부 죽여도 된다."
"아닙니다. 복수하면 후련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허망합니다. 기분이 상쾌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더러워지네요. 강호란 곳은 알면 알수록 멀리하고 싶네요."
"동생, 강호에는 격언이 하나 있다. 이 격언을 항상 가슴에 품어라."
당우형이 엄숙한 표정을 하자 정말 그럴듯해 보였다.
"사람이 있는 곳에 강호가 있다."
하긴 그렇다. 포두들에게도 그들만의 강호가 있고 뱃사공들도 그들만의 강호가 있다. 안인현은 강호 세력이라고 칭할만한 단체가 없지만, 그곳에도 강호가 있었다. 부처님을 모시는 소림이나 도를 닦는 도사들이 모인 무당도 강호에 속한다.
"형님, 전당호의 수급을 챙겼어야 했는데."
당우형은 오른손에 든 물건을 들어 올렸다. 사람의 수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고 모양이 규칙적이다.
"염우라는 놈이 챙겨주더라. 술단지에 수급과 소금을 함께 넣어서 천으로 싸서 주더라. 우선 가서 의부의 뫼를 옮기고 제사를 지내자."
"아닙니다. 시신은 그대로 두겠습니다."
가다가 문 닫은 주점 하나가 보였다. 당우형은 주점의 문을 탕탕 두드렸다. 서호 주변과 같은 곳을 제외하면 밤에 장사하는 곳이 드물다. 밥때가 이미 지나서 일찍 잠자리에 누웠던 주점의 점소이가 툴툴거리며 문을 열었다.
"여기 있는 술 전부 내놓아라. 조금이라도 숨기면 여기 불 질러버리겠다."
유신의 기분이 좋지 않자 당우형도 기분이 나빠졌다. 당우형의 말투가 무척 퉁명스러웠지만, 점소이는 당우형이 던져 준 은자 반 냥에 정신이 팔렸다. 급히 점주와 주방장까지 깨워서 움에 있는 술단지를 전부 꺼냈다. 술단지를 메고 갈 술지게까지 창고에서 꺼내 주었다.
"곡괭이도 두 자루 가져와라."
곡괭이까지 얻은 둘은 터벅터벅 걸었다. 유신이 조금 앞서고 당우형이 조금 뒤에서 걸었다. 걷는 내내 유신의 어깨가 들썩였다. 정작 복수를 끝내고 나니 더 슬펐다. 가슴을 꽉 채우던 무언가가 갑자기 사라지며 무척 허전했다.
음혈도가 알려준 곳에 도착하니 평지보다 조금 볼록하게 솟은 뫼가 보였다. 당우형과 유신은 우선 돌들을 가져다가 뫼의 주변에 깔았다. 그리고 곡괭이로 주변의 흙을 파서 뫼를 높였다. 무공을 익힌 둘은 금방 끝낼 줄 알았는데,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하다 보니 요령이 부족해 뫼를 단단히 다졌을 때는 이미 날이 밝아왔다.
유신은 물론 당우형은 제사를 지내는 법을 제대로 모른다. 유신이야 가르치는 사람이 없어서 몰랐고 당우형은 가문의 제사에서 시키는 대로 절만 하면 되기에 구체적인 절차는 모른다. 그래서 절을 하고 술을 붓는 것으로 간단히 끝냈다.
"아부지, 아부지 아들 고수가 될 거예요. 그래서 비단옷 입고 매일 고기 먹을게요. 이쁜 색시 얻어서 아기 낳고, 아기는 짚신 짜고 죽립 짜고 광주리 짜게 하지 않을게요. 아기를 가득 낳아서 표국을 만들게요. 표국을 만들어서 산적이랑 수적 다 잡아버리겠어요."
부용루에서 이미 많은 술을 마셨다. 온종일 복수를 위해 돌아다녔고 결국 전당호를 죽이면서 긴장이 풀렸다. 술 한 단지를 무덤에 콸콸 부은 후 남은 술은 당우형과 둘이 안주도 없이 마셨다.
당우형은 품속에 육포가 있지만 꺼내지 않았다. 왠지 안주 없이 술만 마셔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신은 결국 취해 횡설수설 주사를 부렸지만, 당우형은 절정에 근접한 내공 덕분에 취할 수 없었다.
"아부지, 무공비급 어디 있어요? 나 고수 될래요. 이쁜 색시랑 아기 가득 낳아서 지부대인 될게요. 아기들이랑 같이 담 넘어서 도둑놈들 다 잡을게요."
결국, 해가 뜰 즈음에 유신은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당우형은 용철의 뫼에 절을 한 번 더 하고 유신을 업고 떠났다. 곡괭이 두 자루와 술단지 그리고 전당호의 수급만 남았다.
죽림에 있는 유신의 집에 도착하니 천랑이 꼬리를 흔들며 반갑게 당우형을 맞이했다. 당우형은 품속에서 육포 몇 장을 던져주고 안으로 들어가 허름한 침상에 유신을 눕혔다.
그때 육포를 순식간에 다 삼켜버린 천랑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궁이 속으로 쏙 들어갔다 나온 천랑의 입에는 두꺼운 천으로 꽁꽁 싸맨 물건이 물려 있었다. 흡사 책자 모양 네모난 물건이.
- 작가의말
천랑의 역할 끝났습니다. 물론 이후에도 가끔 출연하겠지만, 용도는 이미 다했습니다. 저는 토사구팽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천랑은 승냥이이지 개가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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