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화일현
쇠로 된 뱀이 흉악한 주둥이를 한껏 벌리고 유신의 목을 물어뜯었다. 아무리 빠른 검도 변화무쌍한 뱀의 몸놀림을 이겨내지 못했다. 몸은 비단처럼 부드러운 주제에 이빨은 강철같이 단단하고 송곳처럼 날카롭다.
'또 졌다.'
가주와 무당 장로의 비무는 무승부로 끝났다. 둘은 엄청 화려한 초식과 정교한 공방을 주고받으며 사람들의 안계를 넓혀줬다. 검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도 수련에 엄청 도움이 된다.
무당 장로의 검은 마치 채찍처럼 부드럽게 움직였다. 일부 초식을 사용할 때는 채찍이 아니라 살아있는 뱀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기이한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서문고택의 검은 우직하게 곧은 궤적만 고집했다. 마치 다른 길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듯 한길만 고집했다. 뻔한 경로임에도 상상 이상의 위력을 보여주었다.
'변을 제압하는 쾌가 어떤 것인지 알겠지만 정작 펼치기는 너무 힘들구나. 내공과 초식 거기에 경험까지 부족하지 않은 게 하나도 없다.'
새벽에 일찍 일어난 유신은 곤히 자는 초설을 깨우기 싫어서 눈을 감고 명상수련을 했다. 무당파의 장로를 상대로 삼 초식을 버텨내지 못하고 수련이 끝났다. 심력의 소모가 심해 연속으로 하기엔 부담이 된다.
'쾌만 남기는 게 답일까? 아니면 쾌에 적당히 다른 검의를 섞는 게 답일까?'
대부분 문파의 눈에 서문가의 쾌검은 방문좌도로 보인다. 쾌만 남기고 다른 검의는 전부 버리겠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변을 버리면 출수하는 순간 상대는 검이 목표한 지점을 알 수 있다. 환을 버리면 상대는 속임수에 대한 의심을 버리고 빠른 반응을 보일 수 있다. 강을 버리면 요해가 아닌 이상 상대는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장기에서 포나 상을 다 떼고 차만 가지고 싸우겠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상황에 따라 그리고 상대에 따라 적합한 검술과 대처법이 있는데 서문가는 그 모든 걸 무시하고 절대의 쾌만 추구하겠다는 것이니 대문파들 눈에는 사마외도로 보인다.
만약 쾌를 추구하는 걸 수련의 화두로 삼은 것뿐이라면 괜찮은데 서문가는 실전에서도 쾌검만 고집한다. 그래서 일류의 경지가 되기 전에는 가문을 나서지 못한다는 가법까지 생겼다. 일류에 이르기 전에 강호에 나가면 급하고 더러운 성질 때문에 살아서 돌아오기 거의 힘들다.
그때 밖에서 천랑이 왈왈거렸다. 유신은 초설의 두 팔에서 자신의 왼팔을 조심스럽게 뽑아낸 다음 이불을 잘 여며주고 옷을 차려입었다. 곧 천랑을 안고 장원의 뒷담을 넘은 후 사냥을 시작했다. 꽤 가파른 산을 뛰며 유신은 하체 단련을 했고 천랑은 본능에 새겨진 사냥법을 일깨워갔다.
### 快劍神龍 龍遊迅 ###
열 대가 넘는 사두마차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천검산장으로 향하고 있다. 천검산장이 고즈넉하게 잠자다가 소란에 기지개를 켰다. 미리 소식을 접하지 못한 형주 백성들은 뒤늦게 소문을 듣고 분분히 달려왔다.
마차는 붉은색의 나무로 만들어서 무척 고아해 보였다. 바퀴 빼고 전부 자단목으로 만든 마차는 먼 길을 나서기에 적합하지 않다. 저 마차 한 대가 웬만한 크기의 장원 하나와 맞먹는 값어치를 한다. 흠집이 나기라도 하면 정말 엄청난 손해다.
거기에 마차를 끄는 말들도 잡티 하나 없는 백마가 아니면 흑마였다. 잡티가 없는 백마는 정말 귀하고 새까만 말들이 붉은색 마차를 끄니 보기에 정말 좋았다. 영문도 모르고 귀한 분이 왔다고 무작정 엎드리는 백성이 대부분이다.
비싸 보이는 가죽옷을 차려입고 노루 가죽으로 만든 피풍의로 몸을 감싼 여자들이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마차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살짝 드러난 이마가 하얗고 고운 것으로 보아 거친 일을 하는 여자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마차를 따라 걷는 여자가 삼백 명은 넘었다.
행렬의 마지막은 솜옷에 털모자를 쓰고 병장기 꾸러미로 보이는 짐을 잔뜩 짊어진 사내들이다. 하나하나가 눈빛이 형형하고 태양혈이 불뚝 솟은 것이 내외공이 일정 경지에 이른 무인이 틀림없다. 내공 혹은 외공만 수련해서는 태양혈이 밖으로 솟지 않는다.
일행 모두 합치면 마차 안의 사람을 제외하고도 육백이 넘는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형주로 왔는데 아무 소문도 나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물론 큰 강줄기가 여럿이고 호수도 많은 곳이라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담화일현(曇花一現) 천지실색(天地失色)."
주변에서 구경하던 백성들이 전부 줄행랑을 놓았다. 당문처럼 유명하지는 않지만 담화궁 역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무서운 문파로 소문났다.
"우리 서문가도 저런 멋있는 구호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데."
초현이 아쉬운 말투로 입을 열자 유신이 말을 받았다.
"저리 외치는 사람들은 무척 부끄러울 거야."
"옥면검룡 불세일출 이렇게 외치고 내가 딱 등장하면 정말 멋있을 텐데."
유신은 자신이 몇 년 전에나 하던 유치한 생각을 아직도 하는 초현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만약 용호산에서 남무천을 만나 강호와 고수에 대한 환상이 깨지지 않았다면 유신 역시 저들이 멋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문이 열려 있으니 손님이면 빈손으로 오시고 원수라면 검을 들고 오시오."
서문고택의 목소리에는 내공이 충분히 실려서 메아리까지 울렸다. 담화궁이 먼저 서신을 통해 서문가를 도발하며 좋게 볼지 검을 맞댈지 선택하라고 했는데 서문가는 대문을 활짝 열고 그 선택권을 담화궁에 넘겼다. 명분에서 이기고 들어가려는 것이다.
"술상을 차렸으면 빈손으로 갈 것이오, 홍문연이라면 검을 들고 들어갈 것입니다."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목소리가 천검산장의 상공에 퍼졌다. 흔히 고종음(鼓鐘音)이라고도 불리는 전음법으로 시전자의 위치를 짐작하기 어렵다. 전음 대결에서 내공의 양은 서문고택이 이겼지만 기술은 담화궁이 앞섰다.
"술상도 차렸고 검진도 준비했으니 손님이 마음대로 택하시오."
"객수주변(客隨主便 - 손님은 주인이 편한 대로 한다)이라고 천검산장에서 원하는 대로 하지요."
그때 무당의 장로가 나서서 중개했다.
"우선 빈손으로 들어와서 술잔을 기울일지 검을 맞댈지 상의하는 게 어떻겠소."
무당의 천룡음(千龍吟)은 말이 끝났는데도 그 소리가 귓가에서 몇 번이나 맴돌고 사라졌다. 서문고택처럼 내공을 실어 소리를 크게 한 것도 아니고 담화궁의 고수처럼 허공에서 소리가 나게 한 것도 아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의 귓가에 대고 일일이 속삭인 것이다.
"무당의 고인이 계신 줄은 몰랐어요. 천룡음을 들으니 아무래도 송엽 진인께서 왕림한 것 같군요."
"무당이 천검산장으로 비무하러 온 것이 강호에 다 알려졌는데 아직 모르셨다니, 귀를 닫고 살지는 않으셨을 테니 무당 정도는 눈에 차지도 않으신 것이구려."
계속 밖에서 전음으로 도발하기만 하면 무당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협박이다. 만약 이 협박이 먹힌다면 나름 무당의 위세에 도움이 되고 상대가 이 협박을 무시한다면 더 잘 된 것이다. 담화궁에도 무시당하는 현실을 반대파들도 견디기는 어려울 것이니 모두의 뜻을 하나로 합칠 수 있다.
"선물을 준비해라."
마차에서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들이 내리더니 천으로 가린 몸통 크기의 물건을 들고 천검산장으로 들어섰다. 문 옆에 대기하고 있던 서문청월이 담화궁의 일행을 안내했다. 가주전 앞에 차린 술상은 'ㄷ' 형태로 차려졌다.
주인을 뜻하는 북쪽은 서문가의 가주와 장로들이 앉았고 동쪽은 무당의 장로들이 앉았다. 같은 손님이건만 무당에게 굳이 더 높은 신분을 상징하는 동쪽을 내준 것은 기세로 담화궁을 누르려는 수작이다.
"선물을 올려라."
아무 내색도 없이 좌석에 앉은 담화궁의 여자는 수하에게 선물을 올리라고 명했다. 가냘파 보이는 여자 둘이 묵직한 선물을 가운데 놓고 천을 벗겼다. 황금색의 큼직한 종 하나 놓여있었다.
"은과 동을 섞어서 만들고 금칠을 한 종입니다. 소리가 맑고 고우며 멀리 퍼집니다."
종 안에 넣었던 솜들을 더 꺼낸 후 동으로 만든 막대기로 종을 치니 청아한 종소리가 멀리까지 퍼졌다. 분명 귀한 선물이지만 서문가 사람들의 낯빛은 무척 좋지 않았다.
송종(送鐘 - 종을 선물하다)은 송종(送終 - 마지막 길을 보낸다)과 발음이 같아서 가장 꺼리는 선물이다. 담화궁이 준비한 또 하나의 도발인 셈이다. 굳이 종을 선물로 줬다고 서문가가 화를 내면 강호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종소리가 참 맑습니다. 손님들에게 많이 들려드리고 싶군요."
유신이 앞으로 나가 담화궁 여자의 손에서 막대기를 받아든 다음 종을 가볍게 쳤다. 동작은 가볍지만 일류에 이른 유신의 모든 내공이 담겨 있고 막대기에는 최근 청죽단풍검에서 얻은 깨달음이 심겨 있다.
'진(震).'
흔들 진(振)이 아니라 자체가 떨리는 진이다. 막대기는 겉보기에 아무 낌새도 없지만 내부에는 거대한 진동을 품었다. 그리고 그 진동을 종에 전달했다. 종은 본래 진동으로 소리를 내는 물건인데 거기에 막대기의 진동이 얹히자 결국에는 파국을 맞이했다.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종의 일부는 가루가 되고 일부는 조각이 되었다. 청아한 소리를 내던 종은 부서질 때 결코 아름다운 소리를 내지 못했다.
"담화궁이 좋은 마음으로 송종(送終)했는데 제가 그만 실수로 파종(破終)했군요. 마음만 받고 선물은 돌려드리겠습니다."
선물을 받아도 웃음거리요 받지 않아도 웃음거리다. 조롱의 의미가 듬뿍 담긴 선물을 받으면 기개가 없다고 비웃을 것이고 받지 않으면 흉금이 작다고 비웃을 것이다. 그런데 유신이 나서서 훌륭히 수습했다.
내공으로 종을 깰 수 있는 사람은 이 자리에도 많다. 그러나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에 유신처럼 가벼운 동작으로 종을 깰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더구나 진동이 몰린 부위는 아예 가루가 나버렸다. 동과 은을 섞은 것이라 철처럼 단단하지는 않지만 약관이 되기 전에 이처럼 할 수 있었던 사람은 이 자리에 없다.
"용유신이라고 큰 내상을 입고 서문가에서 요양 중인 제 사위입니다. 실수로 담화궁의 선물을 깨트렸으니 참으로 미안하군요. 이 선물 그대로 받을까요?"
서문청산이 적절하게 나서서 수습했다. 만약 서문청산의 수습이 없었다면 유신이 무력으로 먼저 도발한 셈이 된다. 담화궁의 여자는 그제야 자기 신분을 소개했다.
"담화궁의 부궁주입니다. 여인네 이름을 함부로 공개할 것이 못 되니 그저 담 부인이라고 불러주십시오."
부궁주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힌 담 부인은 수하에게 눈짓했다. 깨진 종을 천으로 덮은 후 밖으로 가져다가 마차에 다시 실었다.
"비록 선물은 전달하지 못했지만 서문가에서 무척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으니 다음에 더 튼튼한 것으로 준비하죠."
다음을 기약하는 말을 내뱉은 순간 담화궁은 이미 기세에서 지고 들어갔다. 그러나 강호는 결국 힘 싸움이다. 명분은 다툼이 끝난 뒤 더 훌륭한 수습을 위한 것이지 검을 맞대는 데 큰 보탬이 되지는 않는다.
"도화궁이 멸문당했는데 무림맹은 나설 생각이 없어 보여요. 강호의 정의를 위해서 담화궁이 나서기로 했습니다. 오늘 서문가에 흉수가 있는지 혹은 서문가가 흉수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밝혀낼 생각입니다."
"우리 서문가도 도화궁의 멸문에 매우 놀랐소. 비록 마교의 호법 백면귀산을 보고 도망가고 무당의 큰 어르신 우행 진인을 무시했지만, 그래도 무림맹의 일원이고 강호의 동도가 아니겠소. 아무 친분도 없는 사이라서 그렇지 만약 깊은 교분이 있었다면 우리 서문가도 검을 뽑고 나섰을 것이오."
피비린내를 맡았는지 하늘이 하얀 가루를 내렸다. 땅이 피로 얼룩지면 눈가루로 덮으려는 생각이 분명하다. 흘릴 피가 많은 것인지 하늘은 끊임없이 굵은 가루를 땅에 내려주었다.
- 작가의말
어제 노트북이 고장 났습니다. OS가 제대로 로딩이 안 되더군요. 이젠 끝이라 생각하고 세이프티 모드로 들어가서 자료를 백업한 다음 시스템 복구를 시도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첫 시도에 성공했습니다. 하마터면 일주일 강제로 연중할 뻔했습니다.
Comment '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