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스로드

웹소설 > 일반연재 > SF, 전쟁·밀리터리

이름가림
그림/삽화
이름가림
작품등록일 :
2018.04.12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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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8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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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4.25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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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1회 - 동행 (01)

DUMMY

하우스라 불리는 대륙 횡단 트럭은 전용 면허증을 딸 수만 있으면 누구나 운전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면허증으로 돈을 벌고 싶으면 ‘대륙 간 이동 조합’에 가입하는 게 좋다. 왜냐하면, 비싼 초대형 트럭을 자기 돈 주고 살 수는 있다고 쳐도, 여러 의미에서 엄청난 화물을 꾸준하고 안전하게 수송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대륙 간 이동 조합’은 여객과 수송 주문을 모아 검증된 회사와 기사들에게 일감을 나눠준다. 거기에 더해 전 세계 곳곳에 정비, 보급, 주차, 창고 시설을 마련하여 제공하고, 가려는 곳의 날씨와 도로 정보를 공유하며, 치안 상태가 나쁜 지역에 들어갈 때는 경비 업체와의 연결을 도와준다. 또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사건 사고의 뒤처리와 보험업무를 대행해주면서도, 수수료가 비싸지 않았으니 하우스를 활용하는 가장 편한 방법은 여러 개의 조합 중 하나에 가입하는 거다.


길은 누란에 있는 그 조합의 물류창고에서 운송해야 할 화물의 취급 주의서를 읽었다. 원래는 단말기를 보면 될 내용인데, 그날 싣는 짐은 특이하게도 운송정보가 종이에 적혀 보내져 왔다.


... ... ... ... ... ... ... ...

내용물: H형 철제 기둥

출발지: 누란 조합 물류창고: C-71

도착지: 동문 도시 항구, 창고 번호 N32961


주의 사항

뜯지 마세요. 충격 방지 포장이 되어 있습니다.

습기 주의: 물에 젖으면 안 됩니다.

화기 엄금: 절대 인화성 물질과 같이 놓지 마세요.

... ... ... ... ... ... ... ...


길은 종이를 뒤집어 인계 서류에 사인을 받으려는 물류과 과장에게 보여줬다.

“주의 사항이 이상해요. 철제 기둥 옮기는데, 누가 불 걱정을 해요?”


과장은 시큰둥했다.

“몰라. 어쩌면 다른 물건일 수도 있어. 저건 이리로 왔을 때부터 꽁꽁 싸매져 있었거든. 밀봉 상태 확인하는 봉인지가 심하게 많은 걸 보면, 조금 이상하기는 해.”


길의 하우스에 물건이 실리고 있었다. 방수포에 덮였고 고정 로프에 칭칭 묶인 30m짜리 상자인데 위쪽에 사각형 환기 구멍이 튀어나왔다. 그것 3개가 창고 천장에 설치된 운반 크레인에 매달려, 뚜껑을 열어놓은 하우스 화물상자 속으로 차례차례 옮겨졌다.


길이 말했다.

“곤란해요. 이제 겨우 하우스를 제 명의로 돌렸다고요. 일 시작하자마자 불법물 운송하다가 경찰한테 걸리면 저는 어떻게 되겠어요. 일단 내용물을 확인할게요. 아니면 다른 일 맡을 거예요.”


“야, 나 좀 봐줘라. 우리 같이 일한 지 10년 넘고도 꽤 됐잖아. 저기에 무슨 대단한 한 게 실려 있겠냐. 조금 유별나기는 해도 저 물건 맡긴 회사가 꽤 큰손이야. 지금까지 실적도 있고 신용도 많이 쌓았으니까, 자잘한 건 넘어가 주자. 저런 짓 하는 거 보면 자기네 산업 기밀 같은 거 지키려는 거겠지. 괜히 일 늘리지 말자. 쉽게 가면 너도 일감 하나 챙기는 거고 서로 좋잖아.”


길은 성을 냈다.

“장난해요! 저는 켕기는 짓 하는 거 싫어요! 저 화물 잘못되면 과장님도 저랑 똑같이 골치 아파지실 텐데, 왜 이상한 짐을 떠맡아요?”


과장은 씨익 웃었다.

“나는···, 물건 잘 부탁한다면서 뒷돈을 조금 받았거든. 그리고 너는···.”

“저는요!”


과장은 씩씩거리는 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렇게 성질을 내면서도, 내가 부탁하면 들어주는 녀석이잖아. 괜찮아. 잘못될 일은 하나도 없을 거야···.”


길은 과장의 손을 치웠다.

“웃기시네. 그런 부탁 들어주는 병신은 10년 전의 나였고, 지금은 심보 고약한 개 한 마리 남았을 뿐입니다. 4할 챙기세요. 몸으로 직접 뛰는 내가 6이고, 과장님이 수수료로 4할이에요.”


“어허, 이거 왜 이러시나. 내가 왜 일부러 돈 얘기를 꺼냈겠어. 모르는 척 입 닫았으면 10할 전부 가지는 건데. 내가···” 과장은 잠시 고민했다.

“내가 6이야. 자네는 똑같이 일하고, 거저먹는 부수입으로 4를 챙기면 되잖아. 복권 당첨된 것 같은 돈인데, 뭐가 불만이야.”


길도 웃었다.

“과장님 말씀대로 모르는 척하고 먹었으면 될 돈 얘기를 꺼냈다는 건, 다른 데 다 찔러보고 안 됐으니까, 어쩔 수 없이 나한테 부탁한다는 거잖아요. 어쩐지 차 대놓자마자 쫓아와서 물건 실을 때부터 이상하다 했어. 저 마음 바뀌었어요!”


“야, 너 자꾸···.” 불안해진 과장은 자기 목을 긁어댔다.


길은 선언했다.

“내가 8할! 과장님은 2할. 꼬우시면 짐 내리던가!



— — — — —



모래색의 도화지 같은 사막 대평원에 녹색을 넓은 붓에 입혀 한 획으로 가로질러 초원을 그린다. 그 가운데쯤에 솟은 오아시스가 여관 마을 누란이었는데, 이 사람 별로 없는 땅에 놀이공원을 축성하기로 했다. 가장 가까운 도시까지 가려면 300㎞나 달려야 하는데도, 큰 도박장과 테마파크를 넓게 짓고, 경계선에 하늘로 뻗는 벽을 높이고 이어붙여, 어른과 어린이를 위한 성을 쌓겠다는 거였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진짜로 자원과 돈을 들이부어 만드는 시대가 건설시대다.


예전에 길이 스쿠터를 타고 병원에서 돌아왔을 즈음, 다시 생각할 때마다 열 받게 하는 배불뚝이 사장의 사무실에서 한바탕 난리를 치고 뛰쳐나와 여기저기를 방황했을 시절에, 우연히 길거리에 나자빠진 사람을 도와줬었다. 그는 술에 잔뜩 취해 널브러져 있었고, 발목을 심하게 삐었었다. 구급차를 부르려고 해도, 그 아저씨는 필요 없다며 고집을 부렸었다. 난감해진 길은 근처의 민가에서 얼음을 얻어와, 퉁퉁 부은 취객의 발에 얼음찜질을 해주었고, 일으켜 세워 부축해가며 그가 집이라고 주장하는 장소로 끌고 갔었다.

그곳은 술 취한 아저씨가 운영하던 1인 운송 회사의 차고였고, 지금은 길의 것인 된 하우스가 있었다. 길은 그 인연으로 아저씨를 도와 하우스를 타고 다녔고, 제법 긴 경력을 쌓고 나서는 은인이자 웬수 덩어리로 변해버린 아저씨가 딸과 손주들이 사는 마을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먹어, 거의 공짜와 같은 가격으로 하우스를 인수했다. 원래는 여럿이서 운전하고 정비해야 하는 하우스지만, 아저씨와 함께할 때부터 익숙해진 집이라, 혼자서도 무리 없이 끌 수 있었다.

은퇴한 아저씨와는 전화로 농담 따먹기를 주고받거나, 가끔 그가 물어다 주는 일감을 받아먹기도 하면서 관계를 이어갔고, 조합에서 요청하는 화물을 옮겨주고 갖다 주는 하우스 유목 생활 중에 누란에 왔다.


길은 그곳의 물류 과장과 얘기를 하다, 또 마음이 약해져 뒷돈의 2할만 받기로 하고 목적지인 동문으로 향했다.

그곳은 항구 도시인데 빨리 가면 3일 정도 걸릴 거리였다. 하지만 차창 밖으로 지평선을 보니 꿈틀거리는 구름 형태가 신경 쓰였다. 날씨는 언제나 믿을 것이 못 되고, 기상위성은 80년 하고도 더 이전에 쏘아 올린 게 마지막이어서, 건설시대의 일기예보가 믿을 만한 내용인지 아닌지는 지역별로 천차만별이었다. 그래도 참고할 만한 게 있으면 마음이 놓이니, 날씨 알림을 단말기에 설정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동문까지의 하우스로드는 GPS와 지도의 정확도가 보장되는 구역이어서, 자율주행 모드를 사용할 수 있다는 거였다. 자동이라고는 해도 운전석을 벗어날 수는 없지만, 쉬엄쉬엄 딴짓도 해가며 밀린 책도 읽을 수 있으니 좋다.

하지만 하우스 운전룸 안에서 달리는 속도로 흐르는 풍경을 보며, 엔진과 바퀴 구르는 소리에 정신이 빨려 들어가고, 이따금 나타나는 아름다운 자연에 감동하거나, 입 벌어지게 웅장한 건축물을 감상하는 건 재밌어도, 놀이도 오래 하면 질리는 법인데, 누란 대평원의 풍경은 지나치게 지루했다. 지평선 끝까지 존재하는 건 오로지 모래와 잡초뿐인데, 계속된다. 연속적인 풍경이 겨우 끝났다 싶어지면 2부가 계속된다. 3부와 4부도 계속이고, 어쩌면 더 계속된다. 따분함에 짓눌려진다. 집중력은 망가지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심심해지다가 심해지면 미쳐버릴 정도로 지겨워지고, 지겨워지다가, 몽상과 잡념에 빠져들어 졸음이 올 때쯤에 섬찟한 경보음을 듣는다.

차가 이리처리 삐뚤거리다가 차선을 이탈할 때 나는 경고.


삐빗— ‘이상한데?’


졸지 않았고 운전도 제대로 했다. 발생한 경고는 주행 불안이 아니라 충돌 주의였다. 있으면 안 되는 물체가 발견됐다. 하우스로드에 사람으로 추정되는 물체가 진입했으니, 충돌 혹은 폭력 사태를 조심하란다. 전방 레이더의 기록이 그래픽으로 바뀌어 모니터에 그려졌다. 그 사람은···, 앞 방향 4㎞ 지점의 오른쪽에서 이동해와 도로로 진입했다. 속도로 봐서는 앞을 향해 걷고 있었다.


확신한 증거는 없었고, 명확한 논리도 없었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길은, 앞에 걷고 있는 인물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그녀라는··· 느낌이었다. 그녀라고 확신했다. 미래보기를 해줬었고 병원에서 만났고, 그 후로도 몇 번이나 사는 모습을 목격해야 했던 그녀를 다시 스쳐 지나가는 거였다.


외부 카메라가 목표를 포착해 초점을 맞췄다. 자기 몸보다 큰 배낭을 멨다. 더욱 가까워져서 이제는 300m 앞이다.


그녀도 등 뒤에 달려오는 존재를 눈치챘다. 가슴께의 배낭끈을 다부지게 붙잡고 뒤를 돌아봤다. 헐렁한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었고 신발은 모래색으로 변한 것이, 넓디넓은 누란 평원을 100년은 걸어 다닌 꼴이었다.

더 가까워졌다. 얼굴이 바로 보였다. 압도될 만큼의 큰 상자가 옆을 지나가는데도 무서워하기는커녕 호기심이 가득했다.


운전룸의 높은 위치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던 길은 발바닥에 지긋이 힘을 주었다.


‘가자! 안 만나는 게 제일이야. 엄청! 골치 아픈 일만 생길걸. 반가웠어요, 또 만나지는 말아요. 이 믿음은 시각이 지날수록 확신으로 변하네요···.’


하우스는 그녀를 완전히 지나갔고, 길은 가속페달을 밟은 발을 떼지 않았다. 대신 휘파람을 불려고 입술을 오므렸다. 그런데 부는 법을 몰랐다. 얼른 떠 오르는 아무 노래를 흥얼거렸다. 소음을 토해내다가 리듬이 필요해져서 핸들을 두드렸다. 왼발을 떨었다. 미소를 억지로 지었다.

열린 문틈으로 흙먼지가 들어왔다. 좌·우측을 보니 잡풀이 뭉친 것 같은 뭉텅이가 굴러다녔고, 바람에 밀린 모래가 엷은 막으로 변해 허공에 떠다녔다. 방금과는 다른 경고음이 울렸고, 단말기에 내용이 표시됐다.


삐삐삣—


... ... ... ... ... ... ... ...

- 경보 -

누란 평원 서북쪽 슈퍼셀 발생.

동남쪽으로 이동 중.

강한 폭풍을 동반하고 있으며, 토네이도 발생 가능성 매우 큼.

... ... ... ... ... ... ... ...


‘저 여자 우산은 가지고 있나?’


브레이크를 밟았다. 움직이는 물체가 무겁고 거대하다. 그걸 갑자기 세운 면 난리가 난다. 충돌 같은 제동이 걸려 운전룸이 앞쪽으로 기울어지고 화물 상자의 꼬리가 치솟았다. 중력이 길의 등을 떠밀었고 안전벨트가 가슴을 당겼다. 기계식 현가장치가 충격을 흡수하며 출렁거렸고, 긴급 제어 장치는 차체를 안정시키느라 난리가 났다. 바퀴가 노면에 미끄러졌고, 꺼놨다고 생각한 ABS가 작동해 탁탁— 거렸다. 경고음은 신이 나서 삣삣— 거리고, 고치지 않았던 주방의 찬장이 열렸는지 접시가 떨어져 깨졌다. 작업 선반의 나무 의자가 굴러 넘어졌다.

지진이다. 잔잔해졌다. 경고음이 멈췄다. 고개를 앞으로 처박았던 길은 안전벨트의 탄력에 의지해 시트에 등을 기대고 천정을 쳐다봤다. 그의 마음에 불붙은 난장판은 이제부터 타오른다.


‘어떡하지?’


일어나려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손을 짚어 뭔가에 의지하려 했지만, 악력이 아기 손처럼 약해져 도움이 안 됐다. 겨우 운전석 뒤로 가서 출입용 발코니로 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흙바람이 불어와 콧구멍을 쑤시고 들어왔다. 앞쪽의 하늘은 맑은 파랑인데, 그녀가 오고 있는 뒤쪽의 하늘에서는 시커먼 구름 거품이 부글거리며 다가왔고, 빛 막대기가 번쩍하고 땅으로 내려꽂혔다. 바닥에서 12m 높이, 조심조심 난간을 붙잡고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마음이 더 급해져서 100m 뒤에 있는 뒷바퀴까지 달리듯이 걸어갔다. ‘무슨 말을 하지?’ 머릿속 국어사전이 펼쳐지지 않는다. 갑자기 하우스를 세운 걸 그녀가 봤을까?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녀가 길을 믿어주는 언행을 한 번이라도 했었나? 이빨 달린 순대 같은 괴물이 가슴을 찢고 나올 것 같아졌다. 입도 딱딱하게 굳어서 이제는 할 말이 떠올라도 뜨지 못한다.


그녀가 보였다. 짊어진 배낭의 무게만큼 천천히 걸어왔다. 여기까지 도착하려면 영원함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 긴장감이 몸을 더 굳게 했다. 심장이 폭발한다. 걷는 법을 까먹었다. 제자리에 서 있는 자세마저도 어색했다.


왔다. 가깝다. 인사를 시도했다. 한 손을 흔들면서, 그 옛날에 했던 병신 짓을 또 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인사를 받았으니 돌려는 주겠다는 듯 턱을 끄덕거리고, 멈추지 않고 걸어가, 길을 지나쳐갔다. 어째서인지 배낭끈을 잡았던 손을 허리춤으로 옮겨 티셔츠를 움켜잡았다. 온몸이 먼지투성이였고, 배낭과 닿은 등은 땀에 젖었다. 쭉 걸어가서 길과의 거리가 벌어지자, 하우스에는 관심이 있는 건지 여기저기를 살폈다. 그래도 좀처럼 서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대로 멀어지고 사라져버릴 기세였다.


‘그냥 보내도 돼?’ 빛이 번쩍였다.


쿠쾅—


천둥이 길을 흔들었다. 빛과 울림의 간격이 짧았으니 아주 가까이에서 내리친 거다. 더욱 강해진 바람이 등을 압박했고 모래가 사방에서 회오리쳤다. 흙내음에 섞인 비 비린내가 짙어졌다. 길과 하우스가 구름이 만든 어둠에 덮여갔다. 맑은 하늘 아래에서 지평선을 보고 걷는 그녀를 향해 그림자가 몰려갔다.


길은 소리쳤다.

“잠깐만요!”


그녀는 멈칫하더니 허리춤을 움켜잡고 뒤로 돌아섰다. 길은 두려워져서 더 말하기를 망설였다.


그녀는 말했다.

“왜요?”


길은 한발 물러섰다가, 용기를 내서 두 사람을 쫓아오는 먹구름을 가리켰다.

“저기···, 폭풍이 오고 있어요. 이 근처에는 비바람 피할 때가 없어요. 태워줄 테니까, 제 차를 타고 가요.”


그녀는 하늘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길을 노려보면서 싫은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친절한 제안은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대피할 장소는 제힘으로 찾을게요.”


그녀는 작별 인사랍시고 머리를 살짝 숙였는데, 노려보기를 그만두지 않아서 눈동자가 위를 보며 희번덕거렸고, 그 상태로 세 발자국을 뒷걸음치다가 뒤로 돌아섰다. 빛이 번쩍였고 투쾅— 하고 천둥이 울렸다. 돌풍과 함께 비가 작대기처럼 쏟아졌다.


길은 소리쳤다. “잠깐만요!” 한달음에 달려가서 그녀를 붙잡으려고 팔을 뻗었다가, 예전에 그랬었던 것처럼 감히 만지지 못하고 손만 뻗었다. 달리기도 멈췄다. 탁구공만 한 빗방울이 온몸에 떨어졌다. 그래서 애원했다.


“비가 아니라 바람이 문제라고요! 토네이도가 발생할지도 몰라요, 여기 어디에 대피 장소가 있다고 고집을 피워요. 제발! 안전해질 때까지만이라도 제 차에 타주세요!”


“뭘 믿고!” 그녀는 서지 않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당신 차에 타느냐고! 나한테 상관 말고 아저씨 갈 길이나 가세요!”


길은 이성을 잃었다. 달려나가 그녀를 추월해 앞을 막았다. 그러자 정신이 칼날처럼 또렷해졌다.

“돕고 싶어서 그래요! 나 기억 안 나요!”


그녀는 여전히 허리춤의 티셔츠를 잡고 있었다.

“저리 비켜요! 우리가 언제 만났었다고 이래요!”


‘왜 기억 못 하는 거야!’ 길은 생각으로 절규했다. “상관없어! 난 아가씨를 태워야겠으니까, 배낭 이리 줘! 내가 들게요!”


길이 거칠게 다가오자, 그녀가 오른발을 뒤로 뺐다. 왼손으로 잡고 있던 티셔츠를 들어 올렸다. 여자의 하얀 배가 드러났고, 꾀죄죄한 브라가 노출됐다. 오른손이 거기로 들어갔다.


길의 의식이 가슴과 그사이에 끼인 검은 가죽에 집중됐다. 총소리를 알아차린 건 귀 옆으로 날아간 총알의 압력을 느끼고, 한참 뒤였다.


탕—


그건 여성의 가슴 사이에 숨기라고 제작된 권총 파우치였다. 그녀는 방금, 여행 전에 수백 번을 연습한 동작으로 순식간에 총을 뽑아 위협 사격을 행사했다.


길은 아직도 그녀가 들고 있는 게 총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물러나서 뒤늦게 귀를 막았다. 권총 섬광 때문에 눈을 잃을 뻔했다. 번개의 빛줄기가 다시 터졌고, 천둥이 터졌다. 땅이 요동치는데 마치 총 때문에 그런 것만 같았다. 그녀가 화를 내며 뭐라 뭐라 고함지르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생존 본능이 작동해 잃어버린 시력과 청력을 회복시켜줬다. 힘들고 어렵게 그녀가 소리치는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몇 번을 말해야 해! 빨리 무릎 꿇어! 꼼짝하지 마! 여자 혼자 다니니까 쉬워 보였어!”


길은 귀에서 손을 뗐다. 이젠 온몸이 젖었다. 빗물이 머리를 타고 내려와 수막을 만들었다. 따듯한 게 입으로 흘러들었다. 괜히 웃음이 나와서 대꾸했다.


“어떻게···. 꼼짝 안 하면서 무릎을 꿇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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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13회 - 쟝과 세이거 (03) 19.05.17 87 1 13쪽
42 13회 - 쟝과 세이거 (02) 19.05.08 94 1 15쪽
41 13회 - 쟝과 세이거 (01) 19.04.30 102 1 12쪽
40 12회 - 길과 명주 19.04.16 178 1 22쪽
39 11회 - 쟝과 마리아 19.04.03 97 1 19쪽
38 프롤로그 - 빚과 담배 19.03.17 100 1 23쪽
37 10회 - 탄생 (07) 19.02.25 107 1 36쪽
36 10회 - 탄생 (06) 19.02.09 99 1 16쪽
35 10회 - 탄생 (05) 19.01.28 112 1 19쪽
34 10회 - 탄생 (04) 19.01.19 119 1 13쪽
33 10회 - 탄생 (03) 19.01.08 122 1 11쪽
32 10회 - 탄생 (02) 19.01.05 136 1 13쪽
31 10회 - 탄생 (01) 18.12.25 118 1 19쪽
30 9회 - 혼란 (02) 18.12.13 137 1 13쪽
29 9회 - 혼란 (01) 18.12.10 124 1 14쪽
28 8회 - 도착 (02) 18.11.17 108 1 14쪽
27 8회 - 도착 (01) 18.11.16 133 1 12쪽
26 7회 - 여정 (05) 18.11.01 121 1 10쪽
25 7회 - 여정 (04) 18.10.31 128 1 11쪽
24 7회 - 여정 (03) 18.10.31 129 2 12쪽
23 7회 - 여정 (02) 18.10.19 126 2 11쪽
22 7회 - 여정 (01) 18.10.13 195 1 10쪽
21 6회 - 수리 (04) 18.10.05 161 1 14쪽
20 6회 - 수리 (03) 18.09.28 156 3 14쪽
19 6회 - 수리 (02) 18.09.14 176 2 17쪽
18 6회 - 수리 (01) 18.09.01 180 3 12쪽
17 프롤로그 - 교차로 18.08.19 189 3 13쪽
16 5회 - 동업 18.08.07 178 3 20쪽
15 4회 - 계약자 (03) 18.07.27 186 2 14쪽
14 4회 - 계약자 (02) 18.07.24 186 2 17쪽
13 4회 - 계약자 (01) 18.07.13 209 2 20쪽
12 3회 - 살인자 (05) +1 18.07.04 230 4 12쪽
11 3회 - 살인자 (04) +1 18.06.28 217 5 10쪽
10 3회 - 살인자 (03) 18.06.25 252 3 11쪽
9 3회 - 살인자 (02) 18.06.21 243 5 21쪽
8 3회 - 살인자 (01) 18.06.12 311 3 13쪽
7 2회 - 몽상가 18.05.25 315 5 24쪽
6 1회 - 동행 (04) 18.05.12 340 6 11쪽
5 1회 - 동행 (03) +1 18.05.11 381 7 9쪽
4 1회 - 동행 (02) 18.05.11 460 4 8쪽
» 1회 - 동행 (01) +2 18.04.25 733 9 18쪽
2 프롤로그 - 5년 18.04.12 805 9 11쪽
1 프롤로그 - 18살 +1 18.04.12 1,672 1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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