솟아날 구멍
거제도 동쪽 등대.
"박철, 도끼 좀 계단으로 던져줘."
늘 똑같이 10초만 미끼 스킬을 유지했다. 그런데 이번은 심상치 않다. 박철이 놀라서 딸꾹질할 정도로 많은 괴물이 몰려들었다. 신기는 장기전을 각오하고 박철에게 도끼를 밑으로 던지라고 말했다.
쿵쿵 소리가 장난 아니다. 100레벨을 빨리 만들기 위해 효주와 강아지를 집에 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차 실수하면 이곳에 뼈를 묻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 목덜미에서 식은땀이 쫙 났다.
등대의 철문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열렸다. 수천이 몰려드니 등대 안으로 들어오는 좀비도 부쩍 늘었다. 좀비가 셋 이상이 되자 신기는 계단으로 후퇴했다.
돌진을 사용한 좀비가 계단을 따라 빠르게 오르다가 발이 걸려 넘어졌다. 장애물에 잘 걸리는 것과 다르게 계단에서는 쉽게 넘어지지 않았다. 결국엔 넘어지기는 하지만 일어서는 속도도 장애물에 걸렸을 때보다 빨랐다.
엎어진 좀비의 목을 치려던 신기는 곧바로 뒤로 물러섰다. 다른 좀비가 또 돌진해 올라오는 바람에 넘어진 좀비를 처리할 기회를 놓쳤다. 먼저 넘어졌던 좀비가 일어나며 새로 넘어진 좀비를 처리하는 걸 방해했다.
뒤로 천천히 물러나던 신기는 박철이 계단으로 던진 도끼를 왼손으로 잡았다. 몸을 일으킨 뒤의 좀비가 미처 돌진하기 전, 넘어진 앞 좀비의 뒤통수를 도끼 등으로 시원하게 깠다. 그리고 도끼를 버리고 몸을 급하게 뒤로 움직였다.
착착 맞물리던 두 좀비의 콤비가 무너졌다. 정말 우연히도 두 좀비가 번갈아 돌진하며 서로를 엄호해 주었다. 그걸 뒤통수 한 방 까는 것으로 타이밍을 어긋나게 했다. 뒤에 있던 좀비가 돌진하며 일어나던 좀비와 강하게 충돌했다. 신기는 검으로 두 좀비의 목덜미를 차례로 뭉개버렸다.
다시 내려가며 도끼를 적당한 위치에 모셔놓고 검만 들고 좀비와 싸웠다. 좀비의 근육은 고무 정도는 아니지만 꽤 탄성이 강한 편이어서 신기는 발로 밟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일대일이면 몰라도 괜히 잘못 밟아서 넘어지면 목숨이 위험하다.
계단에 넘어진 좀비의 목을 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벽에 부딪히거나 땅에 넘어졌을 때는 편한 자세로 칠 수 있지만, 계단에 넘어진 좀비보다 더 높은 계단에 있는 신기는 검으로 내려치기를 하는 게 아니라 검 끝을 아래로 향하고 내리 찔러야 한다. 검술 스킬이 초급 1이 되었지만, 신기에게는 아직도 무척 어려운 동작이다.
'호미 모양의 도끼가 있으면 참 편할 텐데.'
좀비의 목을 쉽게 딸 수 있는 여러 무기가 머릿속을 빠르게 스쳤다. 지금 호미 모양으로 날이 선 도끼가 있다면 목을 내려찍기 참 좋다. 돌진하다 벽에 붙은 좀비는 두꺼운 낫 모양의 무기가 적합하다. 물론 그 날은 안쪽이 아닌 바깥쪽으로 세워야 하겠지만 말이다.
다시 좀비가 안에 들어오자 잡생각을 멈추고 집중했다. 중간중간 잡생각을 하는 건 긴장을 푸는 신기만의 방법이다. 이렇게 긴장을 가끔 풀어줘야 피로도가 덜 쌓여 더 오래 싸울 수 있다.
"형, 괜찮아요?"
"정 힘들면 위에 올라갈 테니 걱정 말어."
사실 꼭대기에 가서 문 하나 지키면 지금보다 훨씬 편하게 싸울 수 있다. 그러나 등대 꼭대기에 가면 퇴로가 없다. 한 번의 실수가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기에 신기는 최대한 등대 꼭대기를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려 했다.
일어서는 좀비의 머리를 걷어찬 신기는 몸을 최대한 옆으로 피했다. 더 밑에서 돌진하던 좀비가 신기에게 걷어차인 좀비랑 충돌했다. 질량이 비슷한 둘이 충돌하며 비슷한 운동 에너지를 나눴다.
머리를 걷어차여 뒤로 넘어지려던 좀비는 충돌의 여파로 다시 엎드렸다. 신기는 도끼로 예의가 과한 좀비의 목을 시원하게 내리쳤다. 돌진하다 뒤로 튕겨 나간 좀비가 다른 돌진하는 좀비와 또 추돌사고를 일으켰다.
'다시 슈퍼로 가서 도끼를 가져와야겠다. 시체들이 많아서 피했는데 도끼가 검보다 훨씬 낫구나.'
늘 사용해서 손에 좀 더 익은 검이 부러졌다. 여벌로 준비한 검이 있지만 신기는 도끼를 선택했다. 평지라면 몰라도 계단에서는 도끼가 검보다 열 배 정도 사용하기 편하다. 신기는 뒤로 훌쩍 뛰었다. 너무 많이 반복한 동작이라 감각으로 정확히 세 계단 위에 안착했다.
계단에 엎드리는 좀비를 무시하고 뒤의 좀비들 동태를 살폈다. 신기도 그리 대단한 수준의 운동신경을 가진 건 아니지만, 성휘의 영향으로 좀비들이 느려지는 바람에 여유를 가질 수 있다. 뒤 좀비들의 돌진 타이밍이 계산과 맞지 않아 뒤로 더 후퇴했다.
'특성 정화 사용.'
어느새 신성력이 다시 차올랐다. 정화를 사용한 후 신기는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꽤 오래 싸운 것 같은데 몸이 적당하게 달아올라 힘든 줄을 전혀 몰랐다. 아마 착각이겠지만, 몸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는 느낌이다.
'꽤 열심히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일이 닥치고 나니 허송세월한 느낌이네. 잘한 건 별로 없고 아쉬운 것들만 가득하구나.'
음식도 다양하게 준비하지 못했다. 그저 먹고 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매일 전투식량만 먹다 보니 기분이 무척 우울했다. 통조림은 야채와 과일 그리고 육류와 해산물을 골라 먹는 재미라도 있는데 전투식량은 그런 게 없다.
'제일 큰 문제는 무기지.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르는데 검술 스킬을 얻었다고 검만 달랑 준비해놓았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정보 단말 덕분에 세상에 뭔가 위험이 닥친다는 확신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정화 스킬 덕분에 좀비들의 돌진 빈도가 줄어들었다. 신기는 바닥에 쓰러진 좀비와 비틀거리며 괴로워하는 좀비들을 비교했다. 체형은 거의 비슷하고 오관도 거기서 거기다. 목을 베어도 피나 체액이 일절 흘러나오지 않는다.
'사람이나 생물을 닮은 다른 괴물들도 피를 흘리지 않을까?'
등대 주변의 괴물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신기는 특성 정화를 취소하고 성휘 스킬만 펼쳤다. 좀비가 다시 등대 안으로 들어오자 정화를 사용했다. 연달아 두 번 정화를 사용한 후 또다시 좀비와 육탄전을 벌이며 신성력이 회복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미 이 패턴을 여덟 번 정도 반복했으니 두 시간 조금 안 되게 싸운 셈이다. 나무로 된 도끼 손잡이가 갈라진 것을 발견한 신기는 도끼를 버리고 다시 검을 들었다. 중요한 때에 도끼에 문제가 생기면 오히려 맨손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형, 얼마 안 남았어요."
박철이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했다. 과연 2분이 조금 안 되는 시간이 지나자 지름 15미터 안에서 괴물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화를 내리고 성휘만 펼친 신기는 계단에 주저앉아 괴물이 접근하기를 기다렸다.
- 레벨 100을 달성했습니다. 등급이 무급으로 오릅니다.
- 특수 스텟 기력과 신성력이 두 배가 됩니다.
- 특수 스텟 신성력과 기력이 두 배가 됩니다.
- 수치로 표현할 수 없지만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스텟입니다. 변화의 폭에 유의하기 바랍니다.
한참 더 기다려도 다른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신기는 각성자 정보를 불러왔다. 등급이 무급으로 변하고 개인 등급이 0으로 변했다. 그러나 양쪽 다 스킬의 추가가 없었다.
'왜 스킬이 추가로 주어지지 않는데?'
- 재주의 획득 방법에 대한 정보를 아직 전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만, 등급이 오를 때마다 무조건 재주를 얻는 게 아닙니다.
"박철아, 집에 가자."
둘은 골프카를 몰고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하니 효주가 울고 있었다.
"효주 혼자서 무서웠어요?"
마지막에 너무 큰 무리가 몰려와서 오래 걸렸다. 그래서 집에 도착하는 시간이 많이 늦었다. 신기는 효주가 겁이 나서 운 것으로 추측했다.
"아빠 전화 왔어요. 내일 비행기 보낸다고 했어요."
신기와 박철은 서로 부둥켜안고 기뻐했다. 그러나 신기는 기쁨에 빠져서 중요한 일을 잊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우리 등대로 가서 구슬이나 주워오자. 그냥 두고 가기에는 너무 아까운데."
신기는 모두 데리고 등대로 다시 갔다. 셋은 앉아서 쉬고 효천이를 시켜 구슬을 모았다. 총 121개의 구슬을 메는 가방에 넣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기분이 좋아진 박철은 그렇게 아까워하던 고기를 강아지에게 연신 던져줬다. 물론 구출 받은 후에는 고기를 마음껏 먹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본인 입에도 쉬지 않고 밀어 넣었다.
### DUAL SYSTEM ###
서울 PP 세이프티 경호 업체 5층 회의실.
"자, 최 대리와 이 사원.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거제도에 가서 생존자를 구출해야 해. 사람은 셋에 강아지 한 마리 구해오면 되네."
"사장님, 애완견을 포함한 동물은 구출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박 사장은 최 대리의 대꾸 질을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억하심정이 있어 무작정 대드는 것이 아니기에 굳이 화가 나지 않았다.
"최 대리, 내가 대리 할 때는 사장님 보면 화장실로 막 숨고 그랬어. 내가 최 대리만큼 간이 컸으면 지금 머리도 덜 벗어졌을 텐데 말이야."
박 사장은 자신이 말하고 혼자서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최 대리와 이 사원이라 불린 여자는 어색한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알아. 나도 아는데 이번에는 애완견도 구해 와. 어차피 여러 군데 들르는 게 아니고 거제도에 가서 사람 싣고 바로 서울로 올 거야. 애완견이 겁먹고 달아나서 그거 찾아오다가 사람 다치는 일은 절대 없으니 걱정 말라고. 원칙을 지키는 건 좋지만서도, 그 원칙을 왜 지켜야 하는지 알고 유도리있게 대처하는 모습도 바람직해."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지 구체적인 목적지는 왜 말씀해 주시지 않습니까?"
"어딘지는 헬기 운전하는 양반이 알 거야. 자네들은 그저 안전하게 구출해오면 돼."
박 사장은 썰렁한 농담 몇 개 더 던지고 회의실을 떠났다. 입사한 지 오래되지 않아 아직 사원인 여자가 최 대리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왜 임무 하달을 사장님이 직접 하는 거예요?"
"이 사원 눈치 참 없구만. 애완견도 챙기라는 걸 보면 모르겠어? 내 생각에는 여자 연예인이 분명해. 그래서 우리에게 위치도 미리 알려주지 않는 거야. 아마 어느 높은 분과 그렇고 그런 사이겠지."
"진짜 그렇다면 박 사장님이 가장 믿는 팀을 보내지 않았을까요?"
"지금 경호팀 전체에 여자는 이 사원밖에 없어. 구출 작업을 한다고 하니까 여자 경호원들이 다 그만뒀거든. 굳이 이 사원과 나를 보내는 걸 보면 상대는 분명 여자야. 내가 눈치 하나로 대리까지 온 사람이거든."
"그런데 사장님이 구출 상대가 셋이라고 했잖아요."
"부탁한 사람이 무척 높은 분인 모양이지. 제길, 부럽군."
### DUAL SYSTEM ###
거제도 신기의 별장.
"형, 이거 봐요. 큰일 날 뻔했어요."
인터넷을 뒤적거리던 박철이 큰소리로 신기를 불렀다. 신기가 가보니 미끼 스킬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는 글이었다. 그제야 왜 마지막에 평소의 몇 배나 되는 괴물이 몰려왔는지 알 수 있었다.
"박철아, 우리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 것 같아. 큰 화를 피하면 복이 따른다고 하잖아."
수많은 괴물이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박철은 우울한 말투로 말했다.
"형, 각성자라서 굶어 죽지는 않겠다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이젠 전 쓸모없어진 거 아닌가요?"
신기는 자기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걱정 마. 이 형이 다 생각해 둔 게 있어. 물론 이 글을 보고 조금 수정은 해야겠지만."
등대처럼 든든한 건물을 짓고 괴물을 불러다 처리할 생각이다. 안전하고 빠르게 레벨업을 하고 등급을 올려 더 많은 스킬을 얻는다. 그 과정에 지금 사태를 해결할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구슬에 관한 정보는 아직 고민 중에 있다. 확실한 정보가 아니고 사람도 구슬을 통해 각성할 수 있는지 미지수다. 어떤 식으로 이용해야 최고로 이득을 취할 수 있는지 신기는 아직 생각이 없다. 배움도 짧고 경험도 부족하고 세상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다.
"형만 믿을게요. 형이 죽으러 간다고 해도 저는 형을 따를게요."
신기는 박철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 주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정이 깊이 들었다. 괴물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길에서 만나도 그저 스쳐 지나갔을 인연이다. 신기는 박철에게 일찍 자라고 말한 후 방으로 돌아가 하던 일을 마저 했다.
- 작가의말
드디어 사람들 사는 세상으로 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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