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급조절
독도 등대.
박철이 전력으로 펼친 미끼 스킬에 오만이 조금 넘는 괴물이 몰려왔다. 그 모습을 5층에서 구경하는 김태풍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마력을 전부 소모해도 좀비 해골 합쳐서 삼천 마리도 처리하지 못한다.
미리 당부받은 대로 신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오만이 되는 괴물이 등대를 빼곡히 에워싸고 벽을 두드리고 몸을 던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성휘 스킬을 펼쳤다. 괴물들의 동작이 느려진 것을 알아챌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정화 특성을 사용하고 신성력을 몰아넣었다.
중급이 되면서 성휘 스킬은 지름이 60미터가 되었다. 그리고 신성력의 낭비가 훨씬 줄어들었다. 지금 등대에 김태풍과 김연희 박사 그리고 여자 경호원을 제외한 남은 사람들은 전부 파티에 소속되어 있다. 그 영향으로 스킬의 지름은 74미터가 되었다.
"상무님 딸랑딸랑. 괴물 6830마리 처단하셨습니다."
스킬의 범위 안에는 더 많은 괴물이 있었지만 신성력 부족으로 전부 처리하지 못했다. D급이 되면서 신성력이 많아져 여유가 있었는데 성휘 스킬이 중급이 되면서 범위가 늘어나 다시 신성력 부족을 느끼게 되었다.
"대박."
김태풍을 더 놀라게 한 건 십 분도 되지 않아 신기가 또 한 번 7천 마리에 육박하는 괴물을 처리했다는 것이다. 현재 신기는 최대로 90%까지 신성력을 쏟아부을 수 있기에 10분도 안 되어 신성력이 다시 꽉 찼다.
90분도 안 되어 5만이 조금 넘는 괴물이 깡그리 사라졌다. 시체마저 증발해서 말 그대로 사라졌다. 괴물이 전부 처리되자 5층에 있던 각성자들이 난리 났다.
"어머, 저 E급 됐어요."
"저도요. 저는 새 스킬도 생겼어요."
"대박. 저 E급인데 레벨이 서른 개 올랐어요."
김연희는 권태로운 표정으로 검증기를 통해 이들의 정보를 확인하고 기록했다. 이미 프로그램을 짜서 통계와 분석은 자동으로 하게 만들었다. 김연희가 하는 일은 데이터를 DB에 입력하는 일밖에 없다. 거기에 각성자들의 반응도 늘 한결같아 새로운 자극을 느낄 수 없다.
2층에 있던 효주가 문을 열자 강아지가 폴짝 뛰어내렸다. 5미터의 높이임에도 전혀 두려움이 없었다.
"효천이 물어와."
사다리를 내린 효주가 커다란 가방을 들고 밑으로 내려갔다. 강아지가 빨빨거리며 검은 구슬을 물어왔다. 확실히 신기가 정화를 사용했을 때 더 많은 구슬이 생긴다. 여러 차례 반복하여 검증했기에 확실한 결론이다.
수십 개의 구슬을 가방에 담은 효주는 끈을 꽁꽁 묶었다. 그리고 신기와 최영웅을 기다렸다. 현재 E급인 최영웅은 철벽 스킬을 얻었다. 문현과 다르게 본인 신체의 방어력을 강화하는 스킬이다. 담대함을 넘어 무모함을 자랑하는 최영웅은 돌진하는 좀비와 충돌한 적이 있는데 좀비가 튕겨 나갔다.
둘의 호위를 받으며 효주는 가방을 끌고 서도로 향했다. 동도와 서도를 이어주는 다리를 건너 가방을 김 비서에게 넘겨주었다.
"작은할아버지, 구슬 받으세요."
"아이고 아기씨, 그냥 김 비서라고 부르세요. 송구스럽습니다."
현재 E급 각성자인 김 비서는 아직도 스킬을 각성하지 못했다. 그리고 강 회장과 김 회장 역시 마찬가지다. 구슬 여섯 개를 먹고 각성한 최영웅이 스킬을 얻은 것으로 볼 때 아무래도 구슬이 많이 필요한 사람들은 스킬을 각성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리고 신 상무, 내일은 손님이 예약되어 있네."
"알겠습니다. 미리 준비하죠."
처음에 김 비서는 신기에게 존대했다. 그러나 대화를 자주 나누면서 편하게 느껴져 존대를 그만두었다. 웬만한 사장들도 김 비서 앞에서 굽신거려야 하기에 김 비서가 굳이 존대하지 않아도 이상하지는 않다.
거의 일주일 정도 새로운 손님을 받지 않았다. 강 회장의 말로는 완급조절이라고 했다. 이미 정치계의 거물 몇몇과 군부의 실세 한 명을 각성자로 만들고 치유로 건강하게 만들어줬다. 그리고 독도 요양원은 쭉 휴업했다.
구슬을 전부 전달한 후 셋은 다시 다리로 돌아갔다. 각성하면서 건강해진 김 비서가 직접 와서 가져가도 되는데 김 비서는 이 방식을 고집했다. 권위를 세우는 데 필요한 일이라며 신기가 보기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을 매일 수차례 반복하고 있다.
"자, 이번엔 강성철 씨와 오주현 씨가 동시에 미끼 스킬 사용합니다. 10초씩 사용하고 바로 멈출게요. 괴물 처리는 김태풍 씨가 전담하겠습니다."
신기 일행이 돌아간 후 김연희의 지시에 따라 테스트를 시작했다. 강성철은 현재 C급이고 오주현은 D급이다. 그러나 미끼 스킬의 등급과 레벨이 똑같다.
"3687마리, 각자 10초씩 사용했을 때보다 2백 정도 적습니다."
차현영의 말에 김연희가 좀비와 해골이 각각 얼마인지 다시 묻고 결과를 DB에 입력했다. 둘이 동시에 미끼 스킬을 사용했을 때 각자 사용했을 때의 합보다 적게 불러왔다. 대신 좀비의 비율이 훨씬 높아졌다.
김태풍은 신기에게 너무 밀리지 않으려고 무척 정신을 집중했다. 집중할수록 더 정확히 명중할 수 있기에 기적이 발생해 평소보다 더 많은 괴물을 처리하길 바랐다.
"남은 건 공우진 씨가 처리해 주세요."
안타깝게도 평소보다 더 많이 처리했지만 결국에는 몇백 마리가 남았다. 공우진이 불바다로 남은 괴물을 깡그리 태워버렸다. 신기는 성휘를 펼쳐 시체들이 사라지게 했다. 몇 분이 지난 후 시체가 증발하자 효주가 강아지를 데리고 구슬을 회수했다. 달랑 구슬 한 개가 나왔다.
"박철 씨, 짧게 2초, 해골만 불러주세요."
최영웅이 각성한 이튿날 박철이 C급으로 승급했다. 그리고 새로운 스킬 식별을 얻었다. 정보 단말로부터 귀한 정보를 얻은 신기는 박철에게 식별 스킬을 열심히 수련하라고 알려주었다. 어차피 미끼 스킬은 마음대로 수련할 수 없기에 박철은 식별 스킬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그리고 드디어 미끼 스킬과 식별 스킬 모두 중급이 된 후 박철은 괴물의 종류를 선택해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좀비만 부르거나 해골만 부를 수 있게 되었고 좀비와 해골을 같이 부를 수도 있다.
"알겠습니다. 바로 스킬 쓸게요."
짧게 사용했지만 3천이 되는 해골이 몰려왔다. 신기를 비롯한 근접 전투 스킬을 사용하는 각성자들이나 철벽 혹은 강화 스킬을 얻은 각성자들이 무기를 들고 등대 밖으로 나갔다. 실전이 스킬 경험치를 더 주기에 해골만 불러서 스킬을 수련한다.
최영웅을 비롯한 철벽 각성자들은 상체를 탈의하고 전투에 임했다. 해골에게 맞아줘야 하기에 옷을 안 입는 게 낫다. 가능하면 바지도 벗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여자 각성자들이 있다.
신기는 성휘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검술로 해골을 처리했다. 철벽과 강화 각성자들이 팀을 짜서 철벽이 해골을 유인하고 강화가 공격하는 식으로 해골을 처리했다. 무기술이나 격투술을 보유한 각성자들은 혼자 혹은 둘이 팀을 짜서 해골을 상대했다.
"저, 저도 파티에 받아주면 안 됩니까?"
대한민국 최고의 각성자, TV만 틀면 나오는 스타 각성자,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적으로도 유명인이 된 김태풍이 주눅 든 목소리로 김연희에게 애걸했다. 함께 헬기를 타고 온 F급이 벌써 D급을 바라보고 있다. 물론 이틀이나 사흘 정도 걸린다고 하지만 이 무리에 끼지 못하면 언젠가 자신은 뒤처질 것이다.
"김태풍 씨는 아직 회사와 계약하지 않았잖아요. 계약이 먼저입니다."
배짱을 엄청 튕기던 김태풍은 독도에 가서 실력을 발휘해보라는 꼬임에 넘어가서 독도로 오게 되었다. 그런데 무슨 수를 썼는지 신기가 90분 동안에 5만 마리가 넘는 괴물을 처리했다. 김태풍은 그 시간에 만 마리도 벅차다.
'해골이 많으면 만 마리 가능한데 아까 보니까 좀비가 무척 많았지. 저 정도 실력이면 상무를 달 수 있으니 나라면 차장이나 부장이 되지 않을까?'
사실 다른 대기업에서 제의가 오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리고 조건이나 대우가 태운 그룹보다 훨씬 나았다. 그러나 태운 그룹을 제외하고 명확하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주는 곳은 없었다. 오직 태운 그룹만 확실한 비전을 제시했고 등대 프로젝트에 관한 동영상들도 보여주며 설득력 있게 접근했다.
"당연히 계약해야죠. 계약 생각이 없었으면 여기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위세를 부리러 왔다가 기만 죽은 김태풍은 차장 직급으로 태운 그룹과 계약하게 되었다. 등대 프로젝트에 관한 교육을 받은 후 자신을 홍보 모델로 사용한다는 말에 잠깐 우쭐했다. 그러나 신기가 강 회장과 직접 통화하는 사이라는 소문을 얻어듣고 다시 기가 죽어버렸다.
### DUAL SYSTEM ###
독도의 서도 요양원 건물.
박영광은 검은 구슬을 바라보며 잠깐 주저했다. 어제 강 회장과 면담이 있었다. E급 각성자가 된 강 회장은 무척이나 열정적인 태도로 박영광을 설득했다.
'이 구슬을 먹고 각성하면 신인류가 된다. 그러면 친일파의 피도 사라진다.'
친일파 후손인 김 회장이 구슬을 먹고 각성한 후 태운 그룹을 전력으로 돕기로 했다고 한다. 손해를 감수하면서 등대를 세우고 있고 가지고 있던 헬기와 원유도 무상으로 태운 그룹에 양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을 정복하는 선봉에 서기로 했다는 말도 전해 들었다.
"저, 상무님은 일본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정복해야 할 대상이죠. 늘, 언제나."
강 회장이 미리 알려준 모범 답안을 신기는 뱉어냈다. 주저하던 박영광이 결심을 내렸다. 구슬을 꾸역꾸역 삼키면서 각성자가 되어 일본 정벌의 선봉에 서겠다고 다짐했다.
'일곱 개라. 스킬을 얻을 확률이 높겠다.'
구슬을 삼키고 조금 시간이 흐르자 박영광이 헛소리를 시작했다. 앞선 사람들과 다르게 박영광은 진짜 헛소리였다. 자신이 이순신 장군이라며 언제 뭐 했는지 상세히 말했다. 어찌나 그럴듯한지 신기는 박영광이 구슬을 먹고 전생의 기억을 각성한 게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다.
'불쌍한 사람이구나.'
형의 그림자에 갇혀 서럽게 살았다. 친일파를 싫어했지만 자신도 친일파 후손이라는 것을 알고는 자신을 학대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형처럼 살려고 군인이 되었다. 어릴 적 꿈은 역사학자였다.
마음이 여려서 남을 증오할 수 없어 우선 자신을 증오했다. 그러다가 점점 많은 상대를 증오하게 되었다. 정당한 이유가 없는 증오는 결국 변질했고 박영광의 정신도 변질했다.
'불쌍하지만 나쁜 놈이네. 이 사태를 예상했음에도 미리 막지 않았다니.'
물론 미리 준비한다고 해서 다 막아내지는 못한다. 그리고 더 많은 난민이 생기면 지금보다 더 나쁜 상황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박영광의 결정은 이해하거나 용서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다.
'항상 자기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다니. 완전 미친놈이군.'
순서대로 헛소리하는 게 아니라서 더 미친놈으로 보였다. 박영광이 살아온 세월을 차근차근 짚으면 조금이나마 공감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순서가 뒤죽박죽이라 완전 미친놈으로 보였다.
'나도 뭐 나을 건 없지. 목적을 위해 결국 이 자식과 손을 잡겠지.'
등대 프로젝트의 전체적인 조율을 박영광에게 맡길 작정이다. 이 부분에서는 박영광이 확실한 재능이 있다. 각 등대에 어떤 각성자를 파견하고 보급은 하는 등 일은 김연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죽어서 지옥에서 평생 참회하겠습니다."
박영광은 눈물을 흘리며 누군가에게 사죄했다. 신기는 그런 박영광을 지켜보며 마음이 착잡했다. 만약 자신도 목적과 사람 목숨이 서로 대치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막막하다.
'구할 능력도 없었지만, 슈퍼에서 다른 사람들을 외면한 건 사실이다. 목표를 이루려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음을 약하게 먹지 말자.'
구슬로 각성시키며 그 사람의 내면을 일부 들여다볼 수 있다. 그 과정을 통해 신기는 사유를 넓히고 세상을 알아갔다. 대기업 총수, 정치계 거물, 군부의 실세 등의 내면만 봤기에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건 한 명도 없었다. 물론 내면을 들춰보면 좋은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자, 다섯을 세고 동의라고 강하게 떠올려 주세요."
파티를 맺은 후 정보 단말을 통해 박영광이 얻은 스킬을 알아냈다. 소환 스킬은 인터넷으로 확인한 적이 있다. 실존하지 않는 존재를 소환해내는데 그 위력은 제각각이다. 마력 스킬이라 D급이 되기 전에는 소용이 없다.
- 작가의말
제 글은 추천하기 힘듭니다. 왜냐면 너무 많은 것을 꽁꽁 싸매고 있거든요. 이 글은 이러이러한 사이다 전개로 예상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글이 아닙니다. 그래서 추천해주시는 분들께 늘 누가 되고 있습니다.
문체를 바꾸려는 시도는 포기했습니다. 어차피 바뀐 문체도 싫어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니 차라리 지금 이대로 나가면서 조금씩 다듬어 나가는 쪽으로 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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