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
서울 외교 모 병원.
신기는 소형차의 유리를 똑똑 두드렸다. 창문이 스르륵 내려가더니, 누가 봐도 군인 아저씨를 외칠 까까머리 청년이 사나운 눈으로 신기를 째렸다.
"형씨, 불 좀 빌립시다."
청년은 피식 웃으며 조수석 앞쪽 서랍을 뒤져 라이터 하나를 꺼냈다.
"불 빌리는 김에 담배도 한 대 주쇼."
라이터를 조수석에 던진 청년이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차 안에 있을 때는 평범한 청년으로 보였는데, 밖에 나오니 위압감이 장난 아니었다. 소매를 걷자 울퉁불퉁한 근육이 아닌, 오밀조밀한 근육이 화났어를 연신 외쳐댔다.
"거참, 사람이 성질 하고는. 담배 아까우면 싫다고 하면 될걸."
신기의 유들유들한 말에 청년이 씩 웃으며 주변을 살폈다. 3초 정도의 시간을 소모하여 CCTV 카메라가 없음을 확인했고, 숨어서 촬영하기 좋은 지점에 사람이 있는지도 살폈다.
"허."
그저 겁을 줄 생각으로 날린 주먹이어서, 속도만 빠르고 힘이 실리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가 왼손잡이라고 쳐도, 이렇게 쉽게 상대에게 잡혀서는 안 된다. 오른 주먹이 상대의 왼손에 꽉 잡히자 바로 발차기로 옆구리를 노렸다.
"새끼, 안에 철판 깔았냐?"
오른쪽 옆구리를 노리는 발차기를 신기는 팔뚝으로 막아냈다. 팔뚝과 부딪친 다리에서 큰 통증이 느껴지자, 청년은 상대가 옷 속에 철판이나 각목 따위를 숨겼다고 생각했다.
"미안합니다. 배운 적이 없어서."
사람을 기절시키는 법 따위를 익히지 못한 신기는, 상대의 상의를 벗겨 팔을 뒤로 묶어버렸다. 그리고 신발 끈끼리 서로 묶어서 다리도 한데 합쳤다. 이미 준비한 손수건으로 입을 꽉 막아 소리를 차단했고, 팔을 묶은 상의와 다리를 묶은 신발 끈을 한데 모아 묶어서 발버둥 치기도 힘들게 했다. 그렇게 상대를 꼼짝달싹 못 하게 만든 후, 차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영광이 형과 친합니다. 장난 좀 치려고 하는 거니까, 긴장 풀어요."
반 시간이나 기다려서야 박영광이 나왔다. 차 근처에 서 있는 신기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박영광은, 뒷좌석에 묶여있는 부하를 발견하고 바로 손을 허리춤에 가져갔다.
"아니, 총 있어요?"
신기가 놀란 표정으로 질문하자, 박영광은 대답해야 할지 무시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너무 해맑은 표정이어서, 그저 구경하는 사람처럼 여겨졌다.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저세상에 계시는 그쪽 형이 말을 전해달래요."
박영광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늘 공손하거나 호의적인 표정만 봐온 신기로서는, 처음 확인하는 사나운 얼굴이다.
'좀 무서운데.'
가슴에 가시가 잔뜩 돋친 박영광의 기세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신기는 래퍼처럼 준비했던 말을 쏟아냈다.
"동풍이 불면 서쪽으로 기울라고 했습니다. 동풍이 부는 데 굳이 동쪽을 향하지 말고요."
박영광의 표정이 멍해졌다. 형이 자살하기 하루 전, 모아둔 용돈으로 박영광에게 음식을 사줬다. 그래서 박영광은 그 후로 순대를 먹지 않는다. 순대를 볼 때마다 형이 생각나서 미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날 순대를 먹으며 박영광은 수줍게 자신이 쓴 시를 형에게 읽어주었다.
갈대는 뿌리가 얕아서 바람을 두려워한다.
동풍이 불면 서쪽으로 기울고, 북풍이 불면 남쪽으로 기운다.
그건 갈대에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갈망하는 마음이 생긴 갈대는, 동풍에도 동쪽으로 기운다.
동쪽에는 뜨는 태양이 있고, 박영광에게 형이 바로 태양이었다. 해바라기로 쓰려다가, 너무 티 나는 것 같아 갈대로 바꿨다. 박영광의 시를 들은 형은 눈물을 흘렸고,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마음이 형에게 전달된 줄 알고 기뻐했었다. 이튿날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너 엄마 혹시 순댓집 해?"
"순대를 식초에 찍어서 먹으면 참 맛있죠."
"시발 새끼."
박영광은 화를 참지 못하고 신기를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동작이 하도 커서 신기는 가볍게 피했다.
"형 복수 안 할 거예요? 그리고 형이 군인이 아닌 외교관이 꿈이었다는 걸 몰라요? 군인은 아버지가 억지로 시켜서 하려던 거였어요."
안다. 당연히 안다. 하지만 외교관이 되면 형의 복수를 할 수 없다. 그래서 형이 입에만 담고 마음속에 간직한 적 없는 직업군인을, 형의 꿈이라 자신을 속였다. 형을 위한 복수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복수를 하려고 형의 꿈마저 왜곡시켰다.
"개새끼, 너 진짜야?"
"형 복수 도와줄 테니, 먼저 날 도와요. 난, 왕이 될 거예요."
"미친 새끼."
운전병의 포박을 풀며 박영광이 신기에게 질문했다. 표정은 무뚝뚝하지만, 마음의 동요가 가라앉지 않았는지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몇 살이야? 이 포박은 어설프지만, 특수부대에서 하는 포박과 비슷해 보이는데."
"대딩입니다. 강남 꽃망울 지하에서 조용히 대화 나누죠. 참고로 난 부모님이랑 같이 살아서 술 안 먹어요."
### DUAL SYSTEM ###
강남 꽃망울 클럽.
코카와 펩시를 섞어서 마시는 신기를, 박영광은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부드러움과 거침이 만나면 서로 중화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요. 사실 부드러움과 거침은 공존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보여주는 거, 특급 비밀입니다."
쇠로 된 재떨이를 잡은 신기는, 손가락 힘만으로 찢어버렸다. 맨손으로 책을 찢는 것만 해도 힘센 연예인의 개인기가 되는 세상에서, 신기는 마른오징어 찢듯 쇠로 된 재떨이를 가볍게 찢었다.
"봤죠?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이렇게 거친 흔적을 남길 수 있습니다."
박영광은 재떨이를 가져다가 손에 힘을 줬지만, 찢어지기는커녕 휘어지지도 않았다. 둘로 찢어진 재떨이를 서로 부딪쳐서 소리까지 확인한 박영광은, 주저주저하다가 결국 질문했다.
"최면술이야?"
"젠장. 왜 이렇게 의심이 많아요? 갈대 얘기를 하면 믿어줄 거라고 했는데."
소주와 양주에 레드불을 섞어 크게 한 잔 마신 박영광이, 살짝 부드러워진 혀를 굴렸다. 혀가 부드러워져서 그런지, 말투도 무척 부드러웠다.
"내 형 잘 있어?"
"몰라요. 부탁한 사람이 하도 많아서. 개인 사정 일일이 챙길 여력이 안 됐죠."
"사실 나 미친놈이야. 나 같은 미친놈이 아니었으면 네가 뭐라고 해도 안 믿었을 거야."
"알아요. 그래서 당신을 먼저 찾아온 거예요. 최대한 빠르게 애 하나 찾아줘요. 구체적인 계획은 때가 되면 말해줄게요."
### DUAL SYSTEM ###
경기도 화성 모 보육원.
"혼자 갈 거야?"
"그럼요. 박영광 씨 얼굴 보면 애가 놀라 경기를 일으켜요."
졸지에 신기의 운전병이 되어버린 박영광은, 신기가 보육원을 향해 걸어가자 차에서 내려 담배를 입에 물었다. 신기를 만난 지 사흘째인데, 그사이 담배 열 갑을 폈다. 도깨비 같은 덩치만 큰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착잡한 마음을 담배 연기와 함께 흩어버렸다.
입에서 담배 냄새가 심하게 나는 박영광을 뒤로하고, 신기는 보육원으로 걸어갔다. 보육원 대문 앞에 있는 칠이 다 벗겨지고 긁힌 흔적이 가득한 벤치 의자에 왜소한 체구에 얼굴이 곱상한 아이가 앉아있었다.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지 아니면 자아가 확고한 타입인지, 신기가 다가가는데도 아무 반응 없었다.
"여기 있는 게 싫지?"
"누구세요?"
"네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사람."
아이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신기를 바라보았다.
"누구예요? 나쁜 사람이에요?"
"나? 아님 네 아버지?"
"둘 다요."
"나는 좋은 사람이고, 네 아버지는 곧 좋은 사람이 될 거야. 네가 사달라는 거 다 사줄 테니까."
"별도 사줄 수 있어요?"
"그건 좀. 그 정도로 돈 많은 사람은 아니거든."
"장기 밀매하는 나쁜 사람 아니죠?"
신기는 아이가 장난치는 건지 진심으로 말한 것인지 헷갈렸다.
"우선 네 이름부터 바꾸자. 강효성 어때?"
아이는 갑자기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얼굴도 곱상하니 배우를 시켰어도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요. 콩팥 하나 정도는 드릴게요."
아이의 이름은 강간이다. 보육원에 맡겨질 때, 훗날 다시 찾아야 한다며 이 이름을 꼭 써달라고 부탁했단다. 이름 때문에 초등학교까지만 다녔다.
"그럼 같이 가자. 저 밑에 인상 더럽고 담배 골초인 아저씨가 기다리고 있어. 가서 이발도 하고 새 옷도 사 입자. 할아버지 뵈러 가는 데 이쁘게 차려입어야지."
아이는 신기를 순순히 따랐다. 그러다 갑자기 의문이 들었는지 질문을 던졌다.
"근데 제 엄마는 누구예요?"
"네 엄마는 나도 몰라. 이름 바꾸고 외국 나가서 살거든. 네 얼굴이 엄마 닮았어."
"엄마도 나쁜 사람인가요?"
"불쌍한 사람이지. 그저 없는 사람 취급해. 괜히 찾고 그러지 마. 시집가서 잘살고 있을 텐데."
"근데 왜 할아버지 만나요? 제 아버지 죽었어요?"
"할아버지가 너를 제일 이뻐할 거거든. 이후 하고 싶은 일 있으면 할아버지한테 떼를 쓰면 돼. 너 떼 쓸 줄 알지?"
"근데 형은 몇 살이에요?"
"너보다 다섯 살 많아. 이후 친해지면 말을 놔도 돼."
"알았어, 형."
두려움과 설렘이 섞인 얼굴을 한 아이는, 박영광을 보고 살짝 겁을 먹었다. 분장도 없이 당장 악역을 맡을 수 있는 얼굴을 가리지도 않고 다니는 박영광이, 참 양심 없다고 생각했다.
'전쟁터 나갔으면 얼굴로 상대를 사살하고 다녔겠어.'
"다음 목적지."
"가서 소고기 좀 굽죠. 그러고 나서 옷과 신발 맞추고요. 목욕탕 가서 때 싹 벗긴 다음 얘 할아버지 만나러 갑시다."
"고기는 네가 먹고 싶은 거지?"
"빙고."
박영광의 운전은 얼굴과 정반대였다. 차의 부드러운 움직임에 강효성은 잠이 들 뻔했다. 다행히 오른손에 꽉 잡고 있던 접이식 칼이 허벅지를 아프게 찔러 잠에서 깼다.
소고기를 배불리 먹은 다음, 백화점에 가서 브랜드 옷을 구매했다. 효성은 신발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추운 날씨에 찬바람이 들어오는 신발을 신고 다녔는데, 더 가볍지만 훨씬 따뜻한 신발이 무척 반가웠다.
목욕탕 앞에 가자, 강효성이 멈춰 섰다.
"이 안에서 제 배를 가를 건가요?"
박영광은 영문을 몰라 눈을 끔뻑거렸다. 신기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역시. 콩팥 하나만 떼간다고 약속해 주면 들어가 줄게요."
"장기 밀매 아니래도. 그게 목적이면 뭐하러 CCTV가 가득한 곳에 너를 계속 데리고 다녔겠어. 네가 실종되면 가장 먼저 의심받을 텐데."
"이미 경찰이랑 다 짠 거 아니에요? 영화 보면 꼭 나쁜 경찰 한 명씩 있던데."
"너 목욕탕 한 번도 안 가봤어?"
"네."
"저기 봐. 저 아버지가 아들 배 가르려고 목욕탕 갈까?"
"비밀의 방 같은 거 있겠죠."
"근데 왜 따라왔어?"
"혹시나 진짜 아버지를 찾아줄지도 몰라서요. 그런데 하는 행동을 보니 역시네요."
"네 할아버지 돈 많아. 그래서 널 데려다주고 돈 받으려고 하는 거야. 네게 잘 해주면 돈도 더 많이 줄 거잖아."
"역시, 진실은 늘 숨겨져 있었군요."
'진실은 안 믿어주고, 거짓만 믿는 더러운 세상.'
강효성이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가자, 신기는 기가 막혔다. 박영광 역시 둘의 대화로 전후 사정을 대충 알아차리고 입을 딱 벌렸다.
"너희 둘이 일부러 짜고 날 놀리는 건 아니지?"
박영광의 말에 신기는 대꾸할 힘조차 남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강효성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따 형이 등 밀어줄게."
"저 여자 좋아해요."
등을 아프게 밀어줘서 복수하려던 계획이 물거품 되었다. 비누 거품을 잔뜩 내고 신난 표정을 짓는 강효성을 보며, 오 년 전의 자신을 돌이켜보았다. 다른 건 모르겠고, 강효성보다 정상이었던 건 확실하다.
용 문신을 한 아저씨들이 와서 시비라도 걸어줬으면 강효성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확실하게 보여줬을 텐데, 사우나 안에는 박영광의 포스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래 버티기에서 박영광을 가볍게 이겨버린 신기가 마음을 추스르고 나왔을 때, 강효성은 이미 새 옷과 신발로 무장하고 있었다.
"다음 목적지."
"태운 빌딩 갑시다."
"얘 혹시 강 씨야?"
"빙고."
"얜 누가 부탁했는데?"
"너무 많이 알면 다쳐요. 이제부터 판 크게 벌릴 거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요. 얼 타다가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린 바퀴벌레 신세가 될걸요."
박영광의 차가 태운 빌딩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다섯 시가 조금 지났다. 신기는 박영광의 핸드폰을 가져다가 전화번호를 찍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이 정확히 두 번 울리고 나서 통화가 연결되었다.
- 작가의말
현재 세계관과 설정이 확고하게 완성된 상태가 아니기에, 먼저 설정을 펼치고 세계관을 선보인 다음에야 글을 제대로 펼 수 있습니다. 괜히 재미와 자극성을 추구하다 설정이 무너지고 세계관이 비틀리는 글을 많이 봤기에, 이런 순서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설정이 탄탄하고 세계관이 확고했다면, 회귀한 시점부터 서술하며 앞부분을 조금씩 가져와도 되죠. 그러면 글이 지금보다 더 재밌었을 테죠.
생각하고 있던 소재들을 다 이런 식으로 소모하면, 필력이 늘고 경험이 쌓인 후 쓸 소재가 사라질까 봐 걱정입니다. 한 달 하고도 보름 더 있으면, 글 시작한 지 만 일 년이 되는군요. 초반에 생각 없이 쓰다가, 자신감이 붙어 막 쓰다가, 지금은 거품을 빼고 있습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는 고마운 분들을 위해, 글을 더 재밌고 읽기 쉽게 쓰는 법을 늘 고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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