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나를 아는 여자
인터폰을 받은 여자가 잠시 듣고 있다가 말했다.
“네... 아 제 엄마가 맞아요. 올라오시게 해주세요.”
인터폰을 내려놓고 여자는 김혁에게 말했다.
“엄마도 과학자시라 상의 좀 드릴려고 전화했었는데 달려오셨네요. 가까운 데 사셔서. 저보단 좀 과학적으로 해석해 주시지 않을까 해서 말씀드린 건데. 뭐 분야는 다르지만 그래도 혼자 고민하는 것보단 빠르니까.”
문을 열어주자 50대 후반이나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자그마하고 단정한 이미지의 중년 여인이 들어왔다. 군더더기 없는 날렵한 몸매에 빈틈없이 빗어 넘겨 틀어 올린 머리와 안경으로 가린 날카로운 눈매가 과학자라기보단 깐깐한 교수님을 연상시킨다.
“엄마!”
“오랫만이구나.”
“잘 지내셨어요? 좀 마르신 것 같네.”
“변화 없어. 너야말로 말랐구나. 연구도 좋다만 좀 잘 챙겨먹어라.”
“연구소에서 잘 챙겨먹어요.”
“근데 어디 있냐? 그 미스테리 남자는.”
“그러니까...”
여자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때는 김혁의 모습이 사라져 있는 상태였다.
“저 여기 있습니다.”
김혁이 대꾸했다. 목소리만 허공에서 울려나오자 중년여인이 흠칫 놀라서 두리번거렸다.
“뭐, 뭐냐? 지금 저건.”
“그 남자. 몸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데 밤에는 사라졌을 때도 목소리는 들려요. 낮에는 완전히 사라지고. 내가 어제 얼마나 놀랐을 줄 상상이나 돼요? 샤워 마치고 나왔는데 여기 침대에 웬 시커먼 남자가 앉아 있는데 아휴, 정말.”
여자는 다시 한번 그 느낌이 생각나는지 심장 쪽에 손바닥을 가만히 댔다.
“그래서 귀신인가 생각했다고?”
“네.”
“난 니가 전화했을 때 과학하는 애가 이게 무슨 소린가 어이가 없었다. 네가 너무 연구만 하다가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닌가 해서 부랴부랴 온 거야. 안 그래도 내일 세미나 준비도 해야 하는데.”
“성격 급한 건 알아줘야 해. 울 엄마. 미안해요. 의논할 사람이 엄마 밖에 없었어. 저 사람이 지금 극비리에 개발하고 있는 타임머신 기계 안에서 발견됐거든. 근데 기억은 없대지 몸은 저렇지. 미래에서 온 거라면 정말 굉장한 건데 사실 내가 어제 혼자 있을 때 몰래 실험한 거라서 명박사님께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워서 확실해지면 말하려고.”
“혼자 해봤다고? 그런 위험한 짓을 왜 하니? 큰일 하는 애가.”
“마침 어제 아무도 없었고 너무 궁금하기도 하고.”
여자가 장난꾸러기처럼 생긋 웃었다.
“정말 너란 애는 못 말리겠다.”
중년여자는 자기 딸에게서 시선을 돌리고는 허공을 향해 말했다.
“아무것도 기억을 못한다고요?”
“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김혁의 목소리가 대꾸하고 나서 젊은 여자가 말했다.
“기계 내부에서 물성이 변형된 거라면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모습이 나타날 때는 완벽히 사람 모습이라서 유령이라고 할 수도 없거든요, 이따 나타나면 엄마도 진짜 놀랄 거야.”
모녀지간이라 그런지 여자는 중년여인에게 존댓말을 썼다가 반말을 썼다가 하고 있다. 어딘지 모르게 닮은 모녀다.
이제 김혁 눈에 흐릿하게 그들 뒤로 안개 같은 것이 어른거리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뭐지? 저건? 흐릿하고 형체도 없는데 그냥 풀어놓은 물감 같은 것이 점점 진해지고 있었는데 아직은 그게 뭔지 확실치 않았다.
눈도 이상해지는 건가? 김혁은 눈을 손으로 비비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중년여인이 앗, 하고 짧게 소리쳤다. 때마침 몸이 나타난 김혁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아, 아...”
김혁을 발견한 중년여인은 정말 놀라서 말도 잇지 못했다.
“엄마 왜, 왜 그래?”
“너는, 너는, 그때 5층, 5층 맞지?”
“...?”
김혁은 기억이 없으니 당연히 멀뚱멀뚱 바라보고만 있고 여자는 중년여인에게 재차 물었다.
“5층이 뭐야? 응?”
“...저승사자.”
중년여인은 조그맣게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저승사자?”
김혁과 여자는 거의 동시에 되물었다.
“엄마! 왜 그래 무슨...!”
여자는 정말 놀란 얼굴이다. 김혁이 저승사자라는 사실보다도 자신의 엄마가 그런 걸 믿고 있다는 사실에 더 놀라는 듯 했다. 좀 전에 귀신 얘기를 꺼냈다며 나무라던 냉철한 과학자와 뭔가 부조화스러운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정말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 건가? 나 오수연이에요. 오.수.연. 뛰어내리면 지옥불구덩이에 떨어진다... 나 무서운 사람이야... 그런 천재 니가 해, 응? 또, 천재아들 낳으라고...?”
중년여인은 옆의 두 사람이 전혀 못 알아듣는 말들을 주루루 늘어놓고 잠시 말을 멈췄다. 하나도 기억해내지 못하는 김혁이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딸은 그런 엄마를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김혁은 모른다는 뜻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때 나한테 지옥에서 왔다고 저승사잔데 하나도 안 무섭냐고 했어. 그때 내 나이가 열 일곱살이었는데 나보다 나이도 많다면서 열 여덟 살이라고 분명히 그랬는데 난 어제 일처럼 다 기억나. 모습이 하나도 안 변했네. 그대로야. 정말이야. 그때 그 조순철... 조순철이 그날밤 죽었거든. 다음날 학교에서 과학 선생님이 죽었다고 애들이 말하는데 심장마비라나 그런 소문이 돌았지만 그때 난 당신이 진짜 저승사자라고 믿게 됐지. 그때 조순철 잡으러 왔다고 했었잖아.”
중년여인의 얼굴에는 정말 추억 속의 친구를 만난 듯 애틋한 표정이 어렸다.
“정말 나를 만났다고요? 그때가 언젠데요?”
김혁은 자신에 대한 어떤 사실이라도 알고 싶어서 중년여인에게 질문했다.
“그러니까 그게 벌써 40년 전인데.”
“40년?”
딸은 이렇게 외치고 김혁과 엄마를 번갈아 본다.
40년 전에 본 저승사자?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서 온 거란 말인가? 아니면 40년 동안 저승사자였는데 기억상실? 뭐가 어떻게 된거야? 대체.
김혁은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미래와 과거가 뒤죽박죽이 되는 기분이었다. 어머니뻘은 돼 보이는 여자가 자신보다 어릴 때 자신을 만났다고 하고 그 딸은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엄마가 만난 저승사자를 지금 보고 있다.
“이름은 뭐라고 하던가요?”
“이름은 안 가르쳐줬어. 다시 만날 일도 없는데 뭘 가르쳐 주냐면서 그냥 훌쩍 날아갔지. 이렇게 만날 줄 알았다면 알려줄 걸 그랬지? ... 잠깐 그럼 혹시, 그럼 내 딸을...?”
중년여인의 표정이 바뀌었다.
“이번엔 누구를 잡으러 온 거지? 왜 거기 있었을까?”
저승사자가 연구실에 누구를 데리러 온 건가 몹시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너희 연구소 지금 몇 명 있니? 직원이.”
“뭐 많지. 우리 실험 연구원들은 다섯 명이고 오박사님하고 나 이렇게 있고 다른 팀들도 있으니까 꽤 많은데 엄마! 정말 저승사자라고 믿고 있는 거예요?”
“적어도 나는 내 눈으로 본건 부정하지 않는다. 엄마가 맨날 방송에서 고맙다는 그분이 이 존재야.”
“설마.”
여자는 정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차마 저승사자라고 말하진 못했지만 늘 방송에서 엄마가 하는 말들 다 저분이 한 거라고.”
여자는 다시 한번 김혁을 바라본다. 엄마를 믿자니 지금껏 설레이며 세워온 ‘미래에서 온 남자’라는 가설을 포기하고 저승사자임을 인정해야만 하고 그렇다고 저명한 과학자인 엄마를 안 믿자니 혼란이 오는 데다 김혁의 존재가 설명이 안 되고 만다. 달콤한 가설이냐 엄마를 믿느냐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양이었다.
“난 여태껏 허튼 소리 한적 없다. 어디에서고. 난 그때, 고등학생일 때 정말 죽을 사람처럼 5층 난간에 서 있었어. 그때 말을 걸어왔었지.”
“엄마가 정말 그랬다고? 자살을?”
여자의 눈이 둥그래졌다.
“그래, 좀 힘들었어. 그때 네 할머니하고 갈등도 있었고, 그 과학 선생 때문에...”
중년여인이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딸에게도 차마 털어놓지 못한 비밀이었나 보았다. 김혁도 궁금해졌다. 무엇 때문에 열 일곱살짜리가 자살까지 하려고 했던 거지? 왜 이렇게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걸까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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