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좀비가 출몰하는 숲1
김혁은 더 높이 떠서 산 너머까지를 관망했다. 그리 높고 험준한 산은 아니었지만 이 산을 넘어간다 해도 바로 인가나 마을이 보이진 않았다.
김혁은 멀리 여전히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는 3층 건물을 돌아보았다. 이런 외진 곳에 저런 큰 건물을 왜 지으려고 했던 건지 의아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숲 어딘가에 조직원들의 가족이 사는 마을이 숨겨져 있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이 산줄기와는 상관없는 어디라는 것일까. 궁금한 건 많았지만 지금까지 보아낸 것들에선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김혁은 다시 돌아가 강탄이를 눈으로 쫒았다. 강탄이는 지난 오전 내 겪었던 엄청난 일들로 인해 이미 기진맥진해져 있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럼에도 걸어가면서 눈에 띄는 적당한 돌맹이가 있으면 주워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어느덧 양쪽 주머니가 불룩해졌다. 그리곤 숲 깊이 들어갔다고 생각이 들었는지 적당히 몸을 숨길 수 있는 나무덤불을 발견하자 그 아래 몸을 숨겼다. 그는 팔을 내밀어 빗물을 받아 마시고 빗물로 얼굴과 목을 씻었다. 갓 세수를 마친 어린남자의 얼굴은 깨끗해졌지만 그의 내면을 짓누르고 있는 어둠은 씻겨나가지 않았다. 그는 어두운 표정을 한 채 잠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먹장구름도 많이 옅어졌고 빗줄기도 가늘어져서 거의 가랑비 수준이었지만 강탄이는 온몸이 젖은 데다 급작스럽게 행동을 멈춘 다음이라 그런지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는 몸을 한껏 웅크린 채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지난밤을 새며 조직원들을 지키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던 그였다.
떨림도 멎고 꼼짝도 않은 채 그대로 잠에 빠져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그를 보고 있는 김혁은 조마조마했다. 아직 총 든 사내들이 쫒기를 포기하지 않았는데 잠이라도 들어버리면 큰일이었다. 저 나이 때 잠은 결코 옅지 않다는 걸 잘 알기에. 김혁은 강탄이의 주변을 날며 바람이라도 일으켜보려고 애썼다.
소년아, 일어나라. 일어나!
그때 조금 먼 곳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강탄이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막 졸음에 빠졌다 깨어난 얼굴이었다. 그는 두리번거렸고 온 신경을 모아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이후로는 주위가 다시 조용해졌다. 그는 불안한 눈을 바닥에 둔 채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그는 갈 곳이 없을지도 몰랐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수도 있었다. 그에겐 이제 남은 가족이 없고 돌아가야 할 고향도 없을 터였다. 조직원들의 가족이 모여 사는 마을에도 그를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였다. 그를 숲속까지 끌고 온 건 생존본능이었을 터. 인간들을 그 어떤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게 만든 그 생명의 신비. 그것이 그를 필사적으로 총을 집게도 했고 여기까지 달리게도 했지만 그 다음 방향까지 결정해주는 건 아니었다.
강탄이는 조심스럽게 일어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쨌든 낮동안 숲을 벗어나야 한다는 걸 그도 아는 듯 했다. 그가 항상 나와서 보던 해질녘의 산 그 너머로, 해가 빠져들던 그 등성이 어디쯤으로 그는 걸어가기 시작했다.
비가 그쳤다. 강탄이는 여전히 조심스레 걷고 있었다.
빠직, 빠직 뭔가가 내는 소리에 강탄이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자신의 발아래서 나는 소리와는 조금 다른 소리였다. 느리고 무거운 소리. 젖은 흙 위에서 삭정이와 오래 쌓인 잎들이 밟히며 나는 소리였다. 뭔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강탄이는 서둘러 옆의 나무에 몸을 숨기고 숨을 죽인 채 두리번거렸다.
나무들 사이에서 한 조직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옷을 알아보고나서야 강탄이는 안도한 채 나무 앞으로 나섰다. 밤을 지새며 함께 보초를 섰던 그 조직원이었다. 아래쪽에 먼저 내려갔다 도망쳤던 세 명 중 하나기도 했다. 그는 땅바닥에 굴렀는지 온 몸이 진흙 투성이었다. 쫓기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형님, 저 탄이에요.”
탄이가 부르자 그때서야 그는 탄이 쪽으로 완전히 돌아섰다. 처음에 본 얼굴 반쪽은 진흙과 검은 잎조각 따위가 붙어 있어서 잘 표시가 나지 않았지만 정면으로 보니 분명해졌다. 탄이는 그 얼굴에 흠칫 놀라 뒷걸음질쳤다. 그는 이전의 그가 아니었다. 붉어진 얼굴과 끊임없이 흐르는 침. 평소보다 몇 십 배나 표독스럽게 노려보는 붉은 눈.
“혀, 형...님!”
“우어어어.”
그는 탄이를 발견하자마자 먹잇감을 발견한 듯 더욱 침을 흘리며 달겨들었다. 탄이는 잽싸게 몸을 피해 달렸다. 그런 곳에서 좀비와 맞붙어 싸워봐야 좋을 게 없었다. 좀비는 그다지 몸이 빠른 건 아닌 것 같았다. 점점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탄이가 먼저 좁은 산길에서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며 아래쪽으로 떨어졌다. 낮은 둔덕 수준이라 탄이는 서둘러 일어나 도망쳤다. 좀비는 한번 발견한 먹이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쫓아오다가 같은 곳에서 아래까지 굴러왔다.
어디선가 또 총소리가 한방 들렸다. 총소리가 아까보다 더 가까워져 있었지만 이제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강탄이는 좀비를 피하는 데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는 모르고 있었지만 다시 건물 쪽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 않은 곳에 총을 든 마스크맨이 주위를 살피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게 계속 가까워지다가 결국 모두 한 자리에 모이고 말았다. 발소리들이 얽히면서 서로의 존재를 눈치채고 서로가 서로를 알아챘을 땐 이미 늦었다.
마스크맨은 총을 들고 있었지만 동시에 좀비와 강탄이를 상대해야 했다. 좀비와 강탄이는 약간 거리가 있었고 마스크맨은 그 중간 쯤 측면에서 들어온 상태였다. 마스크맨은 잠깐이지만 어느 쪽을 먼저 쏴야할지 갈등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초를 다투는 짧은 순간이었다. 그는 좀비를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둘 다 해치워야 할 조직원들이라고 인식하긴 했지만 잠시 망설이느라 두 사람 사이를 왔다갔다 차례로 겨누던 총구를 결국 때마침 돌을 들고 있던 강탄이를 먼저 타겟으로 삼았다. 강탄이가 좀비와의 거리가 적당히 벌어지자 주머니에서 돌을 꺼내 던질 준비를 하던 찰나에 마스크맨이 나타났던 거였다.
마스크맨은 실제로 좀비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뒤따르는 조직원이 침을 흘리고 눈이 붉은 것보다도 강탄이의 손에 든 돌맹이가 더 위협적으로 느껴진 듯 했다.
그가 총구를 강탄이 쪽으로 향하자마자 강탄이보다 더 가까이 있는 다른 먹잇감을 발견한 좀비가 마스크맨에게 덤벼들었다. 이를 알아채고 다시 총구를 다가드는 좀비에게 겨누고 쏘았지만 좀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 으악!”
마스크맨이 쏜 총알은 허공중에 발사됐고 좀비는 마스크맨을 물어뜯었다. 허기진 짐승이 사냥감을 물어 뜯듯이 날고기 냄새를 맡으면 맡을수록 더욱 허기가 진다는 듯이 좀비는 더욱 더 피묻은 이를 깊숙히 박아댔다. 마스크맨은 목덜미를 물린 채로 좀비 몸에다 총을 몇 발이나 더 쏘았지만 좀비의 행위를 멈추게 하진 못했고 결국 총알도 떨어져버렸다. 그는 쓰러졌지만 좀비는 여전히 남자를 놓아주지 않고 계속 뜯어먹었다. 마스크맨은 한동안 몸을 떨어대며 몸부림쳤지만 끝내 좀비에게서 벗어나진 못했다.
강탄이는 뛰었다. 그에게서 퍼져나오는 공포의 냄새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것이었다. 그는 뛰다가 넘어졌고 다시 일어나 뛰었다. 어딘가에서 다시 또 진흙길에 미끄러져 둔덕 아래로 굴렀다. 하지만 그는 웬일인지 오랫동안 일어서질 않았다. 땅에서 다시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서야 얼굴을 들었다.
“너는... 너냐?”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묻고 있었다.
탄이는 둔덕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한 손에 돌을 단단히 쥐고 서 있는 남자는 건수였다. 탄이의 얼굴에는 채 씻겨 내려가지 않은 진흙과 검은 나뭇잎 따위가 들러붙어 있었다. 그는 아마도 강탄이가 좀비가 됐을까봐 두려운 듯 했다. 그에게서도 옅은 공포의 냄새가 풍겨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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