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좀비가 출몰하는 숲4
강탄이는 덩치가 큰 편이 아닌 대신 퍽 단단해 보이는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벗은 상체에는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상처들이 여러 개 두드러져 있다.
길게 찢어졌던 상처들. 꽤 오래된 상처도 보이는 걸로 봐선 조직 이전에 생긴 상처인 듯 했다.
건수도 상처를 보고 있다가 탄이에게 물었다.
“야 탄이. 나 예전부터 진짜 궁금했는데 너 그거, 학교 때 누구한테 쳐맞고 살았냐?”
“아뇨.”
“근데 왜 온 몸에 상처투성이야?”
“어릴 때 교통사고 당한 적이 있어서요. 찢어진 데들을 꿰맸는데 흉터가 남았어요.”
“아아, 난 또. 어릴 때 엄청 쳐맞고 다니던 찌질이었나 했네. 왜 그런 거 있잖아. 복수심에 불타서 크, 개노력해가지고 무술 고수 되고 뭐 그런 거.”
“아 형, 그런 건 진짜 영화에서나 그렇죠. 그런 게 현실에서 가능할까요?”
“그치? 그건 그래.”
강탄이가 씨익 한번 웃어주고는 연회색 폴라티를 머리 위로 둘러 썼다. 본래 옷 주인과 덩치 차이가 있어선지 그 옷은 강탄이에게는 좀 많이 헐렁했다. 옷 색깔만 바뀌었을 뿐인데 그의 인상이 어쩐지 달라진 것 같아서 김혁은 다시 한번 그의 모습을 찬찬히 훑었다.
궁금했다. 검은 오라를 갖기 전에 그의 오라는 무슨 색깔이었을지가. 어떤 색이든 검은색이 아닌 오라를 두르고 있다면 또 달라 보일 거였다.
누구나 자기만의 색깔을 갖고 태어나지만 사람들은 그걸 알기도 전에 버리곤 했다. 김혁은 늘 그런 것들이 안타까웠다. 평생 동안 자신의 오라를 지키고 빛나게 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지만 그 자신만의 것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
자신이 아닌 것을 닮아가려 애쓰다 보면 오라는 차츰 차츰 탁해지고 때로는 어두워지다 못해 결국 검어진다. 영혼을 썩히고 행복한 사람은 없다. 그저 고요하고 편안한 것과 행복한 건 다르다.
건수와 탄이는 휴대용 버너에 올려둔 냄비 물이 끓는 동안 옷을 다 갈아입고 마주 앉았다. 다 끓은 물로 각자 한 컵에 스틱 커피를 두 봉지씩 넣어 간단히 휘휘 젓고는 급하게 입술부터 갖다 댔다.
첫 모금에 이미 그들의 표정에 안온함이 피어올랐다. 그 커피는 지난 저녁 이후 처음으로 맛본 따스함과 훈기일 거였다. 건수는 후루룩 후루룩 급하게 마셔댔고 탄이는 마치 생애 첫 커피를 마시듯이 컵을 감싼 채 조금씩 아껴 마셨다.
“야~ 이거거든. 산에 와서 마시는 이 커피 맛은 정말 잊을 수가 없다니까.”
건수가 한마디 하고 다시 후루룩거리며 남은 커피를 마저 들이켰다.
이제 각자 통조림 하나씩을 따서 허겁지겁 퍼먹기 시작했다. 그들은 배가 고팠고 통조림 속의 음식은 너무 적었다. 다른 통조림들도 금새 빈 깡통이 됐다. 그나마 긁어모은 먹을 것들은 그렇게 바닥이 났고 추가로 물을 받아 끓였지만 곧 일회용 가스가 고갈됐는지 불이 꺼져버렸다.
건수가 먼저 일어나 싱크대로 갔다. 여기저기를 뒤적이며 또 다른 연료가 없는지 찾았지만 모두 빈 통들뿐이었다. 일회용 가스통들을 흔들어대던 건수가 실망한 채 말했다.
“아, 씨, 없네. 이런 건 좀 넉넉하게 갖다놔야지.”
건수가 손을 털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자 강탄이가 물었다.
“여기서 큰길까진 먼가요?”
“큰길? 차가 다닐만한 길까진 그렇게 멀진 않지만 그러면 뭐해? 다니는 차들이 아예 없는데 결국은 또 걸어야지. 차 만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그렇게 없어요?”
“여긴 가끔 사냥하러 오는 사람들이나 드나들지 누가 여길 와. 사람들 있는 데까지 가려면 정말 한참 걸어야 될 걸? 얼마가 될진 나도 몰라.”
“그래도 부지런히 걷다 보면 밤 되기 전까진 갈 수 있지 않을까요?”
“뛰어가든 걸어가든 걷는 건 자신 있지만 그놈들이 진을 치고 있다면 금방 눈에 띄니까 문제지. 밤에 움직이는 게 나아.”
“밤에요?”
“그래. 옷 마르면 갈아입고 가지 뭐. 어두워도 여기서부턴 큰길 찾는 건 내가 아니까 길 잃을 걱정도 없고 길만 따라가면 큰 문제없을 거야. 껌껌하면 들킬 염려도 덜하고.”
강탄이는 불안한 눈길로 실내를 다시 한번 둘러봤다.
“여기는... 그들이 여기까지 오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건수도 따라서 내부를 한번 둘러보았다. 벽을 뚫고 들어오진 못하겠지만 사람 몸 하나가 드나들 정도의 창문이 하나 있긴 했다. 그 창문에 눈길을 준 채 건수가 말했다.
“잘 모르겠다. 그것들이 이 집 찾아내는 것보다는 차로 먼저 큰길 쪽에 와 있을까봐 더 걱정이야. 나라도 이 넓은 숲을 뒤지는 것보단 길목을 지키는 게 낫단 생각부터 드는데.”
“그래도 좀비든 그놈들이든 여길 오면 우린 꼼짝없이 갇히는 건데...”
“뭐 비어있는 척을 하면 부수고 들어오진 않겠지. 민간인 집이라고 생각해도 그럴 거고. 아 그런 건 상관 안 하려나? 그래도 숲속까지 화염병 들고 쫓아오진 않을 거 아냐. 숲 다 태워버릴 작정이 아니라면. 여길 발견한다 해도 못 들어오면 지들이 어쩔 거야. 안 그냐?”
그러면서도 건수는 현관문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에겐 좀전까지도 불길 속에 갇힌 채 필사적으로 벽을 뚫고 도망쳤던 경험이 벌써 트라우마가 된듯했다. 건수가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넌 좀 쉬어야 해. 눈이라도 잠깐 붙여. 또 언제 쉬게 될지도 모르고 밤새도록 걸을지도 모르니까. 이러나저러나 위험한 건 마찬가진데 뭐.”
“혹시 전기는 들어오나요? 밧데리만 충전되면 휴대폰 쓸 수 있는데요.”
“전화가 있었어?”
“네 전... 있긴 한데 밧데리가 다 돼서 꺼져버려서.”
“전기까진 안 들어와. 그나마 수도라도 있는 게 다행이지. 그것도 옛날 집 주인이 개울이랑 연결해 놓은 거라서 쓸 수 있지. 그 사람 죽고나서도 물 때문에 종종 들르긴 했던 모양인데 집이 워낙 오래 돼가지고 큰형님이 허물고 새로 짓기로 한 거라구. 가끔 비도 피할 겸 해서 말야. 근데 보다시피 거의 날림이라 집 꼴만 갖춰지 뭐.”
“네.”
“아 내건 밧데리 빵빵했는데...”
검은 고치들이 됐던 자들은 모두 전화기를 모아 한쪽에 모아뒀었던 탓에 미처 가지고 나올 틈이 없었던 거였다.
“하긴 전화가 있다고 뭘 어쩌겠어? 등산하다가 조난됐다고 하면 구조팀이라도 보내줄려나?
“콜택시라도 부르면.”
“여기까지 오겠다는 택시가 있을까봐? 여긴 아는 사람은 절대 얼씬도 안해. 알잖아?”
“총든 놈들이 설친다고 신고하면 경찰은...”
“아 짭새들이 얼씨구나 하고 오겠다. 걔들도 몸 사리느라 더 안 와. 우리끼린 치고 박든 말든이라니까?”
“그 정도인가요?”
“그럼. 아 다 자기 나와바리가 있는 건데. 시내 가서 깽판치는 거 아닌 이상 눈길도 안줘. 역시 아직 모르는 게 많네. 우리 건물을 포함해서 여긴 정말 버려진 땅이라구.”
“이 집엔 원래 누가 살았는데요?”
“누군진 모르지. 웬 노인네 혼자 꽤 오래 살았던 것 같아. 아마 우리가 터잡기 전부터 살았을 걸? 바깥이랑 왕래도 없고 우리 패들이 가끔 들러서 물이라도 얻어마시고 가고 뭐 별로 해 될 것도 없는 노인네니 그냥 뒀는가본데 갈 때가 돼서 간 거지.”
“혼자요?”
“죽어 있는 걸 발견하고 묻어줬다는 것 같아. 작은형님이랑 애들이.”
“네.”
“얼른 방에 들어가서 눈 좀 붙여. 지금은 내가 망볼 테니까.”
“...”
강탄이는 여전히 불안한 얼굴로 꼼짝도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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