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화 비밀속으로4
주은정이 생각이 깊은 건 알고 있었지만 근래 며칠간 뭔가 변화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지옥에서는 가차없이 죄인들을 불구덩이에 처넣는 걸 즐기던 아이, 인간들은 희망이 없다며 인간 세상은 지옥이 되는 게 낫다고 하던 아이. 저승사자들 내에서도 절대 자기 얘기는 하지 않던 말없던 아이, 민하진만 보면 으르렁대고 반감을 보이던 그 아이가 달라졌다.
어쨌든 이곳에 머물면서 인간들을 관찰하며 보고 들은 것들이 주은정의 내면에 어떤 변화를 끼친 건 분명해 보였다. 김혁이 아지트의 불길 속에서 살아남으려 애쓰는 검은 고치들을 보면서 뭔가를 깨달았듯이.
앞으로는 주은정이 인간들에게 희망이 있다고 말하게 될까? 지상을 지옥이 되게 하면 안 된다고 확신하게 될까? 김혁은 그런 생각을 하며 넘버쓰리의 마지막 말을 전했다.
“그 자가 전해 달라고 했어. 너나 네 아빠한테 미안하다고.”
주은정은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들 탓도 있지만 어쨌든 가장 증오하는 건 직접 가족을 죽인... 그 사람이에요. 마지막 밤까지도 우리한테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어요. 어떤 잘못된 예감조차도 느낄 수 없었다고요. 이미 사라져버려서 복수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을 증오하는 마음을 아세요?”
주은정의 이 말에는 순수한 증오가 묻어 있었다. 복수조차 할 수 없는 자라... 김혁은 그저 사랑밖에 몰랐다던 아빠를 죽인 원수, 그 삼촌이라는 남자를 떠올렸다. 가난한 엄마를 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극구 반대했던 재벌 할머니는 어떤가? 그들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부모 얼굴도 모른 채 고아가 되는 일은 없었을 거였다. 트럭으로 아빠의 오토바이를 치고 뺑소니쳤던 김만재도 나쁜 놈이지만 사실 그걸 시킨 자들이 더 나쁜 사람들이다. 시키지 않았으면 하지 않았을 일이기에.
김혁은 제 손으로 가족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가장보다 그 가장을 그렇게 몰아갔던 저들이 더 나쁘다고 생각했지만 말하진 않았다. 당사자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분명하니까. 믿었던 만큼, 사랑했던 만큼 배신감도 큰 법이다.
김혁은 지옥불에서 불타고 있을 그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복수조차 못한 사람들이 있긴 했지. 내 부모를 죽인 자들. 그래도 증오까진 하지 않아. 복수는 지옥불이 대신 해주고 있으니까. 벌써 40년 전 일이네. 복수를 하겠다고 지옥을 택했던 게. 내가 악마의 꼬임에 빠져 고아원 원장한테 복수를 하러 갔었던 건 너도 알지?”
주은정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혁은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카만 하늘에 별이 몇 개쯤 솟아나 빛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김혁은 마치 별에게 말을 하듯 속마음을 털어놨다.
“그 복수심에만 사로잡히지 않았어도 악마한테 붙들려 버릴 일은 없었을 텐데,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 그 기억이 없다면 어떨까 하고. 그 밤은 선택도 내가 했고 실행도 내가 한 거지. 그게 환상일지라도 원장을 내 손으로 구덩이에 묻었던 기억은 결코 잊어버릴 수가 없어. 때로는 그런 기억을 심어준 악마가 너무 싫어. 그런 기억은 머릿속에서 절대 사라지질 않지.”
여기까지 말하고 김혁은 다시 주은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 네가 그놈 목을 부서뜨리지 않은 걸 보고 난 좀 놀랐다. 그건 정말 어른스러운 결정이었어. 만약 나처럼 했다면 너도 아마 계속 그런 기억을 떠올려야 했을 거야. 그러지 않은 건 널 위해서도 다행이었어.”
김혁은 이 말을 하면서 약간 혼란스러졌다. 말을 하다 보니 깨닫게 된 것들이 있었다. 여기에 주은정을 데려온 게 잘못한 일처럼 생각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악마처럼 자신이 주은정에게 몹쓸 기억을 주려 했던 것 같은 기분. 그런 나쁜 기억을 일부러 심어줄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차 트렁크 속에서 조만호가 계속 몸을 움직여대며 퉁퉁거리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밑바닥에 깔려 있는 핏물이 철푸덕철푸덕 소리를 내며 약한 보조음을 냈다. 웬일인지 짐승소리는 내고 있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내가 널 여기로 데려온 건 잘못한 것 같아. 꼭 악마가 날 꼬인 것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이네. 난 그저 좀비 하나 해치우는 거라고 생각했지. 지옥 불구덩이에 죄인들을 처넣는 것처럼 그런 거. 내 생각이 짧았다.”
지옥의 문지기들을 대신해서 죄인들을 짊어지고 가 지옥불 속에 던져 넣는 걸 도맡아 하던 주은정이기에 조만호의 생을 거두는 일을 양보함으로서 주은정에게 어떤 통쾌함을 안길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악마랑 너무 오래 일하다 보니 싫어하는 악마의 방식조차도 닮아버린 건지 뭔지... 김혁은 서둘러 주은정에게 말했다.
“좀비는 내가 처리할게. 넌 그만...”
“아니에요. 제가 해요!”
갑자기 주은정이 단호하게 소리쳤기 때문에 김혁은 멈칫했다.
“음?”
주은정이 차 트렁크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쳤다. 좀비가 ‘우어어~’ 소리를 내며 세차게 몸부림쳐댔다.
“선배님 말대로 이 자는 이제 좀비일 뿐이죠. 지옥에서 내 원수가 도착했다는 걸 들었다면 당장 달려가서 제가 먼저 질질 끌고 가 지옥불로 던져 넣었을 거예요. 사실 전 지옥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선배님이 이 자를 보내면 그렇게 하는 게 어떨까 생각중이었어요. 물론 선배님이 허락해 주신다면요.
좀비에게 복수하는 것보단 멀쩡한 조만호에게 욕설이라도 내뱉어주고 싶었거든요. 내게 애원하게 하고 싶기도 했고. 우리 아빠한테 그런 것처럼 손이 발이 되게 빌게 하고 싶다고도 생각했어요.”
“어... 그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역시 무서운 아이다.
“이런 자에게 그런 비굴한 변명 따위 들어서 뭐하겠어요. 이 모습만으로도 충분해요.”
주은정이 말을 마치고 머뭇거림 없이 트렁크 위에 걸쳐두었던 통나무를 한 손으로 밀어냈다. 통나무는 마치 로켓처럼 멀찍이 날아가서 다른 나무를 부러뜨리며 떨어졌다. 뚜껑에 내놓았던 구멍들 중에 각각 양쪽 끝에 손가락을 하나씩 넣고 간단하게 트렁크 뚜껑을 들어내자 철판이 쇳소리를 내며 드드득 찢어졌다. 마치 종이 상자를 부욱 뜯어내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갑작스레 천정이 열리자 안에서 좀비가 몸을 일으켰다.
“우어어어, 크아앜, 하악!”
몸을 일으킨 좀비는 주은정을 발견하고 새로이 침을 흘려대며 덤벼들려고 했다. 이제까지 봐왔던 조만호의 얼굴 중에 가장 흉악하고도 소름 끼치는 몰골이었다. 옆의 운전사를 잡아먹을 때 묻힌 피가 더께더께 말라붙어 각기 다른 빛깔로 칠해진 시뻘건 얼굴을 한 조만호의 저 얼굴이 주은정의 뇌리에 평생 인이 박히리라. 다른 좀비들의 얼굴은 잊혀져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주은정은 잠시 그런 조만호의 얼굴을 눈에 담아두겠다는 듯 노려보다가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조만호의 얼굴을 한손으로 덮은 채 콱 밀었다. 찢겨진 채 남아 있는 날카로운 트렁크 뚜껑 단면에 조만호의 머리가 댕강 베어져 떨어져 나가면서 힘을 잃지 않고 그대로 날아가 차 뒷 유리를 깨고 뒷좌석 쪽으로 굴러 떨어졌다.
“크허...억”
조만호의 마지막 말은 목이 떨어져 나가기 전에 낸 그 짐승소리 뿐이었다. 머리가 사라져버린 몸통은 중심을 잃고 트렁크 내부로 툭 떨어져 내렸다. 주은정은 차의 한쪽을 간단히 들어 차를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엎었다.
트렁크에 담겨 있던 몸 세 개, 좀비 몸통들과 부서진 뼈들이 검붉은 핏물과 함께 아래로 철퍼덕 쏟아져 내렸다.
그걸 보더니 그 정도론 안 되겠는지 앞쪽으로 가 차체의 앞부분을 들어 올려 세로로 세워 놓고 허공에서 몇 번 몸을 뛰어대며 꾹꾹 눌러 밟았다. 좀비들의 사체와 함께 차체가 땅속으로 푹푹 가라앉았다. 차체의 끝까지 모두 땅속으로 파고드는 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그리고는 아까 뜯어내 버렸던 트렁크 뚜껑을 가져다 밀려나온 흙들을 그 위로 쓸어 모았다. 차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대신 작은 무덤이 하나 생긴 셈이었다. 주은정다운 깔끔한 뒤처리였다.
김혁은 그러는 동안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보면 볼수록 놀라운 데가 있는 아이였다. 언제 망설였나 싶은 저 일처리 솜씨. 다시 이전으로 돌아와 있는 힘찬 분위기.
“이제 됐어요.”
“저기 은정아!”
“네.”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물어보세요.”
김혁은 살짝 망설여지는 마음이 있었지만 말이 나온 김에 물어보기로 했다. 웬지 오늘 밤이라면 진실을 들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근데 넌 왜 천국으로 가지 않은 거야? 여긴 복수할 대상도 없고 천국에 가면 나머지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악마가 대체 뭘로 널 꼬드긴 거지? 넌 지상으로 돌아올 이유 같은 건 없었잖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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