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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쟁이(진)
작품등록일 :
2018.07.05 19:05
최근연재일 :
2018.08.11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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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05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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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서장

DUMMY

차가운 밤공기에 잃어버렸던 의식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함께 했던 함성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시린 만월로 두 눈이 가득 차는 것만 같았다. 저 달빛에 귀를 아프게 했던 비명마저 얼어붙은 걸까? 굽이치는 강물에 담긴 건, 망자의 몸에서 베어 나온 새빨간 선혈··· 물길은 바다로 흘러들어가겠지만 저들의 넋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


하얗게 말려 부서지는 입김마저 묘하게 현실감이 없었다. 나는 가쁜 숨을 내쉬며 겨우 나무기둥에 몸을 기댔다. 내 곁에서 먼저 숨을 거둔 병사는 원통함에 눈을 감지도 못한 채로 식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 노병은 생애 끝자락에서조차 의무를 내려놓지 않았었나.


생기가 떠난 그의 눈동자에 담긴 건 우리가 지키고자 했던, 아니 지켜야만 했던 도성이었다. 나 역시 시선을 돌려 봤지만 수도는 넘실거리는 화마에 실루엣만 희끗거리고 있었다. 머잖아 저 탐욕스런 불길은 하늘에 닿을 듯, 높이 타오르며 모든 걸 집어삼켜가겠지.


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제 살아있는 인간은 얼마나 될까. 그 중에서 또 얼마나 죽어갈까. 의미 없는 질문들을 이어가며 나는 애써 정신을 붙잡았다.


길었던 전쟁이 이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나는 나와 함께했던 이들을 떠올렸다. 먼저 길을 떠난 동료들에게 약속했던 승리는 끝내 얻을 수 없었나. 살아서 보자던 기약마저 잿더미로 화해 버린 지금에, 그들의 생사마저 알 수 없게 된 현실에, 울컥 하고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역시, 살아 있었구나.”


문득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적 군단의 총 사령관, 푸른 눈의 마녀- 이엘. 엘프의 날개 중 백익을 이끄는 수장이자 내 전우들의 원수. 동료들의 피를 뒤짚어 쓴 그녀가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절로 이가 바득 갈렸다. 다른 놈들이라면 몰라도 저 년만큼은 내가 죽였어야 했는데. 뿌리 깊이 내린 앙금이 내게 힘을 주는 것만 같았다. 그래, 맞다. 스러져간 이들의 의지를 잇는 건 살아있는 인간뿐이라는, 스승님의 유언을 되새겼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겠냐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노라고, 먼저 떠난 이들에게 떳떳할 수 있게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쥐어짰다.


이번만큼은 복잡한 연성식도 길디 길은 영창도 필요 없었다. 구동 형식도, 조건도 갖추지 못한 반푼이짜리 마법은 반드시 폭주하겠지만, 어차피 이곳에 발을 딛은 이들 중 인간은 그 누구도 없었다.


“「열화 만개」”


“피해라!”


엘프들이 뒤늦게 대응에 나섰지만, 마법은 이미 구현되었다. 지면에 동심원의 연성진이 점멸함과 동시에 눈이 멀 정도의 불꽃이 순식간에 피어났다. 그것은 청화를 넘어선 백화. 주변의 어둠까지 녹여버릴 찰나의 겁화였다. 마치 춤을 추듯, 일대를 휘감은 불길에 나는 왈칵 하고 검은 피를 연거푸 토해냈다.


대가에 비례해 위력만큼은 확실했다. 어느덧 주변은 잿빛으로 가득하고 그 위에 잔불만이 남아 주변을 비췄다. 그래도 조금 더 타올랐다면 좋았겠지만, 그 이상 지속돼지 못한 건 태울 연료가 바닥나서겠지.


그러나 이마저도 부질없는 짓이었나 보다. 자욱한 연기에 앞을 살필 순 없었지만, 조금씩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천천히 회복되는 시야 사이로 보이는 건, 군단장과 그를 보좌하는 부관들. 별안간 바람을 가르는 수 발의 화살이 내 몸에 박혀 들어 왔다.


“넌 항상 나를 곤란하게 하는 구나.”


이엘의 탄식을 뒤로하고 부단장, 에린은 내 배에 박힌 화살대를 잡아 그대로 비틀어 뽑아버렸다. 허나 응당 뒤따라야할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무리하게 마법을 연성한 반작용이었다. 마치 신경 마디마디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기분··· 이제 이 몸뚱이는 내 통제에 따라주지 않을 터. 나는 비명 대신 이엘에게 되물었다.


“···어떻게?”


그녀는 대답 대신 손에 쥐고 있던 창을 내보였다. 기하학적인 문양이 양각된 나무 몸체 끝에서 빛나는 창날, 단순히 외양으론 그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다만 지근거리에서 발현한 마법에도 옷깃 하나 그슬리지 않았음은, 저것이 보통 물건이 아님을 반증하고 있었다.


짚어 보건데 이를 가능케 하는 수는 사실상 없다고 봐야 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 희미한 가능성을 소리 내어 말했다.


“미스···텔, 테인?”


“용케 알아보는 구나.”


혹시나 했지만 그녀의 긍정에 그만 탁, 하고 맥이 풀려버렸다. 이적을 배제하는 저주받은 가지, 미스텔테인. 실존할거라 생각하진 못했는데···. 적어도 거짓을 고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저것은 마법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보구였다. 마력을 사역할 수 없는 엘프들이 마도를 걷는 우리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했다. 다만 그것을 염두 하지 않은 건, 그저 신화 속에서나 기술된 허황된 무기라는 통념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나 역시 미스텔테인이 실존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저것을 지녔다면 왜 이제야 꺼내 드는지, 그 연유를 묻고 싶었지만 이젠 그도 무용했다.


심장이 조금씩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는 내게 겨눠진 수 십의 활시위들을 훑었다. 문득 실소가 나왔다. 소용없을 텐데, 어차피 죽어가고 있거든. 수중에 마력은 없지만, 설령 있다 해도 미스텔테인이 있는 한 저들에게 해를 입힐 순 없겠지.


마도사의 최후가 이리 허망할 줄이야. 전쟁 내내 나를 괴롭혔던 무력감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더욱 무겁게 짓눌러오고 있었다. 매일 밤, 그토록 신께 빌었건만 매정하게도 내게 단 한 번도 힘을 빌려주지 아니하는가. 저 멀리 지옥에서 그를 마주한다면 그자에게 토해낼 원망은 저 바다를 흐르는 물만큼이나 많을 것이다.


목숨이 다하기 전, 부군단장 에린은 분풀이를 하듯 내 몸에 박힌 화살대를 잡고 다시금 그대로 비틀어버렸다. 그렇게 몸을 관통해 나무에 박혀있던 수 발의 화살이 모두 뽑히고, 고정되었던 몸뚱이는 실이 끊어진 인형마냥 볼품없이 바닥에 엎어졌다.


에린은 연달아 나를 걷어찼지만, 내가 별다른 반응조차 보이질 않자 내 가슴팍을 발로 찍어 눌러왔다. 안 그래도 가쁜 숨이 턱하고 막혀왔지만 나는 반항 대신 눈동자만 겨우 돌려 하늘을 향했다.


오늘따라 달이 참 밝네.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이리 평온한 건, 그간 죽음이 너무 가까웠기 때문일까.


수년 동안 전장에 메여 있던 몸이었다. 하나, 둘 곁을 떠나는 동료를 보내면서도 내심 차례가 오지 않길 바랐었는데. 막상 그 때가 되니 별다른 감상이랄 게 없다. 어쩌면 너무 많은 걸 잃어버려 마음이 무뎌진 걸지도 몰랐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시야에 나를 내려다보는 이엘의 얼굴이 들어왔다. 전장에서 마주하던 눈동자보다 보다 가라앉은 채로. 숱하게 싸워왔지만 좀처럼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은 여전한가보다. 오랜 대립 끝에 쟁취한 승전의 기쁨도 그녀에게선 한줌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이 조금씩 검게 물들고 있었다. 암전을 거듭하는 세상에, 곧 사라질 의식은 이 싸움의 종지부를 알려오고 있었다. 우리의 지긋지긋한 싸움도 이것으로 막을 내리려나 보다. 그 끝자락에서 나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제야, 내 동료들 곁으로 갈 수 있겠구나.


짐을 내려놓는 다는 건 이렇게 편안한 것일 줄이야. 허나 사명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여전히 나를 죄여오는 것만 같았다.


“단장님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에린이 못마땅한지 눈을 흘기자 이엘은 대답대신 손을 저어 호위를 물렸다. 워낙 악연이었던 탓에 난도질당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녀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주변을 포위했던 인영들이 멀찍이 물러서자, 나는 그제야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장미만큼이나 진한 향기에 머리가 멍해지는 것만 같다.


몸이 조금씩 떨려오고 있었다. 벌어진 살갗에서 새어나오는 피가 계속해서 바닥을 적셔가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그녀와 나 둘 뿐, 곧 그녀만 있겠지만···


나는 흐릿해지는 의식을 애써 다잡았다. 오래 전 그날처럼, 별들을 눈에 담아보려 했지만 얄궂게도 환한 달빛에 가려 보이는 건 얼마 없다. 너무하잖아. 마지막까지 이러기야, 신님.


그리 행복하진 않았지만 이런 결말을 바라지 않았는데. 눈꺼풀이 점차 무거워지고 있었다. 마치 감겨오는 시야처럼, 칠흑 같은 어둠이 자아를 좀먹어오는 것만 같았다. 그 저항할 수 없는 엄습에 점차 의식을 내어주던 그때, 돌연 세상이 반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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