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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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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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18.08.02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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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8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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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05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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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삶#5

DUMMY

시오르가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이라면, 기절해서 남에게 실려 오는 일이다. 한창 기억이 없던 시절에도 기절하는 일이 있어서, 라흐벨에게 곤란함을 안겨줬다. 한 달이 지나가기도 전인데, 벌써 두 번째다. 바깥이 화창한 아침인 것을 보니 두 번째 달, 스물한 번째 날인 게 분명했다. 레이션을 나서기로 한, 다음 날이 온 것이다.


눈을 뜨자마자 주변을 살피는 것은 이제 습관이다. 잔잔하게 울려오는 찬양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예배가 진행 중임을 알렸다. 어제 들렸던 신전 근처라는 건 어림풋이 짐작된 시오르. 익숙하지 않은, 푹신한 침대에서 일어나며 노곤함을 떨쳐냈다.


보이는 물품들이 죄다 잘 가공되고 꾸며진 목재인 것을 보아, 귀족인 두 사람이 구한 숙소 같았다. 가지런히 책상 위에 놓인 허리띠는 꽤 엉망진창이다. 나중에 시간 나는 대로 꿰매야겠다고 생각한 시오르. 그 안에 달려있는 것들은 대부분 멀쩡하다. 마공학 장비는 애매한 부분에서 가격 차이가 심하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한 그였다.


입가에 느껴지는 쓰디쓴 향은, 자신이 먹는 약과 비슷했다. 조금 달고 순한 느낌이 좋았던 그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래도 코끝까지 올라온 향에 자신도 모르게 재채기가 나왔다.


"케흑...."

"어라, 일어났어?"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공책을 들고 온 세라스였다. 제복을 입은 그녀의 모습은, 어제의 전투가 허상처럼 느껴질 만큼 말끔하고 정돈된 상태였다. 비싼 재질로 만들어졌으니 당연한 건가 싶었던 시오르.


"아, 좋은 아침."

"아침은 지나간 지 한참 전이거든? 뭐, 낯빛을 보니 멀쩡해서 다행이네."

"다른 사람들은?"

"쉬고 있지. 내려가면 레아한테 가 봐. 지금도 안절부절못하고 있더라."


공책을 덮고는 문을 활짝 연 세라스는 고갯짓으로 나가자고 했다. 입고 있는 옷도 말끔하게 바꿔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걸어 나갔다.


복도는 차분한 느낌의 연갈색 목재로 이뤄져 있었다. 대낮부터 켜져 있는 마력등은 은은한 햇살을 모방했다. 따스함은 한끝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시오르는 햇살이 가득한 풀밭에서 일어난 것 같은 상쾌함이 느껴졌다. 아마 향초를 피운 것 같았다.


분주히 돌아다니는 사람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헐레벌떡 뛰어온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레아의 머리카락은 바람 앞에 놓인 깃털처럼 흩날렸다.


"시온! 괜찮아?"

"딱히 부상은 없었으니까. 그보다 너무 오래 기절한 것 같기도...."

"그럴 만하지. 황무지에서 가진 마력 반절을 쏟아붓고, 한시도 멈출 새 없이 마법을 써댔으니."


나르시아는 레아의 뒤에서 걸어왔다. 가까이 온 것만으로 밀려온 한기는 봄철의 따스함과는 정반대였다. 게다가, 그녀의 눈빛은 피곤하고 지친 탓인지 매섭게 뜬 채로 번뜩이고 있었다.


"괜찮을 거라고 말했는데, 어떻게 그 난리를 치던지."

"하지만 피를 내뿜는데...."

"평소에 비하면 괜찮은 편이야. 오히려 그간 별문제 없었던 게 이상했는데...."


뭔가 불편한 듯, 나르시아는 얼굴을 찌푸렸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아무튼, 이제 레이션을 나갈 수 있게 됐어."

"드디어 집에 간다니. 이야, 오래도 걸렸네."​

"코넥스는 자주 가봤지만, 시온네 집이라....."


세 사람이 각자의 생각에 빠져있을 무렵, 시오르는 팔 끝에 느껴지는 저린 감각에 화들짝 놀랐다. 아직 회복이 덜 된 것인지, 마력이 제대로 손가락 안에 스며들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폭풍우 속에서 밀려드는 파도처럼 마력이 부딪치고는 저림을 멈춰줬다. 그는 조용히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한 번 선을 크게 넘어서자, 갑작스레 더 많은 가능성이 엿보였다. 잠긴 문을 연 것처럼 속이 시원했다. 기존에 흘러가지 않던 흐름이 느껴졌고, 그 흐름이 자아내는 순환은 효율적으로 그 안에서 실현 중이다. 자신이 타고난 마법사라는 사실이, 소름 돋을 만큼 실감이 되었다.


반대로, 어떻게 그런 출력으로 마력을 쏟아부을 수 있었는가는 의문이었다. 분명 자신에게는 마법적인 제약을 가하는 낙인이 있다. 그간 마법을 시전하는 데에 턱하고 막히는 구간이 많았기에, 그는 그 한계를 낙인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낙인을 풀어헤칠 수 있다는 소리일까?


과거의 자신이 어쨌든, 이러한 사실은 그에게 찝찝하기만 했다. 남들을 속이고 사용하는 마법의 수준을 올려도 괜찮을까? 그런 고민을 할 무렵, 레아는 시오르의 팔을 붙잡았다.


"어디 안 좋아?"

"아, 괜찮아."


창처럼 찌르고 들어온 레아의 마력은, 당혹스러울 법도 했다. 하지만, 시오르는 걱정하지 말라며 팔을 내젓는 정도로 반응했다. 시오르의 상태를 살핀 레아는 마법을 거뒀다.


"갑자기 멍하니 있길래 놀랐잖아."

"미안. 잠깐 생각 좀 정리하느라."

"우선, 짐은 진작에 다 꾸려둬서 바로 출발만 하면 돼. 다들 딱히 볼 일 없지?"

"아, 언니. 보수라던가 사례는?"


세라스는 당당히 나르시아에게 물었다. 밴딜을 붙잡은 것에 큰 공로가 있으니, 분명 그에 걸맞은 보상이 있으리라 의심치 않는 모습. 실로 당당하긴 했으나, 나르시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싸우면서 부순 마을 복구 비용이랑 퉁쳐야지. 네가 태운 집만 몇 채인데."

"그렇게나...?"

"자릿수가 6자리부터 시작할 거야. 그 대신, 개인적으로 용돈이라도 줄까?"

"진짜?"


나르시아의 제안에 눈을 번쩍이던 세라스는, 문득 뭔가를 떠올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그러면 보상이 아니지. 가서 우기고 올게."

"그래. 멋대로 해."

"정말 그래도 돼요...?"


세라스가 점점 멀어지자, 레아는 조심스럽게 나르시아에게 물었다. 하지만, 나르시아는 살짝 웃었다.


"물론. 어차피 가서 진짜 달라고 안 할 애거든."

"어? 그럼...."

"집안 돈 받기 싫다는 거지. 우리 집 가계 사정 정도는 잘 아니까, 나름의 양보야."

"많이 힘드신가요?"

"글쎄. 여기까지나 귀족으로서 가난한 정도야. 내가 보기엔, 반백 년은 남들처럼 살아도 남아."

"그렇군요...."

"체이든 가문에서 돈을 들고 왔었으면, 지금 위치에 있을 수도 없었겠지만 말이야. 시오르, 너도 갈 준비해."

"알겠어."


시오르는 다시 뒤로 돌아가서, 두고 온 벨트를 챙기러 갔다. 레아는 두 사람을 흘깃 보고는 기쁜 듯이 말했다.


"확실히 서로 많이 가까워지신 모양인가 봐요."

"어, 뭐. 그렇지."

"그래도 걱정이에요. 시온이 여전히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서."

"그건 그래. 아무래도 한동안 지켜봐야 할 것 같긴 한데...."


나르시아는 조심스럽게 레아를 바라봤다. 연한 보랏빛 눈동자는 자신을 향해 있었다. 일전에 느낀 꺼림직함 탓에, 그녀는 레아를 가까이 두는 게 옳은가 생각했다. 흐릿하지만, 분명 그녀의 안에 담긴 것은 집착이다. 어째서 시오르에게 집착하는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말기로 했다. 며칠 전부터 올라온 불편함이, 자신을 집어삼키는 게 느껴졌다. 이 주제에만 머리를 굴려도, 정신적으로 피곤했기 때문이다. 결국 생각을 잠시 내려둔 그녀는, 자신의 제복 근방에 서리가 끼는 것을 보고는 그것을 털어내며 말했다.


"너도 짐 싸서 나와. 늦은 만큼, 빠르게 가기로 했으니까."

"알겠어요!"


-----


"오, 저번에 만났던 얘들이네. 얘들아!"

"발란 씨, 카밀 씨도 있네요."

"안녕. 레아 양."


가방을 매고 이동하던 시오르와 레아는, 우연찮게 광장을 지나다가 두 사람을 만났다. 한창 뒤에 있는 경비대가 건물 잔해를 치우고 있었고, 그들은 옆으로 우회해서 가도록 안내하고 있었다. 그런 찰나에 만난 네 사람은 서로 인사를 나눴다.


"다들 별일 없으셨죠?"

"우린 별일 없는 게, 좋은 직업이지. 물론 한동안은 바쁠 테고...."

"그만 좀 칭얼대. 이 일만 몇 년째인데."

"아, 카밀. 너도 어제는 이러다가 죽을 바에 빨리 사직한다고."

"사직은 모두의 꿈이라고. 돈만 많다면 말이야."


낄낄대던 두 사람은 앞에 서 있는 이들을 바라봤다. 초기 제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정보를 전해준 아이들이 있다는 말이 경비대 내부에 떠돌았다. 묘하게 이 애들을 닮은 것 같았지만, 카밀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 두 명이 그 아이들인지는 딱히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저, 자신들을 치료해줬던 이들이 다쳤더라면 잠자리가 뒤숭숭할 것 같았다.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들의 삶이니까. 다행히 밝은 표정으로 마을을 떠나는 모습에, 그들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아무튼 이제 가는 거니?"

"네. 시온네 집으로 간대요."

"오, 어디?"

"코넥스로 가요."​


그 말에 발란은 손가락을 흔들며 시선을 끌었다.


"이거이거, 또 자랑을 하지 않을 수 없겠군."

"야, 너는 얘들한테 뭘 자랑하는 거야? 네메시스티아 경비대로 이직한다는 게 무슨 벼슬이냐."

"또 또 또. 부러우면 말로 하지 그래?"

"됐어. 아무튼 조심히 가렴."

"어? 야, 왜 멋대로 보내?"

"길 가는 사람 이유 없이 붙잡는 경비대원에 대한 경고가 두렵진 않나 봐?"

"으으.... 카밀...."


두 사람의 행동에, 시오르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것을, 손으로 붙잡았지만 역부족이다. 이에 발란은 투덜거리듯이 뒤로 돌아갔다.


"알겠다고. 아무튼, 두 사람 다 조심히 가렴."

"근데 네메시스티아로 간다니. 부럽네요."

"그치? 솔직히 좀 부럽긴 해. 나보다 1년 늦게 들어왔는데 수도라니."


레아에게 작게 속삭인 카밀은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면 잘 가! 다음에 올 일 있으면 하루 정도는 공짜로 묵게 해줄게!"

"여러분도 잘 지내세요!"

"다음에 봬요!"


인사를 마친 두 사람은 빠르게 대로변을 돌아서 그 방향으로 쭉 달렸다. 간만에 편히 잔 것인지, 보이는 사람마다 표정이 무척이나 밝아 보였다. 간만에 잔 덕인지 뒤늦게 일어나서 다급하게 가는 이들도 많았다. 자신들이 지켜냈다고 생각하니, 두 사람의 표정도 덩달아 밝아졌다.


특히 시오르는 만족감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불안과 걱정을 묻어버릴 만큼, 성취감은 이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자기 같은 모자란 사람이 마을을 지켜냈다고 생각하니, 책 속에 나오는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다. 게다가, 레아도 자꾸 칭찬해준 덕에 별것도 아닌 일도 잘한 것 같이 느껴졌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그들을 기다리는 일행에게 다가갔다. 세라스는 제복 단추를 부분부분 풀고는 의자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멀리서 볼 땐 몰랐으나, 가까이 갈수록 제복 안쪽에 있는 민소매와 짧은 바지가 눈에 띄었다.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그녀도 그 사실을 알고 살짝 앞을 누른 채로, 옷깃으로 부채질을 했다.


나르시아는 그런 세라스에게 팔짱 낀 상태로 앉아있었다. 정확히는 세라스가 시원하다면서 나르시아의 팔을 붙잡은 것이지만, 멀리서 보면 부모한테 매달리는 자식 같았다. 작은 회중시계를 보던 그녀는, 다가오는 시오르와 레아를 발견했다.


"빨리 왔네."

"처음, 집으로 가는 건데 기대가 안 될 수가 없지."


처음이라는 말과 집이라는 말이 묘하게 엇갈리는 느낌이나, 충분히 이해가 가는 말이다. 기억에도 없는 집이라는 게 무슨 기분일지, 다른 이들은 알 수 없었다. 오로지 그 느낌은 시오르만 알 수 있으니까.


"자, 그럼 다들 짐 들고 따라와."


나르시아는 옆에 놓인 작은 가방을 들며 말했다.


"좀 돌아가긴 해도, 오늘 밤엔 집에서 잠잘 수 있을 거야."


작가의말

벌써 9월이 다가오네요.

바쁜 일이 점점 생기기 시작하는데, 덕분에 머리가 아파옵니다....

여러분도 건강 조심하시고 좋은 한 주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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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후기 20.05.08 92 0 1쪽
80 마지막 여명#5(完) 20.05.07 77 0 14쪽
79 마지막 여명#4 20.04.30 53 0 20쪽
78 마지막 여명#3 20.03.26 27 0 15쪽
77 마지막 여명#2 20.03.19 65 0 12쪽
76 마지막 여명#1 20.03.12 35 0 16쪽
75 잘못된 시작들#8 20.03.05 49 0 17쪽
74 잘못된 시작들#7 20.02.27 44 0 16쪽
73 잘못된 시작들#6 20.02.13 39 0 16쪽
72 잘못된 시작들#5 20.02.06 43 0 13쪽
71 잘못된 시작들#4 20.01.30 43 0 15쪽
70 잘못된 시작들#3 20.01.23 37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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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잘못된 시작들#1 20.01.09 42 0 15쪽
67 갈라지는 비극#3 19.12.01 32 0 12쪽
66 갈라지는 비극#2 19.11.28 30 0 16쪽
65 갈라지는 비극#1 19.11.21 31 0 13쪽
64 정말로 잃어버린 것#9 19.11.14 42 0 19쪽
63 정말로 잃어버린 것#8 19.11.07 55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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