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빌어먹을 신년회
청하의 정식 사서 임명식이 끝나고 로이스의 말대로 내 방에서 신년회가 열렸다. 망할 자식.
지수 선배, 서청천 씨, 로이스, 청하와 유리까지. 다 내방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다. 나는 술도 좋아하지 않는데 왜 여기서 이러는 걸까.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마라. 술맛 떨어진다."
네놈 때문에 이런 표정이다. 이 자식아. 로이스는 자기 앞에 놓인 잔을 들이킨다.
한숨 밖에 나오지 않는다. 아직 행사가 시작한 지 1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 청하는 반쯤 맛이 갔다. 축하주라고 번갈아가며 한 잔씩 줬으니.
"후야야! 기분 좋당."
봐라. 저게 어딜 봐서 정상인의 말투인가. 청하는 그대로 술상에 엎어져서 헤실헤실 웃는다.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상태가 좋지 않다.
유리와 지수 선배는 뭔가에 대해 격렬한 토론 중이다. 살짝 들어보면 빨간색이 왜 빨간색일까 라는 이상한 주제다. 서청천 씨는 로이스와 계속 술잔만 주고받는다. 다음에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내 방에서 일어나지 않게 하리라.
"그래서! 우리 김유빈 군의 노래자랑이 시작되겠습니다!"
"뭐!"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를 내려쳤다. 탁자에 엎어져 있던 청하마저 일어나서 나를 바라본다. 다섯 명의 기대에 찬 눈빛이 나를 향한다.
"갑자기 왜!"
"술 게임 벌칙."
"언제 시작했는데!"
"조금 전에."
"원래 술 게임 지면 술 마시는 거 아니야?"
"안 취하는 사람에게 마시면 재미없어."
제기랄. 말은 겁나 잘해. 더 반박할 거리가 없어진 나는 어쩔 수 없이 노래를 불러야 할 처지에 놓였다.
"불러라! 불러!"
이제 박수까지 친다. 한숨을 한 번 쉬고 앞으로 나선다. 반주도 없이 노래라니. 엄청 어색해.
"자. 이거 받아."
유리가 나에게 뭔가 던져준다. 공중에서 그 물건을 받아낸다······. 마이크다. 이 인간들 너무 본격적이잖아. 저 기대에 찬 눈들. 너무 반짝인다.
손에 들린 마이크를 꽉 잡고 입가로 가져간다. 이럴 때 부를 노래는 나의 18번 `Over the Rainbow`. 안다. 이런 술자리에 어울리는 노래가 아니란 걸.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한테 노래를 부르라고 시킨 너희가 잘못이지.
노래가 끝나고 마이크를 책상에 올려놓는다. 다시 내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바라본다. 지수 선배를 제외한 사람들이 입을 반쯤 벌리고 나를 바라본다. 뭔가 이상했나? 나름 잘 불렀다고 생각했는데.
지수 선배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키득거리고 잔을 들이킨다. 저 인간 지금 몇 잔 째냐. 진짜 많이도 잡수시네요.
"왜 그러고 있어?"
아직도 굳어 있는 사람들에게 질문한다.
"너···. 너. 무슨 노래가."
유리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킨다. 기분 나빠. 삿대질이라니.
"너. 노래를 왜 그렇게 잘해."
노래를 잘한다. 단순한 칭찬 문구도 손가락을 들이민 상태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니 욕처럼 들린다.
"진짜 장난 아니었어요! 꼭 가수 같았어요!"
그 세 술이 깬 것인지 청하가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그래. 저런 게 칭찬이지. 원래부터 노래는 잘한다고 듣고 다녔다.
"축제 때보다 더 잘 부른 거 같네."
여기서 유일하게 이전에 내 노래를 들었던 지수 선배가 말한다. 학교 축제 공연에도 한 번 섰었지. 뮤지컬 연극을 하느라 노래를 불렀는데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정말 잘 부르더군."
"이야. 노래를 잘할 줄 모르고 시킨 건데."
서청천 씨와 로이스도 내 노래를 좋게 평가한다. 뭔가 약간 쑥스럽다.
"자! 술 게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수 선배가 시끄러운 장내를 박수를 쳐 조용히 시킨다. 술 게임 아직도 하는 겁니까?
제기랄.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빌어먹을 신년회. 얼굴을 손에 파묻고 한숨을 쉰다.
탁자 위에는 빈 술병들이 굴러다닌다. 안주로 집어 먹었던 음식들의 흔적은 방안 곳곳에 흩어져있다. 내 침대는 또다시 청하와 유리의 차지가 되었다.
청하가 먼저 쓰러졌다. 그 뒤를 이어 유리가 쓰러졌다. 서청천 씨는 인사불성의 로이스를 대리고 방을 나갔고, 지수 선배는 도망치듯 사라졌다.
"으으. 이제 더 못 먹어요."
안돼. 여자는 때리면 안 된다 유빈아. 청하는 내 침대에 누워 잠꼬대할 정도로 깊게 잠들었다. 그 옆의 유리도 만만치 않다.
일단 청하부터 옮기자. 이 인간들 빨리 옮겨야지. 안 그러면 내가 화병으로 죽는다. 지금도 죽은 상태지만, 분명히 또 죽을 거다.
"야. 이청하! 일어나라!"
다행히 청하는 금방 정신을 차렸다. 눈을 비비며 일어난 청하는 잠이 가득한 얼굴로 날 바라본다.
"어? 유빈 선배? 왜 여기에?"
정신을 차렸다는 말 취소. 제정신이 아니군.
"여기 내 방이거든?"
"에? 아. 선배. 저를 방에 끌어들여서 이상한 짓 하려고?"
청하는 묘한 웃음을 짓는다. 속이 끓어오른다. 참자. 참을 인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고 했다.
"더 그렇게 쉬운 여자 아니거든요? 푸흡."
청하는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저건 명백한 비웃음이다. 오냐. 너 죽고 나 죽자.
침대에 앉아 있는 청하의 머리를 손날로 강하게 내리친다. 빡! 소리가 나게끔. 청하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머리를 부여잡는다. 많이 아픈지 아프다는 소리도 내지 못한다. 내가 때렸지만, 아프긴 할 거다.
"아프잖아요!"
다시 몸을 일으킨 청하가 눈물 젖은 눈으로 소리친다.
"아프라고 때린 거다. 넌 빨리 네 방에 돌아가."
청하는 콧방귀를 뀌고 펜을 휘두른다. 바로 청하의 모습이 사라졌다. 드디어 한 명 보냈다. 이제 남은 건 유리뿐인데. 일단 깨워 보자.
"야! 유리! 한유리! 일어나라! 네 방 가서 자!"
어깨를 붙잡고 흔들지만, 유리는 미동도 없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안 일어나냐!"
더 격렬하게 어깨를 흔들자 유리가 눈을 뜬다.
"으어어."
해석 불가능한 무언가를 말하며 몸을 일으킨다. 나를 한참이나 바라본다. 뭔가 상당히 불안하다. 왠지 저번 크리스마스가 떠올라.
"아으아으으 으허."
그리고 유리는 다시 침대에 엎어진다. 하. 미쳐버리겠다. 이 인간을 어찌해야 좋을까.
"일어나라!"
유리의 귀를 잡아당기며 강제로 일으켜 세운다. 유리는 으으 거리며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는다.
"너도 빨리 방으로 가라."
내 말에 유리는 감고 있던 눈을 뜬다.
"아! 유빈이다!"
등줄기에 스산함이 지나간다. 진짜 위험하다. 제발. 내 생각이 틀리기를 바란다.
"유빈아! 사랑해!"
히익!!! 유리가 나를 끌어안으려고 하는 걸 간신히 피한다. 이 년. 술을 얼마나 처마신 거야! 빨리 보내야 해! 안 그럼 내가 위험해진다.
얼른 유리의 어깨를 잡고 펜을 휘두른다. 유리의 방 앞에 도착하자마자 유리의 손을 잡고 방의 문고리를 돌린다. 다행히 열렸다. 그대로 방문 너머로 유리를 집어 던지다시피 밀어 넣고 펜을 휘둘러 내 방으로 돌아온다.
좋아. 위험한 일은 사라졌다. 유리는 저 일을 기억 못 할 거다. 기억 못 해야 한다. 그대로 침대에 눕는다. 주변을 둘러본다. 엉망진창이다. 제기랄.
방도 엉망진창, 내 마음도 엉망진창. 완전히 빌어먹을 신년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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