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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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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7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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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0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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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15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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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유산(4)

DUMMY

카르미르는 이번 전쟁에서의 교훈을 되새기며 입을 열었다.


“대주교 각하. 양측의 분쟁도 중요하지만, 언데드의 위협이 남아있습니다.”


“언데드의 위협?”


“예, 각하. 대규모 언데드 군세가 깨어지며 언데드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흩어진 언데드들이 어떤 피해를 끼칠지 모르니 군을 나누어 소탕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흐음. 어떻게 말인가?”


의아해하는 노이만 대주교의 반응에 카르미르가 슬쩍 입술을 적시며 말했다.


“병력을 셋으로 나누어야 합니다. 일부는 이곳, 미레인 성 주변의 언데드를 소탕하고 나머지 둘은 동남과 서남방향으로 진군해야 합니다.”


“동남과 서남? 이유가 뭔가?”


“예상되는 피해가 가장 크기 때문입니다. 이곳으로부터 북서쪽에는 로다르 남작의 베일 성이 있습니다. 전대 백작님이 군대를 이끌고 오라고 명하신 바, 아마 충분히 방비가 되어 있어 피해가 적을 겁니다. 남쪽은 고메즈 후작군의 진군로였기 때문에 이미 영지민들이 몸을 피신한 상태입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브리베 강에 연해있는 장원이나 마을들은 방비가 충분치 않습니다. 베트니아 만 일대 역시 아직 전투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해당 영지의 주인인 해리어트 남작은 주변의 구호에 신경 쓰기 어려울 겁니다. 교국군이 나서 무고한 피해자들을 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심문관. 자네 말대로 후작군이 아직 전투중이라면 우리와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을 텐데.”


흥미롭다는 듯 말하는 대주교에게 카르미르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각하. 마찰은 없을 겁니다. 비록 지금은 전투중이라지만 우리는 동맹입니다. 언데드라는 공적 앞에서 뭉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흠, 그래. 언데드를 이유로 휴전을 제안하자는 게로군?”


“그렇습니다.”


“좋군. 후작군이 있는 방면은 내가 직접 지휘해야겠어.”


얼마 전, 미레인 성이 포위당했을 때 카르미르가 홀로 카스티야 자작과 독대할 때도 비슷할 말을 했었다.

코앞에 우리의 공적인 언데드들이 창궐했으니, 동맹끼리 뭉쳐야 한다고. 고메즈 후작군은 카르미르의 말을 개소리 취급하며 무시했지만, 정예 민병대를 이끌고 나타난 대주교가 같은 이야기를 한다면 결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교국군은 금지된 땅을 공격하고 있고, 남방대교구의 군대 역시 구호작업을 실시할 것이다. 괜한 시비에 휘말릴 일도 없을 것이다.


이후로는 일사천리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남방대교구의 병력은 보급부대까지 근 이천에 달했고, 그 중 사백여 명은 그들이 타고 온 범선과 보급로를 지킬 겸 몰튼엔즈에 주둔하고 있었다. 대주교는 즉석에서 남은 천 오백의 병력을 나누었다.

카르미르에게 백오십 명의 병력을 맡겨 미레인 주변을 소탕하게 하고, 전장 경험이 풍부한 상급성기사 한 슈미츠에게 사백의 병력과 마법사를 맡겨 브리베 강 방면의 영지민들을 구호하도록 했다. 나머지 모든 병력은 대주교가 직접 이끌고 플룩투스 방면으로 진군하기로 했다.




남방대교구에서 온 병력들은 주변의 언데드들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성내로 들어와 구호활동을 벌였다.

교국군은 상당한 규모였지만 변경백령의 본성인 미레인은 지난 백년 간 끊임없이 증축과 보수가 이루어진 거성이었기 때문에 모든 군대를 너끈히 수용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여명이 밝아오자 대주교와 한 슈미츠는 각자 군대를 이끌고 출정에 나섰다. 고작 하루였지만 최선을 다해 자신들을 도운 교국군들을 위해 미레인에 피신해온 영지민들은 성벽 위까지 올라 배웅에 나섰다.


해가 밝아오자 카르미르는 자신에게 주어진 병력의 지휘관과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르미르는 일단 성문의 보수작업 등으로 바쁜 러셀 백작군을 대신해 경계를 지원해줄 것을 명령했다. 임시로 성의 경비를 맡고 있는 케이언 러셀에게 지휘관을 소개하여 협력하도록 한 뒤, 카르미르는 대주교가 성에 남겨두고 간 성직자들을 찾았다.

노이만 대주교는 붉은 성벽과 미레인 성에서 죽은 자들을 위해 장례를 치러주고 싶다는 카르미르의 말에 자신을 보조하기 위해 따라온 신부 한 명과 부제 둘을 남기고 갔다.

세오렌의 사제이기도 한 신부는 치유의 권능을 발휘하여 부상자들을 돌보고 있었고, 카르미르는 부제들을 데리고 장례식 준비를 시작했다.


주변에 물어물어 확인해본 결과 죽은 자들의 대부분은 발라노어나 다른 선신의 신도였다.

러셀 변경백령은 금지된 땅과 인접한 영지였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외의 신을 모시는 이들도 있었지만 따로 권능을 받거나 교단에 든 자는 없었기에 한꺼번에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대주교가 떠나고 사흘 후, 장례식은 미레인 성 동쪽의 절벽을 내려가 브리베 강이 멀리 보이는 곳에서 치러졌다.

그간 카르미르가 직접 병력을 이끌고 주변의 언데드를 싹 소탕한 탓에 장례식이 방해받는 일은 없었고, 눈발도 그쳐 포근한 날씨였다. 카르미르는 소리 높여 기도하기 시작했다.


“선하고 정의로운 자들이 눈 감음에 세 선신께 기도를 올리리라.”


카르미르는 평소의 판금갑옷 대신 검은색 예복을 입었다.

신부들이 입는 수단과 거의 유사하지만, 하얀 파시아(fascia:수단에 두르는 너비가 넓은 비단 허리띠)를 허리에 두르고 성표를 금줄에 걸어 목에 차고 있었다. 무수한 전투로 성도에서 지급받은 갑옷은 일찌감치 잃어버렸고, 그 대신으로 입고 있던 갑옷도 썩 상태가 좋지 않았다.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빌리고 수소문 하여 차려입은 예복이었다.

사실 사제가 아닌 자가 입는 것은 규정에 어긋나지만, 어쨌든 심문관을 겸직하고 있는 카르미르였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딱히 없었다.


“그들이 겪은 환란과 시련은 그들의 품에서 구원 받으리니, 지금 그 무거운 육을 벗고 온전히 빛나는 영으로 영원히 영광되리라.”


덕분에 카르미르는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만에 완전한 비무장 상태였고, 겹겹이 예복을 입었음에도 벌거벗은 것만 같은 감각에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하지만 카르미르는 기도문을 외기 시작한 후 뒤에서 파도치듯 들려오는 자그만 흐느낌에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흐으윽...”


“형님...”


카르미르의 뒤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다. 시신들을 이곳까지 옮기는 데에도 꼬박 한 나절이 걸렸다.

그 외에 수습하지 못한 시신을 가늠하면, 이번 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이들은 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게다가 여기 모인 시신들 중 징집병 이백여 명은 아직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은 마지막까지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할 것이다. 그들 역시 언데드나 후작군의 약탈로 목숨을 잃었을 것이기에.


“오늘 이들이 눈 감음은 하늘 아래에 비극이나 지극히 높은 존재들의 품 안에 드는 지복이라. 태초에 그들이 생명을 결정지음에 예정된 순리이니 눈물짓지 말지어다.”


“후으으윽, 흑, 흐으윽.”


사랑하는 아버지와 삼촌들을 잃은 엠마 러셀이 동생의 어깨에 기대 구슬프게 울고 있었다. 동생인 헨리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음을 참으려고 했지만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을 수는 없었다.


“영광된 영은 헛된 육을 박차고 하늘에 올라 빛이 되고 숨결이 되리니, 세상에 등짐은 아니리라.”


반면 어린 백작의 눈빛은 냉정하다 못해 싸늘했다. 더스틴 러셀은 이를 악문 채로 아버지의 맨 발바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교국의 전통에 따라 장례는 화장으로 정해졌고, 영지민들은 성에서 긁어모은 장작으로 단을 쌓았다. 줄지어 뉘어진 죽은 이들에게는 깨끗한 천 옷이 입혀져 있었고 맨발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세 선신의 전당에 흙발로 들지 않기를 기원하는 것이었다.


“오늘 여기에 빛나고 선하고 순결한 존재의 복이 내림에 선한 이들의 혼이 구원받으리라. 세 선신의 품안에 잠들기를.”


“세 선신의 품안에 잠들기를.”


나무로 쌓은 거대한 단 앞에서 나지막한 기도가 울려 퍼지고, 카르미르는 부제에게서 횃불을 전해 받고 걸음을 옮겼다. 워낙 많은 이들의 시신을 올린 지라 스무 번이 넘게 돌아다니며 불을 붙여야 했다. 카르미르는 힘없이 일렁이는 불길을 보며 나지막하게, 하지만 간절하게 중얼거렸다.


“내 영육을 온전히 소유한 광휘의 주여. 주의 거룩함을 찬양하는 종의 손에 정의와 정화를 위한 불꽃을 내려주시옵소서.”


그러나 끝끝내 카르미르는 발라노어에게 성화(聖火)를 받지 못했다.

신성한 불꽃이라면, 내일 아침이 떠오를 때까지 아름답게 타오르며 죽은 이들의 마지막을 조금이나마 밝혀줄 수 있을 텐데. 발라노어의 성기사를 자처하는 카르미르는 죽은 백작에게 마지막 선물도 해주지 못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울적해졌다.


“후우.”


문득 가슴 언저리가 울컥한 카르미르의 머릿속에서 추수철의 밀밭처럼 빛나는 금발과 푸르른 녹안을 뽐내는 소인족 소년, 제르핀이 떠올랐다.

카르미르는 무법도시에서 크루델의 신도들에게 허무하게 죽은 제르핀의 형과 청년들을 장례지어 주었더랬다.


‘구원받을 수 있느냐고...’


소년은 그게 궁금했었나보다.

억울하게 죽어간 그의 가족들이 세 선신께 구원을 받을 수 있을지. 제르핀이 질문을 던졌을 때 카르미르는 모르겠다고 대답했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어쩌면...’


날씨가 꽤 풀린 탓인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마침내 단 위에 불길이 화르르 타올랐고, 카르미르는 공허한 눈빛으로 불길을 응시했다.

대미궁에서 빛으로 스러지던 동료들도, 하얀 성화 속에서 조용히 타오르던 제르핀의 형과 청년들도, 억지로 불붙여 매캐한 연기 속에서 불티가 티는 소리를 요란히 내며 타오르는 러셀 백작과 사람들도.


‘구원받을 수 있는 걸까? 고작 화신 한 번 부른 걸로 대전사를 내팽개친 선신들에게?’


“후우...”


평소에도 문득 이런 불경한 생각이 들 때면 무릎 꿇고 사죄의 기도를 올리던 카르미르였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저 우울한 감정을 곱씹으며 발갛게 달아오르는 죽은 자들의 발바닥을 응시했다. 시체가 타오르며 내는 역하고도 고소한 냄새에 욕지기가 치솟았다.




장례식이 끝나고 한 달이 흘러 해가 바뀌었다.

남방대교구의 군세는 러셀 변경백령에 흩어진 언데드들을 착실하게 정리했다. 노이만 대주교는 뜻밖의 도움으로 후작군을 쉽사리 몰아낼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고메즈 후작군이 알아서 철수했다.

고메즈 후작령에 다시 한 번 대규모 언데드가 출몰한 것이다.

전과 같이 군대를 이루어 공격해온 언데드들은 곧장 후작령의 본성인 몬타나로 진격했고, 소식을 들은 고메즈 후작은 급하게 회군했다.

플룩투스 성에서 농성하던 해리어트 남작은 적들이 포위를 풀고 퇴각하자 상황을 파악한 후 잽싸게 붉은 성벽을 수복하는 공을 세웠다.

뒤늦게 몬타나를 구원한 고메즈 후작군이 다시금 진군했지만 언데드를 청소를 거의 마치고 붉은 성벽에 합류한 남방대교구의 군대로 인해 결국 고메즈 후작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노이만 대주교와 사절단을 이끌던 브라운 주교는 회랑에서 고메즈 후작을 어르고 달래며 집요하게 설득했고, 결국 휴전을 논의할 것을 확정지었다.

러셀 가문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뛸 듯이 기뻐했으며, 곧장 휴전 논의에 참가하기 위해 붉은 성벽으로 향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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