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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손
작품등록일 :
2018.09.17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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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0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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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5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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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 안식일(2)

DUMMY

엠마가 그녀를 기다리던 가병들, 시종들과 합류하려던 차에 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엠마 아가씨!”


차가운 겨울 공기를 가르는 쾌활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인족 소년이었다. 풍성한 금발에 빛나는 녹색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용모의 소년은 목깃이 높은 하얀 예복 위에 검은 영대(領帶)를 두르고 있었다.

하인이 건넨 숄을 어깨에 두르던 엠마는 뜀박질에 가까운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소년을 발견하고 살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옷자락을 잡고 인사를 건네는 것이었다.


“빛의 주가 종을 비추기를, 부제(副祭)님.”


엠마의 인사말에 소년은 어색한 표정으로 양손을 모으며 답했다.


“선한 축복이 함께하기를. 장난치지 마시고 그냥 제르핀이라고 부르세요, 아가씨.”

“저택에서라면 모를까, 대성전 앞에서 그러고 싶진 않네요, 부제님.”

“헤, 어차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텐데요.”

“글쎄요?”


엠마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제르핀은 슬쩍 주변을 돌아보았다. 자신을 향해 멈춰있던 시선들이 분주하게 흩어지는 것을 발견하곤 제르핀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일단 가요. 저택으로 가시죠?”

“네. 미사 마무리는 끝난 건가요?”

“어차피 제가 있어봐야 방해만 되니까요. 어서 가요.”


제르핀의 채근에 엠마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가병이 끌고 온 말에 올라 옆으로 걸터앉았다. 그러자 미노트 경과 캐서린도 그녀를 따라 말에 올랐고, 제르핀은 건장한 러셀 가문의 가병이 내민 깍지 낀 손에 무릎을 지탱한 채 던져지듯 안장에 올랐다.


가병들이 고삐를 짧게 쥐고 말을 끌기 시작하자 제르핀은 조금 상기된 얼굴로 안장을 단단히 붙들었다. 승마경험도 적고, 등자에 발이 닿지도 않는지라 조금 긴장된 기색이었다.

찬바람이 불어오자 엠마는 숄과 옷깃을 여미며 웃는 기색으로 제르핀에게 물었다.


“오늘도 저택에서 묵을 건가요?”

“네-어, 혹시 폐가 되나요?”


단호한 대답에 이어 불안한 얼굴로 물어오는 제르핀을 보며 엠마는 손을 내저어보였다.


“설마요. 저는 상관없지만 부제가 성당 밖에서 머무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까요.”

“뭐···, 그건 그렇죠. 하지만,”


엠마의 걱정스런 표정에 제르핀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덧붙였다.


“원래 아무리 성실한 종자라도 기사가 없으면 땡땡이를 치는 법이랍니다.”

“음, 그런가요?”


엠마의 시선이 그녀의 충직한 호위기사에게 향했다. 그러자 미노트 경은 잘 정리된 반백의 수염을 쓸어내리며 조용히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비근한 예였지만 종자와 부제는 분명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종자가 기사를 모시며 배움을 쌓고 마침내 또 한명의 기사로 거듭나듯이 부제도 신부 혹은 주교를 모시며 배움을 쌓고 마침내 또 한명의 사제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이 말인즉슨 모셔야 할 기사 혹은 사제가 없으면 종자와 부제의 배움은 멈추거나 늦춰진다는 의미였다.

제르핀은 자신의 처지를 기사가 없는 종자에 빗대어 말한 것이었다. 즉, 제르핀은 부제로 서품을 받았지만 모셔야할 사제를 배정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제르핀은 부드럽게 흔들리는 말머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투덜거렸다.


“빨리 카르미르님이 돌아와야 뭐라도 될 텐데.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순방단을 쫓아가고 싶어요.”


잠시 입술을 달싹거리던 엠마는 말을 아끼기로 하고 조용히 미소만 지어보였다.


부제 서품 이전부터 제르핀은 꽤 유명인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제르핀은 본래 글도 배우지 못한 일자무식에, 카롤링거 촌구석 농노의 아들이었다. 그런 그가 카르미르의 후견을 받아 교국 최고의 교육기관인 신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제르핀의 이름이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신학교의 교사들은 제르핀을 그저 운 좋은 소년으로만 여겼다. 그러나 이내 제르핀은 비상한 학습능력을 뽐내며 고작 1년 만에 신학교 과정을 모두 마쳤다.

보통 신학생들-어려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으며 공부에 전념하다가 신학교에 입학한 이들-이 짧으면 3년, 길면 5년에 걸쳐 신학교 과정을 마친다는 것을 감안하면 제르핀의 성취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렇게 소년들의 선명한 질시와 권력자들의 음흉한 관심, 교사들의 뜨거운 애정을 한 몸에 받던 제르핀에게 예기치 못한 행운이 찾아왔다. 지난 가을에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의 여파 때문이었다.

그 사건은 미친 주교가 용병을 부려 자신의 사목구에 속한 마을 하나를 통째로 학살한 일로 세간에 알려져 있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수십 명의 사제들이 감옥에 갇혔고 이로 인해 신부와 부제로 서품 받는 인원이 갑작스레 늘어나게 되었다.


뛰어난 학업 성취와 우연한 기회, 그리고 높은 곳에 앉은 이들의 뜻이 맞물려 제르핀은 부제가 되었다. 성도에 온지 일 년하고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고아소년이 성직자가 된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제르핀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겠지만-심지어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겨울의 찬바람에 구름이 동쪽으로 훌쩍 물러서자 창백한 햇볕이 대로를 내리쬐었다. 엠마는 저도 모르게 제르핀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곤 세간에 떠도는 소문을 떠올리며 속으로 침음했다.


‘···성흔(聖痕)이라.’


상기된 낯빛으로 말 등에 매달려있는 제르핀의 얼굴엔 어느새 하얀 자욱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샹들리에와 양초, 옅은 빛 아래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그것이 태양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것은 얼핏 화상자국 같기도 했고, 분을 길게 칠한 것 같기도 했다. 부드러운 눈매에서 시작하여 하얀 볼을 가로질러 턱을 향해 길게 내려 그어진 흔적. 엠마는 그 흔적이 꼭 눈물자국 같다고 생각했다.


바람은 서쪽의 구름을 끌어당겼고, 이내 커다한 구름이 다시금 태양을 가렸다. 희미하게 빛나던 눈물자국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제르핀의 얼굴에 모여들었던 눈들이 자연스레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것이 정말 소문대로 신이 새긴 흔적인지 아니면 마법이나 정령에 의한 신비한 현상인지 아니면 알려지지 않은 피부병의 일종인지-엠마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제르핀은 부제품을 받던 중 교황의 안수기도를 받고 정신을 잃었다. 그리곤 상서로운 빛을 머금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현장에 있던 교황과 고위 사제들은 즉시 권능을 부려 이 기이한 현상을 가렸으며 관련된 일에 대해 함구령을 내렸다.

그러나 당시 일이 벌어졌던 대성전의 예배당 안에는 삼천여 명의 신도들이 있었다. 그러니 제르핀이 흘린 상서로운 눈물을 목격한 이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백은 넘었다. 신의 계시를 받고 그 증거로 얼굴에 성흔을 새긴 소인족 소년에 대한 소문을 숨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신흥 상회의 실질적인 주인답게 엠마는 밝은 귀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제르핀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믿을 만한 이들에게서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교황이 세 명의 추기경들을 데리고 제르핀과 직접 면담을 했다는 이야기였다.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결코 평범한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무슨 이야기였을까?’


엠마는 자기보다 여섯 살이나 연상이지만 겉으로 보기엔 소년에 불과한 제르핀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엠마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르핀은 새된 목소리를 내며 불안하게 흔들거렸다.


“어, 어어.”


자신을 태운 말이 슬쩍 투레질을 하자 제르핀의 상기된 얼굴빛이 순식간에 허옇게 물들었다. 말고삐를 쥐고 있던 가병은 별 것 아니라며 웃음 지었지만 제르핀은 허벅지를 꽉 조인 채 상체를 바짝 수그렸다.

공교롭게도 그 자세는 전력으로 말을 달릴 때 기수가 취하는 것과 거의 흡사했다. 똑똑한 승용마는 자신의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기분 좋은 압박감에 콧김을 뿜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으억!”


얌전하게 걷던 승용마가 갑자기 휙 앞으로 뛰쳐나가자 고삐를 쥐고 있던 가병이 기겁하여 비명을 내질렀다. 잠시 질질 끌려가던 가병은 이내 고삐를 놓치고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으아아악! 아가씨! 살려줘요-!”

“이런! 부제님!”


엠마의 눈짓에 미노트 경이 즉시 제르핀을 쫓았다.


“이럇!”


중년의 기사는 능숙하게 말을 몰아 곧 엉뚱한 골목으로 향하던 제르핀을 따라잡았다. 그리곤 상체를 한껏 기울여 신나게 달리던 말의 고삐를 휙 낚아챘다.


“어, 어억-”


기사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주둥이가 휙 들린 말이 고개를 거칠게 흔들었다. 그러자 제르핀은 질린 얼굴로 갈기를 붙든 채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 으아아-!”


고성을 내지르는 그를 보며 미노트 경은 잠시 수염을 쓸어내리곤 고삐를 모아 쥐었다. 그리곤 슬쩍 손을 뻗으며 말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으아- 아헥,”


미노트 경은 제르핀의 뒷목을 잡아채어 훌쩍 들어 올리더니 자신의 앞에 턱 앉혔다.


“흐, 흐으. 감사합니다, 경.”

“아닙니다, 부제님.”


미노트 경이 제압한 말의 고삐를 쥔 채 일행에게로 돌아오자 캐서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캐서린!”

“푸흡- 죄, 죄송해요, 아가씨.”


그러면서 캐서린은 웃음기 어린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미노트 경 좀 보세요. 꼭 어린 손자를 데리고 나온 할아버지 같지 않아요?”


캐서린의 말에 얼굴이 허옇게 질린 제르핀과 담담한 얼굴의 미노트 경을 돌아본 엠마는 간신히 엄한 얼굴을 지켜내었다.


“흐으, 죄, 죄송합니다. 걱정을 끼쳐드렸군요.”

“아뇨, 괜찮-”


그러나 엠마도 결국 제르핀의 에메랄드빛 눈망울에 물기가 찔끔 배어나오는 것을 보곤 슬쩍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


가뜩이나 울상이던 제르핀은 고개를 돌린 엠마가 하얀 손으로 입가를 가리는 모습에 입을 꾹 다물었다.


작가의말

 후원해주신

 rlaqud8k 님,
 아그룬타 님,
 AshPile 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기다려주신 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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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 #48. 소용돌이(5) +175 20.10.20 5,575 219 13쪽
228 #48. 소용돌이(4) +6 20.10.20 1,376 8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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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 #48. 소용돌이(1) +9 20.05.05 2,138 109 13쪽
224 #47.5 관문 너머 +8 20.05.05 2,069 108 13쪽
223 #47. 죽음의 사도 (3) +32 20.05.02 2,767 140 15쪽
222 #47. 죽음의 사도 (2) +9 20.05.02 2,131 113 14쪽
221 #47. 죽음의 사도 (1) +11 20.05.02 2,169 120 13쪽
220 #46. 정화 (2) +49 20.04.20 3,397 164 13쪽
219 #46. 정화 (1) +15 20.04.20 2,163 124 15쪽
218 #45. 불길 (7) +56 20.04.15 2,746 174 13쪽
217 #45. 불길 (6) +24 20.04.15 2,165 12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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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45. 불길 (2) +5 20.04.12 2,225 11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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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44. 전조 (3) +20 20.04.08 2,531 139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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