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류(무림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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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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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6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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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

DUMMY

좁다란 회랑을 따라 걷던 흑의인은 곧 목적했던 문 앞에 이르렀다. 회의를 입은 무사가 그를 반겼다.


"안에서 기다리십니다."


험상궂은 얼굴과 달리 무사의 태도는 지극히 정중했다. 신원 확인 없이 바로 비켜서며 문을 열었다.


문을 통과한 흑의인을 맞은 건 중년 사내였다. 흰 머리가 듬성듬성 난 그는 다탁에 앉아 서류를 보다가 일어나 흑의인을 반겼다.


"반갑습니다, 하오문 서안분타를 맡고 있는 이홍진이라고 합니다."

"반갑소."

"우선 앉으시지요. 한 대협!"


이홍진이 반가운 이를 맞듯 활짝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미소로 굵어진 주름이 좋은 인상을 풍겼다.


"나를 아시오?"


흑의인이 앉으며 물었다.


홍진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용정차를 빈 잔에 따르며 답했다.


"노야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그분께서 전 지부에 알리셨죠. 그래서 대협의 용모를 숙지하고 있었습니다."

"노야라······."


흑의인은 찻잔에 차오르는 찻물을 보며 홍진의 말을 잠시 되뇌었다.


그는 바로 무경.

이틀 전 천진에 있던 그가 지금 서안에 있었다.


홍진의 말에 무경은 이마 한가운데 돋은 큰 점과 맑은 눈빛을 지닌 얼굴 하나를 떠올렸다. 그 얼굴은 장성 밖 하오문 지부에서 만난 늙은이의 것이었다.


"변두리의 분타주치고는 범상치 않다했더니. 역시나 그가 하오문주요?"


대뜸 쏟아진 질문.

그에 홍진이 흠칫 놀랐다.


"음··· 어떻게 아셨습니까?"

"분타주로 썩기에는 너무 무공이 높더군요."


노인은 다 망해가는 하오문의 지부장이나 하기에는 아까운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절정고수였다.


"문주님은 특이한 무공을 익혀 제 수준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데··· 대단하시군요."


고개를 끄덕인 홍진이 이번에는 무경을 향해 포권했다.


“문주님 서찰을 받고 평범한 인물은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이번 팽가혈사는 정말 뜻밖이었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무경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내 뒷조사를 했군. 그래 얼마나 알아냈지?"

"많이는 모릅니다. 처음에는 단지 용모파기뿐이었으니까요."


갑자기 짧아진 무경의 말투에 홍진이 손사래를 치며 급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최근 대협께서 찾은 인물들이 차례로 죽자 관심을 가지고 조사를 했습니다. 우선 삼룡과 대협이 원한관계란 건 당연하니... 그 구체적인 접점을 찾으려했죠."


차를 한 모금 마신 홍진이 말을 이었다.


"그때 팽가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쉽게 범위가 좁혀지더군요. 삼룡과 팽가가 동시에 관여한 사건. 그걸 뒤져보니 하나 남더군요."

"그래서 내 정체를 알아냈나?"

"네, 운 좋게도."


그가 서류 한 장을 꺼내 무경에게 내밀었다. 거기에 북경에서 일어난 화재사건이 적혀있었다.


"흑웅방 멸문사건. 당시 삼룡의 공적이 대대적으로 홍보된 사건이죠. 정의를 구현했다며 관부와 무림 양쪽에서 상을 받았죠."

“···.”

“물론 감춰진 진실을 하오문은 알고 있었습니다. 뒷골목에 떠도는 소문. 숨겨진 이유를. ”


홍진의 말에 무경의 눈이 깊이 침잠했다. 그 차가운 눈을 바라보며 홍진이 말을 이었다.


"저희가 알아낸 건 대협이 당시의 생존자라는 겁니다. 흑웅방 제일검이었다는···. 그리고 지금은 무서운 실력을 지녔다는 정도죠."


홍진의 추론에 무경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긍정이라 받아들인 홍진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필히 대협이 이곳으로 오리라 생각했습니다. 삼룡 중 하나가 바로 이곳에 있기 때문이죠."


홍진이 서류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에 한 인물의 행적이 적혀있었다.


건조하던 무경의 눈에 빛이 일렁였다.


"요청하신 팽소천의 행적입니다. 그는 아비가 비명에 간 덕에 오늘부로 천하오대세가의 주인이 되었죠. 뭐 가문의 크기가 절반으로 줄긴 했지만 말입니다."

"놈은 지금 어디 있지?“


무경의 악다문 이 사이로 거친 숨이 뿜어졌다. 상대가 눈앞에 있다면 당장 씹어 먹을 기세다.


홍진이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하북에서 날아든 비보에 팽소천은 지금 정천성 안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대협보다 비응(飛鷹)이 더 빨랐습니다."

"······."

"처음부터 그를 노렸어야 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일같이 성문 밖 기루와 술집을 돌며 행패를 부렸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행적이 묘연할 정도로 성안에만 꽁꽁 숨어 있습니다."


길게 이어진 홍진의 말.

그것은 일종의 설득이었다. 당장은 참으란 거다.


그러나 무경의 대답은 달랐다.


“전에 요청한 자료를 받지. 지금 당장.”


방안을 밝히는 촛불에 무경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홍진의 이마로 땀이 솟았다.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미리 준비한 걸 꺼내 다탁 위에 펼쳤다.


복잡한 선이 교차하는 사각 두루마리.

그건 찻잔을 치우고도 다탁 위 대부분을 차지했다. 각종 골목길과 전각이 그려진 정천성 내부지도였다.


홍진이 지도 한가운데, 중앙에 위치한 전각을 검지로 가리켰다.


"지금 팽소천이 머문 곳은 빈객당. 바로 맹주부 지척입니다."


그는 자신의 손끝을 노려보는 무경을 향해 힘주어 말했다.


“이곳은 팽가의 정예가 있으며 주위로는 정의맹의 무력대가 터를 잡고 있습니다. 드러나지 않은 눈까지 치면 결코 잠입이 불가능합니다.”


한마디로 잠입하지 말란 말.

저지하는 거다.


무경이 대뜸 물었다.


"왜 말리는 거지? 어차피 하오문이야 보수만 챙기면 그만인데."

"귀빈이시니까요. 이미 과분한 선금을 내셨으니 그 값어치를 해야죠."


홍진이 무엇도 바라는 게 없다는 듯 양손을 펼쳐 하늘을 향했다.


그 미소 띤 얼굴을 무경이 잠시 뚫어지게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자신이 치른 야명주가 값비싸기는 해도 이 정도는 아니다.


"웃기는군. 그 가치가 정의맹과 반목할 정도는 아닐 텐데? 정말 나와 손잡을 생각인가?"


무경의 행적은 곧 드러날 일.

하오문에서 정보를 얻는 것도 정의맹은 이제 알아챘을 거다.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가 하오문이 무경의 조력자가 된다면 정의맹은 하오문을 가만두지 않을 거다. 야명주 수십, 수백보다 더한 대가를 치르게 만들 거다.


홍진이 대답했다.


"답을 드리기 전,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지?"

"대협은 복수를 위해서라면 정의맹과도 싸울 겁니까?"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무경의 냉소에 홍진이 미소 지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적의 적은 친구니까요. 믿어도 좋습니다."

"하오문이 정의맹의 적이다?"

"그렇습니다."


목이 마른지 홍진이 곁에 치웠던 차를 단숨에 마셨다. 그리고 빈 잔에 다시 찻물을 채웠다.


"하오문에게 정의맹은 도살자와 같습니다. 인정사정없는 칼질로 해체하려들죠. 이것은 개방의 태상방주가 맹주가 된 이후 더 심해졌습니다. 지난 십년간 문 닫은 분타만 열한 곳이니까요."

"하오문주가 장성 밖에 있는 것도 그 때문인가?"

"맞습니다. 하오문은 지금 멸문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

“그래서 시간이 필요합니다. 폭풍우가 지나갈 시간. 그 방편으로 대협을 응원하는 겁니다."


홍진의 기대에 찬 눈빛이 무경을 향했다.


무경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잘못 선택했군. 내 복수는 곧 끝날 테니까."


명백한 거부.

하지만 홍진은 미소를 지었다. 능글맞은 미소였다.


"이미 중천회를 아시잖습니까?"

"음...!"

"역시나 알아내셨군요. 그렇습니다. 흑웅방의 멸문은 그들의 작품입니다. 그런데도 팽소천 하나로 끝내시렵니까?"


정보를 다루는 하오문.

그들은 역시나 중원의 지배자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악몽 같은 밤의 진실을 무경에게 들려주었다. 물론 무경이 당문독에게 들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다.


홍진의 눈에 열의가 묻어났다.


"그들은 집요합니다. 대협이 살아있는 한 주변을 거닐며 끝없이 악연의 사슬을 이어갈 겁니다."

“어찌 그리 확신하지? 중천회를 잘 아나?”


무경의 말투는 여전히 차가웠으나 전보다 한결 부드러웠다. 상대가 어느 정도는 진실을 말한다고 느껴서다.


홍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압니다. 저희도 한때 중천회에 속했으니까요. 개방과 함께 말입니다."


야만의 세월.

하오문도 한때 중천회의 이상에 동참했었다.


위협적인 외세의 침략에 맞서 동포를 지키기 위해...

적국의 요인을 암살하고 정보를 수집해 중천회를 지원했다.


“그럼 지금은 중천회를 나온 건가? 이유가 뭐지?”

"지금의 회는 과거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명 제국이 들어서고 천하가 안정되니 중천회도 변했습니다. 정의맹을 앞세워 제 이익에만 몰두했죠."

"그게 잘못인가? 어차피 누군가 지배할 세상. 몸담은 조직이 그 주인이라면 반길 일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가 아닌 자신의 세상입니다. 같은 한족이라도 태생이 천한 자는 도태시키고 명문의 피를 이은 자만이 자격이 있다 믿는 자들입니다. 그것을 근래 대놓고 드러냈죠."


비분강개한 상대의 말.

허나 무경은 비웃었다.


"어차피 그런 세상 아닌가?“


세상은 모순투성이.

인간은 어딜 가나 서로를 구분하고 제 이익을 추구한다. 그게 본능이다.


그런데 겨우 이런 이유로 천하를 지배하는 중천회와 적대한다?

하오문처럼 실리를 추구하는 조직으로서는 하지 않을 일이다. 말이 되지 않는다.


무경의 의심에 홍진이 고개를 저었다.


"정도가 지나치니까 하는 말입니다. 지난 백년간 중원에서 문 닫은 문파의 수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소규모 문파를 합치면 천 곳이 넘습니다."

"그게 많은가?"


무경의 의문은 당연했다.

하루가 멀다고 세워지고 망하는 게 문파다. 하다못해 황도 뒷골목도 해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문파가 나타나고 사라지는데, 천하를 놓고 보면 엄청난 숫자일거다.


홍진이 단서를 달았다.


“말이 잘못 전달됐군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언급한 문파는 삼대 이상 이어지며 천하에 이름을 떨치진 못해도 지역에선 알려진 강호들입니다.”

“······.”

"물론 넓은 천하를 생각하면 천이라는 숫자도 대단찮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럼 대문파라 불리는 곳을 기준으로 얘기해볼까요? 무림사에 한 획을 그은, 적게는 삼사백 년 많게는 천 년 넘게 이어진 문파들 말입니다. 진주언가, 모용세가, 북궁세가, 사천표국······."


홍진은 무거운 이름 하나하나를 힘주어 말했다. 모두 무경에게도 익숙한 것들로 무림사에 자주 언급되는 이름이었다.


"지난 백년 간 그들도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중천회가 나눠가졌죠."

"그들의 멸문이 중천회가 조장한 일이다?"

“네, 모든 결과가 진실을 말해줍니다. 찢긴 상권은 중천회의 자금줄인 천하상단으로, 갈린 영역은 지척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로 흡수되었으니까요.”


거칠게 말을 뱉어낸 홍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내 더 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중천회를 떠난 이유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홍진의 눈빛이 한층 더 무겁고 불안하게 흔들렸다. 깊은 분노와 좌절이 그 안에 맺혔다.


“중천회는 주기적으로 아이들을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지금은 뜸하지만 지난 백년간 사라진 아이가 십만입니다. 십만! 그게 우리가 집계한 숫자입니다. 하지만 실제는 이보다 훨씬 많겠죠. 당금 천하는 하오문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이 더 많으니까요.”

“아이들? ...혹시 중천회에서 비밀리에 무력대를 키우나?”

“그렇다면 다행이죠.”


무경의 물음에 홍진이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아닙니다. 돌아온 이가 하나도 없으니까요.”

“모두 죽었단 말인가?”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아마도 그렇겠죠. 어떤 소식조차 없으니... 대협의 추론이 맞을 겁니다. 후우-."


예상보다 더 흥분한 홍진에게 무경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가족이 있었나?”

“네. 여동생이었죠. 친구들과 개구리 잡으러 갔다...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중년의 나이가 된 사내.

홍진은 아직도 당시 기억이 생생한지 눈가에 그리움이 가득했다.


“하늘로 솟고 땅으로 꺼진 듯 감쪽같이. 뒤늦게 알게 된 수천의 아이들처럼... 모두 중천회의 짓이었죠.”


무경이 물었다.


“아이들은 어디로 갔지? 한때 중천회에 속했다면 짐작이 될 텐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습니다. 중천회 내부 비밀조직이 행한 일이니까요. 다만··· 실험과 제물에 관한 말들은 있었습니다."

"실험? 제물?"




무인은 피를 먹고 자라고, 저는 선작과 추천을 먹고 자랍니다.


작가의말

무인은 피를 먹고 자라고, 저는 무얼 먹고 자란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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