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의 이름으로 – 24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형제의 이름으로 – 24
“야, 얘기는 끝까지 들어야지. 그래도 난 사실이라고 생각해.”
“뭐라고? 이 새끼가 사람을 헷갈리게 하네. 이유가 뭐야? 그 사람을 믿는 이유 말이야.”
“내가 말했지. 그 분은 항상 우릴 믿어줬고, 또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사실 난 그 분이 고금제일인이 아니라도 좋아. 하지만 그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고금제일인이 될 수 없다고 봐.”
“뭐야? 얘기가 왜 삼천포로 빠져?”
“그건 모르겠고, 대답했으니까 이제 선택할 차례다.”
“좋아. 먹는 거냐? 아님 입는 거야?”
“입는 거.”
“정말 탁월한 선택이다.”
“그럼 줘야지.”
“뭘?”
“뭐긴? 선물이지. 뻥이란 소린 안 된다. 여기가 낭인촌이란 거 잊지 말고.”
“친구란 놈이, 날 그렇게도 못 믿어?”
“당연하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라. 니가 우릴 믿게 했는지.”
“그래, 나 뻥쟁이다. 그럼 선물을 안 줘도 되겠네?”
조충은 봇짐에서 봉투를 두 개 꺼내다가 다시 집어넣는다.
“자..잠깐! 너 내 좌우명이 뭔 줄 아냐?”
“그런 것도 있었냐?”
“그래. 조금 전에 만들었다.”
“미친 놈! 그래, 뭔데?”
“내 손에 한 번 들어온 물건은 절대 빼앗기지 않는다야.”
촌장은 조충이 들고 있는 봉투 중에서 작은 걸 낚아챈다.
“이거 맞지?”
“이거면 어쩌려고?”
조충은 큰 봉투를 들고 되묻는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만 먹는 게 입는 것보단 크지 않겠어?”
“흐흐흐, 우리 정이의 잔머리는 여전하구나.”
와지직!
촌장은 봉투를 찢어서 내용물을 확인한다.
“이..이게 뭐야?”
“뭐긴 뭐야? 여자 속옷이지?”
조충의 말대로 봉투 속엔 빨간색의 여자 속옷이 들어 있다.
“이게 선물이라고?”
“왜, 이상해?”
“이 새끼, 너 변태지?”
“변태?”
“그래. 남자한테 여자 속옷을 선물하는 놈이 변태가 아니면 뭐가 변태야?”
“너도 그렇게 생각해?”
조충은 일초에게 공을 넘긴다.
“나 같으면 입겠다.”
“여자 속옷을?”
“그래. 충이 저놈이 다른 건 몰라도 여자 문젠 우리보다 한 수 위잖아?”
“그랬지. 우린 여자 손목 한 번 못 잡아도 저 놈은 하룻밤에도 두, 세 명을 품었으니까. 근데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너 이런 얘기 못 들었어?”
“무슨 얘기?”
“남자가 미인의 속옷을 입고 다니면 그 여자보다 더 예쁜 여자와 결혼할 수 있다는 속언 말이야.”
“그런 얘기가 있어? 그럼 당연히 내가 입어야지. 대신 말처럼 안 되면 어쩌지?”
“그야 충이가 책임지겠지 뭐.”
“책임이라면...?”
“책임지고 널 장가보내야지.”
“야, 그거 마음에 든다. 물건을 팔면 사후 관리를 그 정도는 해야지.”
촌장은 그 자리에서 입고 있던 누른 속옷을 버리고 빨간색으로 갈아입는다.
“으이구! 더러운 새끼, 이 지경이 되도록 입고 다닌 거야?”
“어때서? 십 년 째 입고 다니는 건데.”
“내가 못 산다. 못 살아. 그러니까 아직도 혼자 살지.”
“니가 내가 혼자 사는 데 보태준 거 있냐? 그리고 곧 장가간다는데 뭐가 걱정이야? 너 혹시 유부녀나 창기들 걸 훔친 건 아니지? 아..아니야. 난 그런 생각 안 할래. 근데 일초 넌 확인 안 해? 봉투가 작은 걸 보니까 영약일 것 같은데.”
“조충이 어떤 인간인 줄 안다면 그런 말을 못 할 텐데?”
“바로 그거야. 내가 아는 한 충이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사람이야. 내가 얻은 게 장가를 갈 수 있는 여자 속옷이라면, 그것도 그에 필적할 만 한 선물일 거야.”
“열어 봐.”
조충은 자신이 있는지 열어 볼 걸 권한다.
“맞춰볼까?”
“웃기시네. 나도 자세히 모르는 걸 니가 안다고?”
“선물을 준비한 놈이 내용물을 모른다고?”
“자세히 모른다고 했지 모른다고 했냐?”
“그게 그거지. 그러니까 독은 독인데 무슨 독인지 모른다는 말이지?”
“정말 알고 있었네. 사실 봉투는 여는 순간 넌 이미 중독됐다.”
일초는 막 봉투를 열었다. 순간 미세하게 하얀 가루가 밖으로 흘러나왔고, 그는 그걸 들이마셨다.
“왜 이런 짓을 하냐?”
“그 양반이 정말 고금제일인자라면 널 살려줄 테니까.”
“미친 놈! 가자!”
“어딜?”
“형님을 만나기로 했잖아?”
“그야 그렇지만, 괜찮아?
“그보다 넌 이게 무슨 독인지 정말 모르니?”
“십 년 전인가? 내가 어떤 노인네한테 정보를 팔고 대신 받은 거다. 그 영감탱이가 주면서 하는 말이 걸작이었지.”
“뭐랬는데?”
“이 독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에게 목숨을 걸라고 했어.”
“재밌는 영감탱이네.”
“그렇다면 이미 승부는 끝났다.”
“뭔 소리야? 형님이란 양반은 만나지도 않았는데.... 설마 너 중독도 안 된 거냐?”
“너 그 동안 뭐하고 살았냐? 옛날에는 제법 총명했는데, 지금 보니까 바보가 다 됐네.”
“그건 뭔 개 똥 누는 소리냐?”
“생각을 해봐라. 그 분이 정말 고금제일인자라면 몇 년을 같이 지낸 동생에게 아무 것도 안 가르쳤겠냐?”
“으음!”
조충은 침묵으로 촌장의 말에 동의한다.
“고금제일인자의 동생이 그 정도 독에 당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그렇다면 그를 만나볼 필요도 없는 거지.”
“그럼 일초가 멀쩡하니까 그가 고금제일인자란 게 증명된 셈이네. 젠장!”
“일초가 혼자 힘으로 무공이 강해졌을 수도 있지.”
촌장의 말에 조충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럼 니가 완패한 건 인정하냐?”
“사람도 안 만났는데 인정은 무슨.... 근데 아직도 멀었냐? 어떻게 사람이 그 먼 거리에서 얘기를 듣고 전음을 보낼 수 있지?”
“200년 전에도 고금제일인이었다. 그 동안 놀고먹었겠냐?”
“환장하겠네. 그럼 우리 같은 사람은 어떡해?”
“왜, 너도 수백 년을 살려고?”
“꼭 오래 살고 싶진 않지만, 무공만큼은 높았으면 좋겠다.”
“순진하던 회주님께서 그 동안 맺힌 게 많은가 봅니다.”
“복수할 놈이 많겠지.”
“내가 말이야. 회주란 걸 맡고 보니까 어찌나 갑질하는 놈이 많은지. 어휴! 마음속으론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을 죽인다니까.”
“그거야 힘없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거지. 근데 우리 형님도 신경 쓰는 사람이 있다면 믿겠냐?”
“고금제일인자가 조심하는 사람이라.... 그 정도로 무공이 뛰어나다는 거겠지?”
“무공도 무공이지만 권모술수에 뛰어난가봐.”
“그래서 힘이 필요하고, 나 같은 사람도 필요할 테지.”
“그럼 얘기가 다 끝났네. 형님, 어떻게 할까요?”
‘시간이 없으니까 일을 끝낸 다음에 보자.’
‘예.’
일초가 허공에 대고 말을 하자 세 사람의 귀에 동시에 전음이 들려온다.
“뭔 소리야?”
“가자!”
“어딜 가?”
일초와 촌장이 오른쪽 숲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조충이 앞을 가로막는다.
“따라 오기나 해.”
“그래도 무슨 일인지는 말해줘야지.”
“급한 일이다. 가면서 얘기해줄게.”
“그렇게 급한 일을 왜 지금 말해?”
“말을 안 들어먹는 어떤 놈 때문이지.”
“우리 형님은 절대 강요하지 않는다. 빠질 거면 지금도 늦지 않았다.”
“누가 잔머리 대마왕이 아니랄까봐. 니들 내가 호기심 때문에라도 못 빠질 거 알고 이러는 거지?”
“낄낄낄! 들켰네. 가자! 정말 급한 일이다.”
그 말을 끝으로 일초는 앞서 달려 나간다.
“저..저건 또 뭐냐?”
“놀랄 게 저거뿐이겠냐?”
일초가 생사무의 신법을 펼쳐 화살보다 빠르게 달리자 두 사람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진다.
“대체 일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앞으로 우리에게도 일어날 일이지.”
“거 참! 귀신에 홀린 것도 아니고.”
조충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간다.
얼마나 달렸을까?
“형님, 대형이 말씀하신 곳입니다.”
어느새 태민 사형제와 곤일이도 합류했다.
“벌써 삼백 리를 다 왔단 말이냐?”
“예. 여수라고 합니다.”
“여수(旅愁)?”
“예. 도시 전체가 음기로 가득합니다.”
“그런 게 보여?”
태운의 말에 촌장이 되묻는다.
“보이진 않지만, 느껴지긴 합니다.”
“으음! 그렇긴 하네. 그럼 음기를 따라가면 되겠네.”
조충은 말을 하곤 앞장선다.
“쯧쯧, 성질하곤? 지금부턴 개방과 낭인촌, 그리고 묵사회가 같이 움직인다.”
“예!”
“개방도 니들 편이냐?”
“편이라기보다 제 동생이 소방주입니다.”
“잘 한다. 그러다 니들 형제가 무림을 다 말아먹겠다.”
조충이 부러운지 시샘을 한다.
“그럼 회주님도 저희 형제가 되시면 되죠.”
“내가 그럴 수 있을까? 그럼 니들은 또 한 명의 상전이 생기는 건데?”
“이것 보시오. 좀생이님. 내 동생들은 당신하곤 다르거든요.”
“그래. 니 똥 굵다.
“잠깐!”
그 사이 촌장이 손을 들어 걸음을 멈춘다.
“왜?”
“피 냄새다. 고개를 숙여 봐. 안개가 짙어서 위에서는 안 느껴지지만 숙이면 진하게.... 저기다!”
그는 말하다가 한 곳을 가리킨다. 그곳에는 작지만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가자!”
일초를 선두로 일행은 모두 달려간다. 그때 앞쪽에서 한 사람이 달려온다.
“안녕하세요. 개방의 여수 분타주 위만입니다. 어느 분이 일초살수님이십니까?”
“나요. 시간 관계상 인사는 나중에 하고 상황을 들어봅시다.”
“예. 보시다시피 저곳은 한 때는 무림맹의 분타였던 곳입니다. 지금은 정파의 무사들이 이백여 명 머물고 있습니다.”
“항상 그렇게 많소?”
“아닙니다. 소림에서의 회합 때문입니다.”
“아직 안 끝났소?”
“영웅맹과 관련된 회합은 끝났습니다. 하지만 다른 일이 생겨서...”
“분타주. 지금 그런 걸 설명할 시간이 없소. 안쪽 상황이 필요하오.”
“예. 약 한 시진 전에 일단의 괴한들이 침입해서 정파 인사들을 도륙하고 있습니다. 저희도 정확한 상황은 모르지만 이미 백 명 이상 죽은 것 같습니다.”
“어떤 자들이오?”
“그것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다만...”
“다만?”
“지금껏 무림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자들입니다.”
“세심각이오.”
일초의 말이다.
“지난번 그 자들 말입니까?”
태운이 지난번 싸움이 생각난 모양이다. 그땐 독룡지체(毒龍之體)를 상대했다.
“그래. 대충 몇 명 정도 됩니까?”
“약 이십 명 정도입니다.”
“이십 명이 백 명을 죽였다고? 그것도 한 시진 만에?”
조충은 깜짝 놀란다.
“그렇습니다.”
“고맙소. 잠시 후에 낭인촌과 묵사회에서 올 겁니다. 분타주가 잘 조율해 주시오.”
“묵사회도요?”
“그렇소. 우린 가자!”
일초는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다음 무림맹의 분타로 몸을 날린다.
“형님. 여깁니다!”
잠시 후, 먼저 출발한 곤일이 일행을 맞이한다.
“상황이 어떠냐?”
“잠시 소강상태입니다만, 곧 다시 시작할 것 같습니다.”
“뭘 보고 그리 판단하느냐?”
“싸움은 세심각의 움직임에 의해 좌우되는데, 저길 보십시오. 시작됐습니다.”
곤일의 말대로 한쪽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나와 반대편 건물을 향해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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