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의 이름으로 – 27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형제의 이름으로 – 27
“허공섭물(虛空攝物)이라... 대단하군. 대단해. .... 그만하고 앉아라.”
“날 아느냐?”
“후후후, 널 아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아..아니다. 분명히 말해라. 날 어떻게 아느냐?”
따앙!
여인이 검을 무진의 목에 대려하자 일초가 쳐낸 것이다.
“건방지게... 죽고 싶냐?”
일초는 단검으로 여인의 목을 겨눈다.
“물러나라!”
“혀..형님!”
“괜찮다. 내 문제다.”
“예.”
무진이 손을 들어 제지하자 일초는 뒤로 물러난다.
챙!
여인은 이번에는 옆구리에서 쌍검을 꺼낸다.
“원앙검이라.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원앙검을 알다니.... 정말 날 안단 말이냐?”
“오빠가 동생을 모른다면 말이 되느냐?”
“오..오빠? 이 세상에 내가 오빠라고 부르는 사람은 한 명인데. 서...설마?”
“쯧쯧, 아무리 변했어도 그렇지 하나뿐인 오빠를 몰라보다니.... 섭섭하구나.”
“정말 룡이 오라버니세요? 아니야. 아닐 거야. 이건 말이 안 돼.”
“당연히 말이 안 돼지. 난 영원각이란 현판을 보는 순간 널 생각했고, 대문을 여는 순간 너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도 믿을 수가 없구나. 난 네가 살아 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꾸..꿈이 아니고, 정말 룡이 오라버니가 분명한가요?”
“아니면 우리 달이를 어떻게 알겠느냐?”
“다...달이. 그건 오라버니가 날 부르던 이름인데... 오라버니! 흐흐흐흑!”
여인은 달려와 무진의 품에 안긴다.
월미공주.
다섯 살 때 부친인 명친왕과 어머니를 잃고, 홀로 명친왕부를 지킨 여인이다. 무진이 명친왕과 친분이 있어서 친 여동생처럼 돌봐주었다. 공주는 그를 짝사랑했고, 무진도 좋아했으나 스무 살의 나이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오빠 동생으로만 지냈다.
“넌 어찌 된 놈이 아직도 어릴 적 그대로냐? 이러다간 나보다 더 오래 살겠다.”
“오라버니랑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죽을 생각인데?”
“어릴 적에도 그러더니 아직도 그 모양이냐?”
“과거에는 못했으니 이번에는 해야죠. 근데 이 아이를 보니 이번에도 어려울 것 같네요.”
“그래. 미안하구나.”
“가려라고 했던가요? 그러고 보니 둘이 많이 닮았네. 아니, 똑 같이 생겼네요.”
월미공주는 호란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처음에 이 사람을 보곤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오라버니를 세상에 나오게 만들려는 하늘의 뜻이겠죠.”
“그렇다면 평안하게 해줘야지. 너도 봐서 이 사람에게 이런 시련이 처음이 아니다.”
“오라버니와의 질긴 인연을 만들려다 보니 그런 거겠죠.”
“이전의 일은 그렇다 쳐도 이번에는 이유를 모르겠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무진의 표정이 더 어두워진다.”
“간단해요.”
“간단해?”
“예. 염원이 지극하면 못 이룰 일이 없으니까요.”
“내가?”
“아뇨. 이 아이의 염원이 하늘에 이르렀어요.”
“가려에 대해서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묻지도 않았고.”
“호호호! 오라버닌 아직도 이 아이를 모르시네요.”
“뭘 몰라?”
“이 아이는 오라버니의 눈빛만 봐도 마음을 읽을 수 있어요.”
“내 마음을?”
“그럼요. 오라버니도 이 아일 보면서 가려 생각을 했을 테니까요.”
“그걸 안단 말이냐?”
“호호호! 오라버닌 여전히 여인을 잘 모르시네요?”
“이 사람이 내 맘을 읽었다고 치자. 그렇다고 어떻게 세상을 떠난 지가 200년이 더 지난 가려의 혼을 불러낸단 말이냐?”
“그러니까 이 아이가 무서운 거죠. 오라버니가 가려를 생각하는 마음을 읽고선 자신이 그녀가 되고 싶었던 거죠. 이젠 오라버닌 이 아이에게서 영영 벗어나기 힘들 거예요.”
“그거야 관계없다만 어떻게 좀 해봐라. 이런 상태로 놔둘 순 없잖니?”
“호호호! 쉽게 받아들이네. 오라버니도 이 아이를 상당히 아끼나 봐요.”
월미공주는 약간 질투하는 눈치다.
“달아. 난 지금 몹시도 불안하단다. 혹시라도 이 아이가 어찌 될까 봐 숨쉬기도 곤란하구나.”
“호호호! 고금제일인자라는 오라버니께서 여인 땜에 숨쉬기가 곤란하다고요? 과거 오라버니를 아는 분들이 이 얘기를 들으면 뭐라고 하실까?”
“다른 놈들이 너처럼 시간을 끌었다면 벌써... 알지?”
“알다마다요. 오라버니의 뜻을 거스른 사람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으니까요. 근데 절 믿을 수 있겠어요?”
“당연하지. 근데 이상은 하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던 네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하게 됐느냐?”
무진의 말대로 과거 두 사람이 젊었을 땐 월미공주는 황제는 물론이고, 황실의 젊은 사내들이 모두 탐내던 황실제일미녀였다. 전통적으로 황실제일미녀가 바로 중원제일미녀였다. 게다가 명친왕부의 전 재산을 가졌으니 황제도 부러울 게 없는 여인이었다.
“다 오라버니 때문이에요.”
“나 때문에?”
“예!”
“내가 지금껏 샐 수 없이 많은 죄를 지은 건 사실이다. 허나 너만은 아니다. 난 가려 다음으로 널 아꼈다. 그건 너도 알지 않느냐?”
“저도 인정해요. 하지만 오라버니를 잃고, 전 세상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었어요. 그렇다고 무림에 남아 있을 수도 없었죠.”
“으음! 그랬겠지. 내가 널 아낀다고 무공을 가르치지 않았으니까....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대신 오라버닌 제게 여러 가지를 가르쳤어요.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심령술이었죠.”
“하지만 난 취미생활을 할 정도밖에 가르치지 않았다. 정통하지도 않았고.”
“전 지난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대부분을 혼자 지냈어요.”
“으음! 내가 널 시집을 보냈어야 하는데....”
“시집이야 제가 마음만 먹었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었어요. 하지만 전 혼자가 좋았어요. 그동안 오라버닐 생각하며 지낼 수 있었으니까요.”
“흠!”
무진은 지난 200년 동안 혼자 지냈을 월미공주의 고통을 느끼는 듯 괴로워한다.
“전 심령술에 흥미를 느꼈고, 제법 재주도 있었어요. 설사 재주가 없다 한들 200년을 넘게 익혔으니 하수는 아니겠지요.”
월미공주의 말은 왠지 쓸쓸하게 느껴진다. 무진은 달이를 따뜻하게 안아준다.
“미안하다. 나만 생각해서.”
달이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린다. 그렇게 두 사람은 거의 한 시진을 안고서 떨어지지 않는다. 만약 일초살수가 부르지 않았으면 언제까지나 그렇게 있었을 것이다.
“형님! 계속 그러고 있을 거요? 아가씨 상태가 나빠지고 있소.”
그제야 두 사람은 떨어진다.
“으응. 워...월아, 부탁한다.”
무진은 무안했던지 얼굴을 붉힌다.
“쯧쯧, 그러고 싶을까? 나중에 봅시다. 아가씨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땐 각오하시오.”
“그래. 그래. 미안하다. 미안해.”
이 순간만큼은 무진도 진심으로 고개를 숙인다.
“호호호! 재밌군요. 천하의 황룡이 동생에게 쩔쩔매는 모습이. 그래도 부러워요.”
“너도 이제 얘들이랑 같이 어울려서 행복하게 살게 될 거야.”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너라면 동생들이 다 좋아할 거야. 이 사람도.”
“말이라도 고마워요.”
“.....”
무진은 물론이고, 동생들도 월미공주의 말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뭐지? 이 기분은. 형님의 신분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공주의 표정과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이유가 뭘까?’
일초는 유심히 월미공주를 쳐다본다.
“모두 뒤로 물러나 주세요. 아니, 오라버니를 제외하곤 모두 나가시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제가 그러고 싶어요.”
“으음! 그래. 모두 물러가 있어라.”
“알겠습니다.”
일초를 선두로 모두 밖으로 나간다.
“오라버니가 도와주셔야겠어요.”
“내가?”
“예. 가만히 두면 두 개의 기운은 그다지 강하지 않아요. 하지만 합치려 하면 강하게 반발해요. 저로선 역부족이에요.”
“알았다. 바로 시작할 거니?”
“예. 먼저 두 개의 혼을 불러낼 겁니다. 혹시 그 과정에서 오라버니를 원망하는 내용이 나올지도 몰라요. 이해하세요.”
“걱정 마라. 이미 각오하고 있으니까.”
“눈을 감으세요. 제가 말 할 때까지 그대로 계세요.”
“응!”
무진이 대답하기 무섭게 월미공주는 내력을 끌어올려 양 손을 호란의 머리 위에 올린다.
우우우우웅....!
월미공주의 손에서 뻗어 나온 기운이 방안을 가득 메운다. 그 기운이 방안을 한 바퀴 돌더니 호란의 몸속으로 들어간다.
“가려야! 가려야! 오랜만이구나. 이백 년이 지났다고 설마 날 모른다곤 하지 않겠지? 가려야!”
월미가 같은 말을 다섯 번 정도 하자 몸속으로 들어갔던 기운이 다시 밖으로 나온다. 헌데 들어갈 땐 하나였는데 나올 때는 두 개의 기운이다.
“호호호! 누가 날 부르나 했더니 우리 월미공주님이시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그래. 너도 잘 지내는 것 같아서 좋구나.”
“근데 이 아이는 누구죠? 자꾸 절 따라다니네요.”
“예. 언니! 전 호란이라고 해요.”
“언니? 우리 예쁜 아가씨가 날 언제 봤다고 언니야?”
“가려야. 그 아이는 널 그렇게 불러야 한단다.”
“왜요? 전 여동생이 없는데.... 혹시...”
“가려! 나요.”
중간에 무진이 끼어든다. 원래는 심령술사 외에 인간은 영혼간의 대화에 끼어들 수가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끼어들고 싶어도 들 수가 없다. 영혼과 인간 사이엔 거대한 벽이 있어서 서로 소통을 할 수 없다. 근데 무진이 끼어든 것이다.
“누구시죠? 누군데 제 이름을 부르죠?”
“외모는 많이 바꿨지만 네가 가장 잘 아는 분이시다.”
“제가 잘 아는 분이라면 정이 아버지인데...”
“그렇소. 나요. 오랜만이요. 잘 지냈소?”
무진의 두 눈엔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슬이 맺히더니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저..정랑! 정말 당신이에요? 저..정랑!”
가려는 그대로 무진을 향해 달려가 안긴다.
“허억! 다..당신은 죽지 않았군요.”
가려의 영혼과 무진의 몸은 같이 어울리지 못하고 따로 논다.
“그렇소. 당신과 정이만 먼저 보내고 죄 많은 난 이렇게 살아남았다오.”
“아..아니에요. 사실 난 당신이 살아남아서 우리 정이, 흐흐흐흑! 우리의 꿈이자 사랑이었던 그 아이의 복수를 해주기를 빌고, 또 빌었어요.”
가려의 눈에서도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린다.
“미안하오. 내가 무능해서 아직 복수를 하지 못했다오. 미안하오.”
“복수를 언니도 같이 하면 어떨까요?”
호란이다. 그녀는 적절한 순간에 개입한다.
“어떻게요? 그게 가능해요?”
가려는 상당히 놀란 눈치다.
“물론이에요. 언니가 저랑 함께 한다면 가능해요.
“정랑, 이 아가씨는 누구예요? 아까부터 절 언니라고 부르는데.”
“자세히 보시오.”
“자세히 보면.... 이쁘긴 한데... 익숙한 얼굴이기도 하고... 어머!“
가려는 호란을 자세히 보다가 화들짝 놀란다.
Comment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