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5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5
“련아! 빨리 들어가자. 명이 형님의 상태가 심상찮다. 그리고 운고야, 지금부터 왕부엔 개미새끼 한 마리도 못 들어오게 해야 한다. 부탁한다.”
위기 상황이 오자 조충의 지도력이 드러난다. 그는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결정을 신속하게 내린다.
“알았소. 여긴 발이와 제가 맡을 테니 명이 형님은 형이 책임지시오.”
“알았다. 왕야께서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내가?”
“예, 자세한 건 들어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 어서 들어가세.”
진천왕은 자신의 역할이 있단 말에 마음이 급해진다.
잠시 후, 일행은 모두 접객실로 이동한다. 왕명은 커다란 침대에 누워 있고, 그 앞에 진천왕과 조충 등이 서 있다.
“청운장주의 정신을 제압하라고?”
“예. 지금 형님은 문이 형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 절망하고 있습니다. 죽음까지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으음! 그렇겠지. 나라도 그럴 테니까.”
“그런 다음에는 어떻게 해요?”
수련이 나선다.
“그래. 니가 도와줘야겠다.”
“제가요?”
“그래. 형님에겐 지금 대화 상대가 필요하다.”
“그런 거라면 당연히 제가 해야죠. 근데 한 사람의 도움이 필요해요.”
“누구?”
“그거야 뻔하지.”
진천왕이 비꼬듯이 말한다. 그 사이 소개가 개방의 업무를 처리한 다음 다시 돌아왔다.
“아버지. 지금 장난칠 때예요?”
“난 장난이 아닌데?”
찌리리릿!
수련이 정색을 하고 부친을 노려본다.
“정말 이러실 거예요? 아버지가 약속을 안 지키면 저도 안 지킬 거예요.”
“아..알았다. 알았어. 입 다물고 있을 게.”
“정랑 이리 오세요. 정랑이 도와주셔야겠어요.”
“제가 말입니까?”
예상대로 소개가 나선다.
“예. 약간의 연극을 하려 해요. 현재로선 명이 오라버니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서희 언니예요. 제가 언니 역할을 할 테니까 정랑이 명이 오라버니 역할을 해주세요.”
“알았소. 공주와 같이 하는 거라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소.”
“잘들 논다. 흥이다. 흥!”
진천왕은 치고 빠지는 식으로 끼어들었다가 수련이 노려보면 곧바로 뒤로 물러난다.
“괜히 시비 걸지 말고 맡은 일이나 준비하세요.”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왕야!”
조충의 신호에 따라 진천왕은 한 손을 왕명의 머리 위에 올리며 천천히 기운을 불어넣는다.
“모두 기운을 최대한 올려서 몸을 보호해라. 두 사람의 내력이 충돌하면 건물 전체가 날아갈 수도 있다.”
조충이 경고하자 모두 내력을 끌어올려 몸을 보호한다.
“이얍!”
진천왕이 왕명의 머리에 기운을 넣은 다음 뒤로 물러나더니 두 손을 들어 올린다. 그러자 왕명의 몸이 누운 자세 그대로 천천히 위로 올라간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두 사람의 기세 싸움이 시작된다.
“크으으으윽!”
진천왕의 기운이 왕명의 머리를 감싸고 계속 회전하자 왕명이 강력하게 반발한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왕명은 공중에서 몸부림치며 극렬하게 저항한다. 본능적인 행동이다. 그 여파로 건물 전체가 흔들리고, 지붕이 날아가 버린다.
콰콰콰쾅쾅!
“우욱!”
미리 준비했는데도 주위를 지키고 있는 진천왕부의 무사들이 내상을 입는다.
“아버지! 아버지! 저 서희예요. 아버지. 이제 그만 일어나세요.”
“서..서희야!”
수련이 서희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부르자 왕명의 태도가 달라진다. 우선 강하게 거부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스스로 자제하려고 애쓴다. 그게 자식을 대하는 부모의 마음인 것이다.
“아버지, 왜 누워 계세요? 어디 편찮으세요?”
“아..아니다! 그냥....”
이때부터 왕명의 역할은 소개가 한다.
“아니, 문이 숙부는 왜 저기에 계세요? 오라버니!”
“서..서희야!”
“예, 아버지.”
“숙부는 세상을 떠났단다.”
“예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왜요?”
“그게 말이다..... 날 살리려다 그만.... 크흐흐흑!”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있는 왕명의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린다.
“아버지,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숙부가 아버지를 살렸으니 숙부 몫까지 좋은 일을 많이 하시면 돼요.”
“련아, 너도 문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지?”
“물론이죠. 어린 시절 부모님은 홍수로 모두 잃고, 홀로 수련해서 무림십대고수의 반열에 오른 분이죠. 하지만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려다 아버지를 만나 새로운 삶을 사셨죠. 그래서 아버지를 항상 친 형처럼 생각했어요.”
“결국 내 손으로 친동생을 죽인 셈이 됐구나. 크흐흐흑!”
“아버지! 설마 이상한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니죠?”
“서희야! 미안하구나. 아버진 동생을 혼자 보낼 수가 없단다.”
“그러니까 절 혼자 두고 숙부를 따라가신다고요?”
“.....”
“좋아요. 그렇게 하세요. 대신 저도 아버지를 따라 갈 테니 그렇게 아세요.”
“뭐..뭐라고?”
“그렇잖아요? 아버지는 숙부가 없인 살 수 없고, 전 아버지 없이 혼자 살아갈 자신이 없으니까 다 같이 가는 거죠 뭐. 깔끔하고 좋잖아요? 그럼 제가 먼저 가서 기다릴 게요. 숙부랑 천천히 오세요.”
수련은 자신의 목에 칼을 대고 찌르는 시늉을 한다.
“안..돼...!”
콰콰콰콰쾅!
순간 가슴이 터질 듯한 큰 소리와 함께 왕명이 눈을 뜬다.
“형님!”
“명이 형!”
형제들이 달려와 그의 손을 잡는다.
“련아, 어찌된 일이냐? 서희는?”
“호호호! 죄송해요. 저랑 정랑이 오라버니를 속였어요.”
“속여?”
“예. 죄송합니다. 죄는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저희로선 형님마저 잃을 순 없었습니다.”
소개가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구한다.
“으음! 그렇게 된 일이구나. 니들에게 부담을 줘서 미안하다. 왕야께도 신세를 졌습니다.”
“무슨 말씀이오? 나야 말로 여러분에게 크나큰 은혜를 입었소이다. 아무튼 건강을 되찾았으니 다행이오.”
“감사합니다.”
“형님, 문이 형님은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흠! 일단 형님과 의논을 해봐야 하니까 당분간 우리가 잘 지키도록 하자.”
“걱정 마시오. 진천왕부가 책임지고 잘 모시겠소이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왕명은 진천왕에게 다시 인사를 한 다음 형제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모두 수고했다. 오늘은 여기서 끝내고 내일 아침 련이의 숙소에서 모인다.”
“회의입니까?”
“그래. 너희들과 의논할 게 있다.”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왕명에게서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라 동생들을 모두 긴장하는 눈치다. 원래 왕명은 먼저 나서거나 자신의 의견을 잘 내는 사람이 아니다.
“복수를 할 생각이다.”
그 말을 남기고 왕명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
그가 방을 나서고도 동생들은 한 동안 자리를 지킨다. 각자 생각에 빠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형제들이 모두 한 방에 모여 있다. 향후 방향을 어떻게 해야 할지 논의 중이다. 왕명은 멀쩡하고, 조충은 여전히 전신에 붕대를 감고 있다.
“전 명이 형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개방은 세심각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할 것입니다. 이건 추개 형님도 동의하셨습니다.”
소개가 처음부터 강하게 나온다.
“놈들을 치잔 말이지?”
“예.”
“조심하는 것도 좋지만 잘못하면 기회를 놓칠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는 추개가 거들고 나선다.
“충이 생각은 어떠냐?”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아니, 당장 혼자서라도 달려가서 요절을 내고 싶습니다.”
“우리도 형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정발과 운고도 동의한다. 이제 남은 건 수련이다.
“저도 동의해요. 하지만 큰 오라버니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나도 고민이다. 그 동안 놈들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노심초사하셨는데 잘못하면 우리 조직만 노출될 수 있으니까.”
왕명은 복수를 결심하면서도 이점을 걱정하고 있다. 자신의 결심이 자칫 대사를 그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니들 생각에 동의한다.”
갑자기 무진이 끼어든다.
“형님이십니까?”
“그래. 늦어서 미안하다.”
“전음은 아닌 것 같고, 유체이탈법인가요?”
“요즘 연습 중이다. 아직 완성하진 못했다.”
잠시 후, 희미하게나마 무진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전보단 한 단계 더 발전된 모습이다.
“대형을 뵙습니다.”
“큰 오라버니를 뵈어요.”
동생들이 모두 일어나 인사를 한다.
“고생들이 많다. 양문의 죽음에 마음이 무겁구나. 내가 같이 움직였다면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아닙니다. 우리의 실전 경험을 쌓게 하려고 배려하신 건데....”
아마 무진이 동생들의 실력 향상을 위해 독자적인 활동을 시킨 모양이다.
“됐다. 그 얘긴 그만하자. 명아!”
“예. 형님!”
“역습을 하더라도 이번처럼 조절하면서 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태양장과 세심각의 제자들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었지만, 수련의 판단에 따라 실력을 숨기고 일부는 살려 보낸 걸 말한다.
“알겠습니다. 근데 오늘 새로운 세력이 등장했습니다.”
“여인부대를 말하는 것이냐?”
무진도 알고 있는 눈치다.
“예. 성급하게 공격하다간 역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건 조심해야지. 그리고 앞으론 그런 세력이 더 많이 등장할 거다. 실력도 상당할 테고.”
“혹시 형님께서 파악한 게 있습니까?”
“지금까지 정보를 종합하면 이렇게 판단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태양장이 공개된 세력이라면 세심각을 비롯한 그 외의 세력은 모두 비밀세력이다. 그리고 비밀세력엔 적어도 다섯 개 이상의 조직이 있다. 이건 20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결론적으로 놈들의 조직이 크게 변한 게 없다.”
“너무 과거에 연연해하지 말자는 말씀인가요?”
“그래. 나도 처음엔 놈들의 실체를 잘 몰라 소극적이었는데. 이젠 꼭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물론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 실력을 어느 정도 드러낼 것인가 하는 건 중요하다. 마지막에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세심각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너희들끼리 해도 되겠느냐?”
“문이의 복수는 꼭 우리 손으로 하고 싶습니다.”
“좋다. 대신 조심해야 한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못 다한 얘기는 다음에 하자.”
이 말을 끝으로 무진의 영혼은 방안에서 사라진다.
“다들 들었겠지만, 지금부턴 우리가 주도권을 쥔다. 먼저 개방과 묵사회가 목표물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공격은 청운장이 책임진다. 진천왕부는 당분간 왕부를 지키는데 전력을 다한다. 이상이다. 질문은?”
왕명은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한다.
“우리 힘으로 전면전은 무리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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