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나도 허락하도록 하지.
잠시 휴식을 취한 우리는 일단 공동으로 나왔다.
거대한 시체를 해체하려면 넓은 공간이 필요했으니까.
중앙에 평평한 황금 바닥으로 올라온 나는 우선 카미로프의 시체를 꺼냈다.
여전히 처참한 몰골의 카미로프가 바닥에 닿으며 조용히 거대한 울림을 자아냈다.
어제만 해도 불쌍해 보였는데···
지금은 꼴 좋다는 생각 밖에 안 드네.
“어제도 느꼈지만 정말 처참한 모습이네요.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는지 보여주는 것 같아요.”
“아··· 네, 그렇죠··· 격렬했죠···”
스트레스가 폭발해서 죽은 줄도 모르고 때려 잡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이런 꼴을 보니 기분은 좋지만 이래서는 대부분 버려지겠는걸요?”
“그거라면 제가 치유 할 수 있어요.”
“네? 하지만 죽은 몸을 치유하는 방법은···”
“<클래스 체인지-진리의 현자>”
빛에 휩싸이며 흑발의 하얀 가운을 입은 연금술사로 변한 나.
이미 들켜버린 이상 스킬 사용에 거침이 없었다.
난 그 상태로 카미로프의 시체에 손을 댔다.
“<시체 복구>”
내 손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거대한 마법진.
그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의 입자가 카미로프의 시체에 스며들었다.
“상처가 낫고 있어요···!”
또 새로운 모습으로 변한 나를 보며 놀라고 있던 레이리엘은 치유되는 카미로프의 몸을 보며 한번 더 놀랐다.
이 세상에서 시체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으니까.
애초에 수요도 거의 없고.
네크로맨서라면 필요 하려나?
상처는 아물었고 부풀었던 피부는 가라앉았다.
처참히 깨졌던 비늘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한 시체에 딱 한번씩만 쓸 수 있는 이 스킬은 원래 또 다른 스킬과 연계해서 사용하는 스킬이었다.
모처럼 고 레벨의 시체니까 써먹어볼까도 생각했지만···
그 스킬이 여기서 어떻게 적용될지도 모르겠고.
게다가 저 녀석이 다시 움직이는 모습 따위 전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냥 해체하기로 하자.
어느새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처럼 말끔해진 카미로프.
그리고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대로는 제대로 해체하기 힘들었기에 조금 해체장의 구조를 바꿀 필요가 있었다.
“<연성-변형, 변경>”
아예 튼튼한 재질로 바꾸면 더 좋겠지만 크기도 크기인 만큼 오래 걸릴 테니까.
강도만 조금 높여놔야겠네.
쓰러져있는 카미로프의 몸을 고정하며 꼬리 쪽을 살짝 높이 들어올려 경사를 지게 만든 나.
해체를 위해 피를 먼저 뽑아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피도 그냥 버릴 수 없다.
소중한 연금술 재료 아닌가!
머리 쪽에는 피를 받을 수 있는 커다란 유리병도 만들었다.
다만 이대로면 피가 굳기 전에 계속해서 회수할 필요가 있겠네.
적어도 아이템창에서는 굳을 리 없으니까.
혈액 항응고제 같은 게 나한테 있을 리도 없고.
아이템으로 나오는 피는 이런 걱정 할 필요 없었는데.
“와아··· 굉장해요, 천사님···”
천사는 뭡니까···
평소에는 굉장히 멋진 엘프였지만 가끔 나사가 빠져 보이는 행동을 할 때가 있었다.
나는 피를 받기 위한 거대한 유리병을 몇 개 더 만들어 놓고는 다시 기사 캐릭터로 모습을 바꿨다.
“···리즈님은 정말 알면 알수록 놀라움만 더해가는 것 같네요.”
“하하하···”
반짝이는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며 말하는 레이리엘에게 나는 그저 웃어줄 수 밖에 없었다.
웃음으로 적당히 얼버무린 나는 검을 꺼내 들고 목을 베기 위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가죽에 칼을 들이대고 스킬을 사용했다.
스킬 없이 칼만으로는 카미로프의 피부를 벨 수가 없으니까.
“<이레이저 블레이드>”
“아, 리즈님! 거기보다 살짝 위쪽 부근이 마석을 꺼내기 좋을 것 같아요!”
“응? 이쪽인가요?”
“네, 거기요! 거기서 강한 마력이 느껴져요!”
스킬을 사용해 베기 직전, 옆에서 서포트 해주는 레이리엘의 목소리에 따라 위치를 조정했다.
나는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역시 마력 감지에는 둔하네.
나는 그대로 칼을 꽂아 넣어 상처를 벌렸다.
방혈을 쉽게 하기 위해서.
오, 이러니까 뭔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바로 앞에 있어야 느낄 수 있다니.
아예 못 느낄 때는 몰랐지만 막상 기척과 마력 감지에 익숙해지고 나자 이제 없이는 못살 것 같아.
기사 캐릭터가 튼튼해서 좋기는 하지만 감각이 차단된 느낌이라 답답함도 있었다.
나는 미미하게 느껴지는 마력을 감지해가며 드래곤 하트를 꺼내기 쉽도록 길을 만들었다.
“이 정도면 되겠죠?”
“네, 충분해요. 이제 저 안에서 하트를 꺼내기만 하면 됩니다. 시체 속에 오래 놔두면 마력이 자연으로 흩어져 버리니까 빨리 꺼낼수록 좋아요.”
“···하지만 이래서는 꺼내기 힘들 것 같은데.”
상처에서는 죽은 게 맞을까 싶을 정도로 쉴새 없이 피가 흘러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안쪽에 있는 드래곤 하트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 쓰게 될 테니까.
“이번엔 제게 맡겨주세요. <라이랍스>!”
레이리엘의 외침과 동시에 그녀 주위로 강한 돌풍이 불었다.
돌풍은 곧 소용돌이가 되어 인간의 크기로 변하더니 이내 사라졌다.
소용돌이가 있던 자리에는 훌륭한 갑옷을 입은 반투명한 여인이 서있었다.
라이랍스, 바람의 최상급 정령이었지?
역시 게임과 같은 정령이네.
“다시 만나서 기뻐요 라이랍스.”
“[레이리엘! 그대, 괜찮은 건가?!]”
오, 말도 하잖아?
그러고 보니 상급 정령부터는 게임에서도 말하고 있었지.
퀘스트도 주고는 했으니까.
우리 애들도 말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으려나?
“전 보다시피 무사해요.”
“[그 드래곤은···]”
“여기, 눈 앞에 있잖아요.”
라이랍스도 레이리엘이 처해있던 상황을 알고 있는 듯 카미로프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다 웃으며 레이리엘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본 라이랍스는 경악하며 눈을 부릅떴다.
“여기 이분이 구해주셨어요. 그러니까 이젠 전부 괜찮아요.”
라이랍스는 나를 바라보고는 한번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인간이···]”
“그 동안 저 때문에 걱정이 많았죠? 이제는 다 해결 됐으니까 마음 푹 놓아도 되요. 고생 많았어요. 정말 감사해요.”
레이리엘은 그렇게 말하며 라이랍스에게 다가가 포옹했고 라이랍스도 그런 레이리엘을 안아주었다.
“[고생은 그대가 했지. 정말 다행이다.]”
둘은 잠시 그렇게 서로를 안으며 마음을 위로하는 시간을 가지고 난 후에야 포옹을 풀었다.
그리고 라이랍스는 날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인간, 그대에게 감사를 표한다. 레이리엘은 수년간 이 괴물에게 고통 받았어. 구해주고 싶었지만 내게는 그럴 힘이 없었지. 그런 그녀를 구해줘서··· 정말 고맙다.]”
라이랍스는 진심을 담아 내게 감사를 표했다.
라이랍스가 레이리엘을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 느낄 수 있었기에 보고 있는 나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저도 레이리엘을 도울 수 있어서 기뻤어요.”
“[···고맙다, 그대에게 정령의 가호가 함께하길 바라지.]”
라이랍스는 다시 한번 깊이 고개를 숙이고는 레이리엘에게 돌아갔다.
“[저 인간이라면 나도 허락하도록 하지.]”
“네? 무슨 소리에요?”
“[뭐냐니, 그대의 눈빛을 보아하니 딱 봐도 저 인간을 노리고···]”
“꺄악! 꺄악! 라이랍스! 이제 됐으니까 여기 좀 도와줘요!”
라이랍스의 손을 잡아 끌며 시체로 다가가는 둘을 보며 꼭 사이 좋은 자매 같다는 생각을 했다.
라이랍스는 레이리엘의 지시에 따라 어디선가 긴 창을 꺼내 드래곤 하트가 있는 부위로 천천히 찔러 넣었다.
창과 몸 주위에는 바람을 두르며 틈을 벌려 3,4미터는 파고 들어가 나서야 드래곤 하트가 눈에 들어왔다.
저걸 맨몸으로 파고들었다가는 눈뜨고 못 볼 꼴이 될뻔했네.
그나저나 정령을 저런 식으로도 쓰는구나.
자아를 가지고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면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럼 우리 애들도 스킬이나 일반 공격 외에도 다양이 활용할 수 있을지도.
나중에 시험해 봐야겠다.
왠지 시간이 갈수록 해야 할 일이 늘고만 있는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무사히 카미로프에게서 드래곤 하트를 꺼내 온 레이리엘이 다가왔다.
“리즈님! 여기 있습니다.”
“아,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레이리엘. 라이랍스도.”
레이리엘은 부끄러운 듯 미소 지었고 라이랍스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라이랍스, 고마웠어요. 그럼 다음에 또 봐요.”
“[언제든지, 친구여.]”
라이랍스는 그렇게 말하며 말 그대로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나는 레이리엘로부터 넘겨받은 드래곤 하트를 살폈다.
노란 빛을 띄고 있는 반투명하고 거대한 보석이었는데 지름만 30센티 정도였다.
엄청 크구나···
게다가 모양도 불규칙적이고.
게임 시절의 구했던 드래곤 하트들은 다 주먹만한 크기에 정말 하트모양으로 된 보석이었는데.
이건 뭐, 어떤 건 게임이랑 같고 어떤 건 다르고.
종잡을 수가 있어야지.
<드래곤 하트:영약>
등급 레전드
에이션트 드래곤의 마력이 담긴 마석.
응? 영약이라고?
와, 처음 봤어.
나는 아이템 정보를 살피다가 영약으로 분류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영약 흡수 스킬을 습득 한 뒤부터 각종 아이템을 살펴보면서 시험해봤지만 효과가 있었던 아이템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정말 산에 들어가서 산삼이라도 찾아봐야 하는 건가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설마 여기서 갑자기 영약이 튀어나오게 될 줄이야.
이거 쓸만하겠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게임에서 드래곤 하트 좀 많이 구해 놓을 걸.
드랍률이 너무 낮았으니까···
일단 지금 당장은 좀 그러니까 나중에 써보기로 하고.
해체 작업부터 마저 해야지.
드래곤 하트를 아이템창에 보관한 나는 어느새 유리병에 가득 찬 드래곤 피를 확인하고 새로운 병으로 갈아 끼웠다.
그리고 회수한 피는 굳어버리기 전에 재빨리 아이템창에 보관.
커다란 욕조만한 유리병을 다 채우고도 병이 차오르는 속도는 줄어들 줄 몰랐다.
“피를 다 뽑으려면 한참은 걸리겠죠?”
“아마 하루 종일은 걸리지 않을까요.”
다시 피가 차오르길 기다리면서 시간 낭비를 하지 않기 위해 해체도 조금씩 진행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드래곤은 어떤 부위를 모아야 할까요?”
“글쎄요··· 저도 드래곤을 해체해보는 건 처음이라서...”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드롭 되는 아이템만 봐온 나에게 몸뚱어리 전체를 던져줘도 어디서부터 활용할 수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으니 막막하기만 했다.
보통 몬스터 별로 쓸 수 있는 부위와 필요 없는 부위가 있었으니까.
“떠오르는 건 비늘과, 발톱, 이빨, 힘줄, 피와 뼈··· 정도일까요?”
“고기도 먹을 수 있다고 들었어요! ”
오, 그건 먹어보고 싶네.
딱히 공간을 차지하는 것도 아니고.
괜히 버렸다가 나중에 필요하게 되면 억울하니까 일단 다 모아두자.
또 다시 나의 소시민적 마인드, 버리지 못하는 병이 발병했다.
결국 놔두면 다 쓸 일이 있다는 나의 신조대로 하나도 버리지 않고 회수해두기로 했다.
“우선은 제가 달라붙어서 비늘을 떼어내 볼게요. 레이리엘에게는 떼어낸 비늘의 정리를 부탁해도 될까요?”
“네, 맡겨주세요.”
그때부터 나는 카미로프의 몸에 올라타 몸에 붙어있는 비늘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비늘이 붙어있는 곳은 등쪽을 비롯한 몸의 바깥 쪽 부근으로 안쪽에는 가죽뿐이었다.
내 몸 만한 크기의 비늘을 떼어내는 일은 꽤나 중노동이었다.
내가 떼어내 바닥에 떨어트린 비늘은 레이리엘이 정령을 동원해서 한쪽에 차곡차곡 모아두기 시작했다.
이번엔 표범과 악어의 모습을 한 정령이네.
표범이 바람, 악어가 땅의 중급 정령들이지?
역시 중급 정령은 말하지 못하는 것 같네.
말은 못하지만 말은 다 알아듣는 것 같았다.
나는 스킬이 아닌 행동도 착실히 행동하고 있는 정령들의 모습을 신선한 기분으로 구경했다.
물론 손도 멈추지 않았고.
중간중간에 유리병을 확인하며 가득 찰 때마다 바꿔주는 작업도 잊지 않았다.
결국 그 작업은 저녁 늦게나 되어서야 끝낼 수 있었다.
- 작가의말
후후후, 여러분 각이 보이죠?
약점은 빨리빨리 보완해야 하는 겁니다.
기껏 ts를 했는데 언제까지 남캐로만 있을 수는 없져
Commen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