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하지.
‘으음··· 아침인가···’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에 눈을 뜬 리즈는 오랜만에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레이리엘의 모습에 잠시 시선을 멈췄다.
나신으로 자신의 품 안에 안겨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고르게 숨을 내쉬고 있는 레이리엘.
예전에는 리즈가 안겨있는 일이 많았지만 신장이 비슷해지고 난 후에는 레이리엘이 안기는 일이 많아졌다.
‘아침 산책은··· 오늘은 포기할까. 레이리엘을 깨우기에는 미안하고, 그렇다고 이대로 두고 갈 수도 없고.’
결국 리즈는 그대로 다시 잠들기로 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고 얼마나 지났을까.
뭔가가 몸을 더듬는 느낌에 잠에서 깬 리즈.
눈꺼풀을 열자 품 안에서 꼼지락 거리며 움직이는 레이리엘이 보였다.
“···레이리엘?”
“아, 리즈님! 깨셨나요?”
“그러고 있으면 깰 수밖에 없잖아요?”
“후후, 눈앞에 너무 먹음직스러운 과일이 보여서 그만···”
‘아니, 본인도 있으시잖아요?’
태연히 대답하는 레이리엘에게 리즈는 할 말을 잃었다.
“정말이지··· 그럼 이만 일어날까요?”
“괜찮다면 조금만 더···”
“앗, 잠··· 거긴···!”
레이리엘은 대답도 듣지 않고 리즈의 몸에 입술을 맞췄다.
결국 두 사람이 침대에서 나온 건 아침 시간이 한참 지나서였다.
“으음··· 결국 아침 운동 해버렸네요.”
“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레이리엘은 이후에 일정이 있나요?”
검술 대신 다른 운동으로 몸을 푼 리즈는 샤워까지 마치고 옷을 갈아입으며 레이리엘에게 물었다.
레이리엘은 어느새 단정히 차려 입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물론 옷을 갈아입는 리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빤히 바라보면서.
“아뇨, 딱히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럼 같이 바깥 도시로 나갔다 올래요? 쇼핑을 좀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물론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마침 저도 도시 쪽에 볼일이 있었거든요.”
“아, 잘됐네요!”
그렇게 결정한 리즈는 옷을 모두 갈아입고 난 뒤 밖으로 나갈 준비를 마쳤다.
주말인 만큼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은 리즈는 레이리엘과 함께 문을 열었다.
“우앗!”
“응?”
그리고 마침 열린 문에 앞에 서있던 누군가가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리즈도 설마 문 앞에 누군가 있을지는 예상 못했기에 놀라며 상대를 바라봤다.
“어라? 라피스?”
“아, 안녕하세요. 엇? 레이리엘님? 레이리엘님이 왜 리즈의 방에서···”
“네? 아··· 레이리엘이 잠시 볼일이 있다고 찾아왔었거든요. 그래서요, 호호호···”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날 뻔 했네.’
“리즈님에게 조금 상담드릴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리즈는 살짝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고 레이리엘도 담담하게 말을 맞추었다.
덕분에 라피스는 별다른 의심 없이 넘어가 주었다.
“아, 그랬군요.”
“라피스는 어쩐 일로 제 방에?”
“네? 아, 아뇨, 특별한 일이 있는 건 아니에요. 그냥 리즈는 뭘 하고 있을까 하고···”
‘음? 심심했다는 말인가? 그럼···’
“저는 이제부터 도시로 나가보려고 하는데, 바쁘지 않다면 함께 가시겠어요?”
“네! 무척 한가합니다!”
기운차게 대답하는 라피스.
갑작스레 일행이 한 명이 늘어났지만 딱히 문제는 없었다.
그대로 방을 나선 리즈는 두 사람과 함께 건물을 나섰다.
“그런데 무슨 일로 도시까지 가는 건가요?”
“방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둘까 해서요. 지금은 너무 텅 비어 있어서.”
“아, 그러고 보니 제 방도 아무것도 없었네요.”
“그럼 함께 쇼핑하면 좋겠네요!”
“그러게요. 저도 뭔가 필요한 게 있나 생각해봐야겠어요!”
“그러고 보니 레이리엘의 볼일은 뭔가요? 레이리엘도 뭔가 필요한 물건이 있는 건가요?”
“그것도 있지만, 먼저 고향에서 가져온 약초를 팔까 해서요.”
레이리엘이 말하기를 교사의 급여는 한달 뒤에나 나온다고 한다.
그때까지는 가지고 있는 돈으로 버텨야 하지만 리즈와 마찬가지로 현금이 없던 레이리엘도 현금 마련을 위해 가져온 약초를 팔러 나가려던 것이다.
“그런 거라면 제가 드릴 수도 있는데···”
“괜찮아요. 애초에 돈을 마련하기 위해 가져온 약초니까요.”
레이리엘은 예전부터 리즈에게 물질적으로 도움 받는 일은 죄송하다는 입장을 고수해오고 있었다.
레어의 보물도 몇 개를 제외하고는 한사코 거절하고 있었고.
안 그래도 신세 진 일이 많은데 그런 사소한 일들까지 부탁하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리즈도 그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한번씩 이야기는 해도 강하게 권유하지는 않고 있었다.
“알겠어요. 그래도 필요한 일이 생기면 꼭 얘기해줘요?”
“네, 감사합니다.”
“···”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라피스는 가만히 지켜보면서 의문을 품었다.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인거지?’
옆에서 보고 있으면 꽤 신기한 관계였다.
한 명은 영웅급 엘프검사고 한 명은 천사 같은 외모의 인간인데 엘프는 인간에게 극존칭을 하고 있고 인간은 존칭을 하고는 있지만 편하게 이야기 하고 있으니까.
‘귀족 아가씨와 호위로 고용된 엘프일까?’
하지만 영웅급 엘프가 인간에게 고용 될 이유가 있을까 싶었기에 의문만 더해갔지만 그렇다고 직접 물어보는 건 실례가 아닐까 싶어서 궁금증을 참고만 있는 라피스였다.
그때, 리즈 일행의 앞에 또다시 예상 외의 인물이 나타났다.
“···리즈?”
“아, 리즈씨다!”
“소피? 메이?”
막 건물을 나선 세 사람의 앞에 소피아와 메이가 나타난 것이다.
잠시 서로 놀란 표정을 짓던 일행, 그 중 리즈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은 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리즈를 만나려고.”
“모처럼 휴일이니까 함께 놀아요!”
“그럼 혹시, 두 사람 다 오늘 한가해?”
“응?”
“네?”
소피아와 메이에게 상황을 설명한 리즈.
당연히 두 사람도 동행하는 일이 되었고 그렇게 일행은 결국 5명이 되었다.
서로서로 인사를 나눈 후 5명은 다시 도시로 향했다.
“레이리엘님도 함께 계셨군요?”
“네, 소피아님은 이번 학기에 제 수업에 참여하게 됐죠? 잘 부탁해요.”
“저야말로 잘 부탁 드립니다.”
소피아는 라피스 쪽을 살짝 흘겨보고는 레이리엘과 이야기를 나눴다.
레이리엘로서도 리즈의 동생인 소피아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반갑게 대답했다.
“레이리엘님과 라피스씨도 뭔가 사러 가는 건가요?”
“하하, 네. 방안에 필요한 물건이 있나 보려구요.”
“저는 약초를 조금 팔고 싶어서요.”
“도시에 가는 거죠? 그럼 제가 가봤던 맛있는 가게들도 알려줄게요! 세 분 다 분명 좋아하실 거에요!”
사람이 5명쯤 되자 과연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이쯤 되면 마차를 타고 나가는 게 빠르겠다 싶었기에 리즈는 마차를 한 대 잡아서 함께 이동했다.
캠퍼스 내부가 넓은 만큼 캠퍼스 내부에서만 운영하는 마차도 꽤 많았다.
특히나 휴일에는 리즈처럼 도시로 나가는 학생들도 많았고 그만큼 마차의 수도 많았기에 어렵지 않게 마차를 잡아 입구까지 이동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차에서 내려 길을 가려던 리즈 일행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우선은 환전소에 가고 싶은데, 혹시 어느 방향인지 아는 사람?”
““···””
처음 학원국에 온 리즈와 레이리엘, 라피스가 환전소의 위치를 알 리가 없었다.
대륙통화밖에 안 써본 소피아와 메이도 환전소를 이용할 일은 없었다.
“···그보다 환전소라는 게 있을까? 보통은 환전 할 일이 없을 것 같은데···”
“···아?!”
소피아의 말에 리즈는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오랜 세월 대륙 통화만 사용해온 이곳에서는 환전을 할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을.
게임에서야 엘프국과 드워프국의 화폐가 달랐기에 마을마다 환전소가 있었지만 이쪽은 다르다.
엘프들에게는 화폐가 사라진 지 오래였기에 다른 화폐를 사용하는 이는 드워프들 뿐인데 그 드워프들은 인간이나 엘프들과 교류가 매우 적다.
‘그러고 보니 이족 세계에 와서 환전에 대한 이야기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구나.’
“리즈··· 뭘 바꾸려는 거야?”
“아니, 드워프 금화를 몇 개···”
“리즈씨, 드워프 금화가 있는 거에요?!”
리즈의 말에 레이리엘을 제외한 세 사람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보통은 드워프 금화를 볼일도 없으니까.
“응, 아는 사람한테 받았거든.”
‘강제로 이것저것 받았지.’
“와아~ 보고 싶어요!!”
메이뿐만이 아니라 다른 두 사람도 보고 싶다는 표정이었기에 리즈는 금화 세 개를 꺼내서 하나씩 보여주었다.
“···굉장히 섬세해···”
“와아, 신기해요! 뭔가 더 무거운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게 드워프 금화구나. 예쁘게 생겼네요.”
세 사람은 한번씩 금화에 대한 감상을 내뱉으면서 살펴보고는 다시 리즈에게 돌려주었다.
아무튼 환전소의 존재가 없을 거라는 건 깨달았지만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그럼 드워프 금화를 바꾸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 거야?”
““···””
다시금 침묵하는 일행.
리즈는 고민에 빠졌다.
‘어쩌지··· 하다못해 이곳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도··· 아!’
“···안즈에게 가볼까?”
다른 사람들이 의문을 품고 있을 때 레이리엘은 리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확실히. 안즈라면 어려서부터 이곳에 살았다고 했으니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죠?”
“리즈···? 안즈라면···?”
“소피랑 메이도 한번 찾아왔었지? 예전에 머물던 숙소에서 일하던 아이야. 그 사람이라면 아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있을 거야. 일단 다들 이쪽으로!”
리즈는 소피아에게 그렇게 대답하며 길을 앞장 섰다.
그 뒤를 레이리엘과 라피스가 뒤따랐고 소피아와 메이도 서로를 한번 쳐다보고는 미묘한 표정으로 뒤따랐다.
“라피스도 한번 봤던 적 있었죠?”
“네, 잠시 인사만 한 것 뿐이지만.”
예전에 함께 식사하기 위해 방문했던 곳을 떠올린 라피스.
다만 그 당시 안즈는 홀에 손님이 많아 바빴기에 라피스는 인사 정도만 나눈 사이였다.
잠시 후 도착한 허브가든.
여전히 은은한 허브향을 뿌리는 아늑한 느낌의 건물이 눈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때마침 문이 열리면서 안에서 나온 빗자루를 든 엘프 소녀.
목표로 했던 안즈였다.
“아, 리즈! 어서 와! 레이리엘씨랑 라피스씨도··· 어라? 소피아랑 메이?”
“...안즈 오랜만...”
“헤헤, 오랜만이야 안즈~”
“어라? 아는 사이였어?”
‘하지만 지난번에 찾아왔을 때는... 아, 그때는 얼굴을 가리고 있었구나.’
놀랍게도 서로 아는 사이인 듯 했다.
의문을 담은 눈빛으로 묻는 리즈에게 소피아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학원장님의 손녀··· 안즈 크루다···”
“엑? 학원장님의?!”
상상도 못한 정체에 당황한 리즈와 레이리엘.
애초에 친분이 없었던 라피스는 덜했지만 그래도 꽤 신기해 하고 있었다.
“아, 으음... 들켜버렸네. 헤헤. 자자, 일단 안으로 들어와! 손님도 없으니까.”
살짝 카오스 상태인 리즈 일행은 일단 안즈의 안내대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에 있던 사루비나와도 인사를 나누고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게 안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학원장의 손녀라는 일은 가능하면 비밀로 하고 있었다고 한다.
“딱히 비밀까지는 아니지만 말이야. 역시 할머니의 이름이 따라붙으면 여러모로 부담스러우니까. 특별취급 받는 것도 별로 달갑지는 않고. 그래서 가능하면 말하지 않고 있어.”
이로서 학원장이 이 여관을 추천해준 이유도 납득할 수 있었다.
‘손녀가 일하는 여관을 추천해주다니··· 이것이 가족 사업? 뭐, 좋은 여관이었으니까 불만은 없지만.’
“뭐, 그렇게 된 거니까 리즈도 가능하면 할머니 일은 신경 써주지 않으면 고맙겠어.”
“물론, 안즈는 안즈니까.”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하지.’
이쪽은 아예 집을 뛰쳐나온 인간 아닌가.
리즈는 강한 동질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마침 점심시간이 가까워 왔기에 일행은 여러 가지 정보도 얻을 겸 식사도 하기로 했다.
식사를 하며 환전에 대해 물어보니 안즈는 드워프 금화에 대해 놀라워하면서도 착실히 대답해주었다.
“환전이라면 상인길드에 가면 할 수 있을 거야. 가끔이긴 하지만 드워프들이 방문하고는 하니까. 드워프 금화라면 일반 금화보다 좀 더 비싸니까 꽤 받을 수 있을 거야.”
좋은 정보를 얻은 리즈는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그 외에도 다른 상점의 추천과 함께 약도도 그려 받을 수 있었다.
여러모로 고마운 정보였다.
이후 사루비나와 안즈가 정성껏 준비해준 음식까지 먹은 리즈일행은 감사 인사와 함께 가게를 나왔다.
- 작가의말
알고 보니 안즈는 플래티넘 수저.
리즈의 인맥은 점점 넘사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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