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 : 지금 이 경계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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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쟁이(진)
작품등록일 :
2018.12.13 14:36
최근연재일 :
2019.01.30 19:40
연재수 :
2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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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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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21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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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5. 탈영(1)

DUMMY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몸이 덜덜 떨리며 오한이 일었다. 녀석만큼이나 내게서도 많은 혈액이 빠져나갔다. 나는 뺨에 묻은 피를 닦았다. 아직 따듯했다.


그 온기를 놓치기 싫어, 재차 녀석에게 붙었다.


“야 그래도 제법 운치 있지 않냐?”


펑펑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바깥은 여름인데 여기만 추운 겨울. 흩뿌려진 선혈에 눈은 고운 다홍빛으로 젖어가고 있었다. 포말처럼 말려 부서지는 입김마저 묘하게 현실감이 떨어졌다.


“술만 있으면 딱인데.”


나는 의미 없는 말들을 이어가며 애써 정신을 붙잡았다. 살겠다는 의지를 놓았음에도 악착같이 버텨는 자신이 그저 우스웠다.


“너는 어때?”

“캬아아아악!”

“물은 내가 바보지.”


칼날이 녀석의 살갗을 가르고, 녀석의 발톱은 내 가슴을 헤집었다. 더는 대수롭지도 않았다. 넘치도록 치명상을 입었으니, 여태 버티는 게 용할 따름이다.


“너는 죽기 전에 할 말 없어?”


마음처럼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한계에 달해 몸뚱이가 삐걱이며 조금씩 굼떠져 갔다. 죽음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무서우리만큼 실감하고 있었다.


“나는 엄청 많은데.”


겨우 20살, 삶에 대한 미련이 너무 많았다. 돌이켜봐도 너무도 짧았던 생. 원치 않은 삶을 강요받아 이렇게 저물어야 한다는 게 미치도록 억울했다.


넋두리라도 실컷 하고 싶지만


“들어줄 사람이 없어.”


문득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괜찮은 척, 아닌 척. 뒤집어썼던 가면이 벗겨지고 눈물만이 펑펑 흘러내렸다.


“남들 보란 듯이 잘 살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감아뒀던 실이 풀리며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남은 한 자루에 의지해 놈의 다리를 막아냈다.


“그냥 내 또래들처럼.”


힘을 쥐어짜 겨우 녀석을 밀쳐내고 숨을 골랐다.


“평범하게 살길 바랐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힘든 거였을까?”

“키갸갸갸갹!”


초점이 흐릿해지며 놈의 형체가 둘로 나뉘어 보였다. 평정이 끝난 건지, 마력이 다한 건지. 더는 녀석의 동선이 보이질 않았다. 어둠이 세상을 좀먹어가고 있었다. 머잖아 도래할 종극이 야속했다.


“4팀장이 했던 말, 이제야 이해가 가.”


흔히들 죽기 전에 주마등을 본다지만 나는 남겨둔 동생만이 눈에 밟혔다. 오빠! 이거 내 라면이야! 오빠 껀 오빠가 끓여먹어! 빼액 질러대던 소리가 그렇게 그립다.


“보고 싶은데, 볼 수가 없어. 그래도 잘 살겠지? 나는 엄마랑 잘 지내고 있을 테니까, 금방 오면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유언 삼아 내뱉어봤다. 레코더를 켜놨어도 전하지 못할 말이었다. 공간이 소멸하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간다. 허무에 삼켜져 시체마저 찾지 못하겠지.


“내가 죽으면···”


장례식 때 육개장 잔치한다던 요원들.


“상관 않을 테니까 칙칙한 까만 옷 좀 입고 오지 마라.”


가뜩이나 창창할 때 가서 짜증나는데 울적하게 만들지 말고. 적당히 울고, 그렇게 잊혀 졌으면 좋겠다.


“부조장님한테도 신세 많이 졌었는데. 이걸로 퉁치지 뭐.”


점멸하던 시야가 이윽고 완전한 어둠에 잠겼다. 아직 숨은 붙어있었다. 나는 한 걸음 내딛어 칼을 휘둘렀다. 지겹게 붙어댔기에 녀석의 패턴이 머릿속에 훤히 그려졌다.


“키이이이익!”


손끝에 감촉이 느껴졌다. 살짝, 스쳤나. 시력만 받쳐줬어도 잘라버릴 수 있었는데.


“키에에엑!”


카앙-! 다음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손에서 칼자루가 미끄러졌다. 칼날이 도로에 부딪혀 청명하게 울렸다.


“윽!”


나는 정통으로 얻어맞아 볼썽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조금만 더 버텨주길 바랐는데, 엎어진 내 위로 녀석에 발이 올려졌다.


“키이이이익!”


짓누르는 힘에 숨이 막혔다. 버둥대보지만 무력한 저항이었다. 결국 이렇게 끝이 나는 건가. 더는 무리였다. 의식이 아득히 멀어지려는 그 때···


숨통이 트였다.


“야, 임마. 죽었냐?”

“커헉, 헉.”


나는 핏물과 숨을 같이 토해냈다. 헛웃음이 나왔다. 전에 들어봤던 목소리다.


“빡빡이 아저씨, 타이밍 죽이네요.”

“아가리 터는 거 보면 멀쩡하네.”


목에 따끔한 주사바늘이 꽂히고 천천히 시야가 회복되었다. 진마는 머리과 몸통이 분리되어 있었다. 남자가 나를 부축했다.


“가속제 주입했으니까 정신 붙들고 있어. 괴수로 변하면 너도 모가지 잘라 버린다.”

“스팀팩이 아니라 가속제요? 아주 죽으라고 제사를 지내시죠.”

“니 꼬라지를 봐라. 스팀팩갖곤 택도 없어.”


가속제는 괴수의 피를 희석시킨 약물. 한순간 침식률을 끌어올려 신체를 강화시키는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자충수와 같은 양날의 검이라지만 덕분에 상태가 한결 나아졌다.


그제야 빡빡이를 온전히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혈전을 치룬 듯 나 못지않게 아저씨도 만신창이었다. 그래서 물어봤다.


“아저씨는 뭐하다 왔어요?”

“애들은 알 거 없다.”

“탈영하면 그걸로 끝이잖아요. 본부는 뭐하고 왜 아저씨만 바쁜 거예요?”


짐작이 아닌 확신이었다. 완전무장한 영관급 요원을 저렇게 만들 수 있는 건 오로지 진마뿐. 대놓고 찌르니 빡빡이가 어물쩍 둘러댔다.


“걔들도 걔들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


그렇게 아리송한 말만 남기고 가버렸다. 아직 고맙단 말도 못했는데. 잡으려니까 되려 내가 잡혀 구급차에 태워졌다. 뭔가가 주렁주렁 몸에 꼽히던 거까지만 기억이 났다. 시끄럽던 경보음이 차츰 멀어지며 잠이 몰려왔다.






“유상아 대위님!”


누군가 황급히 뛰쳐나가고 의무 서포터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야 서 중위! 정신이 들어?”


멀쩡히 눈 뜨고 있는데 뺨이 톡톡 쳐졌다. 뭐하시는 겁니까. 쳐내려는데 손들이 너무 많았다. 한참을 이곳저곳이 만져지고 나서야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동물원 구경 왔어요?”

“그럼. 송장이 일어났는데 신기하기도 하지.”


유상아 대위가 차트를 끄적이며 한 소리 더했다.


“네 몸에 니 DNA로 된 피가 하나도 없는 거 알아?”


자그마치 60팩이나 수혈했다고. 피 구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냐는 불평이 쏟아졌지만 내 알바냐. 대충 한 귀로 흘려듣고 물로 목을 축였다.


“조장님은요?”

“얼씨구. 3주 만에 깨어나서 하는 소리가 겨우 그거야? 오태식 대위랑 브로맨스 찍어?”


반응을 보니 멀쩡한 모양이다. 하긴 이런 나도 살았는데 쉽게 죽었을 리 없지. 그나저나 3주나 이러고 있었다고? 어쩐지 꿀잠 잔 것 같다 했어.


개운하게 기지개를 펴려는데 알싸한 통증이 일었다.


“배때기에 빵구 난 거 잊었어?”

“와, 씨. 이거 나으려면 얼마나 걸려요?”

“아무리 빨라도 8주는 걸릴걸. 레드캠프로 보내려다 말았다고.”

“그럼 임무는요?”

“차트에 직업병 추가한다.”


잠자코 있으랬지만 지난 전투를 생각하면 그러지도 못했다. 108지부 전투조는 전멸하고, 동원된 각 지부 요원마저 죄다 갈려버렸는데.


자꾸 캐물으니 마지못해 그녀가 알려줬다.


“파견 받아서 틀어막는 중이야. 다음 기수 충원 우선순위로 받기로 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진 말고.”


앞으론 회복에 전념하라며 그녀가 자리를 피해줬다. 아니 그렇게 가시면 어떡해요. 나는 병실 가득 메운 수색팀원들에 질겁했다.


“서 중위님!”

“병문안을 빈손으로 옵니까. 얼른 가서 뭐라도 들고 와요.”


타박에도 아랑곳 않고 수색팀원들은 격하게 환대를 해줬다. 급기야 눈물까지 글썽이는데 괜히 나만 민망해지잖아. 멀쩡하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만용이었다.


“어윽.”

“환자는 그냥 누워 계십쇼.”


도로 병상에 눕혀져 어색하게 웃었다. 걱정해준 사람이 많아서 미쳤냐는 둥, 무모한 일 벌이지 말라는 둥, 살면서 들을 핀잔을 전부 몰아들은 것 같았다. 고맙지만 이제 그만 해줬으면 좋겠다.


귀에 딱지생기기 전에 화두를 돌렸다.


“제 선임분들은요?”

“부조장님은 108지부로 파견 가셨고 조장님은 금일 보름이라 외출하셨습니다.”

“조장님이요?”


놀라 되물었다.


“아 모르셨겠구나. 오태식 대위님 이번에 소령 진급하신답니다. 그래서 본부로 발령받기 전에 나갔다 온다고 하셨습니다.”

“예?”


자꾸 고개만 갸웃거리니 4팀장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혼자 진마 잡은 걸로 덤터기 쓰셨습니다.’


아하, 납득이 갔다. 레코더 끄란 말까진 녹음됐을 테니 의심을 받는 건 당연지사겠지. 결국 이렇게 돼버리는 건가. 외출이 풀렸다니 다행이지만, 태업한 사람 중에 조장님만 진급한다니까 뭔가 뜨끔했다.


“서 중위님은 이제 대위(진)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승진도 초고속으로 하시네요. 입대 2년만에 대위까지 이거 기록감 아닙니까?”

“그럼 뭐합니까, 깨먹은 무기가 얼마짜린데.”


안 그래도 다희 땜에 털린 통장이 또 털리겠군. 근황도 전해 들었겠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프긴 하지만 견딜 만했다.


“누구 담배 있어요?”

“그러다 진짜 큰일 납니다.”

“요단강에서 헤엄치다 왔는데 뭐 어때요.”


죽다 살아났는데 담배가 대수랴. 한참 억지를 부려서야 겨우 담배를 손에 넣었다. 후, 이거 못폈으면 어쩔 뻔 했어. 쏙쏙 니코틴이 충전되는 만큼 기분도 업업되었다.


“나중에 저 죽으면 향 말고 담배 꽂아주세요.”

“어휴, 살만 하신가 봅니다.”


한창 노닥거리고 있을 때쯤 못보던 사관들이 흡연실로 들어왔다. 옆에서 4팀장이 귀띔해줬다. 아, 저 사람들이 파견 온 요원들이군.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서 건 중위입니다.”

“아 얘기 들었습니다. 김준홍 중위입니다.”

“오창훈 중위입니다.”


내친김에 기수 통성명까지 했다. 둘 다 나보다 기수가 위인 사람들이었다.


“603기 시라고요?”

“그 기수 생존자일 줄은 몰랐습니다.”

“남들은 진마전 한 번 하기도 힘들다던데, 저만 두 번째라니 재수 옴 붙었죠.”

“저희 둘 다 진마전 경험이 없어서 그런데 진마가 그렇게 쌥니까?”


궁금하다며 오창훈 중위가 묻길래 나는 손사래를 쳤다. 진마랑 엮여서 좋은 기억은 하나도 없었다. 굳이 꼽자면, 피와 죽음?


“말도 마세요. 그 새끼 보이면 무조건 도망쳐야 됩니다. 영관 없이는 엄두도 못냅니다.”

“오태식 대위님 말씀이시죠?”


바른대로 영관급 전위 넷에 후위 부조장님까지 더해 다섯이서도 못잡았다고, 실토할 수도 없었다. 나는 조장님의 얼굴에 금칠을 마구 해대며 그 날의 무용담을 풀었다.


조장님은 별 말씀 안하신건지 다들 진짜라고 믿는 눈치였다. 흠, 리액션이 대단해서 msg가 마구 첨가된다.


“같이 작전 뛸 때는 그렇게 안보이던데. 대단하신 분이셨군요.”

“본부로 발령 가시기 전에 싸인이라도 받아둬야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곧 복귀시간이네요.”


내가 깨어났단 걸 알면 뭐라 하실까. 얘기는 부조장님께 들었을 테니 모가지 잡고 흔드실 거 같은데. 설마 환자한테 그러겠어.


내심 들뜬 마음으로 정문으로 마중을 나갔다. 그런데 기다려도 오질 않았다. 복귀시간은 이미 지났는데··· 초조하게 시계만 올려다봤다.


설마.


[알림. 미복귀자 1명 발생. 전투원 총원 브리핑 룸에 집합하십시오.]


기어코 사달이 났다.


작가의말

책읽는재미님! 와... 매번 신세지는 거 같아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들 추천과 코멘 달아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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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4. 진마(4) +13 19.01.19 500 28 12쪽
18 4. 진마(3) +6 19.01.17 491 28 11쪽
17 4. 진마(2) +6 19.01.15 584 26 12쪽
16 4. 진마(1) +2 19.01.12 531 2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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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 신입 (4) +3 18.12.20 919 26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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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신입 (1) +12 18.12.13 1,759 39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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