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왕 세트1
살짝 술에 취한 듯 멍한 상태에서, 어지러움 때문에 반격도 못 하는 들개왕 머리를 계속 두드렸다. 짬을 내서 확인하니 진돗개가 직접 전투는 자제하고, 외침 스킬로 궁수들에게 버프를 주는가 하면 동굴로 가려는 들개들을 분노의 외침으로 움직임이 느려지게 했다.
깨갱 깽.
동정심을 극도로 유발하는 비명과 함께 들개왕이 사체가 되었다. 들러붙는 들개들을 걷어차며 재빨리 후퇴했다. 내구도가 간당간당한 아이템들을 새것으로 바꾸고 지팡이도 내구도가 꽉 찬 것으로 바꿨다.
'아깝다. 들개왕 정도면 리치나 듀라한 만드는데.'
아까운 나머지 아직 숙련도가 꽤 부족하단 생각은 아예 떠올리지 못했다.
"네크로 님, 들개들이 약해졌어요."
그저 늑대왕 정도겠거니 했던 들개왕은 우르크 도망자 마을의 족장보다 더 강했다. 퀘스트 몹이어서 그런지 피통도 장난 아니었다. 친화력이 겨우 5라지만, 그래도 자폭 스킬 위력이 약한 건 아니다. 우르크 족장을 단방에 빈사 상태로 만들었으니.
거기에 40렙에 이른 전사가 광전사 스킬로 공격했고 파멸 스킬로 공격했다. 비록 기력이 얼마 없어서 파멸 스킬이 오래가진 않았지만, 그러고도 네크로가 열 번 이상 부활해서 계속 때려야 했을 정도다.
"레어 맞죠? 레어 맞는 거죠?"
들개왕 시체가 사라지면서 언뜻 보여준 황금색이 진돗개를 흥분케 했다. 유니크 아이템을 총 7개나 먹은 적 있는 네크로도 심장이 날뛰는 걸 주체할 수 없었다.
'희생의 빛 스킬을 꺼버려야 하나?'
좀비와 해골이 받는 데미지를 아주 조금씩 부담한다지만, 그 숫자가 3백이 넘으니 아직 30레벨대인 네크로에겐 부담이었다. 다행히 들개 공격력이 높지 않아 근근이 버티긴 했다.
늑대왕 상대할 땐 괜찮았는데, 그때보다 언데드 백이 더 늘었다. 그것도 시약 떨어져서 근접인 해골 전사와 좀비만 보충했고, 아이템도 장착하지 못했다.
'많다고 무작정 좋은 건 아니다. 정예화도 시급하고 비율 조정도 급하구나. 원거리를 늘리고 근거리는 줄여야겠다. 성기사 한 명 더 영입하면 참 좋을 텐데.'
물론, 좀비와 해골들에게 노말템이라도 맞춰주면 어느 정도 해결할 문제다. 그러나 이 거지 들개들은 노멀템 하나 떨구지 않았다. 대신 경험치와 스킬 숙련도는 레벨보다 훨씬 후하게 줬다.
"네크로 님, 당장 전사나 성기사로 전직해도 되겠네요. 어쩜 전사인 나보다 근접 전투를 더 잘해요?"
광전사의 후유증으로 공격력 방어력 생명력 이동 속도 모두 반 토막이 난 진돗개는 해골 궁수들 앞에서 접근하는 들개를 잠시 막는 역할을 자처했다. 넘어오는 들개가 적으니 짬도 많이 났고, 그 사이 네크로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 게임 체력 개념 없어서 참 다행이네요. 현실에서 이 정도 싸웠으면 지쳐서 죽었겠죠."
"안 그래도 전투 조금만 길게 하면 머리 아프던데요. VR 게임보다는 낫지만, 가상현실도 만만치 않게 힘들어요. 저 지금 늑대왕 세트 때문에 흥분해서 그렇지, 아까까지만 해도 빨리 퀘스트 끝내고 로그아웃하고 싶었어요."
네크로는 VR 게임일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진돗개는 VR 때도 힘들었다고 말했다.
다행히 들개들은 들개왕이 죽은 후 원래보다 더 약해졌다. 숫자가 많아서 시간은 가장 오래 걸렸지만, 오히려 두 번째 러쉬보다 덜 위험했다. 다만, 전투가 끝난 후 네크로도 빨리 로그아웃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고맙네. 자네들 덕분에 우리 부족의 새싹들이 전부 무사했네. 그대들의 업적을 기려 최고의 보상을 하겠네."
들개왕이 드랍한 반지와 목걸이는 네크로가 은행으로 전송했다. 외눈박이 늑대왕이 보상으로 내놓은 건 40개 상자였다. 네크로와 진돗개에게 각각 20개씩 나눠줬다.
"이거 원래 40명이 하나씩 받는 건가 보네요."
"말하는 걸 들어보니, 암컷 늑대나 새끼 늑대가 죽으면 차감한다는 뜻 같아요."
"바로 까볼까요?"
"대박."
상자마다 귀한 광석이나 레어 아이템이 하나씩 나왔다. 심지어 그 귀한 귀걸이까지 있었다. 매직부터 시작하는 목걸이와 반지와 달리 귀걸이는 레어부터 시작한다.
"이건 각자 독식으로 하죠. 상자에서 뭐 나올지는 개인 운이니까."
진돗개가 고맙다고 인사하며 상자로부터 얻은 아이템을 은행 금고로 전송했다.
"바로 팔진 마요. 장담컨대, 일주일 뒤에 아이템 가격이 피크 찍을 겁니다."
###
"형, 수술 잘 되겠지?"
수술을 앞둔 동해는 기대보다 걱정이 앞섰다. 이번 수술이 실패하면 희망 자체가 사라진다. 지금까진 다리가 나을 수 있다고 억지로 믿어왔는데,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의사 수술을 받고도 못 나으면 마지막 버팀목마저 무너진다.
"인터넷으로 저 의사 검색해 봤는데, 미국에서도 엄청 유명한 분이셔. 논문도 수십 개 내셨고, 특히 이쪽 수술은 최고야. 동양인과 서양인의 골밀도랑 체질 차이를 연구한다고 여기 오신 거래. 그러니 넌 정말 운이 좋은 거야. 미국에서 수술받으러 일부러 한국으로 온 환자도 여럿이래."
있는 말 없는 말 다 동원해 동해를 안정시켰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환자의 심리 상태가 수술 시 몸 상태에 영향을 미친다고 들었다.
"검색해보니까 늦어도 반년이면 정상인과 다름없대. 그때 우리 같이 축구 하러 다니자."
"다리 나으면 돈 벌어야지. 언제 축구할 짬이나 있겠어?"
하얗게 질렸던 얼굴에 그나마 혈색이 조금 돈 동해가 광해를 타박했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 해도 스트레스 쌓여. 그러니 축구로 풀어주는 것도 나쁘진 않아. 철벽 수비 동해와 무적 공격수 광해의 조합이 곧 세상을 떨게 만들겠구나."
"형, 그만해. 나 막 부끄러워."
사고당하기 전까지 형제 둘이서 축구도 많이 하고 그랬었다. 광해는 축구부 에이스였고 동해도 주전은 아니지만, 초등학교 축구부였다. 수비는 잘하는데 공격을 전혀 못 해 풀백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중앙 수비수 자리에 넣기엔 그때 키가 너무 작았다.
그래도 좋아하는 축구 이야기를 계속하니 동해가 안정을 쉽게 찾았다.
수술 과정을 지켜보겠냐는 병원 관계자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문제가 되는 다리의 뼈를 부수고, 그걸 다시 조립한다. 괴사한 부분을 도려내기도 하고, 뼛조각이 부족하면 무슨 소재로 대체하기도 한단다.
동생 다리를 부수고 째고 깁고 하는 걸 볼 정도로 광해 멘탈이 든든하지 못했다.
핸드폰으로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에 접속했다가 그대로 껐다. 유니콘 홈페이지의 레전드 게시판에 들어가서도 게시글 하나 클릭하지 않았다.
그러다 화면이 꺼지면 다시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들어갔다. 재활 치료 관련해 검색하다가 그냥 병원에 맡기는 게 낫다는 생각에 포기했다.
긴 시간 동안 계속 뭔가를 했는데, 결국 아무것도 안 했다.
"형, 동해 수술 들어갔어?"
"응, 이미 두 시간이야."
"미안해. 아침에 함께 오려 했는데, 갑자기 약속 잡혀서 말이야."
"미안할 게 뭐 있어. 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워."
"형 부모님은 안 오셨어?"
"동해가 절대 오지 말라고 했대. 우리 부모님도 좀 유난스럽잖아."
"우리 어머니만큼 하겠어?"
"오시면 의사한테 돈 찔러주고 절하고 난리 치실 거야. 동해는 그런 거 영 창피하게 생각해."
"그 마음 내가 정말 잘 이해하지. 내가 대학교 갓 붙었을 때도 어머니가 같은 과 친구들하고 교수 선생님 모두 불러 밥 산다고 난리 치셨어. 그때 큰 매형이 말리지 않았다면, 나 대학 못 다녔을 거야."
광해와 현성은 실없이 키득거렸다.
"이사한다며?"
침묵이 괴로웠는지 현성이가 질문했다.
"응. 여기랑 10분 거리에서 집 하나 구했어. 비싸긴 하지만, 볕도 잘 들고 깨끗해. 재활 치료도 해야 하고, 새로운 환경에 있으면 수술 스트레스도 확 줄어들 수 있대."
"이사 도와줘?"
"가상현실 기기 하나가 다야. 컴퓨터는 중고로 팔아버렸어."
"형도 참 대단하다. 그걸 어떻게 팔았냐?"
"1층 금수저에게 5만 원에."
둘은 뭐가 웃긴지 배를 부여잡고 눈물 날 때까지 웃어젖혔다.
###
이름 : 고고한 늑대왕의 송곳니
분류 : 목걸이 - 제한 없음
등급 : 희귀
능력 : 착용자의 힘 상승, 명중률 상승
특별 : 반지와 함께 착용하면 유저 레벨 / 2 + 10에 해당하는 늑대 여섯 마리 소환
이름 : 고고한 늑대왕의 어금니
분류 : 반지 - 제한 없음
등급 : 희귀
능력 : 착용자의 힘 상승, 명중률 상승
특별 : 목걸이와 함께 착용하면 유저 레벨 / 2 + 10에 해당하는 늑대 여섯 마리 소환
"이거 늑대 세트와 별도인 것 같은데."
"설명이 전부 나오진 않았네요. 이 둘을 착용하면 마법사나 네크로맨서도 늑대 세트를 착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비로소 풀세트가 되는 거죠."
"풀세트가 되면 별도로 붙는 옵션 있어요?"
"게시글에선 매직 세트와 레어 세트의 효과가 강화된다고만 했어요."
"레벨이 낮을수록 늑대왕 세트에 환장하겠네요. 10레벨 유저는 15레벨 늑대 여섯 마리 소환하는 거니까."
"그럼요. 이거 가격 얼마 정도 생각하세요? 아직 경매장에 올라온 적 없는 물건이잖아요."
"하루에 하나씩 올리죠. 수수료 2% 손해 보더라도 익명으로 올리는 게 좋겠어요. 시작 가격은 300골드로 하고, 경매 시간은 하루. 즉시 입찰가 없이. 다음날은 첫날 가격을 보며 시작가를 정하기로 하고요."
"당분간 늑대왕 세트 사냥만 할까요? 지금 모은 5세트 중에서 진돗개 님이 하나 쓰는 거로 하고. 3세트는 팔아서 나누고 하나는 곧 게임 시작할 내 동생 몫으로 남길게요. 동생 몫의 가격은 가장 높은 경매 낙찰가를 기준으로 30% 드릴게요."
"아니요. 저도 한 세트 받는 건데요. 그냥 동생분 가져다 쓰시면 됩니다."
"다른 건 몰라도 돈거래는 정확히 해야죠. 친구 술 사주는 돈 10만 원 안 아까운데, 고스톱 하다 못 받은 백 원이 가슴에 남는 게 사람이래요. 진돗개 님이 한 세트 갖는 건 미리 얘기된 사항이니 그걸 언급하면 안 되죠."
"그럼 염치없지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길드 성립 자금은 제가 다 대도록 하죠."
동해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의사는 가상현실 게임을 통해 많이 뛰어다니면 신경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외과 의사인 미국 전문가는 의외로 가상현실 기기 원리에 관해 꽤 많이 파악하고 있었다. 현재 어떤 의료기기도 동해에게 더 많은 암시를 줘서 신경을 자극하지 못할 거라고 장담까지 했다.
동해가 사용할 가상현실 기기는 현성이를 통해 구했다. 유니콘과 얘기가 잘돼서 30대를 현성이에게 판매하기로 했다. 미리 체험해보고 싶다는 핑계로 일단 하나 먼저 받았다. 기기는 이미 새 월셋집에 고이 모셔놨고, 동해가 퇴원하기만 하면 바로 게임을 할 수 있다.
일단 현성이와 동해 그리고 네크로와 진돗개까지 넷이서 길드를 만들기로 했다. 길드를 만드는 이유는 길드 채널 때문이다. 길드 채널을 설정하면 공공장소에서 말해도 다른 사람에겐 들리지 않는다. 청각 범위 안의 말은 다 들을 수 있는 게임 특성상, 중요한 대화를 하기 전에 늘 주변을 살펴야 했다.
길드 채널을 활성화하면 이 문제점이 해결된다. 대신 다른 유저와 대화할 때 채널을 변경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지만, 늘 주변을 조심하는 것보다는 덜 귀찮다.
"동생분은 언제 옵니까?"
"내일 혹은 모레 퇴원할 겁니다."
"그럼 오늘도 돈 벌러 가볼까요?"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늑대 사냥터로 향했다. 그런데 오늘은 공기가 달랐다. 늑대 사냥터에 초보가 아닌 레어로 치장한 고렙들이 득실거렸다.
"잘은 모르지만, WM 하부 길드들 같습니다."
길드 마크 같은 기능은 아직 구현하지 않았다. 최근 아이템에 도안을 넣는 직업이 생기긴 했지만, 상황에 따라 아이템을 자주 갈아입는 레전드의 특성상, 길드 마크를 딱히 어딘가에 새기긴 불편하다.
"저기 검은 백합 길드. WM 하부 길드들 맞아요."
자기들끼리 길드 채널로 이야기하는지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이 사냥터는 통제되었습니다. 어서 떠나주시죠."
윽박지르는 말투는 아니지만, 찔리는 게 있는 네크로와 진돗개는 곱게 돌아섰다.
"어떻게 할까요?"
"우선 도시로 가죠."
중심 도시에 가서 경매장을 확인했다.
"제가 미친 걸까요, 게임이 미친 걸까요? 아니면 세상이 미친 걸까요?"
"뭐 세상까지. 그저 돈 많은 미친놈이겠죠."
투구, 갑옷, 장갑, 신발의 매직 세트에 목걸이와 반지의 레어 세트. 이 여섯을 묶어서 올린 늑대왕 풀세트의 경매가격이 3천 골드로 치솟았다.
"얼마 전에 유니크 해머가 1만 골드에 팔렸는데, 그때도 느꼈지만, 세상엔 미친놈과 돈 많은 놈이 너무 많은 거 같아요."
###
술병이 나뒹구는 어느 술집 테이블. 어울리지 않게 노트북 한 대가 올려져 있었다.
"게임은 말이야. 레벨이 장땡이고 아이템이 전부야."
반 실장은 입찰가를 1골드 올렸다. 상대가 입찰가를 올리는 즉시 1골드를 올려버려 약 올리는 중이다.
"확실하지? 지금 입찰하는 게 내 잘난 사촌 형이라는 게?"
"제 해킹 실력 무시하는 겁니까?"
"미안. 그냥 흥분해서 막 씨불인 거야. 마음에 두지 마."
세상엔 돈만으로 부릴 수 없는 괴짜들이 있다. 눈빛이 멍한 저 해커만 봐도, 비록 레전드 게임 서버에는 침입하지 못했지만, 유니콘 경매 사이트는 이미 손금보듯 들여다보고 있다. 괜히 덜미 잡힐까 봐 겁나서 가장 낮은 읽기 권한으로 입찰자 신상 알아보는 게 전부긴 하지만.
"겨우 30대 초반인데 상무 다는 게 말이 돼? 뭐 서른도 안 된 내가 실장 다는 것도 말이 안 되긴 하지만. 그래도 상무는 너무하잖아. 안 그래?"
입찰가가 올라가자마자 반 실장은 1골드 버튼을 클릭했다.
"야, 너 골드 없잖아. 그렇게 무턱대고 해도 돼?"
"골드는 사면 돼. 돈으로 안 되는 게 어딨어."
딸깍 소리와 함께 입찰가가 또 한 번 1골드 상승했다.
Comment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