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으로1
비취색 바다는 바닥이 보일 정도로 맑고 깨끗했다. 배 앞머리 쪽에 통제 탑 비슷하게 높이 솟은 곳에 올라 멀리 바라보면 흡사 실제로 바다에 나와 있는 느낌이다.
"저기, 대장. 해적선 만났네유. 어떻게 할까유?"
선장이 네크로를 찾아와서 질문했다. 선장 버프 아니면 당장 잘라버리고 싶을 정도로 무능했다.
"항해사. 해적선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실질적으로 NPC들의 두목은 상거지다. 갑판장에 조타수까지 다 바지다.
"저들을 생포해 굴복시킨 후 선원으로 써먹었으면 합니다. 경험 있는 선원이 많으면 항해도 더 안전해지고 음식 수급도 원활합니다."
항해사가 된 상거지도 이젠 전함의 주인인 네크로에게 존대했다.
"그럼 추격합시다."
전함을 보자마자 뱃머리를 돌려 도망가는 해적선을 쫓아갔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해적선에서 깃발이 올라왔다.
"해적이 항복했습니다."
여긴 배 전체에 철갑을 둘러 항공모함을 연상케 하는 최신식 전함인데, 해적선은 대항해시대가 떠오르는 나무배고 해적기는 갈고리와 칼을 교차한 뻔한 문양이었다.
줄 사다리를 내려 해적들을 갑판으로 올라오게 했다. 가장 먼저 갑판에 오른 해적이 종처럼 울리는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봤지? 내가 우르크 아니라 인간이라고 했잖아. 바다의 신은 우릴 버리지 않았어."
비록 무기를 들진 않았지만, 우락부락한 근육에 흉악한 얼굴이 오아시스 주민들을 위축게 했다. 게다가 안대를 쓴 자도 꽤 많고 얼굴이나 몸에 어찌 살아남았나 싶을 정도의 흉터를 지닌 자들도 많았다.
"뭐야? 왜 선원들이 이따구야?"
해적 모자를 쓴 선장이 갑판에 몰린 선원들을 보고 흉성을 드러냈다.
"소환."
이젠 수백 마리밖에 남지 않은 해골과 좀비들이 갑판 여기저기 모습을 드러냈다. 해골과 좀비를 보고도 꿈쩍하지 않던 선장은, 조금 늦게 나타난 리치와 듀라한 그리고 죽음의 기사를 보고 바로 무릎을 꿇었다.
"충심으로 따르겠습니다. 전부 괴물 사냥 경험이 풍부한 거친 바다의 용사입니다."
"우린 대륙으로 간다. 혹시 뱃길 아는 사람?"
"젊은 우린 모르지만, 섬에 가면 늙은이 중 뱃길 아는 자가 있을 겁니다."
헤아가 해도를 들고 해적 선장에게 다가갔다.
"우리 위치가 여기다. 섬 위치는 어디지?"
섬 위치를 알아낸 헤아가 한참 고민했다.
"대장. 가는 길에 바다 괴물 잡아서 연료 보충받고, 섬에 가서 선원을 보충받고 음식물도 보충받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역소환."
좀비와 해골들을 다시 숨긴 네크로는, 해적섬에 도착한 후 항해사를 제외하고 모두 새로 임명한다고 말했다. 능력이 가장 높은 자를 선장으로 임명할 거라는 말에 해적들이 흥분했다.
"대장, 술과 고기를 저들에게 내주면 충성심을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단합에도 좋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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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선은 전부 버렸다. 그저 해적선에 실린 사냥 도구들만 전함에 옮겼다. 고래 사냥 다큐에서 봤던 작살 발사기를 닮은 도구가 대부분이었다.
"곧 바다 괴물 영역에 들어갑니다."
해적 선장은 일단 부선장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해적 선장이 추천하는 놈 몇을 삼등 항해사로 임명했다. 그러고 나서 음성 도우미가 연료 효율이 조금 나아졌다고 알려줬다.
"사냥 방식은 어떻게 되지?"
"일단 바다 괴물을 죽여야 합니다. 저 도구들은 도망가지 못하게 잡아두는 역할과 죽인 후에 갑판으로 끌어올리는 역할입니다. 그리고 저기 몇몇 도구만 살상용입니다."
"소환."
언데드들이 나타났다. 거부감은 있지만, 같은 편임을 인지해서인지 사기는 오히려 올라갔다.
"돌쇠, 바다에서 싸울 수 있어?"
"불가."
"언데드는 소금을 싫어합니다."
빛은 싫어하지 않는데 소금을 싫어하는구나. 네크로는 해적 선장에게서 뜻밖의 지식을 얻었다.
"부하들을 거느리고 선원을 보호해라. 듀라한과 리치는 바다 괴물 공격하게 하고."
대화가 되는 죽음의 기사에게 통솔을 맡겼다. 듀라한은 자기 머리를 던지는 스킬이 있다. 쿨타임이 1분인데, 던진 머리가 다시 생겨나는 시간이었다.
"현피야, 가서 동해랑 성필이도 불러. 첫 바다 괴물 사냥인데, 어떻게 싸우는지 견학해야지."
넷 다 로그아웃하면 배가 멈춘다. 하루빨리 대륙으로 가기 위해 둘씩 교대로 로그인했다. 그러나 첫 바다 괴물 사냥인 만큼 둘에게 경험을 쌓아주고 싶었다.
그렇게 불러온 둘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진돗개는 그나마 외침 스킬로 아군에게 버프 주고 바다 괴물의 움직임을 느리게 만들지만, 동해는 원격 스킬이 전혀 없어서 일절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네크로와 동해는 해체용 칼을 들고 괴물 사체를 토막 냈다. 최대한 많은 피를 짜내기 위해 체중으로 괴물 사체를 누르기도 했다.
여기저기 칼집을 많이 내는 동해와 달리, 네크로는 심장 부위의 동맥을 정확히 잘랐다. 바다 괴물 사체에서 피가 콸콸 쏟아졌다. 푸른색 피는 갑판에 난 구멍을 통해 저장 탱크로 흘러들었다. 피가 어느 정도 차자 정제가 시작됐다. 바닷물이나 여러 가지 불순물이 정제 과정에 걸러지고, 피가 함유한 쓸모없는 성분도 대부분 걸러졌다.
그렇게 정제한 핏물은 연료가 되어 전함의 연료통에 저장되었다.
"전함이 좋긴 좋습니다. 바다 괴물 공격에도 끄떡없군요."
바다 괴물의 씨를 말린 해적 선장이 감탄했다. 현황으로 살피니 충성도가 크게 올랐다.
"바다 괴물은 전부 이렇게 약한가?"
"어마어마한 괴물이 많습니다. 그래도 대왕급 아니면 전함에 타격을 줄 괴물이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
바다 괴물의 영역을 벗어나자 진돗개와 동해는 바로 로그아웃했다. 두통을 호소하는 현피 역시 로그아웃해서 쉬라고 했다. 대신 20분에 한 번씩 전화해서 도움이 필요한지 확인하기로 했다.
아직까진 질리지 않는 바다 풍경을 감상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어, 문제없어."
[안녕하세요. 유니콘 한국 지사 고객센터 직원 번호 10320번입니다. 혹시 시간 되시면 잠깐 대화 가능하실까요?]
"동생 전환줄 알고 실례했습니다. 말씀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그간 모은 데이터로 유니콘에서 가상현실 기기를 업그레이드했습니다. 두통을 호소하는 분들이 많아 해당 문제점을 해결했고요. 성형한 분들의 표정이 느린 문제점도 보완했습니다. 고객님은 이벤트 당첨자로 표시되었는데요. 동의하시면 업그레이드된 최신 버전의 가상현실 기기를 무료로 교체해 드립니다.]
'어디서 약 팔고 있어.'
은근슬쩍 최적화를 핑계로 최고 성능의 기기를 교체하려 했다. 여기서 최적화는 가격 대비 성능의 최적화를 의미한다.
"지금 사용하는 기기 매우 만족하고요. 제가 지금 게임 엄청 잘 풀리거든요. 좋은 기운을 계속 받고 싶으니 바꾸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무료 말고 유료인 기기도 있습니다. 돈 조금만 더 보태시면 범용 기기보다 훨씬 성능이 높고 고객님 데이터로 설정한 맞춤형으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살짝 마음이 동하긴 했지만, 거절하기로 했다. 아직 맞춤형이 필요할 정도 어려움은 없었다.
"혹시 교체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전화드릴게요. 다른 전화가 와서 이만 끊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현성이 전화를 받았다.
"형, 방금 유니콘에서 전화 와서 새 버전 기기로 바꿔준다는데. 고민 좀 해보겠다고 말하고 끊었어."
"지금 기기가 총 80대지? 70대를 140대로 바꿔 달라고 해봐."
"덕분에 돈도 잘 벌고 있는데, 그렇게 말하면 화내지 않을까?"
"에구에구. 덕분에? 덕분이 어딨어. 네가 잘나서 버는 건 아니지만, 유니콘 덕분도 아니다. 이건 그냥 비즈니스야. 직접 만나서 대화하자 하고, 나랑 같이 나가자."
교대 타임이 되어 진돗개와 동해가 로그인했다. 네크로는 현성이와 함께 유니콘 직원 만나러 가야 하니 웬만한 일은 직접 해결하라 알려주고 로그아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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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과장님. 새 버전 출시했다고 하셨는데, 안정성과 안전은 보장하실 수 있습니까?"
살이 좀 올랐는지 회사 다닐 때 입던 양복이 몸을 조여왔다.
"물론이죠. 지금까지 사고 소식 터진 적 있습니까?"
"지금 버전이야 믿을만하죠. 다만 최적화했다는 새 버전은 좀 그렇네요. 거의 24시간 손님이 끊이질 않는데, 사고 하나 터지면 사업 망하는 거 금방이잖아요."
광해는 유니콘 영업팀의 박 과장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얘기했다.
"섭섭합니다. 현재 가상현실 기기로 피시방 꾸린 건 현성네 피씨방 하나뿐이거든요. 유니콘에서 큰 배려를 해줬다고 생각했는데, 그쪽 생각은 다른가 봅니다."
"말은 똑바로 하시죠. 기술적 검증은 끝났지만 위험이 없다는 확신을 대중에게 주지 못한 가상현실 기기를, 저희가 부담을 안고 구매한 겁니다. 저희 덕분에 다양한 데이터도 쌓이지 않으셨습니까. 유니콘에서 저희를 일방적으로 배려한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지금 최적화 버전이라고 주장하는 새 기기를 테스트하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현성은 날카로운 말로 상대 약점을 노리는 광해가 낯설었다. 그리고 이게 진정한 사회인의 모습인가 싶기도 했다. 공짜 열매 하나 달리지 않는 콘크리트 정글에서 살아남으려면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은 물론, 저 정도 정신력과 각오가 있어야 하나 싶었다.
"박 과장님, 하나만 질문하겠습니다. 현재 버전은 천만 원인데, 새 버전은 시장 출시 가격이 어떻게 되나요?"
박 과장이 입을 꾹 다물고 눈알만 굴렸다. 광해가 어디까지 정보를 아는지 고심했다.
"이렇게 합시다. 이후 계속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거든요. 박 과장님도 회사에서 월급 받고 일하시는 분이니 난처한 부분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박 과장 얼굴이 조금 폈다. 그래도 영업에서 잔뼈가 굵었다고 크게 티 내진 않았다.
"70대를 200대로 바꿔주십시오. 손익이야 과장님께서도 뻔하시리라고 믿습니다. 명분은 최적화 버전의 일본, 중국 출시 이전 테스트를 위한 협력 업체와의 전략적 제휴 정도가 적당하겠군요. 더 요구하고 싶기도 하지만, 아까 말씀하신 대로 저희도 고맙게 느끼는 부분이 있어서 양보한 겁니다. 10대 남기는 건, 최초의 가상현실 게임 피시방이라는 타이틀을 위한 상징성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양해를 구한 박 과장이 밖으로 나가 통화했다. 통화 중 시종 고개를 숙이고 가끔 허리가 굽혀지는 걸 보니 상사랑 통화하는 듯했다.
"형, 대단하다."
"대단하긴. 나도 떨려 죽겠어. 그리고 어차피 경쟁적수도 없는데 안 바꿔서 상관없으니까 막 지른 거야."
최적화 버전은 전기 소모량이 현재 기기의 1/4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직접 전기세를 물어야 하는 현성이 입장에서는 그 정도도 꽤 큰 이익으로 여겨졌다. 반면 광해는 전기세 생각을 전혀 안 했기에 뻔뻔스러울 정도로 막 나갔다.
"부장님께서 동의했습니다. 젊은 사장이 하 대리 처남이었군요. 하 대리 저랑도 자주 술 마시는 친한 사입니다. 일찍 알았으면 알아서 배려해드렸을 텐데. 조사를 철저히 하지 않은 제 실수로 분위기만 어색해졌네요."
"그럼 계약서 바로 작성할까요?"
찔러봤자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광해의 대처에 박 과장이 고개를 저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잠시 후 계약서를 든 직원이 커피숍에 들어왔다.
"넌 한글 읽어보고, 난 영문 볼게."
분쟁 발생 시 영문 계약서를 기준으로 한다는 문구를 확인한 후 광해는 영문 계약서를 읽었다. 몇 분 만에 계약서를 내려놓은 현성과 달리 광해는 20분 동안 계약서를 붙잡았다.
"이 항목에 관해서 설명 부탁드립니다. 비밀 엄수에 관한 범위가 너무 모호하게 설명되었군요."
70대를 200대로 바꿔주는 대신, 가상현실 기기와 이번 거래에 관해 최고 등급의 비밀 엄수를 계약에서 요구했다. 이해되는 조치지만, 해당 조항으로 트집 잡힐까 봐 걱정되었다.
"혹시 우리 회사 취직할 생각 없습니까? 영어도 잘하시니 미국 본사로 진출해서 성공할 것 같습니다."
"그 정도 능력 안 됩니다. 올챙이는 물웅덩이에서 살아야죠."
"생각 바뀌면 언제든 찾아오십시오. 하 대리랑도 친분 있다고 하니, 영업팀 오면 앞길이 창창할 겁니다."
"말씀 고맙습니다."
피시방 확장에 맞춰 새 버전 기기를 들이기로 했다. 새 버전 기기 100대 우선 들인 후, 테스트 버전 70대를 뜯어가고, 다음 100대를 추가 설치해 주기로 합의했다.
웃는 얼굴로 계약을 끝낸 후 박 과장과 뜨거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밖에 나온 현성은 바로 부모님에게 전화해서 건물 다른 층을 임대주지 말라고 했다. 피시방 덕분에 임대료가 하루 다르게 올라서 더 좋은 가격을 받아내려고 일부러 뜸 들이고 있었는데, 아예 건물을 통째로 현성이가 피시방으로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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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퀘스트 받았어."
그사이 해적섬에 도착했고, 진돗개가 나서서 해적들을 설득해 선원으로 받았다. 다만, 동해가 퀘스트 하나 받아버려서 문제가 되었다.
"넌 스킬 수련에나 열중하라니까. 퀘스트 실패하면 페널티가 있어."
신중한 네크로와 달리 동해는 꽤 즉흥적이었다.
"직업 퀘스트라서."
"며칠 걸려?"
"스킬 그리고 아이템 도움 없이 상대를 쓰러뜨려야 해."
네크로는 우르크 무투장이 생각났다.
"보상은 뭔데?"
"숙련도."
"네가 직접 이겨야 해? 아니면 내가 대신 싸워도 돼?"
"모르겠어."
"퀘스트 공유해 봐."
동해가 파티로 퀘스트를 공유했다. 현피와 진돗개는 당연히 퀘스트를 받지 못했다. 그런데 네크로가 덜컥 퀘스트를 공유받았다.
"갓 게임이네. 어떻게 게임 서버가 둘이 형제인 걸 알고 퀘스트 공유까지 허락하냐?"
이쪽 집안 사정을 모르는 현피가 농담했다. 진돗개 역시 무인 직업 퀘스트를 네크로가 공유받은 데 관해 아무런 의심도 없었다. 네크로가 만약 다단계에 빠진다면 1번으로 끌어들일 상대가 바로 진돗개다.
"섬에 있는 음식 다 실으려면 하루 걸린다 했지? 그 안에 퀘스트 끝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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