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빼고 다 적
전장이 안정됐다.
정령 거미의 거미줄이 닿는 범위가 전부 우르크 세상이 되었다. 거길 벗어나면 황제가 빠르게 도착할 수 없기에 유저들이 우위를 차지했다. 반대로 안으로 들어가면 유저들이 크게 손해 봤다.
황제가 없다고 우르크가 아주 약해지는 건 아니지만, 10분이면 부활하는 유저와 며칠 혹은 몇 주에 걸쳐 부활하는 우르크가 같을 수 없었다.
"이건 유니콘이 일부러 알려주는 거겠지?"
정령 거미가 먹이를 먹고 성장하면 거미줄 범위가 더 커진다는 정보가 모든 세력에 전해졌다. 예전 같으면 모여서 대책을 상의했겠지만, 서로 간극이 커질 대로 커져서 힘을 한데로 모으기 힘들었다.
철혈팔기와 만리장성만 날뛰던 때와 달리, 한숨 돌린 가미카제와 돈줄 잡은 역천도 야심만만했다. 이런 상황에서 초인동맹도 예전처럼 수동적으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유저 규모가 작고 단합력도 부실한 네크로 세력과 그냥 부실한 프리덤만 눈치 보기에 바빴다.
네크로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2단계 퀘스트를 완성하고 3단계가 시작됐을 때에도 고민한 적 있었다. 3단계의 완성도는 재료를 수집해서 올라가는 게 아니다. 수집한 재료를 신전에 바쳐야 완성도에 반영된다.
일단 귀하지 않은 물건들은 개인 창고에서 꺼내 바로 신전에 바쳤다. 초반에 완성도가 빠르게 올라간 이유였다. 구하기 어려운 물건들은 예전에 물건을 구한 경로로 구해서 신전에 바쳤다. 초반 이틀이 지난 후 느리지만 꾸준하게 완성도를 높인 비결이었다.
'어느 퀘스트를 먼저 끝내야 할까?'
지금 대부분 세력의 완성도는 그대로 멈춰있다. 그러나 일부러 물건 구하고도 신전에 안 바쳐서 완성도가 오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누군가 먼저 퀘스트를 완성하면 남은 세력은 그때까지 바친 재료는 그냥 날리는 셈이다. 완성도에 따른 보상 때문에 어느 정도까진 투자하지만, 마지막 10% 정도는 다들 눈치 싸움이 치열했다. 귀한 재료를 바쳐서 경쟁자들이 똥줄 타게 만들지, 아니면 재료가 다 모일 때까지 음흉하게 웅크리고 있을지.
1위를 달리면 소속 유저들이 재료 찾는 데 더 열성일 수 있기에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야 했다.
그리고 지금 네크로의 고민은 다른 세력과 차원이 달랐다. 네크로는 지금 100레벨 퀘스트인 거인 종족의 부활과 신급 퀘스트인 신기를 찾아라 중 하나를 완성할 수 있다.
문제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두 퀘스트 모두 에픽 다이아몬드가 필요했다. 거인 부활을 선택하면 신기 퀘스트를 언제 끝낼지 기약이 없고, 신기 퀘스트를 끝내자니 100레벨을 몇 년 뒤에나 이룰지 고민이었다.
단순히 생각하면 네크로가 99레벨에서 100이 되는 것보단 신기 퀘스트를 완성해 국가가 강해지는 게 훨씬 낫다.
'신기가 생기면 우르크와 싸워야 하고, 우르크 수도를 함락하면 동맹이 깨지고 철혈팔기와 싸워야 한다.'
네크로 입장에선 그날이 하루라도 늦게 오는 게 나았다.
'그러나 다른 세력이 신기 퀘스트를 완성해버려도 마찬가지다. 그럴 바엔 차라리 내가.'
다른 세력에 정보원이 전혀 없는 네크로는 누가 음흉하게 재료를 숨기고 시치미를 떼는지 알아낼 방법이 전혀 없었다. 95%까지 완성한 가미카제가 허세인지 아닌지 판단할 방법도 없었다. 우르크를 해결하면 네크로보다 더 확실하게 공격받을 가미카제다.
'보석함을 열어 쓰레기가 나오면 거인 퀘스트를 완성한다. 보석이 나오면 신기 퀘스트를 한다.'
그날, 네크로는 레전드 등급 사파이어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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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ORLD가 퀘스트를 완성했습니다.
- 소금성에 바알드로의 가호가 가해집니다.
- 소금성을 수도로 하는 WORLD에 다음과 같은 효과가 적용됩니다.
- 인구 성장이 빨라집니다.
- 도시와 마을이 빠르게 발전합니다.
- 해마다 풍년이 듭니다.
- 자연재해가 물러갑니다.
- 광산과 탄광이 발견되었습니다.
- 문화가 급속도로 발전합니다.
- 고등급 시설 건립 기간이 30% 줄어듭니다.
- 대현자 및 현자 NPC들이 소금성으로 모여듭니다.
보기만 해도 입이 찢어지는 메시지들이 줄을 이었다.
- 게임 시간으로 1년 동안 누구도 WORLD를 침공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결정타 하나 있었다. 네크로 혹은 프리덤의 세력이 퀘스트를 완성하면 이 보상을 추가하기로 미리 정했다.
이 보상에는 함정이 있었다. 바알드로의 가호는 소금성에 내려졌다. 누구든 소금성을 점령하고 수도로 지정하면 바알드로의 가호가 해당 국가에 적용된다.
영토나 인구 등만 보면 만리장성이 최약체이고 네크로는 강자다. 하지만 실질적인 실력은 프리덤이 최약체이고 그다음이 네크로였다.
'유니콘이 분란을 일으키려고 작심했구나.'
소금성을 점령하려면 인류 동맹이 깨져야 한다. 인류 동맹이 깨지려면 우르크 수도를 함락해야 한다.
철혈팔기와 만리장성, 거기에 속을 도무지 알 수 없는 역천까지 우르크를 빨리 끝내고 유저끼리 싸우길 원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쩌면 네크로 빼고 모두 우르크를 빨리 끝내려 할 수 있다.
'어쩌면 내가 가미카제보다 먼저 노려질 수도 있구나.'
철혈팔기가 가미카제 대신 소금성을 먼저 공략할 가능성이 크다.
"제길. 올해 연말은 피 튀기겠구나."
혹시 떡고물이 떨어지지 않을까 해서 신전까지 따라온 진돗개가 툴툴거렸다. 동해나 철벽은 아무 생각도 없고 현피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비록 넉 달 동안 아무 눈치도 안 보고 발전할 수 있지만, 넉 달 뒤엔 철혈팔기는 물론 초인동맹까지 소금성을 빼앗으려 덤벼들지도 모른다.
- 이번 퀘스트에서 뛰어난 활약을 한 유저들에게 보상을 내립니다.
네크로의 국가에는 네크로 혼자뿐이었다. 내심 기대했던 진돗개가 툴툴거렸다.
"1단계에서 2개 해결하고 2단계도 20% 공헌했는데."
남은 아홉은 모두 다른 국가 유저였다. 3단계는 네크로가 대부분 완성했기에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형, 보상이 뭐야?"
"에픽 부적이야."
이름 : 행운의 부적
분류 : 장식 - 네크로
등급 : 신화
능력 : 허리띠, 갑옷, 목걸이에 부착
특별 : 성기사 패시브 '빠른 치유' 장착 - 허리띠
특별 : 성기사 패시브 '보호소' 장착 - 갑옷
특별 : 성기사 패시브 '생명의 축복' 장착 - 목걸이
특별 : 스킬 '소환의 나팔' 사용 가능 - 쿨타임 30분
특별 : 파괴 불가
허리에 부착하면 일정 확률로 스킬이나 물약으로 천천히 회복하는 생명력과 마나를 단번에 차게 하는 패시브 스킬 빠른 치유를 얻는다.
보호소는 갑옷 성능을 더 강하게 해주는 패시브고 생명의 축복은 성기사 피통을 크게 해주는 패시브다.
소환의 나팔은 성기사 20명을 소환해서 싸우는 스킬이다. 실제 스킬 쿨타임이 30분이다. 친화력이 높고 광명 패시브를 갖춘 네크로기에 일반 유저보다 효과가 훨씬 좋을 것이다.
네크로는 짧게 고민하고 목걸이에 부착했다. 퀘스트 보상 아이템이어서 네크로에게 귀속되었다. 철벽에게 주면 전투력이 한 단계 오를 것 같은데, 해동청의 방패처럼 네크로만 쓸 수 있는 아이템이다.
"그웩, 이걸 감정해줘."
네크로는 패왕의 인장을 꺼냈다. 어차피 소금성은 이미 모두가 군침을 흘리는 비옥한 땅이 되었다. 다른 세력이나 우르크 황제에게 노려질까 봐 감정을 자제했던 패왕의 인장을 안 쓸 이유가 없었다.
이름 : 패왕의 인장
분류 : 국새
등급 : 신화
능력 : 인장을 보유한 국왕의 기본 스탯 +1
특별 : 인구 성장이 30% 빨라짐
특별 : 성벽 내구도 15% 증가
특별 : NPC가 전투 중 도망 혹은 투항하지 않음
특별 : 스킬 '패왕의 부름' 사용 가능 - 쿨타임 3일
특별 : 수도 함락 시 반드시 드랍
패왕의 부름은 전체 인구의 0.15%에 달하는 단일 병과의 군대를 불러올 수 있는 스킬이었다. 우르크 황제가 비슷한 스킬 '황제의 부름'으로 우르크 기병 15만 불러왔던 걸 생각하면 국가 소속 우르크 숫자가 1억이라는 뜻이었다.
'넉 달이 지나면 3만 정도 부를 수 있겠다.'
- 불멸의 미스릴 왕관, 패왕의 권위, 패왕의 인장이 모였습니다.
- 세트 효과를 추첨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네크로는 모르지만, 이 부분은 최고신도 개입할 수 없다. 최고신은 권한이 가장 높은 인공지능일 뿐, 모든 권한을 얻은 건 아니었다.
- 스킬 '패왕의 돌격병'을 얻었습니다.
- 스킬 '멈추지 않는 충차'를 얻었습니다.
- 스킬 '사기 고취'를 얻었습니다.
패왕의 돌격병은 전진밖에 모르는 돌격병을 소환하는 스킬이었다. 규모는 5천이고 쿨타임은 90일이었다.
멈추지 않는 충차는 쿨타임이 10일이었다. 그러나 지옥의 심판이 범위만 조금 아쉽지 위력은 녹록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약한 스킬은 아닐 것으로 생각되었다.
사기 고취는 네크로에게 딱 맞는 스킬이었다. 위엄 스탯 1을 소모하면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저주에 잘 저항하고 아군 전투력을 높이는 버프 스킬이었다. 쿨타임은 없었다.
"돗개야. 파견한 군대 철수해. 개인 자격으로 계속 참여하는 건 간섭하지 말고. 그리고 마탑을 짓고 기사 양성소도 지어."
마탑과 기사 양성소는 마법 아카데미나 기사 학교보다 상위 기관이다.
"형, 어디 가려고?"
"갈 데 있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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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합니까?"
"상의가 필요하네."
드워프 국왕이 된 대장로가 각 부족 최고 대장장이를 모았다. 이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지만, 네크로의 관심 분야와 너무 멀었다.
"이건 우선 정의를 명확히 해야 해. 강화인지 결합인지 아니면 그저 부착인지 확실히 해야 한다니까."
"결합은 둘의 성능을 합치는 거고 강화는 하나를 희생해 남은 하나를 강하게 만드는 거야. 부착은 그저 둘을 하나의 개체로 묶는 거고. 결국엔 똑같은 거야."
"우리야 똑같은 거나 다름없지만, 네크로가 여기기엔 달라질 수 있지."
"그래. 기술적으로 생각할 게 아니라 의뢰인이 원하는 게 뭔지 알고 그걸 구현해야 한다고. 그럼, 네크로 자네가 원하는 바가 뭔가?"
반나절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은 후, 그제야 네크로에게 뭘 원하는지 질문했다. 나중엔 대충 흘렸지만, 초반에는 말 한마디 안 놓치려고 애썼던 네크로로선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저는 둘이 합쳐져서 더 나은 하나가 되거나, 둘을 합침으로써 패왕의 인장에 있는 마지막 특성인 '수도 함락 시 반드시 드랍'을 지우려는 겁니다."
또 토론을 시작하자 네크로는 드워프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레전드 게시판을 훑었다. 소금성에 바알드로의 수호가 내려진 후 게시판이 난리 났다.
소금성이 이후 격전지가 될 것임은 게임 시작한 지 3일 되는 초보 유저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국가가 소금성을 차지하고 지켜낼 것인지 투표하는 게시글에서 유저들의 말다툼이 치열했다.
"둘을 합치는 거야 어렵지 않아. 그런데 특성 하나만 삭제하는 건 어렵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예상 결과야."
이름 : 패왕
분류 : 반지
등급 : 반신
능력 : 스킬 쿨타임 감소 - 아이템 스킬에도 적용
능력 : 기본 스탯 +1
능력 : 소환계열 스킬 지속 시간 50% 증가
특별 : 스킬 '불패의 군단' 사용 가능 - 쿨타임 30일
특별 : 스킬 '텔레포트' 사용 가능 - 쿨타임 30일
특별 : 성벽 내구도 15% 증가
특별 : NPC가 전투 중 도망 혹은 투항하지 않음
특별 : 스킬 '멈추지 않는 충차' 사용 가능 - 쿨타임 10일
특별 : 스킬 '사기 고취' 사용 가능 - 위엄 스탯 1 소모
특별 : 내구도 무한
"얼마나 걸립니까?"
"열흘이면 되네. 예전 같으면 사람 모으는 데만 석 달 걸렸겠지."
"비용은?"
"필요한 재료 목록이야. 자네가 구하기 힘든 재료는 우리가 대지."
약 30% 재료가 네크로의 창고에 있었다. 필요한 대부분이 금속이어서 광산을 보유한 네크로는 그나마 골드를 절약했다.
"230만 골드야."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뱉었다. 게임이지만 암시 효과로 마음이 진정되었다.
'드래곤 레어 한 번 털까? 아니면 우르크 황궁 창고를 털든지.'
예전엔 신기를 보관해서 우르크들이 창고에 감히 접근하지 못했지만, 황제가 깬 지금 창고를 지키는 우르크가 무척 많았다. 제이크라면 안 들키고 잠입할 수 있지만, 귀한 물건은 다 상자에 잠가뒀기에 훔치는 건 어림도 없었다.
"형, 드레이크 세력 와해했어."
"갑자기?"
"원래 드레이크가 유저들 규합해서 국가 탈퇴하려 했대. 다른 국가로 귀순하려 했는데 이번에 소금성에 수호가 내려지면서 다른 유저들이 변심했어."
"뒤에서 충동질한 게 누군지 알아냈어? 역천 맞아?"
"초인동맹이래."
'광해야, 정신 차려. 서른도 넘은 놈이 멍청하게 환상이나 품고 있어?'
초인동맹은 네크로의 롤모델이나 다름없는 세력이었다. 합리적이고 주고받는 게 깔끔했다. 계획이 구체적이고 치밀할 뿐만 아니라 실행력도 뛰어났다.
첫 합작부터 무척 기분 좋았다. 철혈팔기가 노릴 때도 초인동맹은 갖춘 힘에 비교하면 태도가 무척 신사적이었다. 철혈팔기에 아이템 다 빼앗기고 탄광 광산 다 빼앗기면 아무 쓸모도 없는 네크로인데 말이다. 원하는 게 있긴 했지만, 그것도 빼앗는다기보단 협력 관계를 구축하려는 것이었다.
프리덤 빼면 가장 약한 세력이나 다름없는 네크로는 늘 초인동맹을 마음속으로 전우라고 여겼다. 드레이크의 뒷배로 역천과 만리장성을 의심했다. 그다음엔 가미카제였다.
'도덕적인 개인이 모여도 단체는 합리적이다.'
아무리 구성원 개개인이 도덕적이어도 단체는 이익을 좇을 수밖에 없다. 당연한 건데 네크로는 환상을 품었다.
'힘드니까 기댈 곳이 필요했던 거야. 이제부턴 달라져야지.'
결심이 서자 바로 로그아웃해서 성필을 호출했다.
"성필아. 우리 정모 한 번 하자. 우리랑 가깝게 지내는 길드만 불러. 일박이일로 일정 잡고 수련회 같은 거라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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