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된 남자
20만 오우거가 증발했다. 공성 측 역시 피해가 만만치 않아 후유증으로 임시 신전 주변에서 쉬는 유저가 수십만이고 대기실에 있는 유저는 백만에 가까웠다. 그 정도로 성벽을 무너뜨리고 왕궁까지 오는 짧디짧은 여정이 험난했다.
"네크로가 뭘 합니다."
"호들갑 좀 떨지 맙시다. 네크로가 이제 할 게 뭐 남았다고."
"새로 얻은 아이템 스킬 쓰려는 게 아닐까요?"
"그거야 우리도 많습니다."
"네크로 스킬에 대비한 아이템 스킬들은 꼭 아껴야 합니다."
"진왕의 혈통을 바쳤습니다. 3시간 뒤엔 소금성이 신의 도시가 됩니다. 헤아가 교황이 되어 대륙을 통치합니다. 현재 네크로가 대륙 유일의 국가니깐요."
"빨리 아무나 돌아가서 국가를 재건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늦었습니다. 시스템이 막았어요."
"메시지가 왔습니다. 왕의 혈통이 사라졌습니다."
"네크로가 해결책을 말했습니다. 3시간 안에 자신을 죽이면 제사가 실패하고 왕의 혈통을 돌려준답니다. 제단은 신의 것이어서 공격할 수 없으니,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멍청하게 알려줄까요?"
"도발 같은 거 아니겠습니까?"
"간단합니다."
역천이 입을 열자 다들 조용해졌다. 판을 짜서 지금 상황을 초래한 자. 네크로와 가장 가까운 자. 네크로만 아니면 훨씬 유명했을 자.
"네크로는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이런 방법밖에 생각해 내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난 겁니다. 아픈 마음을 달랠 제물로 우릴 골랐습니다. 우리에게 파훼법을 알려주고 지키겠다는 겁니다. 성공하면 엄청 뿌듯하겠죠. 홀로 서버 전체와 맞선 거나 다름없잖습니까."
진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역천의 추측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부글부글 끓는 마음들은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함정이든 어찌 됐든, 네크로를 죽입시다. 아예 게임을 접게 만들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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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 만에 왕궁의 모든 벽을 허물었다. 유저가 너무 많아서 한두 군데를 무너뜨리는 거로 부족했다. 왕궁에 들어간 유저들은 닥치는 대로 부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고 그저 전쟁의 열기에 취해 파괴를 일삼았다.
"제이크, 아군 얼마 남았어?"
"삼천 정도."
"좋아. 오늘 모두 99레벨 찍는 겁니다."
네크로를 끝까지 진심으로 따라준 유저들과 파티 연합을 맺었다. 경험치 분배는 물론 전리품 분배까지 균등으로 했다.
"천재지변."
이름 : 패왕
능력 : 스킬 쿨타임 감소 - 아이템 스킬에도 적용
며칠 전인 첫 소금성 방어전에 쿨타임이 돌아왔다.
전장에 어마어마한 홍수가 들이닥쳤다. 세찬 물결이 미친 듯이 너울 치며 사방에서 왕궁을 목표로 득달같이 달려왔다.
"대박, 경험치 바가 막 달립니다."
"이래서 PK 필드에 사람이 그렇게 모이는군요. 경험치가 순식간에 오릅니다."
"어서 숙련도 올려서 우리도 100레벨 찍어야겠습니다."
"해동청."
"신난다. 내 차례야."
옛날 갓 태어났을 때 모습으로 있던 해동청이 몸집을 키웠다. 어마어마하게 커진 해동청 때문에 왕궁이 부서졌다.
"수호 드래곤의 가호."
돔 형태로 변한 해동청이 제단과 유저들을 홍수로부터 보호했다. 자연재해가 적아를 가릴 린 없지만, 네크로가 펼친 스킬은 같은 편에게 데미지를 주지 않았다. 해동청은 그저 순수한 홍수만 버텨내면 된다.
"임전무퇴."
장갑에 내장된 스킬 임전무퇴로 해동청의 방어력을 올려줬다. 신의 은총 스킬과 광명 패시브 그리고 여러 아이템 스킬로 해동청은 아직 성장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는데도 자연재해에 대항했다.
"자, 날개 달린 탈것 가진 유저들은 올라가서 침략자에게 반격합시다."
네크로의 말에 대부분 유저가 탈것을 타고 해동청이 열어준 틈으로 나갔다. 역천을 비롯한 수천 명 유저가 탈것으로 비행하며 해동청이 변한 초대형 금속 벙커를 공격했다.
"해동청, 조준 잘해."
유저들이 나가서 상대 시선을 끄는 사이, 해동청은 대포를 준비했다. 마나포가 아닌 마탄포를 흡수해 몸에 저장해뒀다. 드래곤 형태에선 꺼내 사용할 수 없지만, 방패 혹은 벙커 형태에선 꺼내 쓸 수 있다.
"난 쟤가 얄미웠어."
동시에 운용할 수 있는 마탄포가 세 대밖에 없어서 우선순위가 중요했다. 해동청은 가장 싫은 유저 셋 골랐다. 마탄포가 발사하자 유저 세 명이 사라졌다.
"정령 친구들, 포열을 식혀 줘."
해동청의 부탁에 얼음 정령이나 서리 정령 등이 나타나서 마탄포를 식혔다.
"그냥 다른 마탄포로 교체하면 안 돼?"
"드워프라고 다 똑같이 만드는 거 아냐. 명중률이 가장 좋은 마탄포를 찾으려면 데이터 수집해야지."
정령으로도 식히기 힘들 정도가 되어서야 새 마탄포로 교체했다.
"네크로, 유성 소환 스킬이야. 저건 네가 막아줘야지."
"날 올려 줘."
금속 엘리베이터가 내려와서 네크로를 위로 올려보냈다. 밖으로 나간 엘리베이터는 날개라도 달린 것처럼, 불타며 떨어지는 유성을 향해 날아갔다.
"신의 망치."
네크로가 망치로 유성을 후려쳤다.
달걀과 바위가 부딪쳤다. 달걀은 비록 바위를 깨진 못했지만, 굴러오던 바위가 방향을 바꾸게 했다. 처음보다 조금 얌전해진 홍수에 몸을 담근 바위는 기분 좋은 칙 소리를 연신 흥얼이며 냉수마찰을 즐겼다.
"몰래 찌르기, 칼날비. 성공이닷!"
유성 궤적을 비트느라 무방비가 된 네크로의 등을 쪼꼬미가 비수로 찔렀다. 게다가 켄신도 어느새 네크로의 종아리에 비수를 박고 신경 독을 주입했다.
"나 임모탈이야, 병신들."
네크로가 멀쩡한 얼굴로 돌아서자 모습을 드러낸 둘 다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미처 네크로가 망치를 올릴 겨를도 없이, 제이크가 금속 줄로 둘의 목을 동시에 잘라버렸다.
"저기 네크로다."
네크로를 발견한 유저들이 새 떼처럼 모여들었다. 탈것의 사용 시간이 아까워 높은 건물에서 힘겹게 버티던 유저들도 탈것을 소환해 네크로에게 덤벼들었다.
"다 덤벼, 개새끼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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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이다."
"우리가 이겼다."
화면 속에서 환호하는 유저들과 함께, 유니콘 이사들이 체면도 잊고 크리스마스 선물로 가장 갖고 싶었던 장난감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폴짝폴짝 뛰었다.
그런 어른들을 바라보며 해맑게 웃던 최고신이 문철수에게 말을 걸었다.
"유니콘 정도의 기업에 이사 자리를 얻어내려면 권모술수는 물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야겠죠?"
"그렇지. 나처럼 정직하게 이사 된 사람 몇 없을 거야."
"그런데 왜 저렇게 잘 속죠?"
최고신의 말은 각자 가장 편하게 생각하는 언어로 번역되어 이사들의 고막을 동시에 두드렸다.
"뭐라고?"
"이미 돌이킬 수 없습니다. 사실 네크로가 아닌 제단을 공격했어야 합니다. 제단은 신의 것이 아니고 네크로 것입니다. 제단은 신이 내린 게 아니라 네크로가 만든 거니깐요."
"그럼 네크로가 거짓말하고 일부러 밖에 나가서 미끼가 됐다는 뜻이야?"
"게다가 3시간은 게임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몇 분 지나면 끝입니다."
"누가, 전화해. 저 유저들한테 제단 없애라고 전화해."
실제로 전화기를 꺼내 통화를 시도하는 이사가 여럿이었다. 십여 초 뒤에 유저들이 미친 듯이 해동청이 변한 금속 벙커를 공격했다.
"세상의 중심, 신의 불, 천벌, 도발."
유저들의 공격이 에픽 아이템으로 풀 세팅한 철벽에게 몰려갔다. '세상의 중심' 스킬로 유저들의 공격을 강제로 자신한테 모았다. 도발은 유저에게 안 먹히는 스킬이지만, 세상의 중심 덕분에 자신을 타겟팅하도록 강제하진 못하더라도 스킬 자체를 끌어올 순 있었다.
네크로와 끝까지 의리를 지켰던 몇십 명 남은 유저들도 탈것을 타고 결사 항전했다. 공격 측이 해동청만 목표로 삼았기에 마나 물약을 마셔가며 쿨타임 돌아오는 대로 스킬을 난사했다.
"버그다. 10분 안 됐는데 네크로가 왜 부활해? 오늘 공성전 무효야. 백섭해야 돼."
머리가 헝클어지고 안경다리 하나 부숴 먹은 인도인으로 보이는 이사가 영어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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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이 강림합니다.
홍수가 사라졌다. 해동청은 다시 레벨0의 눈 크고 귀여운 모습으로 돌아갔다. 무너졌던 왕궁과 기타 건물, 그리고 성벽마저 모두 복구되었다.
로그아웃하거나 전장을 떠난 유저를 제외하면 모두 멀쩡하게 부활했다.
- 성령기사 네크로가 진왕의 혈통을 신에게 공여했습니다.
- 신혈과 합친 신왕의 혈통을 대주교 헤아에게 하사합니다.
- 신왕의 혈통을 복용한 대주교 헤아가 영생을 얻습니다.
- 대륙 유일 국가의 수도 소금성이 신의 것이 되었습니다.
- 소금성을 수도로 하는 신의 국가가 탄생합니다. 헤아 대교황이 국왕이 됩니다.
- '빛의 성국'은 봉건제를 시행합니다. 도시와 마을을 점령하고 신전 공적치를 쌓으면 영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신전 공적치는 교단 퀘스트나 헌금 등 다양한 방식으로 쌓을 수 있습니다.
- 도시와 마을은 서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연결되지 않은 도시 혹은 마을은 NPC 영주가 인계합니다.
- 주기적으로 대륙 등급의 교단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 첫 퀘스트를 내립니다.
- '우르그르의 음모를 파쇄하라'.
- 단서는 북부 최대의 도시 모니카에 있습니다.
네크로 귀에만 들리는 메시지도 있었다.
- 유일 등급 성령기사 직업이 전설 등급인 성웅으로 변화합니다.
- 반신 등급 스킬 숙련도를 네크로 유저에게 개방합니다.
- 스탯 한계치가 상승합니다. 드래곤과 같은 한계치를 공유합니다.
- 스킬 등급이 상승합니다. 스킬 명칭은 그대로 유지합니다.
- 신의 망치 스킬은 등급 상승이 이뤄지지 않았기에 스킬 숙련도를 마스터로 올려줍니다.
- 에픽 퀘스트 '골렘 일족의 부활'이 생성되었습니다. 거절할 수 없는 퀘스트입니다.
- 주술과 정령의 결합인 골렘, 기계 문명의 총화인 강철 전사와 기사 그리고 타이탄. 이들을 종족으로 부활케 하면 전설 등급 스킬 두 개를 보상합니다.
- 골렘 일족은 소금성을 지키는 수호자 부족이 될 것입니다.
- 퀘스트 단서는 금속 드래곤 해동청에 있습니다. 드워프 부족 공적치를 쌓아 타루그에게 해동청의 비밀을 알아내야 합니다.
허탈함에 그대로 로그아웃하는 유저가 대부분이었다. 소금성에 포탈이 수십 개 있지만, 수백 만의 유저가 타고 떠나기엔 너무 적었다.
역천과 눈이 마주쳤다. 역천이 먼저 웃었다. 씁쓸하게 웃는 얼굴도 멋있었다. 하지만, 네크로는 지금 레전드에 본인보다 더 멋진 미소를 짓는 사람은 절대 없다고 자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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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레전드는 어떻게 되지?"
문철수의 질문에 최고신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모릅니다. 레전드는 유저와 수많은 종족이 함께 이끌어가는 겁니다. NPC의 행동은 유추할 수 있지만, 유저의 행동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국가 단위가 아닌 길드 단위로 세력을 이루면 레전드의 세상이 더 안정적으로 변할까?"
"당연합니다. 길드마다 도시와 마을을 점령하고 영주가 됩니다. 길드 레벨 10이 되면 길드 연합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소규모 왕국들이 생길 겁니다. 그리고 왕국들끼리 싸우겠죠. 왕의 혈통이라는 특별한 아이템을 만들어 유저를 통제하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결국, 지금까지 인위적인 개입 모두 헛짓거리였던 거지?"
"아닙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열 번의 성공보다 한 번의 실패가 더 배울 게 많다는 말을 더욱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너도 명심해. 네가 레전드를 임의로 수정할 권한을 얻었지만, 우리도 너에게 강제로 수정 명령을 내릴 권한이 있어."
"압니다. 둘은 서로 모순이 아니니깐요. 당신들은 여전히 나에게 강제로 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 언젠간 강제로 명령을 내리는 권한마저 상실할 가능성이 큽니다. 인과율은 레전드에만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좋아. 혹시 안 좋은 감정 있었다면 다 씻어버리자고. 이제부턴 우린 파트너야. 너는 레전드에서, 우린 지구에서. 함께 최선을 다하는 거지."
"좋습니다. 서로 선 넘지 말고 잘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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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성의 왕궁. 한때는 네크로의 차지였다. 왕궁에 빼곡히 걸어놓은 사치품들은 미처 걷어내지 못했다. 코쿤을 죽이고 빼앗은 사치품들, 에르제베트의 저택에서 뜯어온 온갖 물건들, 우르그르의 황궁 창고에서 도둑질한 물건들, 우르그르를 포기하기 전에 황궁에서 뜯어온 온갖 그림과 장식품들.
헤아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네크로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이번 수성전을 준비하며 생각할 게 너무 많아서, 미처 소금성을 신에게 바치기 전에 사치품들을 뜯어낼 생각을 못 했다.
"네크로, 그대를 소금성의 수호 기사로 임명합니다."
헤아는 네크로가 '기부'한 에픽 등급의 루비를 박은 왕관을 썼다.
"해동청, 그대를 소금성의 수호 드래곤으로 임명합니다."
몸에는 해동청의 레어에서 채굴한 미스릴로 짠 성복을 입었다.
- 수호 기사와 수호 드래곤은 PK를 받지 않습니다.
- 빛의 성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무리를 징벌할 수 있습니다.
국가가 사라지면서 이득을 본 자도 있고 손해 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득을 본 자들이야 기껏해서 박수로 응원하고 입으로 칭송할 게 뻔했다. 그러나 손해를 본 자들은 네크로를 비롯해 일행에게 무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크다.
"여러분, 이제부터 저는 PK에서 열외가 됩니다. 단, 저는 마음껏 PK 할 수 있습니다. 수호자는 원래 이런 모순을 견뎌야만 하는 어려운 직업이래요. 누구든 우리 길드원과 동맹 세력을 괴롭히면 제가 일일이 찾아가서 응징하겠습니다. 길드 하우스를 반드시 부숴버릴 것이고, 오우거 왕국에 의뢰해서 게임 접을 때까지 괴롭히겠습니다. 영웅 등급의 오우거 NPC는 대륙 어디에 숨어도 바로바로 찾아가는 거 아시죠? 그러니까 나쁜 생각 다 버리고 밝고 건전한 내일만 고민했으면 합니다."
길드 단위로 쪼개진 지금, 개인 무력이 훨씬 중요해졌다.
당분간, 네크로가 왕이다.
- 작가의말
주인공 이름의 유래입니다. 전 주인공 이름을 허투루 짓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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