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의
오·탈자 지적을 바랍니다.
한편 지난여름 우수리가 가오리섬의 북단에 있는 작은 무인도에서 강치들이 모여 있는 것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던 시점에 나는 카라코롬에서 전령이 가지고 온 새로운 대칸의 취임에 대한 얘기를 듣고 있었다.
“내 지난 쿠릴타이는 한울루스 내에 안 좋은 일이 있어 참석을 못했는데 그나마 다행히도 대칸이 결정이 된 모양이구나.”
“예, 그러합니다. 오고타이 대칸의 장남이신 구유크님으로 모두의 시선이 모인 것으로 압니다.”
“다행이군. 그런데 혹시 태후마마의 건강은 어떠신가?”
“저 같은 자가 어찌 그런 일을 알겠습니까. 허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잘 알아들었네.”
별로 참석하고 싶지 않은 취임식이지만 또 참석해 면면을 살필 필요가 있으니 참석은 해야 한다.
더구나 전생의 역사대로라면 이번 쿠릴타이 중에 태후인 퇴레게네 역시 사망할 것이니 어차피 가야만 하는 일이다.
5년 동안 예케 몽골 울루스라는 대제국을 다스린 여인의 죽음이니 참석하는 게 예의일 것이니 말이다.
그런 차에 의외로 고려에서도 대칸의 취임식에 참석한다는 통보가 왔다.
아마도 카라코롬에 있는 안경공을 통해 별도로 들은 소식인 모양인데 의외인 것이 진양후의 아들인 최항崔沆(1209~1257)이 그 사절에 포함이 된 것이다.
내가 알고 있던 지식에는 없는 내용이니 조금은 의아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또 생각해 보면 나라는 존재 자체가 전생의 역사에 없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곤 무심결에 넘기고 말았다.
진양후는 본래 역사처럼 아직도 살아 있지만 또 본래 역사와는 달리 공公이 되지 못하고 여전히 후候에 머물고 있었고, 최항 역시 전생의 역사보다 빠르게 음서를 통해 좌우위의 장군직에 들었는데 장군은 대장군 밑의 4품의 관직이었다.
아마도 취임식에 참석하는 세자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아 떠나는 모양이었다.
고려의 세자와의 여행은 이미 한번 해 본지라 서로가 편했다.
비록 나이가 근 20년의 차가 있어 누군가 보면 부자자간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내가 나이나 칸이라는 지위 따위를 내세우지 않으니 그와 나는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뒤를 돌아보면 꼭이라고 할 정도로 최항의 시선이 내게 꽂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반복이 되니 기분이 언짢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흠,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기는 한가 본데. 진양후가 죽을 날이 아직 남긴 남았다지만 그의 나이 여든이 넘었는데 설마 무슨 일을 저지르려고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걱정은 없었다.
역사에 따르면 최우도 3년 정도 지나면 죽을 것이고 최우보다 능력도 떨어지고 세력도 부족한 최항이 무언가 일을 벌이기에는 많이 부족했으니까.
더구나 21C라면 강산이 변하는데 3개월이면 되지만 지금은 10년은 돼야 강산이 변하는 시대니 말이다.
그렇게 카라코롬에 도착해 구유크에게 하례를 올리고 며칠 후 세자가 나를 찾아왔다.
“이제 할 일이 다 끝났는데 칸께서는 언제나 돌아가시렵니까?”
“아마 더 지체해야 할 듯합니다.”
“예? 특별히 다른 일이 남으셨습니까? 지난번에는 일을 마치고 바로 돌아가셔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마 태후마마께서 곧 돌아가실 듯해서 그 일마저 마치고 돌아가려 합니다.”
“예? 그건 어찌 아시고?”
“명이 다하셨을 뿐입니다. 하늘에서 이미 부르기로 한 모양입니다.”
“어허, 그런 것까지 아시는 겁니까? 그럼 저도 좀 기다렸다 칸 전하와 같이 돌아가야 하겠군요.
그나저나 무슨 일인지 진양후께서 몽골의 대칸께 전할 말이 있는 듯 하더군요. 부디 고려에 해가 되지 않는 밀이어야 되는데.“
“무슨 말씀이신지?”
“제 호위로 온 그 최항이 대칸께 접견을 신청한 모양입니다. 진양후께서 전할 게 있다면서요.”
“일개 장군이요? 하긴 진양후의 이름이라면 가능도 하겠군요.
또 그 분이 연로하셔서 이곳까지 직접 오지 못했다는 것도 참작이 되었겠고요.
그래 접견 허락이 떨어졌답니까?“
“예, 내일 접견한다더군요. 그래선지 상당히 흥분해 있습니다.”
세자가 제 처소로 돌아간 후에 문득 예감이 좋지 않았다.
최항이 내게 보내는 적대적인 시선에도 별 느낌이 없었는데 세자가 전한 최항이 구유크를 면담한다는 말이 내게 불길함을 선사한 것이다.
‘아무래도 알아봐야겠군.’
내가 졸본에 틀어박혀 있다고 마법의 수련에 게을렀던 건 아니다.
물론 마법을 펼친 것은 과거 쿠빌라이의 치료를 끝으로 더 이상 없었지만 이 세상에서 특별한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내 입장에서 마법의 수련만한 재미가 없었으니 마법의 수련에 열심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지구에는 마나가 없다.
단지 존재하는 마나는 혈액 속에 생명의 근원으로만 존재하니 나는 마나를 얻기 위해 생명을 다뤄야만 했다.
그렇다고 칸이라는 지위에 있는 내가 여전히 가축을 도살하는 현장을 찾아다닐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이슬람의 할랄 의식이었다.
더구나 이미 아랍에서 온 이들로 인해 졸본에서는 할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제도의 수용은 어렵지도 않았다.
게다가 할랄을 일종의 위생관념으로 받아들인다면 결코 나쁜 일도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이슬람처럼 모든 것에 할랄이라는 제도를 끌어들일 수는 없는 일이어서 자칫 잘못 먹으면 병을 부를 수 있는 음식, 곧 고기와 생선에만 할랄이라는 제도를 도입하기로 하고 그것을 행하는 이는 한교를 전파하는 이들로 정해 버렸다.
물론 그들에게 철저한 위생관념을 교육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졸본에서의 할랄은 초창기에는 거의 대부분을 내가 했다.
초창기에는 졸본의 규모도 작았고 또 먹는 고기도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 역시 칸이기 전에 한교라는 종교를 전파하는 전교자이고 또 당시 졸본의 사람들은 내가 그 의식을 행한 고기나 생선을 먹는 것을 좋아라 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닭이나 돼지 따위를 잡을 때면 항상 내가 그 도축될 동물에게 가 그 위생상태를 점검하고 또 사람들 앞에서 식재료의 위생에 대해 한바탕 떠든 후 형식적이나마 해당 동물에게 축복을 내린 후 도축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물론 나는 내 영의 한 조각을 밖으로 내어 동물의 혈액 속에 있는 마나를 흡수하기 바빴고 말이다.
그렇게 흡수한 마나를 이용해 다양한 마법을 연습했다.
그리고 내 처지가 그렇다 보니 흑마법에서는 이미 일가를 이루었다고 할 정도로 경지를 이루기도 했다.
나는 들로 나갔다.
이곳 몽골의 초원에서 쉽게 마주할 수 있는 동물이 하나 있는데 마못이라 불리는 설치류가 그것이다.
몽골인들의 단백질 공급원이기도 한 이 설치류는 상당히 커서 어떤 것은 그 크기가 두 자에 이를 정도다.
그렇지만 내게 그 정도로 큰 마못은 필요없고 그저 작은 마못 한 마리면 충분하다.
나는 어찌어찌해서 마못 한 마리를 잡은 후 그것의 생명을 취했다.
말했듯이 생명이 다한다는 것은 그 혼과 백이 모두 사라진 것을 뜻한다.
1차로 그 혼이 빠져나가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서 백마저 빠져나가야 비로소 생명이 완전히 끊어지는 것이다.
혼이 빠져나간 마못을 상대로 흑마법을 거는 일은 이제 내게는 아주 쉬운 일이다.
내가 넣어준 마나는 빠져나간 혼을 대신해 마못의 송과샘에 자리를 잡아 마못의 생명을 연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 마나는 나와 마못의 백, 곧 오감을 연결하는 통로가 돌 것이다.
그리고 몽골의 처소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게르다.
그것은 몽골의 대칸이라 하더라도 변함이 없다.
비록 그 바닥에 호피나 비단을 깔지언정 그것을 걷어내면 땅바닥인 것은 여전한 것이다.
처음 시도해 보는 마법이지만 마나와 혼의 정체를 알고 있는 나는 마못을 통해 보이고 들리는 것에 대해 잠시 시험을 해 본 후 마못을 마침내 구유크의 게르로 보냈다.
설마 최항 따위의 접견을 카라코롬의 궁에서 할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마못이 구유크의 게르 한귀퉁이 바닥에 구멍을 뚫고 들어와 바닥에 깔린 비단과 비단의 겹친 부분에 눈과 귀를 대고 기다리니 과연 최항이 들어왔는데 마못을 통해 들리는 소리는 그 각각의 인간들의 말소리나 숨소리마저 구분할 정도로 세밀한 것이었다.
“그래, 진양후가 내게 하고자 한다는 말이 무엇이냐?”
“그것은 한울루스의 현 칸인 김한돌에 대한 것입니다.
본래 그는 고려인으로 몽골의 고귀한 피인 보르지긴의 피도 받지 못했는데 그 신기한 아부실력으로 전전대 대칸이신 테무친님의 어여삐 여기심을 받아 한울루스라는 영역을 차지하고 겉으로는 몽골에 충성을 다 하는 듯이 하면서 뒤로는 고려를 압박해 고려조정을 장악하기 위해 혈안입니다.
만약 제가 그 자를 제거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필히 그 자를 제거하고 현재의 한울루스 영역을 고스란히 몽골의 대칸께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웃기는 작자군. 한울루스는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여전히 예케 몽골 울루스에 속한 울루스에 불과한데 내것을 네가 내게 바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만 지금의 울루스는 그 김한돌이라는 작자의 나라와 비슷한 처지가 아닙니까?
몽골에서 그곳에 관리 하나 파견하지 못하고 있는 게 지금의 실정입니다.
이는 몽골의 대칸이신 구유크님의 위엄에 해가 되는 것이 분명한 일입니다.“
“형님, 이 자의 말을 들어 손해볼 것은 없습니다.
이 자가 알아서 그 김한돌을 제거한다면 후에 예케 몽골 울루스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어서 좋은 것이고 혹여 실패한다면 형님께서는 전혀 모르는 일이니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다만 이 자가 일에 성공했을 때 형님께서 이 자를 기억해 주시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몽케 동생, 그렇지만 김한돌은 테무게 할아버지나 어머니인 테후마마께서도 함부로 하지 않는 이네.
어른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그에게 공손한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기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형님, 그러니 형님께서는 그저 모르는 일로 치부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다 이 자가 일을 성공시킨 후에 고려에 압력을 넣어 이 자의 지위를 높여주면 전부인 게지요.
이 자가 언감생심 한울루스의 영역을 넘보지는 않을 테니까요.“
“고려 진양후의 사자는 들으라. 나는 그대에게 결코 무언가 들은 바는 없지만 그대가 무언가를 해 내게 성과를 보인다면 나는 그대를 고려의 왕 다음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도록 할 것을 약속한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보도록 해라.”
주고받는 어설픈 대화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본래부터 구유크는 성격이 폭급하고 머리가 좋지 못하다고 하더니 과연 그런 모양이었다.
대화의 주도권 역시 몽케가 가지고 있었고 말이다.
그들의 말을 들은 후에야 고려 세자의 말을 들은 후 남아 있던 약간의 걱정마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최우와 구유크 둘이 무슨 작당을 해 혹 고려와 한울루스를 침범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었는데 고작 한다는 게 나의 목숨을 노리다니 우습지도 않은 일이다.
이들이 나를 죽이려면 내가 마법을 전혀 쓰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내 몸에 직접 칼을 박아야 할 텐데 칸인 내게 그런 일이 발생할 일이 무에 있겠는가?
더구나 최우나 구유크는 전생의 역사대로라면 곧 죽을 운명이다.
아마 혹 최항이 그런 시도를 하더라도 그 시도를 하는 중에 두 거물의 사망으로 그의 일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니 나는 아무런 걱정이 없다.
다만 의아한 것은 몽케가 구유크의 편에 붙어 있다는 것인데 본래 몽케와 구유크의 사이가 나쁜 것이 아니니 그러려니 했다.
구유크와 몽케는 오고타이 칸 시절에 이미 서방 원정에 같이 참여해 손발을 맞춘 경험이 있는 사이니 몽케에게 있어 지금은 바투보다는 구유크와 더욱 친밀한 관계일 테니 말이다.
그러는 중 태후의 사망 소삭이 전해졌고 나는 태후의 일마저 모두 마친 후 세자와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그 길에서 뭔지 모르게 조금은 흥분된 상태의 최항을 보면서 자꾸 웃음이 나오는 걸 참는 것도 고역이다.
아마도 제 아비와 함께 나를 제거하고 고려의 권력을 다시 손아귀에 틀어지는 야무진 꿈을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 역시 최우나 최항이 준비한 수가 무엇인지 궁금하기는 하다.
그렇지만 카라코롬에서처럼 동물을 이용해 그들을 정탐하기에는 개경과 졸본은 너무 먼 거리다.
그렇다고 사람을 동원해 그들을 정탐하기에는 명분도 약하고 번잡하기도 하다.
또 무슨 세작이라고 만들어 파견한다고 해도 가능할 것으로 보이지도 않았고 말이다.
이 시대는 21C처럼 옆집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 시체가 썩는 냄새가 날 때까지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시대가 아니다.
마을에 못 보던 이 하나만 등장해도 모두 알아보고 또 그가 움직인 동선까지 꾀고 있는 이가 숱한 시대다.
그리고 그것은 개경과 같은 큰도시라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고려는 한울루스의 졸본이나 박작시처럼 도시화가 아직 되지 않아 일을 찾아 도시를 드나드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추천은 작가에게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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