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과 자유
오·탈자 지적을 바랍니다.
아직은 때가 아닌 모양이다.
이 우주에게 있어 나라는 존재 아니 나의 진아眞我인 『타』라는 존재는 상당히 불필요한 존재지만 또 필요한 존재이기도 하니 이 우주가 나를 필요로 할 때는 나 역시 나의 진아를 찾아 깨어날 것이 분명하니 기다림이란 나에게는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이다.
그것은 마치 나라는 존재가 인간의 종기와 같은 위치이기 때문이다.
없애야 하는 것이 종기지만 또 다른 면으로 인간 몸에 가득찬 독기를 잔뜩 가지고 있는 것이 종기니 그 종기를 터트림으로써 인간이 건강을 회복하는 것처럼 나의 진아 역시 우주에게 있어 그런 존재인 것이다.
우주에게 불필요한 생명체를 신이라는 이름으로 멸절시키는 존재 말이다.
물론 또 다른 생명체를 만드는 것 역시 나의 일이지만.
그리고 내가 아직 나의 진아인 『타』가 되지 못했다는 것은 여기 이 차원의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멸절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말인 것이니 인간들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런 사실을 알지는 못하겠지만 내가 앉아 있는 앞에는 정말 많은 인간들이 자신들이 아직 멸절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나에게 경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좀 더 빠르게 스스로가 멸절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내게 청하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즉 내 밝아진 귀에 내가 눈을 뜨고 내뱉은 ‘아직은 때가 아닌가 보구나.’하는 말을 무슨 게송偈頌으로 알고 그 의미가 무엇이냐고 서로에게 묻고 답하는 인간들이 있는데 내게는 그들이 인간이 좀 더 빠르게 파국에 닿는 방법을 묻는 것으로 들리는 것이다.
문명이란 그런 것이다.
엔트로피 법칙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생명은 좀 더 빠르게 파국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그것은 종국에는 그 생명체를 파괴하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니 말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미래보다는 현재의 삶을 즐기는 생명체니 당장의 문명발달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런 인간의 원하는 바를 들어주지 않을 수는 없는 일.
나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좀 더 빠르게 파국으로 치닫는 방법에 대해 말이다.
그것도 다른 무엇보다 빠르게 파국에 닿는 방법 말이다.
그리고 당연 도학보다는 과학이 더 빠른 방법이니 나는 앞에 모인 인간들에게 도학이 아닌 과학을 강론하는 것이다.
인간이 듣기에는 아주 달콤한 꿀처럼 들리는 과학이라는 학문이지만 그것은 진리에 닿는 방법이라기보다는 파괴를 위한 학문일 뿐이다.
신을 만드는 학문이라기보다는 동물을 만드는 학문인 것이다.
마나나 기를 알리는 학문이 아니라 물질을 가르치는 학문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고려의 백성들에게는 처음 접하는 학문인 것이다.
나의 강론이 시작되자 월출산 아래로는 수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어떤 이들은 실제로 과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궁금증으로 찾아왔고 어떤 이는 백성들 사이에 회자되기 시작한 나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많은 이들이 내 발에라도 입을 맞추기를 원했고 많은 이들이 내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말을 듣기를 원했다.
내가 하는 강론은 별 내용도 없었다.
그저 과학적 방법론에 대해 설명했을 뿐이다.
다만 그것만을 말하기에는 너무 내용이 부실해 보여 예수나 부처가 설파했던 인간애人間愛에 대해 짧게 덧붙이고 거기에 자유라는 개념과 그 상대편에 있는 평등이라는 개념에 대해 얘기했을 뿐이다.
사실 자유라는 것 역시 엔트로피를 키우는 방법 중에 하나니 당연히 내가 설파해야 했던 내용인 것이다.
평등이야 그 자유를 설명하다 보면 등장하는 개념일 뿐이고 말이다.
그 별 거 없는 내용의 강론이었지만 고려의 백성들은 나의 강론 듣기를 아주 좋아했다.
다만 몇몇 이들은 내게 반론을 펴면서 나의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했는데 그 근거를 대지는 못했다.
사실 내가 하는 말들은 모두 인간이 듣기에 아주 달콤한 내용들이다.
가설과 실험 그리고 검증을 통해 사실을 정확히 알자는 주장인 과학적 방법론은 누구나 들으면 고개를 끄덕였고 인간은 본래 자유로운 존재지만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그 자유의 일부를 내놓게 되었다는 얘기 역시 귀가 시원한 말이었다.
다만 확실히 내 얘기가 유럽의 어느 지방에서 퍼졌다면 각광을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여기 이곳 고려에서는 대부분의 인간들이 가진 연기론적 사고관으로 인해 많은 반론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즉 내 얘기를 들은 어떤 이가 왕후장상 어쩌구 하면서 자유를 예찬하면 또 다른 이는 사람이 동물과 다른 것이 무엇이냐 어쩌고 하면서 자유보다는 질서를 옹호하는 식으로 내가 뱉어 놓은 말로 다툼이 생기기도 하곤 했던 것이다.
뭐 내 입장에서는 상관없는 일이다.
인간은 그런 다툼 속에서 문명을 발전시키는 존재고 또 그런 다툼은 결국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일이니 내가 『타』가 되는 일을 조금이라도 앞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름에 시작한 나의 강론은 가을이 끝나는 시점까지 이어졌는데 그 시점에 사람이 찾아와 나를 전주로 초빙을 하면서 전주에서 강론을 해주십사 하고 부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중에도 최항이 죽었다는 소식은 내게 들리지 않았다.
내가 겨울에 전주로 자리를 옮겼을 때 내 강론을 듣는 이들의 주요 논쟁거리는 오로지 자유에 대한 것으로 옮겨졌다.
사실 생각해 보면 연기론적 세계관에서 자유란 개념이 나오기는 쉽지 않다.
자유란 존재론적 세계관에서나 도출 가능한 개념인 것이다.
전생의 르네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에서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 역시 존재론적 세계관에서나 나올 만한 명제인 것이다.
아마 연기론적 세계관에서라면 나의 존재는 나가 아닌 타자가 증명해야 할 것이지 내가 증명할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리고 고려는 유학이라는 바탕 아래 불교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세계이니 당연 사람들은 일 개인의 완전한 자유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했고 또한 그것을 나와 토론하기를 바랐다.
여태까지 그들이 알던 질서 속에서는 인간의 완전한 자유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알던 질서 속에서는 새는 하늘을 날고 두더지는 땅속에 살며 물고기는 물속에 사는 자유는 있었을지언정 물고기가 하늘을 난다거나 두더지가 태양 아래에서 먹이를 찾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인간의 완전한 자유, 곧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나 그것이 혹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고 그것이 인간의 완전한 자유라고 했으니 나는 많은 이들에게 나의 주장에 대해 공박을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선지 영암에서의 내 강론이 고려의 일반 백성을 대상으로 한 강론이었다면 전주에서의 강론은 식자층, 곧 고려의 유학자들과 불승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론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세계관으로 나의 주장을 공박하기 위해 노력했고 나는 그들의 주장의 내면에 있는 그 연기론적 세계관에 대해 공박했다.
더구나 이 고려의 식자층이라는 이들은 본래가 책상을 끌어안고 공상하기를 즐기는 이들이라 내가 꺼낸 그 자유라는 개념은 별로 할 일도 없는 겨울에 끼리끼리 모여 떠들기에 아주 좋은 주제가 되었으니 전주를 중심으로 많은 이들에게 ‘인간은 그 존재 자체로 자유롭다.’는 나의 주장은 분명 좋은 안주 감이었던 것이다.
사실 나는 나의 주장에 대해 이렇게 뜨거운 토론이 벌어질 줄은 알지 못했다.
내가 졸본에서 강론을 할 때 그곳의 학생들은 나의 주장에 대해 그저 받아들였지 그것에 대해 공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졸본의 학생들은 스승인 나의 말이니 당연히 나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지식을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여기 고려에서의 나는 칸이라는 권위도 가지지 못하고 과학이라는 학문을 창시한 선각자라는 권위도 없이 그저 불승들이 좌선 중에 깨달은 바를 주위에 알리고 같이 토론하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전주에서의 나의 강론은 정월 대보름이 지나면서는 공주로 이어졌는데 이곳 공주는 80여년전 망이와 망소이라는 숯쟁이가 과중한 세금을 못 이겨 명학소라는 소所에서 난을 일으킨 역사가 있어서인지 나의 강론에 참여하는 이들 중 대다수가 일반 양민과 천민들이었다는 게 영암이나 전주와는 달랐는데 이를 지켜보는 공주의 유력자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 시대 난이 일어나면 난을 일으킨 이가 아니더라도 그 진압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보았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연좌제로 인해 난이 일어난 마을 자체의 격을 떨구는 것도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군이었던 곳은 현으로 강등이 된다거나 현이었던 곳은 속현이나 아니면 향·소·부곡으로 강등이 되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연좌제가 바로 대표적인 연기론적 사고관에서 나오는 형벌인 것이니 명학소의 난을 겪은 이곳 공주의 많은 백성들이 나의 강론에 귀를 여는 것도 일응 이해가 되는 면이 있다고 하겠다.
청명 즈음에 나의 강론은 천안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천안은 고려의 중앙군이 파견된 최남단의 지역이다.
물론 지금이야 일본으로의 파병으로 중앙군은커녕 지방군도 찾기가 쉽지 않은 지경이지만.
그렇지만 이곳에서부터의 소식은 분명 개경으로 연락이 갈 것은 뻔한 일이다.
아무리 고려 조정이 무능하다 해도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지방의 반란에 연락책 하나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되니 말이다.
그리고 그 연락책은 또한 최항의 일파에게도 연이 닿아 있을 것은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누가 뭐래도 아직까지 고려에서 가장 큰 군벌은 우봉 최씨 집안이고 그 수장이 최항이니 말이다.
천안에서의 나의 강론은 초대자의 얼굴이 무색하게도 많은 이들이 참여를 하지 못했다.
그 때가 모내기철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신으로 불승이나 유학자들의 참여는 늘었는데 날이 풀리니 집안일을 가솔에게 맡기고 남도 지방에서 퍼진 소문을 쫓아 나의 강론을 찾아온 이들이었다.
더구나 현재 나의 무리는 나를 호종하는 50인대의 호위병 외에도 영암이나 전주 그리고 공주에서부터 나의 강론을 맘에 들어 해 한번이라도 더 나의 강론을 듣기 위해 나를 따라 오는 무리들도 있었으니 모르는 이가 본다면 무슨 난이라도 벌아진 줄 착각을 할 만한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것이 사람을 더욱 끌어모으고 있었다.
천안에서의 강론이 끝나고 내가 발길을 돌린 곳은 개경의 바로 코앞인 남경이었다.
본래 남경은 유행하는 풍수사상에 입각해 문종 21년 1067년에 고려의 별경別京으로 지정되었다가 이내 폐지되었는데 다시 술사 김위제金謂磾(?~?)가 『도선기道詵記』, 『답산가踏山歌』,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신지비사神誌秘詞』를 들어 설득하니 여러 신하들 역시 이에 찬동하여 마침내 숙종 연간(1101)에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을 설치해 목멱산 북쪽에 궁궐을 짓도록 했는데 숙종 9년인 1104년에 완공을 보았다.
그래서 기존에 그 중심지가 버드나루楊津(현 서울 광진구 일대)였던 것이 지금은 목멱산 북쪽(현 종로구)으로 이동한 것이다.
물론 전생의 역사라면 이미 남경의 궁궐터 역시 몽골의 침입으로 불에 타 남은 것이 없었겠지만 지금은 그 별궁도, 그곳에 있는 유수니 부유수니 하는 관리들도 남아 있는 상태다.
유수에게 나의 신분을 밝히니 감히 별궁에 머물게 하지는 못하지만 별궁을 구경하게는 해 주어 살피니 내가 전생에 보았던 경복궁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경복궁은 광화문에서 근정전, 향원정, 건천궁까지 일직선으로 남북을 가리키나 북문인 신무문은 건천궁의 바로 뒤가 아닌 서쪽으로 치우쳐 있었는데 지금 보는 고려 별궁은 신무문까지 죽 이어져 남북을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후에 조선이 경복궁을 지으면서 기존의 남경 별궁터를 이용하면서 방향을 조금 비튼 것으로 보였다.
그러면서 남아있는 신무문은 아마도 살린 모양이었다.
남경에서의 나의 강론 역시 많은 이들이 참여해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더구나 남경은 바로 옆의 개경에서 벌어지는 무신란을 직접 보고 경험했던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심지어 고려의 황제가 신하들에게 처형을 당하고 그 사체가 가마솥에 넣어져 연못에 던져진 일도 겪은 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황제라는 존재가 결코 무소불위의 존재가 아님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즉 남경사람들은 신하에 의해 황제가 죽을 수도 또 황제가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남경의 어떤 사람들은 개경이 그 기가 다했으니 남경으로 도읍을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풍수사상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이들도 상당수가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자유에 대한 얘기는 귀가 솔깃해지는 얘기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즉 남경에 와서 나의 자유에 대한 얘기는 맹자의 사상과 더불어 서서히 혁명사상으로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중에 나는 세 통의 편지를 썼다.
호다다드와 오뜨겅 그리고 치기야에게 전하는 글이었다.
그리고 내 호위군관에게 그 편지를 주며 박작의 호다다드에게 전할 것을 명하고 드디어 나는 개경으로 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것이다.
추천은 작가에게 힘이 됩니다.
Comment ' 4